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희망의 문학, 계몽의 담론」을 읽고 외
「희망의 문학, 계몽의 담론」을 읽고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에서 김상욱 교수의 평론 「희망의 문학, 계몽의 담론」을 읽었다. 이 글은 창비아동문고 200호 발행이 한국 아동문학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었는지 분석하는 동시에 출판이 문학의 발전과 맺는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글은 현재 전성기를 맞은 아동문학이 다분히 아동도서 출판의 성업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야기하는 염려스런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이 글의 결론적 요지는, 제목이 말하는 대로 아동문학은 희망의 문학이지만 ‘이원수로부터 이미옥에 이르는’ 한국아동문학은 계몽적 담론과 추상적 동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그것은 좋았다. 그리고 창비아동문고 200권의 구성이나 기획상의 특성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었다. ‘한국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한다’라는 촛점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거론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핵심을 바로 짚어서 조리있게 공감이 가도록 진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문이 가는 점은 평가의 대상에 대한 균형의 문제였다. 하나는 아동문학을 다룬다고 하면서 동화(소년소설 포함)만 다루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분이 과연 아동문학 작품들을 골고루 읽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아동문학의 중심이 동화에 있기 때문에 동시를 무시해도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한국 동시문학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이 글의 부제는 ‘어린이문학의 역사와 창비아동문고’이다. 창비아동문고에는 아동문학사에 거론되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동시집이 적지 않다. 글의 앞부분에서 동시문학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응당 동시부문이 어떤 방식으로든 구체적으로 다뤄지리라고 짐작했는데 그 언급은 그저 언급으로 끝나고 있었다.
또다른 문제는 거론된 동화작가들의 범위에서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이원수·이주홍·마해송을 한묶음으로 하여 첫머리에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이영호·권정생·박상규를 다시 한묶음으로 다루었고, 임길택을 다룬 다음 ‘좋은 어린이책’ 원고공모 당선작가들과 황선미를 다루는 것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로 보아서 창비사에서 책을 펴낸 작가들을 문학사적 순서에 따라 시대별로 작가군을 만들어 평론을 엮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의아한 점이 바로 특정한 연대의 작가들에 대한 누락이다. 그것이 누락인지, 의도적인 무시인지, 다루기 벅차서 생략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70년대 이후로부터 약 20년간에 걸친 동화 문단에는 임길택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시대가 정말 임길택 한사람만 거론될 정도라면 동화문학의 암흑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논의해야 할 일일 것이다. 혹시 창비가 그 시대의 작가들에 대하여 무심했거나 홀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점을 분명히 짚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창비는 그러하지 않았다. 이원수·이주홍·마해송으로 시작한 창비아동문고는 이후 출간을 거듭하면서 각 시대의 대표급에 해당하는 중견과 신인들의 작품을 발표해왔으므로 문고의 번호에 따라 작가를 거론하면 한국 현대 동화문학사를 살피는 일과 거의 같아질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응당 무시할 수 없는 작가군을 만나게 되는데, 예컨대 이현주·강정규·송재찬·손춘익·정채봉 들이 그들이다.
김상욱 교수도 애당초 그러한 방식을 따르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창비아동문고의 초기 대여섯권과 최근 6, 7년간에 발행된 10여 권의 작품만 대상으로 하고 중간의 모든 작품은 건너뛰어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읽은 것에 대한 평론가의 관찰과 기록은 충실했으나 폭넓은 독서는 부실했다고 본다. 결국 창비아동문고 200권을 통해 한국 아동문학(또는 어린이문학)을 투시해보겠다는 거시적 목표와는 달리 특정한 부분만을 미시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이 글은 미완의 글이 되고 말았다.
고요 koyojune@hanmail.net
박영도 교수의 글을 읽고
지난 『창작과비평』 봄호(115호)에 실린 촌평 「어느 ‘존재론적 드라마’의 정치적 빈곤」의 마지막 구절은 A. 네그리·M.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에 대해 필자가 제기하고 있는 비판을 잘 요약하고 있다.
