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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양 鄭洋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눈 내리는 마을』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수수깡을 씹으며』 『까마귀떼』 등이 있음.
어금니
미당선생 고향에 묻히는 날
어금니 뽑으러 나는 치과에 간다
함께 조문 가자던 친지들이
하필 오늘 뽑느냐고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는다
투덜거리지들 마시라, 핑계가 아니다
미당선생과 내 어금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당선생은 따뜻한 산자락에 묻히고
내 어금니는 내 단골치과 피묻은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소주병도 척척 까던 어금니였다
미움도 절망도 야물게 씹어삼키던
이 세상 험한 꼴들을
이를 악물고 용서하던 어금니였다
오랜 세월 시리고 욱신거리고 부어오르고
악취 머금고 치과에 드나들면서
뽑지 말고 어떻게든 살려보자던
이제는 혀만 닿아도 캄캄하게 아픈 어금니
욱신거리며 조문 가는 대신
야물게 씹어삼킬 것들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용서할 것들을 위하여
이 세상 캄캄하게 아픈 것들을 위하여
나는 이 어금니부터 오늘 꼭 뽑아내고 싶다
차창 밖 눈녹는 겨울햇살이
어금니 속에 시리게 꽂힌다
지평선
하늘 땅이 맞물리는 지평선에는
가고 싶은 보고 싶은 것들도
한꺼번에 맞물려 가물거릴지,
문득 그 지평선에 가고 싶었다
만경강 건너 지평선이 보인다는
심포 횟집을 찾아간다 눈이 내린다
눈이 쉽게 멎을 것 같지 않다
돌마을 주막에 차를 세운다
뜨거운 바지락 국물이 목에는 시원하다
주막집 내외는 마주앉아서
담배내기 화투를 치고 있다
되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보이는 건 들판 가득 눈보라뿐
하늘도 땅도 안 보이는 눈보라뿐
지평선은 보이지 않는다
아줌마, 얼마나 더 가면 지평선이 나와요
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
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
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 잉
그렇구나 여기말고도 이 세상에는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천지사방에 다 가물거리겠구나
문 닫는 것도 잊어버리고
눈보라가 넋 놓고 가물거린다
이 세상 천지사방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
옆구리 결릴 때
감기는 나아도 기침은 남는다
가래를 뱉어도 기침은 남는다
옆구리가 자꾸 결린다
며칠 결리다 말겠지 싶던 게
한달도 넘게 결린다
가래 뱉을 때마다 결리더니
요새는 숨만 크게 쉬어도 결린다
약 먹고 침 맞고 찜질도 해보지만
우선 담배부터 끊어야 가래가 삭을 거란다
가래 삭아야 기침이 멎고
기침 멎어야 결리는 게 풀릴 거란다
의사 아닌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
옆구리 결릴 때마다 옆구리보다
결리는 일이 나는 많다
옆구리 결릴 때마다 우선
담배부터 피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