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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흥길 尹興吉

1942년 전북 정읍 출생.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장편 『묵시의 바다』 『낫』 등이 있음. heunggily@hotmail.com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때와 곳9

 

 

1

 

이야기에 굳이 제목을 달자면 그런 모양새가 된다고 홍성만은 뜨악해하는 동창생들에게 말했다. 성인영화 제목을 연상케 한다는 중론이 돌았다. 어쩐지 음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밤에 이루어지다니, 도대체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란 게 남녀간의 그짓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요즘에는 레스또랑 같은 데서도 밤중에 남녀가 요상한 짓거리를 하느냐고, 참으로 말세라고 넌지시 홍성만의 직업을 빗대어 깐족이는 작자도 있었다. 도야지 눈에는 모두 도야지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까지 인용해가며 홍성만은 엉뚱한 상상력을 휘두르는 동창생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아무튼 홍성만의 뜬금없는 발언에서 비롯된 때아닌 설왕설래는 파장머리의 어물전같이 축 늘어진 분위기를 다시금 빳빳이 개비하는 데 일조했다. 성인영화 제목 운운은 연방 하품을 꺼가며 어서 이야기판이 마감되기를 고대하던 부류에게 각성제 구실을 했다. 음탕한 느낌 운운은 모깃불 곁에서 매캐한 연기도 아랑곳없이 자울자울 졸거나 아예 양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부류에게 기상나팔 같은 효과를 끼얹었다. 고급 레스또랑을 경영하는 마누라 덕에 호강에 잣죽 쑤는 팔자로 변신한 홍성만으로서는 그처럼 저한테 집중되는 좌중의 비상한 관심이 그다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바싹 다가앉는 시늉을 하는 동창생들을 보고 그는 한바탕 낄낄거렸다.

“옛날 같으면 손자를 봐도 벌써 두셋은 봤을 늙다리들이 시도때도없이 색을 밝혀쌓는 그 못된 버르장머리는 여전히들 못 놨구만.”

 

 

2

 

자아, 엿이 왔어요, 엿이 왔어. 말만 잘허면 공짜로 줘요, 공짜로. 엿들 사. 둘이 먹다가 싯이 죽어도 책음 못 지는 엿들 사. 맛 좋고 꾸리 같은 호박엿, 강냉이엿, 찹쌀엿, 가락엿, 갱엿……

이른 아침부터 느닷없는 엿장수 타령이 휑뎅그렁한 창고건물 안을 한바탕 들었다 놓았다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엿장수 봉자 아버지는 말하자면 선생인 셈이었다. 제자뻘 되는 신참 엿장수들을 모아놓고 시방 소리를 가르치는 참이었다. 선생이 찰캉찰캉 가윗소리 장단에 맞추어 구성진 가락으로 선창을 하면 젊은 제자들은 막걸리를 한 말쯤 퍼마신 듯 낯꽃을 시뻘겋게 붉히고 제비새끼처럼 주둥이를 짝짝 벌려가며 생짜로 목소리를 쥐어짜느라 두 눈알이 툭툭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제자들은 빈손에 보이지 않는 엿장수 가위를 쥐고는 장단을 맞추어 보이지 않는 엿가래를 자르는 시늉에 고부라졌다.

“어이, 거그 꺽새!”

가르침을 멈추고 봉자 아버지는 키가 장대같이 큰 젊은이를 지목했다.

“꾸리 같은, 고 대목 새칠로 혀봐!”

“꾸울 같은……”

“새칠로! 꾸리 같은!”

“꾸르 같은……”

꺽새가 매우 자신없는 목소리로 틀린 발음을 되풀이하자 부앗살이 머리 꼭뒤까지 뻗친 봉자 아버지가 왁살스레 크고 무거운 엿장수 가위를 휘두르며 뎅겅 목이라도 자를 기세로 위협했다.

“앓느니 죽겄다, 앓느니 차라리 죽겄어! 고따우 덜떨어진 소리 솜씨로 어디 엿 한가락이나 팔어 먹고살겄냐?”

엿장수 소질을 제대로 못 타고난 꺽새는 성격도 좋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히잇 웃었다. 꿀 같다는 말을 왜 반드시 꾸리 같다고 발음해야 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엿들 사. 개똥이도 쇠똥이도 얼른 와서 엿들 사. 뭣이든지 다 갖고 와 엿들 사. 고무신짝 운둥화짝 지까다비 떨어러러진 것, 내오간에 쌈허다가 요강단지 찌그르르러진 것, 고부간에 쌈허다가 머리끄뎅이 뜯으드드낀 것, 동서찌리 쌈허다가 인두자락 뿌르르르러진 것, 시아바지 방구질에 모시바지 삼베바지 빵꾸꾸꾸난 것……

