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최문자 崔文子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울음소리 작아지다』 『사막일기』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등이 있음. choiikik@hanmail.net
해동
지금 매우 시끄럽습니다.
대지의 열 손가락이
모두 분홍색입니다.
대지는 자꾸 뭔가 해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디 갔나?
나무와 같이 서서 얼어붙던 산속의 정적
어제 불던 칼바람도
피를 녹이러 산을 떠났습니다.
주검을 등지고
서둘러 깨어난 몸들이여,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말을 꺼내려 하지 마오.
사각사각 소리만 나도
이미 대지는 눈물로 번득입니다.
살갗이 까지고
드디어 피가 돋아나는 세상의 나무들
누구나 뛰어들고 싶은 저 아래
지금 매우 시끄럽습니다.
악, 소리를 지르며 지하의 꽃들이 양수를 터뜨리고
떫고 비린 냄새가 올라옵니다.
별들은 오히려 조용합니다.
더 높은 데 저쪽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제야의 기도
지난 것들의 질긴 끝을 잡지 말고
갑자기 미래가 오게 하소서
뻐꾸기시계가
함부로 우는 일 없도록
시간의 새를 가두고
위기에 천천히 조일 수 있는 태엽을 주소서.
어린 소녀가 추운 밤 성냥을 팔지 않아도
개미처럼 모여드는 빵
참으로 많게 허락하시고
그리고
하루 몇번쯤 종을 치소서
지문까지 드러나는
환한 종소리
은은한 종소리 울리거든
컴컴한 세상의 치마를 들추고
미끌미끌한 거품 속
잘 안 잡히는 욕망을 꺼내
그 지느러미를 마른 소금으로 절여
오랜만에 누구나 한참을 쓰라리게 하소서.
새해에는 신이여!
여기 한 페이지
쓰기를 멈췄던 쓰디쓴 문장들을
사과 맛으로 거두게 하소서.
그리고
몰래몰래 믿을 수 있는 상을 차려놓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가장 슬프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