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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순정과 지조의 문학정신

김병걸 문학평론집 『격동기의 문학』, 일월서각 2000

 

 

구중서 具仲書

문학평론가·수원대 교수 kwangsanjs@yahoo.co.kr

 

 

지난해 가을 문학평론가 김병걸(金炳傑) 선생이 별세하였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외로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한권의 문학평론집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놓고 있었다. 이 책에 발문을 쓴 이선영 선생은 김병걸 선생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한다는 말로 글을 끝맺었다. 아직 저자가 타계하기 직전에 책의 제작이 끝난 셈이다. 책의 출간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김병걸 선생의 생애가 끝났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말하였다. “나는 문학을 천직으로 태어난 인간이라고 자부한다.”(5면) 이렇게 말해놓고 그는 다시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문학은 완전 실패작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학을 선택한 것을 더없이 큰 자랑으로 삼는다. 죽었다 다시 세상에 나와도 나는 역시 문학을 선택할 것이다.”(같은 곳)

김병걸 선생의 문학평론 문장이 시적 감수성을 감당한다든가 좀더 조율이 된 어휘를 구사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자신의 문학이 ‘실패’였다고 하는 말은 지나친 겸양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태어나도 문학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그 순정이다. 그는 순정의 사람이었으며 그보다도 천진한 동심의 사람이었다. 그의 순정이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고집불통의 정직으로 일관한 데에도 역시 그 바탕에는 천진한 동심이 있었다. 이것은 정신작업을 하는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신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111-4051974년 봄 서울 명동의 코스모폴리탄다방에 문학인들이 모여 그 시절에는 대단한 결단인 ‘개헌청원’을 선언하였다. 유신독재에 대한 대결선언이었다. 이 선언에 대한 보복으로 군부독재정권은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이 사건수사의 참고인 명목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녔다. 정보부에 다녀온 그는 동료문인에게 말했다. “정보부 수사관이 하는 말이 자기네는 천관우 선생과 김병걸을 존경한다고 합디다.” 그는 수사관이 회유의 수단으로 하는 말도 진지하게 곧이듣는 천진성을 보였다. 거리에서 동료문인을 만나면 손을 잡고 오래 놓지 않는 다정한 사람, 그러다가 몸이 피곤하면 그 자그마한 체구로 그냥 길가에 쪼그리고 앉기도 한다. 이때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소년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로서도 결연히 뜻을 굽히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때가 있다.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회가 결성되는 데에 참여코자 집을 나섰다. 조그마했던 돈암동 집 뜨락에 가족들이 울며 달려 내려와 그의 팔소매를 잡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를 뿌리치고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근무하던 경기공전 교수직에서 해직을 당하였다.

해직되고 10년쯤 지난 후 사회상황이 변하고 직장에서 복직요청의 전갈이 왔다. 그러나 김병걸 선생은 복직을 하지 않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창립에 가담하였다.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끝까지 동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정치인이 되려고 했던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인으로서 지성·참여·행동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가끔 글도 쓰고 책도 펴내면서.

60년대에 이미 김병걸 선생은 당시까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던 현실도피적 순수문학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순수와의 결별」(『현대문학』 1963년 10월호)에서 그는 앙드레 말로의 지성과 행동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타인에 대하여, 타인과 관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는 한에 있어서만이 실존한다”고 한 가브리엘 마르쎌에 대해서도 말하였다(491면). “누군들 어찌 정신의 목가적인 세계를 영유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소녀적인 몽상이 가능케 하는 정다운 공동 목장이 아니다.”(498면) 여기에서 김병걸 선생의 가시밭길 운명은 결정이 되었다.

그는 참여문학의 길을 계속 굳건히 밀고 나아갔다. 그것이 「참여론 백서」(『현대문학』 1968년 12월호)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60년대 참여문학론이 문단에서 역경을 헤치며 전개된 과정을 소상히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옹호 때문에 참여는 선택이면서 동시에 의무로 인한 구속이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김병걸 선생은 ‘상황(狀況)’ 동인과 만났다. 신상웅·임헌영·백승철·구중서가 참여한 ‘상황’ 동인은 60년대에 이미 참여문학의 성향을 뚜렷이했고, 69년에 동인지 첫호를 발간하였다. ‘상황’ 동인은 김병걸 선생보다 훨씬 나이가 아래였다. 그러나 원래 천진한 성품에 겸허의 미덕을 갖춘 김병걸 선생은 ‘상황’의 후기동인이 되었을 만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그의 돈암동 집에 ‘상황’ 동인들이 모여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한 그 시절은 김병걸 선생의 생애에서 모처럼 여유와 안정이 있는 한때였다.

바로 다음해인 1970년에 월간 『사상계』지 문학좌담이 있었다. 4·19혁명 10주년 기획으로 마련된 이 좌담에서 나와 김현 사이에 리얼리즘 찬반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논쟁에 연속된 내용의 평론을 내가 『창작과비평』 1970년 여름호에, 김현이 『문학과지성』 1970년 가을호에 발표하였고, 이어서 염무웅이 김현의 글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 담긴 평론을 『월간중앙』 1970년 12월호에 발표하였다. 당시에 리얼리즘은 참여문학의 원리론적 발전단계였다. 이에 대해 김병걸 선생이 쓴 문단 월평이 「리얼리즘 논쟁」(『현대문학』 1971년 1월호)이다.

“구중서는 우리 문학의 진로로서 리얼리즘을 제시하고, 김현은 그것의 그릇됨을 증언한다. 그리고 염무웅의 글은(…)우리가 놓인 시대와 상황을 거짓과 꾸밈없이 통찰하기 위해선 리얼리즘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혀주는 활달한 평론이다.”(197면)

이렇게 말한 김병걸 선생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뒤랑띠와 샹플뢰리가 보인 소박한 모사론 단계를 이미 넘어서 있는 것이 오늘의 리얼리즘 주장인데, 이에 대해 모사론적 도식이라고 공격하는 김현이 오히려 도식적이며 협량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차라리 다루기를 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김병걸 선생은 거침없는 직언을 하였다. 그의 문학이 왜 실패이겠는가. 오히려 그의 순정, 정직, 끝없는 젊음과 애정의 삶이 한없이 그립고 이에 존경을 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