자다 깬 조무래기들이 식전부터 봉자네 거처 앞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눈곱자기를 뜯으면서 그 희한한 수업광경을 감탄어린 눈초리로 구경했다. 창고 안 주민들 가운데서도 봉자 아버지는 가장 인기있는 축에 속했다. 우선 엿장수 타령 그 자체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팔고 남은 잔챙이엿들을 조무래기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 때문이었다. 엿의 분배기준은 전적으로 봉자와의 친분관계가 좌우했다. 그래서 창고 아이들은 낮곁이면 봉자를 그악스레 뒤쫓아다니며, 과자장시 똥구녁은 바삭바삭, 뚜부장시 똥구녁은 물컹물컹, 지름장시 똥구녁은 미끌미끌, 엿장시 똥구녁은 찐득찐득, 하고 입을 모아 놀려대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봉자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서로 앞다투어 알랑방귀를 뀌어대곤 했다.

하루치의 수업을 끝낸 신참 엿장수들을 이끌고 봉자 아버지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시내 엿도가로 향했다. 어중이떠중이 끌어들여 대장노릇에 고부라진 남편의 등덜미를 겨냥하고 봉자 어머니는 연방 주먹총질을 가했다.

“엿장시 맘대로 헌담시나 저러콤 잘난 화상이 뭣 땜시 즈그 집 한칸은 맘대로 못 장만허는고!”

조무래기들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와는 딴판으로 봉자 아버지는 정작 자기 마누라한테 전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를 빼고는 창고 안 사내들 대부분이 봉자 아버지와 엇비슷한 처지였다. 졸지에 집을 잃은 아낙네들이 남정네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처자식들이 두 다리 쭉 뻗고 안심하고 살아갈 집칸의 있고 없음이었다.

아침밥들을 짓느라 창고 안에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연기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부터 채운 다음 점점 밑으로 내려와 노인들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기침소리를 짜냈다. 풍로에 주로 코크스를 태워 밥을 짓는데, 불량 코크스에 섞인 조개탄이 항상 말썽이었다. 그리고 풍로를 창고 밖에 내다놓고 불을 피우기로 한 약속을 번번이 어기는 몇몇 얌체들 때문에 주민 전체가 날이날마다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오소리 잡듯 조석으로 사람을 잡는 조개탄 연기는 시커먼 그을음을 거느린 채 기분 잡치는 기름 타는 냄새를 펑펑 풍기며 창고 안을 떠돌다가 두어 시간템이나 지나서야 마지못해 겨우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아낙네들은 식전부터 아버지가 없는 길재네 거처에 모여 부지런히 푸념들을 주고받았다. 집을 철거당한 지 벌써 여러 달 지났는데도 아낙네들은 모였다 하면 만날 똑같은 타령이었다. 이런 설움 저런 설움 쌔고쌘 세상이지만, 뭐니뭐니해도 기중 큰 설움은 집 없는 설움이라는 것이었다. 두 눈 번히 뜨고 내 집이 무지막지하게 철거되는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 충격에서 모두들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길재 어머니의 태도가 가장 극성스러워서, 남편을 나라에 바친 불쌍한 여편네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거냐고 울부짖곤 했다. 뜨내기들끼리 오보록이 모여사는 창고 안에서 길재네는 전몰장병 유가족으로 통했지만, 길재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었다.

신경질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내 이름을 연거푸 불러댔다. 해찰 작작 하고 빨리 밥먹고 학교 갈 준비나 하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어머니의 그런 태도였다. 어머니 말마따나 집도 절도 다 없어진 판국에 대관절 학교 따위는 다녀서 뭣에 쓰겠다는 건가. 일요일 아침에도 학교에 가느냐고 나는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갑자기 머쓱해진 낯꽃으로 어머니는 어물어물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창고살이가 시작된 뒤부터 어머니는 혹시라도 자식들이 부모를 우습게 여길까봐 아버지를 두남두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한때 운수가 사나워서 직장 잃고 집까지 잃었을 뿐이지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양반이고 선비다. 창고 안 다른 남자들과는 감히 비교가 안되는 훌륭한 분이다. 그러니 뼈대 있는 집안 후손으로서 너희들도 근본이 의심쩍은 창고애들하고는 절대로 어울리지 마라. 어머니는 같은 내용을 자식들에게 수도 없이 신칙할뿐더러 우선 어머니 자신부터 창고 아낙네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것으로 모범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대있는 내가 노상 좋아라 어울리는 친구들은 근본이 의심쩍은 바로 그 창고아이들이었다.

전쟁 직후 도시의 빈터마다 비집고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무허가 판잣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청에서 갑자기 강제철거에 나섰다. 어느날 철거반이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건장한 사내들이 미처 가재도구를 끄집어낼 겨를도 안 주고 판잣집을 허물기 시작했다. 쇠갈고리로 루핑이 덮인 허술한 지붕을 마구 찍어내리고 쇠망치로 흙벽을 마구 쳐 구멍을 뚫었다. 기둥이 자빠지고 집채가 폭삭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집채가 서 있던 자리에서 싯누런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가을 한낮의 일이었다.

