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해외촛점 │ (속) 팔레스타인 노트
또다시 총은 패배한 것 같다
쌈 바후르 Sam Bahour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의 알비레에 사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팔레스타인 텔레콤사의 창립을 돕기 위해 1995년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재이주함. 『고국: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구전 역사』(HOMELAND: Oral History of Palestine and Palestinians, 1994)를 공저로 펴냄. 이 글은 팔레스타인의 온라인 저널 The Electronic Intifada (http://electronicintifada.net)의 ‘a diaries project’란에 실렸으며 6월 27일 글의 원제는 “Breaking the Fear”, 7월 1일 글의 원제는 “Uninvited Guests Become Neighbors”임. sbahour@palnet.com
ⓒ S. Bahour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두려움을 깨뜨리다
오늘은 6월 27일이다. 마침내 우리 도시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우리가 24시간 통행금지를 당하는 동안 16명의 완전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라말라에서 나흘째 실시중인 호별 가택수색의 일환으로 우리집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3층으로 되어 있다. 처가 식구들이 1층, 우리가 2층,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3층에 산다. 아내 아비르(Abeer)와 큰딸 아린(Areen)은 가택연금(국제법에서는 이를 ‘집단적 처벌’이라 부른다) 기간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종일 빵을 구웠다. 아린이 오븐에서 갓 구어 낸 달콤한 ‘하레사’(Haresah)를 싸면서 아래층의 할머니에게 그걸 보낼 생각으로 들떠 있을 때가 오후 7시 30분이었다. 지금처럼 통행금지를 당할 때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정면 베란다에서 바구니와 밧줄을 이용하여 아래로 물건을 보낸다. 바구니가 흔들리면서 문 안으로 들어가면 처가식구들이 우리가 무얼 내려보냈는지 보려고 열어본다. 이번에는 아린 혼자 베란다에서 바구니를 내려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반쯤 내려갔을 즈음 할머니댁 현관 계단에서 한 군인의 철모를 보았다. 그애는 서둘러 바구니를 끌어올려 안으로 집어넣고 활짝 열어놓은 창문은 닫지도 않은 채 뛰어들어와 군인들이 우리집에 왔다고 말했다. 그애는 잔뜩 겁에 질렸는데 통행금지 조치 이후 어느 때보다 더 무서워했다. 나는 『뉴욕 데일리 뉴스』(New York Daily News) 기자인 코키(Corky)와의 전화를 막 끊고 컴퓨터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나는 앞창으로 가서 우리집 돌담 앞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때 마침 우리집에 와 있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가 인터폰을 받아보니 장모가 군인들이 여기 왔으니 문을 열라고 했다. 문을 열었을 때는 군인들이 아니라 장모 파드와(Fadwa)만 들어왔다. 내가 계단에서 맞으니 장모는 그들이 우리 중 한사람만 아래로 내려오면 된다 하더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보려고 내려갔다. 처가댁 현관 층계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니 현관은 완전무장한 채 무릎을 꿇고 최대한의 경계자세를 취한 군인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한 군인이 현관 문간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총을 겨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내게 헤브루어를 하는지 물었고 나는 그에게 영어나 아랍어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완벽한 영어로 위층에는 누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내 식구들과 아버지가 있다고 답했다. 그는 모두 집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날씨도 쌀쌀한데 애들까지 나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끊다시피 하면서 “모두 나오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위층을 향해 소리를 질러 가족들에게 신분증을 갖고 내려오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 군인은 장모에게 마르완 바르구티(Marwan Barghouti, 파타Fatah의 웨스트뱅크 조직 책임자로서 제2 무장봉기intifada운동을 주도하다가 2002년 4월 13일에 이스라엘 군대에 체포되었음―옮긴이)가 어디 있냐고, 마치 알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에게 장모가 같은 성을 쓰기는 하지만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노라고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다른 마을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빈정대며 “아니, 여기가 라말라잖아”라고 했다. 나는 다시 이곳은 라말라가 아니라 알비레이며 내 처가는 디르 가산나 출신이고 마르완은 코베르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아 나는 애초의 질문에 답하여 마르완은 ‘당신네 감옥’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능글맞게 웃더니 그 답을 인정하는 것 같았고, 또 그건 사실이었다.
