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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도현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바닷가 우체국』 『그리운 여우』 『외롭고 높고 쓸쓸한』 『모닥불』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이 있음. www.ahndohyun.com
얼음 매미
매미가 벗어놓고 간 허물 속으로, 눈이 내린다
이 누더기의 주인은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날아갔는데
눈은 비좁은 구멍 속으로
자꾸자꾸 내린다, 그리하여 쌓인다
하늘은 몇번이나 녹았다가 얼고,
(이 겨울이 지날 때쯤 나는 매미 허물을 가만히 벗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날아갈 줄도 모르고, 발을 가슴께로 그러모은
얼음매미 한마리가 거기 웅크리고 있겠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논물 드는 5월에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