시 당국은 철거민을 위한 거처로 전신전화국 자재창고 두 채 중 위채를 새로 제공했다. 아래채는 이미 피난민들에 의해 일찌감치 점거돼 있는 상태였다. 웬만한 운동장 푼수는 족히 되는, 대낮에도 유령이 등장함직한, 휑하니 크고 넓은 건물에서 수십가구의 철거민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북창동에 속해 있는 건물이지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명한 철인동 사창가가 자리잡고 있어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말끝마다 뼈대와 근본을 들먹이기 시작한 것도 그 험악하기 그지없는 주변환경 때문이었다. 철거민의 대다수는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었다. 우리는 피난민도 아니면서 피난민들 틈새에 끼여 예정에 없던 창고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겨우살이 준비가 당장 시급했다. 주로 가난뱅이들을 겨냥하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닥칠 혹독한 추위에 대비해서 창고 주민들은 커다란 집 내부에 또다른 작은 집들을 다닥다닥 이어짓는 작업부터 서둘렀다. 각 가구마다 자기네 구역을 정한 다음 널빤지가 깔린 마룻바닥 위에 볏짚을 두툼히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가마니장을 덮어 제법 푹신한 공간을 마련했다. 다다미 비슷한 바닥이 확보되자 두꺼운 회포대 종이를 여러 겹 발라 이웃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침으로써 벽 아닌 벽을 만들었다. 그마저도 형편이 여의치 못한 가구에서는 무너진 판잣집에서 챙겨 내온 갖가지 가재도구들을 경계선에 아무렇게나 쌓아올려 담 아닌 담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문에 창고 안에서는 모든 소리가 훤히 다 들리고 모든 움직임이 훤히 다 잡혔다. 뉘 집에 이 빠진 그릇이 몇개고 뉘 집에 달창난 숟가락이 몇개인지 뜨르르 다 꿸 지경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될 사사로운 비밀이란 게 애당초 존재할 여지조차 없었다.

수단껏 추위에 대비한 덕분에 그렇듯 허술하고 괴상야릇한 살림구조 속에서도 얼어죽은 목숨 하나 없이 그럭저럭 무사히 첫번째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고뿔이 들고 손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은 좀 했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으로 새봄을 맞이할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침밥을 먹기 무섭게 한바탕 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치고는 참 더럽고 냄새나는 전쟁이었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도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으레 걸쪄서 창고 앞 마당가에 세워진 세 칸짜리 변소는 식전부터 항상 만원이었다. 아침마다 변소 앞에는 기다란 줄이 세 가닥 늘어서곤 했다. 몸을 배배 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변솟간 안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마치 인민군 아니면 빨치산 대하듯 서로를 살벌하게 적대했다. 참을성이 바닥난 철부지들은 부끄러움이 뭔 줄도 모르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변소 근처 아무데서나 아랫도리를 까내린 다음 알궁둥이를 홀랑 드러내곤 했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난 역사가 찢어지게 하품하는 소리는 먼발치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역사네 늙은 어머니는 말끝마다 무녀독남 귀한 아들을 가리켜 꼬박꼬박, 우리 정섭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듣는 자리에서는 역사 아자씨, 눈앞에 없는 경우엔 그냥 역사라고 함부로 불러 버릇했다. 역사가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나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병직이네 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도망치다시피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병직이네는 이북 피난민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고, 아버지는 헌 풍금을 수선하는 일류 기술자였다. 말하자면 우리 어머니가 드물게 인정하는 그 뼈대있는 집안에 속하는 셈이었다.

“역사 아자씨!”

기다린 보람이 있어 때마침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치마분(齒磨紛)을 듬뿍 묻힌 칫솔을 입에 물고 창고를 나서는 역사를 마당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공일날은 쓰리허러 안 가요?”

나는 깜짝 반가운 김에 겁도 없이 역사의 직업부터 대뜸 건드렸다.

“예끼놈! 또 그런 소리 허면은 때깨칼로 붕알 발러먹는다?”

역사는 대까칼 대신 칫솔을 나한테 겨누어 위협하는 시늉을 했다. 비록 남의 호주머니를 터는 쓰리꾼으로 소문은 나 있을망정 어린애들 불알이나 발라먹을 위인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를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파자마 바람으로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위창고와 아래창고 새중간에 있는 공동우물로 향했다. 우리 창고를 통틀어 최신 유행의 파자마를 걸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어느 겨를에 때꼽재기 동네 조무래기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우물가에 다다른 그가 줄무늬 파자마의 윗도리를 벗어젖히자 러닝셔츠 밖으로 탄탄한 근육에 싸인 늘씬한 몸매가 드러났다.

