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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촛불시위
뷰파인더로 본 촛불시위
강미란 姜美蘭
다큐멘터리 작가. purnnaru@freechal.com
여중생 사망사건이 일어난 지 반년이 지났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월드컵과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열광적인 응원과 지지의 함성이 휩쓸고 간 광장에는 촛불만 남았다. 축제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고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추위는 오히려 낯선 사람들간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의혹을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해서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법적·제도적 문제를 해결할 때에만 광장을 가득 메운 저 촛불이 ‘분노’가 아닌 ‘희망’으로 타오르게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두 갈래로 나누어진 촛불시위를 놓고 ‘분열’이니 ‘자작극’이니 왜곡하고 과장하는 언론, 이에 상처받은 네티즌들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유족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앞에서 ‘자제’를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좋은 친구’라는 글을 남겼다. 미국은 ‘과실치사’ 혐의가 짙은 미군병사를 무죄평결했고 한국의 반미기류에 대처하기 위해 특별한 홍보대책을 강구중이라는 정보를 흘린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기껏해야 주말에 몇번 시위에 참석해서 시민들의 표정을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시위현장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소박하게나마 정리하는 것이 카메라를 든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발딛고 선 이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한다면 내 카메라에는, 그리고 내 눈에는 이 촛불시위에 관해 어떤 풍경이 담겨 있나.
1.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이 가진 두 가지 얼굴
2002년 6월 18일자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는 미군기지 고압선에 감전돼 숨진 고 전동록씨의 장례가 6월 10일 치러졌으나 조선일보가 외면한 점, 6월 13일 여중생 사망사건이 발생했으나 조선일보가 언급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한 기사가 올라왔다(문성 「<조선일보>가 게재를 거부한 기사들」). 일부 언론이 여중생 사망사건을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축소하는 가운데 6월 15일에 피해자들의 부검을 생략한 채 장례식이 치러졌다. 미군측은 먼저 장례를 치르는 조건으로 유족들과 사회단체 대표들에게 사단장 면담을 약속했으나 정작 장례가 끝나자 “약속을 한 적이 없다”며 말을 바꾸었다. 온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전국 각지에서 응원의 행렬에 가담할 때 의정부시 미2사단 개리슨 캠프 레드 클라우드(Garrison Camp Red Cloud) 앞에서는 중학생·고등학생 들이 눈물의 시위를 벌였다.
6월 29일에는 동아일보가 「미군 ‘여중생 사고’ 원만한 처리를」(배달판에선 ‘원만한’을 ‘합리적’으로 바꿈)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사건의 진상규명보다는 혹시 빚어질지 모를 미국과의 갈등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같은 날 새천년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논평을 발표했지만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사회당, 한국미래연합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한국이 4강에 진출하던 날, 신촌 인근에서 밤늦도록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차량들에 접근해 “혹시 미선이 효순이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반응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목이 쉬도록 ‘대한민국’을 외치던 우리는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개정하는 것보다 선진국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한국 축구의 실력이 ‘한민족의 자긍심’과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취향의 문제다. 게다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때 붉은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던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이 이토록 오랜 시간 우리를 거리로 불러낼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을 죽인 운전병이 무죄평결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지수와 민족적 자긍심은 우리가 눌렀다고 생각한 우방이 제한한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있는데도 말이다.
2. 피해자에 대한 이중잣대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다양한 플래시 애니메이션과 동영상, 사진, 만화 등이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그런데 이를 제작한 주체들이 대부분 남성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단지 관용적인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여중생을 ‘누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누이’라는 호칭에서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선은 어땠을까.
피해자를 가족이나 친지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파급효과’를 노리다 간과하는 것이 있다. 누군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약한’ 존재였기에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자가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부각한다는 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근방식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집회현장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군부대에서 설치한 고압전선에 감전되었던 전동록 아저씨도 월드컵 기간에 돌아가셨잖아요. 근데 며칠 뒤에 벌어진 여중생사건만 이렇게 부각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촛불시위에서 그동안 발생한 미군관련 범죄를 다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그분에 관한 구호는 얼마든지 같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아저씨 이야기는 묻혀버리고…… 그분 유족들은 마음이 어떨까 싶어요.”
