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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화가와 문인들의 영감 주고받기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월간미술 2000
이재룡 李宰龍
문학평론가·숭실대 불문과 교수 jllee330@dreamwiz.com
미술과 문학을 더불어 논하는 자리에서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지만 나는 아직껏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화단에서 이발소 그림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문단은 여전히 19세기 스타일의 소설이 큰 행세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년 전의 미술이 지금은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 데 반해 문학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개인적 소감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나란히 출발한 두 장르가 언제부터 걸음의 폭이 크게 달라졌고 더구나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일까? A. 꽁빠뇽은 현대예술의 발전을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19세기 중반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작품, 마네의 그림을 현대성의 시초로 잡는다. 두번째 단계에는 세기초의 브라끄, 삐까쏘의 작품과 깐딘스끼의 초기 추상화, 뒤샹의 작품, 아뽈리네르와 프루스뜨의 작품이 등장했고, 세번째 시기는 초현실주의 1차 선언이 발표된 1924년 무렵이고, 네번째 시기는 냉전시대와 거의 일치하는 2차대전 이후부터 1968년 학생혁명에 이르는 기간이며, 1980년대에 이르러 대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현대성의 마지막 시기, 혹은 탈현대의 시기로 규정한다. 모더니즘을 다섯 단계로 나눈 도식적 작위성을 일단 접어둔다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대예술의 전환기에 항상 미술과 문학을 병렬시켰다는 점이다. 두 장르의 근친성은 필경 미메시스의 충동이 강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나란히 보폭을 맞춰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각기 제 갈길을 찾아나선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미술과 문학을 비교했다는 점에서 이가림(李嘉林)의 『미술과 문학의 만남』도 A. 꽁빠뇽의 착안과 유사하게 모더니즘의 출발과 전개과정에서 활약한 예술가를 되짚고 있다. 이가림이 택해 분석한 18쌍의 화가와 문인은 한결같이 이 다섯 단계 중 하나에 속하고 그중에서도 초기 모더니즘 단계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사가들이 한통속이라 싸잡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은 하나같이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여 그들 사이에서조차 어떤 공통된 노선을 찾기 어렵다. 어쩌면 주어진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는 것, 남과 다른 것을 다른 식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는 전복적 의지가 그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소개에 따라 이들 예술가를 살펴보면 진정한 예술이란 한결같이 어떤 교조에도 얽매이지 않는 전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18쌍의 예술가 사이에 오고간 교감과 상호 영향관계를 논하고 있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 영향이 대개 일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로 문인이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인의 경우 이제 모두 고전 반열에 오른 소설가, 시인이지만 당대에는 예외없이 혁명적 문학관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비록 문학이 아직껏 사실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나마 견고한 성채에 끊임없이 시비를 건 문인은 조형예술의 부추김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 정도이다. 사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살피기 위해 저자가 걸러낸 문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런 심증이 더욱 굳어진다. 예컨대 플로베르, 보들레르, 졸라, 발레리, 프루스뜨, 브르똥, 바따이유, 그리고 쏠레르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하나같이 프랑스 문단에서 새로운 일가를 이룬 작가인 셈이다. 그래서 한 장르의 진화는 필히 타 장르와의 잡종교배를 통한 돌연변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과감한 가설마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이며 이론적·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항이거나 저자가 겨냥한 집필목표와 크게 다른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다만 이 책이 화가와 문인이 나눴던 사사로운 우정, 세속적 관심을 끌 만한 에피소드를 들춰낸 것이 아니라 예술의 근본적 문제로 진지하게 육박한 노작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꼼꼼한 문헌 검토와 농축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연재글을 모은 것이다. 지극히 제한된 지면에 거장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데 녹여야만 했던 일은 시인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36명의 예술가와 관련된 책자를 꼼꼼히 정리한 솜씨에서 성실한 학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실 근래 들어 여러 장르를 가로지르는 시각이 요청되고 그것이 고사 위기에 처한 인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이란 기대도 크다. 그러나 한 우물만 건사하기에도 힘이 부치는 필자들의 어설픈 가로지르기는 무책임한 인상비평, 예컨대 미술관 주유기, 영화관람 소감에 불과한 잡문만 양산하기 십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훌륭한 참조가 될 만하다. 혹시 미술사나 미술비평 전공자가 보기에 어떨지 모르지만 명색이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저자가 인용하며 해설한 다수의 문학작품은 성실한 독서와 분석이 아니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36명의 거장들의 18번의 만남, 이 정도 분량의 주제를 소개하는 데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36명의 거장을 소개받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개 순서에서도 의미를 찾게 마련이다. 안이한 방법처럼 보이겠지만 주제별, 그도 아니면 연대기순─장유유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 순서인가─으로 각 장을 배열했더라면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아쉬움은 한창 흥미가 고조될 무렵 덜컥 글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막 허기를 채우고 느긋이 맛이 느껴질 무렵 밥상을 치우면 여운보다는 허전함이 먼저 느껴진다. 차라리 반찬 수를 줄이고 큰 그릇에 차려주면 좋을 거라는 불평에 가까운 허전함이다. 이런 트집을 잡다보니 문득 나를,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말은 쉬운데 현실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