“아저씨, 입속에 감추고 있는 면도칼 좀 보여줘요!”

“만년필 따내는 말총도 보여줘요!”

무리한 요구를 하며 조무래기들이 성화를 부리는데도 역사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부걱부걱 입에 물고 있던 치마분 거품을 우물 둘레 회삼물 바닥에다 카악 내뱉었다.

“아나, 봐라. 요게 바로 면도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는 면도칼이나 말총 따위 연장을 끝내 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무래기들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솜씨 좋은 쓰리꾼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조무래기들을 사로잡는 그의 명성에는 눈곱만치도 흠집이 가지 않았다. 그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우물터 귀퉁이 돌확에 붓고는 푸우푸우 소리도 요란하게 세수를 했다. 나는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그 흔해빠진 세수장면을 마치 무슨 기발한 요술이라도 되는 양 일삼아 지켜서서 구경했다.

세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역사를 창고 안에서 그의 약장수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매품 회충약 ‘산토캬라멜’을 파는 청년이었다. 여느 산토닌과는 달리 전혀 쓴맛이 나지 않고 과자처럼 달았다. 또한 여느 산토닌처럼 굶을 필요 없이 식사 후에 먹어도 효과는 놀라워서 회충, 요충, 촌충, 십이지장충 가릴 것 없이 좌우지간 뱃속에 든 기생충이란 기생충은 한목에 보따리째로 확 두려빠진다고 했다. 구진한 입담으로 구경꾼들을 잔뜩 불러모아 약 선전을 기막히게 잘하는 그 산토캬라멜 장수와 함께 역사는 노상 단짝으로 어울려 다녔다. 그래서 역사네 늙은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친구와 동업해서 약품판매업을 하는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동업은 동업이되 약장사 동업은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역전광장에서 약장수 친구가 타고난 입담으로 사람들 혼을 빼놓는 틈을 이용해 역사가 어떤 신사의 지갑을 슬쩍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래창고에서 실제로 나타날 정도였다.

“진지 잡수셨어라우, 선상님?”

낮에도 어둑어둑한 창고 안에서 우리 아버지인 줄 단번에 알아보고 역사가 허리를 경위지게 꺾어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말 대신 어험어험 헛기침 두어 방으로 위엄을 보이며 역사 앞을 그냥 지나쳤다.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또 친구들을 만나러 시내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철거 직후 월동대책을 호소하는 장문의 탄원서를 작성해서 철거민 전체 이름으로 시 당국에 올린 뒤부터 아버지는 창고 주민들에게 깍듯이 선생님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결국 탄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쪽이 되고 말았지만, 그때 아버지가 변명삼아 맥없이 던진,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이 한동안 주민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역사가 한껏 때를 빼고 광을 낸 모습으로 약장수 친구와 함께 외출길에 올랐다. 파자마 차림도 물론 돋보였지만 나들잇벌을 걸친 역사는 곱절쯤 더 돋보였다. 왁스를 듬뿍 발라 구둣솔로 정성스레 손질한 검정 가죽잠바는 언제 봐도 삐까번쩍 요란했다. 끝자락을 두 번 접어 걷어올린 미제 청바지는 바가지 한쌍을 엎어놓은 양 툭툭 불거져나온 엉덩판을 팽팽히 감싸고 있었다. 머리엔 파리란 놈이 멋모르고 앉았다가 낙상하리만큼 지꾸로 떡칠을 해서 공들여 빗어넘긴데다가 몸에선 향수냄새가 진동했다. 구두코는 거울 대신 얼굴을 비춰보며 여드름을 짜도 되리만큼 번쩍번쩍 광이 났다.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멋을 안 부린 데가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입속엔 틀림없이 예리한 면도칼이 숨겨져 있을 것이고 허리띠 어디쯤엔 틀림없이 실낱 같은 말총이 매여 있을 것이었다.

위아래를 멋쟁이로 쪽 빼입은 역사와 검정물을 들인 군복 차림을 한 약장수가 창고 앞마당을 지나갔다. 역사는 가뜬한 빈손인 반면 약장수는 산토캬라멜이 잔뜩 든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회충, 요충, 촌충, 십이지장충! 좌우지간 뱃속에 든 기생충이란 기생충은 요것 한갑만 먹으면은 한꺼번에 보따리째로 화악 둘러빠집니다요!”

