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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재학 鄭載學
1974년 서울 출생.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buchanan@dreamwiz.com
아라베스크
할머니는 흙에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을 쫓아버린다 얘야 누군가 온 모양이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걸요 문은 아직 푸른빛이에요 할머니 눈에 철사가 박혀 있었다 잡아 뽑으려 했지만 점점 더 깊이 박히고 있었다 너는 늘 내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냥 내버려두렴 아버지가 아기가 되어 마당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닭은 아버지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다급히 자라났다 닭이 잡혔을 때 아가의 머리카락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이제 일어나세요 아기 옷도 벗어버리구요 내 머리카락이 철사로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기차가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구요 아버지 저 좀 붙잡아주세요 빌어먹을 제 손이 할머니 눈 속에 들어가버렸어요 할머니 눈에서 날카로운 초생달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툭툭 부러졌다 나는 할머니의 몸속에 들어가 아버지가 되어 기어나왔다 문을 뚫고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진에 담긴 편지
당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했어요
기억나시죠? 같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말이에요
당신이 찍은 바구니 오브제마다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가 한명씩 들어가 있지 뭐예요 얼굴이 명확히 찍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눈 속에 있는 고장난 버스를 볼 수 있었어요 지금도 덜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답니다 사진을 서랍 속에 넣어두어도 계속 소리가 들려요
저는 요즘도 결혼식장에 비디오 촬영을 나가고 있어요
오늘 찍은 신랑 신부는 떨려서 표정을 잡지 못하겠다며 미안해했고 무척 좋으니 염려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찍었던 적은 없었을 거예요 늘 따분했던 앵무새 주례도 더듬거리며 모처럼 말다운 말을 하더군요 결혼식이 끝난 후 두 장님은 축복을 받으며 나갔죠 순간 내가 찍은 건 그들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파울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 앞에서
저 찍어준 것 기억나세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말이에요
현상한 사진에 저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얼룩말
멈추지 않는 지하철 안에 얼룩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움직이는 선명한 색을 잡으려고 날뛰었다 잡힌 가죽은 흑과 백으로 잘려졌다 좀더 많은 가죽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이 다투는 동안 벌거벗은 아이들의 얼굴이 증발하고 있었다 가죽이 벗겨진 머리에 회색 시멘트가 부어지고 얼굴 없는 아이들은 알몸으로 자전거를 탔다 아이들의 살갗에 얼룩무늬가 새겨지고 있었다 자신의 손과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핥아먹던 사람이 자전거를 붙잡으며 결벽증에 걸린 비누에 칼과 유리가 박혀 있었다고 고함을 질렀다 아이들이 다른 칸으로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