“혁명 의지의 존재론적 과잉, 객관적 분석 및 검증의 실종과 규범적 방향설정의 부재, 정치적으로 명백하고 시급한 문제들의 존재론적 차폐(遮蔽), 이것은 형이상학적 풍요로 대신하기엔 너무 큰 정치적 빈곤이다.”(438면)
우선, 『제국』이 다양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일차문헌으로 삼아 논리를 구축하고 있는 정치철학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치 수치자료를 내놓으라는 듯한 어조의 “객관적 분석 및 실증의 실종”이라는 비판은 그 잣대 자체가 부적절하다. “객관성”을 우열의 당연한 기준으로 여기는 이러한 사유의 위상은 네그리와 하트가 비판하고 있는 ‘초월성의 구도’와 다름없으며 그 속에서 가능한 정치란 권력의 정치, 지배의 정치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다중의 해방적 역능을 긍정하며 제국을 넘어서는 길을 지향하고 있는 『제국』에 씌운 “규범적 방향설정의 부재”라는 혐의는 독해상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비판이므로 기각된다.
네그리와 하트의 근본적 사유와 급진적 현실비판이 자칫 현실적 문제를 간과하는 형이상학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은 현실 문제들에 대한 그와 같은 기존의 관점 자체의 오류를 문제시하면서 근대기획과 탈근대기획의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고 둘을 조율하면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것을 현실의 구체성과의 관계 속에서 해독하는 일이 우리의 몫에 해당되는 게 아닐까?
박영도 교수는 『제국』의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정치의 빈곤’을 탓하지만, 앞서 보듯 그의 관점 속에서 가능한 ‘정치’란 분명 해방의 정치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가 보여주는 독해 속에서라면, 억압과 차별을 만드는 사유기반인 ‘초월성의 구도’를 걷어버리고 내재성의 철학 안에서, 다중의 역능을 역사의 근본적 동인으로 위치시킴으로써 해방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련한 『제국』의 의미는 크게 감쇄되고 만다.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독해의 빈곤’이다.
송인혁 unzeit@freechal.com
팔레스타인 노트를 읽고
지난 여름호의 해외촛점 ‘팔레스타인 노트’는 내가 모르고 있던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간 몇개 서구통신사와 CNN을 통해서만 제3세계 소식을 전하는 우리 언론의 한계를 생각하면, 이 글을 읽기 전에는 나처럼 편향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9·11사태에만 관심을 두고 갑론을박해왔을 뿐, 정작 미국을 비롯한 서구선진국의 집중공격을 받아온 이슬람 세계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슬람 민중의 삶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처절한 것이었다. 한편 점령지에서 군복무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스라엘 방위군 군인들(리퓨즈니크)도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보고 전쟁은 가해국이건 피해국이건간에 어느 편의 민중에게도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국제적이고 정치적인 사태에 전세계 문인들이 참여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우리나라 문인들도 이제는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방문에 참가했던 문인들의 경험이 담긴 작품들을 곧 만나보고 싶다.
김태경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 193-7
사회공동체와 시
지난 여름호의 글들 중에서 고은 시인의 시들이 눈에 띄었다. 이미 신자유주의란 가면을 뒤집어쓴 미국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 그리고 역사적 상처의 심연들. 고은 시인은 구구절절 시편을 통해서 그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이미 이 시대 작가들은 전체 속에서 소외된 ‘나’의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물화, 코드화된 개인의 정체성 회복이란 차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자칫 인류 공동체를 도외시할 위험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반추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호 고은 시인의 작품들은 개인이 확대된 사회공동체의 의미를 찾고자 한 노력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식 kys9719@hanmail.net
빈방을 두드린 느낌
창비 2002년 여름호를 읽으며 느낀 점은, 개인적으로 빈방을 두드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용적으로나 화제선정 면에서 어느때보다 다채롭고 풍성했던 점, 당대의 현실과 인식의 폭을 한단계 높여 동아시아 국가를 조명했던 점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문학 작품(특히 소설)을 대함에 있어서는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땅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길’ 꽤나 좋아하나 보다. 그럼에도 김중식의 짧은 글은 유쾌하다.
윤정희 puhaa1234@hanmail.net
작가와 떠나는 ‘창비문화기행’을 다녀와서
문화기행을 떠나던 지난 6월 15일 아침은, 월드컵 출전 48년만에 16강 진출이라는 환상(幻想)을 현실로 이룬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만큼이나 날씨도 화창했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축구 관전평은 여행길의 훌륭한 동반자였는데, 버스가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월드컵 이야기도 차츰 잦아들고 아침 일찍 일어난 피곤기에 너나없이 꾸벅꾸벅.