“때끼놈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과 약장수 사이에 서로 친근감을 나타내는 인사가 한바탕 떠들썩하게 나누어졌다. 여태껏 으레 그랬던 것처럼 역사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 책을 꿰찬 채 춤추듯 날렵한 동작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꽉 끼이는 청바지 안에서 팽팽한 엉덩판이 움직일 적마다 뒷주머니의 책도 함께 춤을 추었다. 역사의 뒷모습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이었다. 어찌나 오랫동안 꽂고 다녔던지 귀퉁이가 나우 닳아 나슬나슬하게 보풀이 일 지경이었다. 어떤 내용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점잖은 책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주머니 밖으로 삐죽이 비어져나온 책의 윗부분에는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제목이 야살스럽게 찍혀 있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위창고와 아래창고로 편을 갈라 동네아이들과 마당에서 자치기를 하고 있었다. 한창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가 언뜻 생각이 나서 뒤를 홱 돌아다보니, 아니나다를까, 성주가 창고 벽면을 따라 다람쥐처럼 잽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세살짜리 말라깽이 주제치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걸음이 빨랐다. 나는 자치기 놀이에서 빠져나와 성주 뒤를 밟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건물 끝부분에 다다른 성주가 흙벽에 막 손을 댄다 싶은 순간, 나는 고함을 꽥 내질렀다.

“홍성주!”

성주는 자지러질 듯 놀라면서 제 손으로 얼른 제 눈을 가렸다. 아마도 제 눈에 안 보이면 상대방도 저를 못 보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너 또 흙 먹었지?”

입을 암팡지게 다문 채 성주는 세차게 도리머리를 했다. 하지만 성주의 입술엔 이미 몽근 흙가루가 노랗게 묻어 있었다. 그리고 간장종지 크기로 동그랗게 확이 팬 흙벽엔 방금 묻힌 침 자국도 선명했다. 무슨 까닭인지 성주는 만날 같은 자리를 정해놓고 꼭 그 자리의 흙만 파먹었다.

“뱉어! 얼른 뱉으라니깨!”

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성주는 계속 도리질만 했다. 강제로 입을 벌려 흙을 뱉어내게 하려 했지만 조가비처럼 단단히 맞물린 작은 입술은 끝내 내 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앗김에 나는 머리통을 한방 되알지게 쥐어박았다. 성주는 울지도 않았다. 파리한 낯꽃에 겁에 질린 눈초리로 말없이 나를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는 시간에 내가 어머니로부터 지시받은 주요임무 중 하나는 막내누이 성주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원래 약골로 타고나 잔병치레가 잦은 성주는 아무리 종주먹을 들이대고 혼꾸멍을 내봐도 벽에서 흙가루를 파먹는 그 괴상한 버릇을 여간해서 고치지 못했다. 뱃속에 거시(회충)가 들끓는 탓이라 해서 역사한테 부탁해 산토캬라멜을 공짜로 얻어 먹였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나 내가 잠깐 한눈을 팔았다 하면 어느 틈에 발탄강아지가 되어 제 단골자리가 있는 벽 쪽을 향해 뽀르르 달려가곤 했다. 성주는 나한테 이만저만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먹어선 안될 것을 먹어서 생길 성주의 건강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놀이하랴 다른 한편으로 동생 감시하랴, 이래저래 바삐 나부대지 않으면 안되는 내 곤혹스런 처지 때문에 늘 걱정이 태산이었다.

“엄니한티 안 찔러바칠 테니깨 다시는 흙 먹지 말어. 알었지?”

문득 병약한 성주가 안쓰럽게 느껴져 나는 우격다짐 대신 좋은 말로 타일렀다. 성주는 여전히 입을 조가비처럼 다문 채 연방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써 열 번도 넘게 끄덕거린 고갯짓이었다.

순임이 아버지가 밤새 또 쥐를 두 마리나 잡았다. 순임이 아버지가 쥐를 다루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식전부터 창고아이들이 순임이네 거처 앞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주머니칼을 숫돌에다 슥슥 갈아대는 순임이 아버지의 손놀림을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밤은 물론이고 대낮에도 창고 안에는 항상 쥐들이 들끓었다. 부잣집, 부잣동네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 사람 먹을 거리도 턱없이 부족한 창고를 거처로 택했는지 쥐들의 속셈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고 쥐들은 다들 하나같이 배짱이 두둑했다. 사람을 보면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하던 짓을 잠시 멈추고 어둠침침한 구석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것이 어쩌나 보자, 하고 사람을 말끄러미 관찰하기가 일쑤였다. 쥐들이 밤낮을 안 가리고 떼거리를 지어 널따란 창고도 비좁다고 종횡무진 쏘다니며 찍찍거리고 키득거리는 수작으로 저희들끼리 창고 주민들의 가난한 살림을 마냥 흉보고 비웃는 것이었다. 그 못돼먹은 쥐들을 잡는 일은 순임이 아버지 몫이었다. 두 다리를 못 쓰는 그는 마누라가 식모살이 나가 있는 동안 하고많은 날들을 거처 안에 틀어박혀 집안일을 돌보며 쥐잡기에 매달려 보냈다. 거의 기다시피 문J문J 앉은걸음으로 돌아다니며 거처 주변에 쥐덫을 여러 개나 놓았다. 소증(素症)에 시달리는 순임이를 위해서였다. 원인 모를 열병을 앓고 난 뒤부터 순임이 얼굴은 누렇게 뜨고 짐짝같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팔다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배는 점점 장구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꼭 거미를 연상케 했다. 순임이 아버지가 창고 안에 지천으로 깔린 쥐들을 가축의 일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딸의 입에서 자주 헛소리가 나오고 때로는 게거품을 문 채 발랑 나자빠지기도 하던 무렵부터였다.