그때쯤 아내가 딸들과 아버지와 함께 내려왔다. 큰딸 아린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나는 그애를 안아서 무릎꿇은 자세로 무기를 겨눈 채 문간과 현관을 온통 메운 군인들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봐라, 이분들도 우리와 똑같지, 무섭지 않단다”라고 말해주었다. 아버지도 애를 안심시키려고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이 군인들을 상대하고 싶어 안달하셨지만 우리는 누군가 감옥에서 밤을 보내는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이번만은 참으시라고 설득했다. 아린은 긴장이 약간 풀렸지만 현관 층계의 군인이 아내에게 차고를 열라고 요구하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열쇠가 위층에 있으니 아내가 올라가서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그러라고 했고, 아비르가 갔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군인들에게 “우린 아직도 갈 길이 멀군요”라고 말했다.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두어 명의 나이 어린 군인들이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거기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들 모두는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국땅 이방인의 집에 와서 팔레스타인인(즉 테러리스트) 일가족을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누그러뜨리고 두려움을 달래주려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우리를 그들은 그저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비르가 차고 열쇠를 갖고 오자 두 명의 군인들이 그녀더러 차고 문을 열라고(국제법상으로는 이런 존재를 ‘인간방패’라고 부른다) 했다. 아내가 비어 있는 차고 문을 여니 군인들은 잔뜩 두려워하며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한 채 한발 한발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밖에 없어서 그들이 실망했는지 아니면 안도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두 군인들이 집 쪽으로 다시 나왔을 때 우리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바깥에 앉아 있었고 군인 하나가 손을 내밀어 우리의 신분증을 건네주었다. 장모가 아랍어로 그들에게 “언젠가 평화로운 시기에 당신들이 여기 다시 찾아올 때에는 그렇게 겁먹진 않겠죠”라고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집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는 재빨리 “안녕히”라고 말했는데 마치 우리의 삶을 침범함으로써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자신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완전경계 태세를 취한 채 하나씩 떠났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현관만이 아니라 건물 안의 모든 방들을 다 수색하고 마음대로 들락날락했다. 그들이 철수하는 동안 우리집 조금 위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분명 그것은 다른 조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있는 곳에서 나는 소리였을 테지만 우리집에서 철수하는 군인들은 경계를 풀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거리로 퇴각했다. 중화기와 통신장비와 배낭을 진 채 한사람씩 우리 곁을 지나갈 때 내 딸은 그저 나를 꼭 끌어안기만 했다. 마지막 군인이 집을 나가자 장인이 앞으로 나서서 층계 머리에 섰다. 좌절감에 휩싸인 채 그는 군인들에게 잘 가라고 하고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내일 또 오시게”라고.
그들이 떠난 후 우리는 그들이 2층의 방이란 방, 벽장이란 벽장은 모조리 다 뒤졌음을 알게 되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 아린은 훨씬 진정이 되었다. 우리에게 와서 “예전에는 그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몇명은 좋은 사람 같았어요. 그렇게 조끼를 입고 장갑을 끼고 철모를 써야 하다니 안됐어요. 틀림없이 엄청나게 더울 거예요. 아마 그래서 우리한테 말을 걸지 않았나봐요”라고 했다. 난 그애에게 나도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만 샤론이 억지로 그들을 보냈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애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지어 우리 가정의 안전을 유린한 사람들조차 모두 적으로 보지 않도록 애를 썼다.
마침내 우리의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는 이들 철모 쓴 무장군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는 이런 날이 와서 내 딸이 미래의 이웃들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기를 바랐다. 두살 난 딸 나딘(Nadine)은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너무나 귀여운 액센트와 몸짓으로 지난번 사건 전부를 흉내냈다.
하루치의 쓴 약 같은 점령을 당하고 나서 우리는 평정을 되찾았고, 알비레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를 대접할 수도 있었는데 군인들이 왜 그렇게 빨리 가버렸냐는 농담도 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밤 우리는 딸들에게 잘 자라는 포옹과 입맞춤을 한번 더 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린이 집으로 들어오는 그 군인의 머리 위로 바구니를 내리는 것을 거리에 있던 군인들 중의 하나가 보았더라면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났을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께서 그들이 수색할 다음 집을 보호해주시길.