월출산(月出山)을 중심으로 영암, 강진, 해남 일대에 펼쳐져 있는 문화유적지를 유홍준 교수가 남도답사 일번지로 꼽은 뒤에 그곳를 찾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너나 할 것 없이 볼 것만 쓱싹 보고 떠나버리고 말아 여유있게 음미하는 여행은 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번 창비의 제3차 문화기행 덕분에 ‘1번지’를 다녀왔다.
대개 답사를 구실로 절집을 찾아가면, 절집의 규모나 건축미, 탑이나 비(碑)의 미적·역사적 가치, 절간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풍광(風光) 등등을 살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남도 일번지 답사의 진수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수는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채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다”라고 했다.
도갑사(道岬寺)는 절집의 웅장함도, 건축미의 특이성도, 주변의 뛰어난 풍광도 없다. 출입문을 지나 국보 50호인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니 경내가 훤했다. 대웅전이나 탑을 굳이 챙겨보지 않아도 경내에서 월출산 산자락으로 훤하게 이어지는 풍광이 해탈 그 자체일 듯싶다. 해탈문 앞에 한참을 서서 절집 뒤로 이어지는 산, 그리고 그 위로 이어지는 맑은 하늘을 쳐다보니 그대로 수수한 한폭의 그림이다. 그 순간 누군가가 훈수를 한다. 경내에 나무들이 제법 많았는데 어느해 나무들을 잘라냈다고.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처럼 여기도 주춧돌만 남아 있는 곳에 거대한 복원공사를 하려는가보다고 덧붙였다. 듣고 보니 어딘지 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이 무엇을 짓기 위한 준비중이기 때문인가도 싶다. 인간의 욕망이 또 하나의 절집을 망가뜨리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월남사지(月南寺趾)로 가려면 멀리서 월출산을 끼고 돌아야 한다. 좌석 등받이에 기대 그렇고 그런 시골풍경이 있는가보다 하며 졸며 말며 하던 나는, 어느 순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월출산의 자태에 까물까물 졸던 졸음을 확 쫓아낸다. 월출산 봉우리들이 모여 있는 것이 마치 어느해 모 일간지에서 액자용으로 만들어 돌렸던 금강산의 만물상 같지 않은가? 규모가 작아 웅장함은 없지만 어쩌면 그리도 만물상처럼 아름다운지.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들어가는 모퉁이 길엔 넉넉하고도 수수한 시골의 정겨움이 그대로 푹 배어 있다.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에 세운 삼층석탑은 고려 때 것이면서도 백제 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단다. 여기쯤 대웅전이 있었겠다 싶은 곳에 기다랗게 지은 집이 있는데, 빈집이다. 나그네들만 웅성거리고 있다. 나도 그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편안함을 누려본다. 그때 누군가가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가면서 월출산을 보고 북한산 같다고 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한다. 조선초기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한적한 산기슭에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은 남도 1번지의 기품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 서둘러 절 구경만 하느라 그 풍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음날 아침결에 찾은 영랑생가는 관광객의 눈길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과분한 치장을 해놓은 듯싶다. 반면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꼬부랑 산길은 호젓해서 좋았다. 길이 너무 반질반질하다 싶었지만, 어쩌랴! 나도 이 길을 반질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을. 돌이켜보니, 다산이 혜장스님을 만나러 넘어 다녔다던 그 길에선 ‘등산’이 아니라 ‘소요’를 하는 것이 마땅했거늘, 버리지 못한 도시의 조급함으로 서둘러 넘어버린 것이 후회스럽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백련사 부도 옆 동백숲에서 오랫동안 숨을 고를 수 있었던 것. 백련사 대웅전 기둥에 서서 바라보는 강진만은 천일각에서 구강포를 바라보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친김에 마량포구의 등대까지 간 것은 또다른 땅끝을 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그곳에서도 국토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두고 보는 여유가 없었다. 고금도와 연륙교를 놓는다고 파헤쳐진 만신창이 산허리를 보노라니 입맛이 썼는데, 그나마 길라잡이 김효형 형의 옛집 앞 갯벌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조개껍질을 만지작거리면서 가슴을 정화시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되새겨보니 이번 여행길에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삶의 신산함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맛보는 제대로 된 답사는 못했을지라도,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와 향토의 흙내음이 있어 아름다운 조국강산의 편린(片鱗)은 보고 온 것 같다.
김치홍 ka6808@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