순임이 아버지는 손에 익은 칼질로 첫번째 쥐의 털가죽을 순식간에 벗겨낸 다음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냈다. 두번째 쥐도 금세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알몸을 벌겋게 드러낸 쥐들이 군용 반합에 담기는 순간 내 목구멍에서 꼴까닥 소리가 울렸다. 결코 먹음직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너무도 징그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는 새 삼킨 침이었다. 쥐를 많이 먹은 순임이 입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람의 말 대신 찍찍거리는 쥐소리가 튀어나오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몸서리를 쳤다.

“아자씨, 시방 뭣 허시는 거요?”

갑자기 등 뒤쪽 허공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늦잠 자는 버릇이 있는 역사가 그날따라 웬일로 일찍 일어났는지 아이들 뒷전에서 껑충한 키를 기웃이 숙인 채 뜨악한 낯꽃을 짓고 있었다.

“우리 순임이 멕일라고……”

별걸 다 묻는다는 투로 상대방을 쳐다도 안 보고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순임이 아버지는 반합에 물을 들이부었다. 바로 그때였다. 역사가 파자마 자락을 휘날리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했다. 그의 발길에 걷어챈 반합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홀랑 발가벗은 쥐들은 도중에 반합과 헤어져 따로따로 허공을 날다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인간이 으떻게 쥐를! 괭이새끼도 아니고 의붓자식도 아니고 자기 친딸인디, 인간이 으떻게 자기 딸내미한티 쥐새끼를!”

뜻밖의 행패 끝에 역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행여 그에 뒤질세라 순임이 아버지 또한 젖은 빨래처럼 목청을 발끈발끈 쥐어짜가며 온갖 욕지거리를 빨랫줄처럼 창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길디길게 내걸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소동에 놀란 주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뒤늦게 자기가 벌인 짓에 자기 스스로도 놀랐는지 역사는 갑자기 뒤도 안 돌아다보고 핑 하니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욕을 먹어줄 상대가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순임이 아버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계속 포달을 부렸다. 끊임없이 개와 도야지 등 온갖 짐승들 이름을 들먹이며 삼족에 걸친 역사네 조상들을 닥치는 대로 싸잡아 욕하고 저주했다. 어둠속에 웅크려 앉아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아무나 함부로 노려보는 순임이 아버지 모습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영락없는 쥐, 궁지에 몰려 악착을 떠는 커다란 시궁쥐 같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순임이네 거처에서는 웬일로 지지고 볶는 고기냄새가 동천했다. 간밤에 역사가 순 살코기로만 돼지고기를 두 근이나 갖다주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순임이한테 쥐를 잡아 먹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앞으로도 계속 고기를 대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순임이 입에서 나오는 쥐소리를 듣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쓸 줄 안다고 역사를 칭찬하면서도 창고 사람들은 순임이네가 벼락 맞듯 엉겁결에 붙잡은 그 행운에 은근히 배 아파했다. 우리도 진작에 쥐를 잡아 새끼들한테 먹일걸, 하고 후회하는 눈치들이었다.

역사는 그후 약속을 충실히 지켜 네댓새마다 한번꼴로 순임이네한테 돼지고기나 닭고기, 때로는 쇠고기를 선물했다. 그 고기를 장복하면서 순임이는 몰라보게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장구통배는 점점 들어가고 실낱 같던 팔다리엔 점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완연한 거미 형상이던 순임이는 하루가 다르게 사람꼴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벌이를 나간 역사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간밤에 역사가 바깥잠을 잔 사실을 창고 주민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알아차렸다. 역사가 노모 혼자 거처에 남겨두고 외박하는 일은 무척 드문 경우였다. 점심참이 되자 약장수 친구가 헐레벌떡 나타나 노모를 모시고 어디론지 황급히 떠났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주민들은 끌끌 혀를 찼다.

역사네 노모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창고로 돌아왔다. 할망구처럼 폭삭 늙어 뵈는 역사네 어머니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는 아들 소식을 전하느라 한참 바삐 나부댔다. ‘우리 정섭이’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분질러져 전주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멀쩡한 청년이 달리는 열차에서 무단히 왜 뛰어내린단 말인가. 아들과 관련해서 노친네가 하는 말은 노상 홍시 먹다 이빨 부러뜨릴 맹랑한 소리뿐이었다. 역사가 만원 기찻간에서 쓰리를 하다 들켜 경찰서에 때갔다는 소문이 오래지 않아 창고 안을 누비고 다녔다.