초대하지 않은 손님
오늘은 7월 1일이다. 이스라엘 군대의 통행금지(가택연금) 조치가 내려진 지 여드레째로 접어든다. 아침 7시 20분에 누군가 우리집 초인종을 계속 울리는 바람에 갑자기 잠에서 깼다. 아내는 (이스라엘 군대가 라말라에 진격하고 거리에 탱크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이래 떨어져서는 잠들지 못하는) 두 딸과 함께 자다가 인터폰을 받았다. 대답은 ‘자에시’(jaesh, 아랍어로 군대)였다.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인가 보러 나왔다. 두 딸은 이제 완전히 깨서 벌써 엄마 뒤꽁무니에 바싹 붙어 있었다. 두살배기 나딘은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 이스라엘 군인은 누구 한사람 2층에서 내려와보라고 했다. 우리가 이와 똑같은 절차를 치른 지 겨우 나흘 만의 일이었다. 그때 장인 아부 하짐(Abu Hazim)은 군인들더러 “곧 또 오시게”라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아마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현관문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었더니 다섯 명의 완전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잠이 반쯤 덜 깬 상태였다. 그들은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집 밖으로 불러내도록 했다. 군인들이 이미 여기 왔었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아내한테 애들을 데리고 내려오라고 소리쳤고 아버지한테도 일어나서 내려오시라고 외쳤다.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가 차고 위쪽의 현관에 섰다. 그러자 그 군인은 거리에서 더 많은 군인들을 불러왔다. 알고 보니 병력을 최대한으로 실은 인력수송 장갑차(APC) 두 대가 우리집 정면에 있었다. 전부 해서 열두 명 가량의 군인들이 우리집 현관 층계에 모였다. 한 명이 현관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열 명이 각기 흩어져 집안을 수색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우리의 신분증을 검사했다. 이 시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경계를 서는 군인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나는 그에게 현역인지 아니면 예비군인지 물었다. 그는 현역이라고 말했다. 나는 예비역들이 같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처음에는 예비역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다가 잠시 후 알아차리곤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민간인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게 군인이 할 도리인지, 그럴 바엔 리퓨즈니크(refusenik, 점령지에서의 군복무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방위군 군인들―옮긴이)가 되는 게 나은 선택이 아닐지 물어보려 했다. 우리와 같이 있던 다른 한 명이 그에게 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헤브루어로 말을 주고받더니 둘 다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우리가 서 있던 곳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해갔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두살배기가 겨우 일 미터 떨어져 서 있는 언니에게 소리쳤다. “아린 뽀뽀해줘”라며 나딘은 엄마 어깨에서 몸을 숙여 볼을 내밀었다. 그애가 너무 크게 얘기했기 때문에 두 군인들도 바라보았지만 면도를 안한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상황을 다루는 데 전문가가 다 된 아린은 동생에게 뽀뽀를 해주며 달랬다. 아내는 나를 흘깃 돌아보고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15분 가량 지나자 군인들이 현관문 바깥으로 한명씩 일렬로 나왔다. 몇몇은 무전기에 대고 말을 했고 나머지는 축 늘어져 그저 무리를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그들 모두 아무 말도 않고 거리로 나갔다. 들어가라든지 꼼짝 말고 있으라든지 하는 말도 없었다. 모두 떠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아린은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우리는 군인들이 전부 거리로 나올 때까지 몇분간 바깥에 더 앉아 있은 다음에야 상황을 둘러보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리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APC 한 대가 떠났다. 남겨진 차의 군인들은 길 건너 아부 모하메드(Abu Mohammed) 집으로 가서는 초인종을 울렸다.
우리는 집안의 방을 전부 둘러보았는데 벽장과 서랍이 몇개 열려 있는 것말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여서 다시 한번 (정신적인 것 외에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2층 정면 베란다에 모여 있을 때 거리를 쿵쿵 울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다섯 대의 APC와 지프 한 대, 그리고 메르카바(Merkava) 탱크 한 대가 몰려오더니 우리집 앞에 섰다. 군인 두 명이 다시 우리집 쪽으로 와서 아래층 처가댁 문을 두드렸다. 장모가 문을 여니 나오라고 했다. 장모는 우리집에서 막 나와 길 건너에 있는 군인들을 가리키며 “방금 왔다갔어요,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그들은 당황한 듯했고 한마디 말도 없이 거리로 되돌아갔다.