모 시사주간지에서는 두 페이지짜리 만평을 통해 미국을 침입자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남편으로, 여중생사망을 아내가 강간당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두 아이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한 주부는 불만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범죄 가운데 가장 악랄한 것이 강간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남성 대 여성’으로 놓고 강간으로 묘사한다면 그 틀에 맞지 않는 사건들은 소외당하지 않을까요? 이번 사건을 너무 선정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쾌해요.”
또한 ‘민중의 소리’ 등 진보적 성향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기갑부대 출신의 남성들이 미군 운전병의 증언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글이 폭주할 때, 고의적 사고 혹은 사전 ‘성희롱’이나 ‘성폭력’ 가능성을 제시한 의견이 개진되었으나 “우리의 순진한 동생들, 순수한 영혼들을 더럽히지 말라, 두 번 죽이지 말라”는 답글이 반드시 뒤따랐다.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학생이 일렬로 나란히 쓰러진 점, 차량이 후진한 점, 사체에 남아 있던 궤도자국 등 각종 정황으로 인해 가능한 추론이었지만 아예 그런 일은 상상하지 말자는 의견이 더 강경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미군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이런 시선이 허락되지 않는다. 전국 34개 미군기지 인근에 존재하는 200여개의 성매매업소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10만명 이상의 여성들이 미군으로 인한 인권침해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미군 기지촌 성매매 실태와 성적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원탁토론회(2002. 8. 29) 자료집 중 김현선의 「미군 기지촌의 국가간 인신매매와 성매매의 실태」 참조).
1992년 10월 미군 케네스 마클의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계기로 ‘미군범죄’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그 성과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상시적 활동을 펼친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다. ‘미군범죄’라는 말 자체가 공식화된 것도 이때부터이다(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주한미군범죄백서: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개마서원 1999 참조). 그러나 잔혹한 현장사진이 학생과 시민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과 비슷하지만 사건에 대한 공감과 문제의식은 지금과 그 수준이 달랐다.
똑같은 여성 피해자, 똑같은 우리의 이웃이 잔인하게 죽어갔건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었는가에 따라 우리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사건에 접근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이 점을 누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솔직하게 시인해야 할 것이다. 성폭력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앞당길 수도 있다는 점, 피해자가 당한 ‘폭력의 현장과 피해자의 시신’을 노골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이 과연 피해자의 인권을 배려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3. ‘분열’의 이면
대통령 당선자의 ‘자제’ 발언 이후 2002년 12월 31일 세종로 사거리는 봉쇄되었다. 시위 예정시간이 임박하자 지하철은 광화문역과 종각역을 그냥 지나쳤다. 모든 길은 전투경찰과 그들의 버스가 가로막았다.
2003년 들어 첫 촛불시위가 열린 1월 4일 저녁 광화문에서는 최초로 ‘촛불시위’를 제안했던 앙마가 또하나의 시위대를 조직했다. 방송사와 조·중·동을 비롯한 일간지는 기다렸다는 듯 이 장면을 보도했다.
그러나 누구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분열’이 시위를 제안했거나 꾸준히 참여하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각 도시는 물론 해외교포들과 세계 각국의 국민들까지 한목소리로 외치는 ‘전쟁 반대’ ‘부시 사죄’의 움직임이 누구에게 가장 불편했을까. 어떤 세력에게 가장 난처했을까.
‘앙마’나 ‘범대위’를 비난하거나 그들의 분열을 걱정하지 말자. 12월 31일 광화문 집회가 예정대로 자유롭게 진행되었다면 이들이 과연 갈라섰을까. 그들은 표현방식이 다를 뿐, 궁극적인 바람은 같은 동지들이다. 미국을 무조건 반대하고 지금 당장 미군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부당한 폭력은 사라져야 하고 불평등한 관계는 바로잡아야 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도발해선 안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자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공감하는 곳에 가서 계속 이 촛불시위에 참여하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생각해보자.
아직 한번도 촛불을 켜지 못했다면 이번 주말 조용히 그 대열에 들어가 무엇이 이들을 한데 뭉치게도 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나누게도 하는지 체험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며 ‘한국이 싫어’ ‘난 반미가 싫어’라고 투덜대기에는 저기 모인 사람들의 눈빛과 마음이 너무나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