역사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나날들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역사가 부재중인 창고건물이 갑자기 갑절 이상 커져버린 듯 휑한 느낌 속에서 나는 그동안 역사란 인물이 내 마음속에서 차지했던 몫이 얼마나 큰가를 알딸딸하게 깨달았다. 한껏 멋을 부린 역사의 모습이 눈에 삼삼했다. 그리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늘 꿰차고 다니던 그 손바닥만한 책의 붉은 제목이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에 밟혔다.

늦봄에 전주경찰서에 때갔던 역사는 초가을에 접어들어서야 풀려났다. 역사가 실로 오랜만에 자기 집구석을 찾아 돌아오던 날, 늙은 어머니는 창고 입구로 들어서는 ‘우리 정섭이’ 머리 위로 한 됫박은 족히 되는 왕소금을 하염없이 뿌려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날두부 두 모를 한꺼번에 먹였다. 한동안 송장처럼 꼼지락도 않고 거처 안에서 푹 쉬는 듯싶던 역사는 언제 몸져누워 지냈더냐는 듯 며칠 후에 훌훌 털고 일어나 약장수 친구와 함께 또다시 바깥나들이를 개시했다.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입속 어디엔가 양복 안창을 따거나 손가방을 찢는 데 쓰는 새끼손톱만한 면도칼을 숨겼을 것이고 허리띠 어디엔가 양복 윗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을 후리는 데 쓰는 말총을 숨겼을 것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니깨!”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채 팽팽한 엉덩판의 율동과 함께 꺼떡꺼떡 놀아나는 작은 책을 바라보면서 나는 깜짝 반가운 김에 빼액 고함을 질렀다. 역사는 나를 돌아다보며 한차례 씨익 웃어 보이더니만 춤추듯 경쾌한 걸음걸이로 잠깐 사이에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병직이네가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하기 전전날 밤에 창고 앞마당 건너편 병직이네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창고 주민들 가운데서도 우리집을 비롯한 몇몇 집이 초대를 받았다. 초대받지 못한 창고 주민 대다수가 병직이네 집 울타리 밖에 진을 쳤다. 맘씨 곱기로 소문난 병직이 어머니는 울 밖 구경꾼들에게도 부침개 따위 음식을 고루 나눠주었다.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자 병직이 아버지가 이리땅에 발을 붙이게 된 과정을 감개에 젖어 설명했다.

피난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찬송가 소리가 입에서 줄곧 떠나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전쟁판에서 상한 몸 하나 없이 온 가족이 무사히 피난을 오게 된 것만도 너무나 감사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의 후렴을 흥얼거리는 참인데 열차가 멈추었다.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리고 나서 옆사람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이리라고, 방금 이리역에 도착했다고 옆사람이 일러주었다.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바로 그 순간 주님 음성을 들은 듯싶었다. 따져보니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잠에 곯아떨어진 식솔들을 흔들어깨워 곧바로 피난열차에서 내렸다.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신 이리땅이었다.

주님 도우심으로 이리에서 웬만큼 힘을 잡긴 했지만 워낙 바닥이 좁아 수선할 오르간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근거를 아예 서울로 옮길 결심을 하게 됐노라고 병직이 아버지는 덧붙여 말했다. 병직이네 근처에서 흑설탕을 주원료로 하여 진짜하고 거의 구분이 안되는 가짜 꿀을 만들어 파는 강씨 아저씨가 자기네도 곧 서울로 이사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오르간 수선업과 마찬가지로 가짜 꿀 장사도 서울 같은 대처에서 해야 수지가 맞는 모양이었다. 깎아놓은 밤톨처럼 잘생긴데다가 착하고 영리한 모범생들인 병직이 형제하고 헤어지는 걸 나보다 어머니가 더 섭섭히 여겼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어머니 말마따나 나하고 어울릴 자격이 있는 그 뼈대있는 집안 아이란 창고 동네에 하나도 안 남게 되는 셈이었다. 훗날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나는 병직이 형제와 작별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서울로 떠난 병직이네를 만판 부러워하던 철거민들 중에서도 시내에 방을 얻어 창고를 빠져나가는 가구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개가 억척스럽기로 유명한 이북 피난민 출신들이었다. 떠나는 가구가 차츰 늘어나면서 창고 안은 갑자기 텅텅 비어버린 듯 더욱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변해갔다. 아낙네들이 길재네 거처에 뻔질나게 모여 의지가지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한동안 잊고 있던 푸념들을 또다시 되뇌기 시작했다. 이런 설움 저런 설움 쌔고쌘 세상이지만, 뭐니뭐니해도 기중 큰 설움은 집 없는 설움이라고 떠들어대곤 했다. 가장을 나라에 바친 여편네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거냐며 길재 어머니는 가장 두드러지는 목청으로 대통령부터 시장까지 내리 싸잡아 욕하고 원망하기를 잊지 않았다.