나딘은 이제 베란다 창문에 착 달라붙어 모든 움직임을 열중해서 지켜보고 있다. 그애는 아직 제대로 말을 못하는데도 잔뜩 흥분해서 떠듬거리고 때로는 문장 중간에 말문이 막히면서도 우리에게 탱크가 왔고 ‘우모’(Umo, 아랍어로 삼촌)가 나왔다거나 아니면 APC의 뒷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딸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텔 아비브의 안락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그들이 어떤 세대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보여줄 수만 있다면. 우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을 지켜보는 동안 아린은 내 곁에 얌전히 앉아 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군인들이 그냥 옆집을 수색할 모양이라고 설득하려고 애쓴다. 나는 아버지로서 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노력해야 하기에 그렇다고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열두 명의 군인으로 이루어진 그 수색조는 이웃집 문을 빠짐없이 차례로 두드렸다. 모두 집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는 수색을 했다. 길 건너편에 사는 아린의 친구 아부드(Aboud, 아홉살)는 파자마 차림으로 두 마리 새끼고양이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현관 층계에 두 줄로 늘어선 열두 명의 군인들 사이로 나왔다. 약 삼십분이 지난 다음 군인들은 전부 우리집 현관 층계 앞에 세워진 APC에 모였다. 그들은 색이 칠해진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는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침햇살이 강해져서 플라스틱 코팅을 입힌 지도가 구부러질 때마다 반짝거렸다. 십분 후 그들은 합의에 이른 듯 고개를 끄덕였고 헤브루어로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때쯤엔 이미 APC의 군인들이 모두 내렸고 조용하던 우리 동네는 군부대가 되어 있었다. 수십명의 이스라엘 군인들과 디젤 연료 냄새, 그리고 탱크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는 우르릉대고 삐꺽거리는 소리, 탱크의 대포를 빙 돌아가게 하는 모터 소리, 온통 헤브루어로 주고받는 위압적인 교신 소리, 군인들의 농담과 웃음, 그것은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길 건너편의 3층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인 하나가 대형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1층을, 즉 아부 모하메드의 집, 아린의 여자친구 아셀(Asel)의 집, 그리고 아셀의 할머니의 집에 대한 점검을 끝냈다. 움 칼레드(Um Khaled)의 집이 2층에 있지만 그녀는 항상 이집트에 사는 아들을 방문하느라고 집을 비웠다. 우리는 아셀의 할머니가 열쇠를 갖고 있으니 십중팔구 그들이 움 칼레드 집을 맨 먼저 수색했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럼 이제 3층만 남았다. 3층은 비어 있고 알비레의 시장 하지 왈리드(Haj Waleed)의 소유였다. 몇분간 쇳덩이 내리치는 소리가 나더니 아린이 “그들이 열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아린은 문이 부서질 때 군인들이 웃으면서 “그렇지”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애가 옳았다. 몇분 지나자 두 명의 군인이 우리집과 정면으로 마주한 3층 아파트 베란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채 15분이 걸리지 않아 군인들은 전부 자기가 타고 온 APC나 탱크나 지프로 열지어 가서 더플백과 침낭과 스펀지같이 생긴 녹색의 찢어진 매트리스 등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한 명은 APC에서 TV를 꺼내와서 아파트로 가져갔다. 다른 군인들은 식량 상자로 보이는 것들을 옮겼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끼리 이런저런 논평을 내놓을 때마다 나딘은 팔을 휘젓는다든지 해서 온몸을 다 동원해가며 군인들의 행동을 그대로 재연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세계가 이스라엘의 점령을 용인하다니 수치스러워해야 마땅하다는 말만 계속하면서 사뭇 역겨워했다. 아버지는 만일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텍사스가 문제이고 부시의 집이 우리집처럼 유린되었어도 부시가 그 악명높은 연설(팔레스타인 임시국가안을 제시하였으나 아랍권에서는 친이스라엘적 관점이라고 비판받은 2002년 6월 25일자 연설―옮긴이)을 했겠느냐고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셨다.
그들은 장갑 차량들에서 모든 것을 꺼낸 다음 APC와 탱크와 지프들을 움직여 점거하게 된 집의 현관 주위에 포진시켰다. 이 거대한 장갑 차량들을 움직일 때는 앞뒤 각각 한사람씩 두 명의 군인들이 서서 우리 동네의 좁은 거리에서 지형지물을 피해가려면 어떻게 조종을 해야 할지를 운전병에게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확신컨대 알비레의 도시계획위원회가 이 거리를 건설할 적에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장갑 차량들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딘은 모든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팔동작으로 비행기의 이착륙을 유도하는 사람같이 나딘도 꼭 자기가 그 탱크를 인도하는 것처럼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옮겨지자 그들은 모든 차량의 엔진을 껐고 그러자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 거의 9시가 되었다.
몇분 후 더 많은 군인들이 베란다 창문에 나타났는데 이제는 윗도리를 벗고 있었다. 철모도 방탄조끼도 녹황색의 군복도 소총도 없는 그저 한 인간이었다. 나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한 인간. 유일한 차이라면 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점령군이 되는 일을 그는 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통행금지가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풀릴 것이라는 발표가 오늘 있었다. 필요한 식품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동네 아이들은 탱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한 어린 소년은 마치 전쟁기념관에라도 온 듯 실제로 탱크에 다가가서 그것을 만져보았다. 두 명만 빼고 나머지 군인들은 이제 전부 점거한 집에 들어가 있다. 경계를 서던 두 군인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돌아가서 다른 길을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의 이 희한한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차들이 거리로 오다가 탱크를 맞닥뜨리고는 브레이크를 밟는다. 군인은 손가락으로 둥근 원을 그려 보임으로써 운전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일흔이 넘은 우리 동네 청소부 아부 하싼(Abu Hassan)이 녹슨 쇠수레에다 오래된 검은 쓰레기통 세 개를 얹어서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경계를 서던 군인이 그에게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아부 하싼은 우리가 한발짝만 떨어져서 소리쳐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한걸음 더 우리집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군인은 소총의 발사장치를 풀고서 더 크게 소리치며 떠나라는 몸짓을 보냈다. 아부 하싼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그는 아랍어로 자기는 쓰레기통을 수거해야 한다고 마주 고함을 쳤다. 군인은 이해하지 못했고 아부 하싼은 단호하게 자기 할 일을 하려고 했다. 이 대치상태는 총의 승리로 끝났고 아부 하싼은 넌더리를 내며 돌아서서 수레를 밀고 갔다.
그때 하지 왈리드 시장이 도착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이곳은 자기 집이니 들어가야겠다고 하고 있다. 그는 군인들과 문간에서 입씨름을 벌였는데 몇분 후 낙심한 듯 담배만 뻑뻑 피면서 떠났다. 그들이 그에게 “샤워를 하려면 이틀이 필요하다”고 말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국립보험공단 건물 앞 예루살렘 거리에서 차 한대가 우리동네 거리로 접어들려고 돌다가 우리집 앞의 탱크를 보고는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남쪽으로 향하던 다른 차 한대가 와서 받아버렸다. 재점령상태의 우리 도시와 삶에 잠시 흥밋거리를 제공한 자그마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혼란과 두려움과 분노가 우리 가정과 이웃을 지배한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온 기자에게 설명하려고 모여든다. 어떻게 집을 떠나란 명령을 받았으며 어떻게 탱크가 왔고 통행금지가 풀렸을 때 어떻게 거리에 나왔으며 어떻게 그 군인이 아부 하싼을 거의 쏠 뻔했는지 등등을 그 아이들이 한 장면 한 장면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들을 수 있다. 그런 동안에도 내내 우리의 초대받지 않은 이웃들은 마치 그 집이 예전부터 자기들 것인 양 행세한다. 우리는 그들이 빨리 떠나기를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사이 내 딸들은 진짜 군인들과 탱크가 밖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애들은 집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다. 나딘은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아린은 이스라엘 군인이다. 나딘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책상 아래 숨어 있다. 아린이 내 방을 노크하면 우리는 그애가 방을 점검하는 동안 모두 복도에 나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마분지로 만든 통행증을 아린에게 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아이들을 만들어내는지 알고나 있을까! 자기 아이들은 민간인을 괴롭히는 역을 맡을 것이므로 좀더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방금 전에 아내 아비르가 아부 하싼에게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제 바깥에 군인이 한 명만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집 쓰레기를 수거하려고 막 돌아왔다. 그는 우리집 쓰레기봉투를 치우며 주름지고 지친 얼굴을 들어 웃어 보였다. 아마 이번이 그 군인에게는 아부 하싼과의 첫 대면일 것이다. 아부 하싼으로서는 이스라엘 점령군과 마주친 지 어언 36년째다.
또다시 총은 패배한 것 같다.
[黃靜雅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