어느날 한밤중에 철인동 사창가에서 일제 단속이 벌어졌다. 단속반에 쫓기던 창녀 하나가 도로를 건너 도망쳐서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쌀쌀한 밤공기 속에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망측한 속옷차림이었다. 창녀는 하필 역사네 거처 안으로 숨어들었다. 뒤미처 들이닥친 단속반원이 구둣발 소리도 요란하게 아무데나 함부로 뒤지고 다니는 바람에 주민들 모두가 잠을 망치고 말았다. 역사네 차례가 되었다. 단속반원의 구둣발이 자기네 거처로 다가들려 하자 역사가 갑자기 이불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당신 시방 무신 짓을 허는 거여?”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분명히 봤다느니,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한 적 없다느니, 하며 역사와 단속반원 사이에 옥신각신 실랑이질이 벌어졌다. 단속반원이 막무가내로 거처를 뒤지려 하자 역사가 파자마 앞자락을 부욱 잡아뜯어 단추들을 우두둑 훑으면서 위통을 활딱 벗어부쳤다.

“저 속에 자빠져 있는 건 내 마느래여! 아아니, 당신 말은 그러니깨 내 마느래가 갈보란 말여, 시방? 넘에 멀쩡헌 마느래 갈보 취직시켜놓고 당신 그 문제 책음질 텨? 책음질 거냔 말여!”

그것으로 시비는 일단락되었다. 단속반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잠시 무르춤해 있다가 그냥 곱게 물러갔다. 별것도 아닌 것이 따따부따한다고 중얼거리며 역사는 창녀가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천연덕스레 기어들었다. 진짜 부부처럼 임의로운 사이로 비쳤다. 가을밤 하나가 그럭저럭 또 무사히 넘어가고 있었다.

윤자란 이름의 그 창녀는 날이 밝은 후에도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고 내처 역사네 거처에 머물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역사와 윤자 두 사람은 부부로 변해 있었다. 그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커나가는 자식들 보기도 민망하고 남세스러워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아무 눈치코치 모르는 역사네 노모만이 이 가구 저 가구 기웃거리고 다니며 새로 맞은 며느리 칭찬하느라 입에 침이 말랐다. 착하고 정이 많은 여자라 했다. 학교도 여중까지 마쳤다고 했다. 알고 보니 고향동네에서는 제법 방귀깨나 뀌고 사는 벌쭉한 집안 태생이더라는, 역시 날두부에 쇠젓가락도 안 꽂힐 소리만 골라서 늘어놓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착하고 정이 많은 여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붙임성이 좋고 걸핏하면 잘 웃는 바람에 약간 모자라거나 헤픈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숙성해 보이는, 몸맨드리가 고운 여자였다. 역사가 벌이하러 나가지 않는 날이 가끔 생겼다. 벌이하러 나갔다가도 일찌감치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집구석에 들어서기 무섭게 윤자하고 바짝 붙어앉아 끊임없이 시시덕거리며 걸핏하면 웃기를 일삼는 역사를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미장이로 공사판을 떠돌던 희수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구석을 찾아 돌아왔다. 창고 입구에서 희수 아버지하고 덜컥 마주친 윤자가 깜짝 반색을 하면서 결코 해서는 안될 소리를 불쑥 해버렸다.

“옴마! 김씨 아저씨도 여기 창고 살어요?”

금세 난리가 나버렸다. 창고 안이 벌컥 뒤집혔다. 희수네 거처에서는 대판거리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죽네 사네, 갈라서네 어쩌네, 하고 다투는 소리와 우레 같은 호통과 째지는 비명이 한나절이나 계속되었다. 아낙네들은 끼리끼리 모여 쑤군덕거렸다. 쓰리꾼에 똥갈보라, 과연 천생연분에 보리개떡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코뚜레를 해서 조리를 돌려 내쫓든지 해야지 이대로 더는 못 참겠다는 과격한 목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대세를 잡아나갔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때마침 벌이를 안 나가고 거처에 머물러 있던 역사가 분연히 떨치고 나섰다.

“창고 사람 모다들 내 말 잘 듣드라고!”

역사는 군용단검을 꼬나쥔 채 통로 한복판에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공자님도 부처님도 과거는 묻들 않는 벱이라고 말씸허셨어! 우리 윤자는 인제 똥갈보가 아녀! 하나뿐인 내 마느래란 말여!”

창고건물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기가 딱 질려 주민들은 삼베바지에 방귀 새듯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처럼 불같이 화를 내고 불량을 떨어대는 역사를 보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앞으로 으떤 연놈이든지 우리 윤자보고 똥갈보 소리 한번만 혀봐! 아이꾸찌로 배때기를 콱콱 쑤셔박어서 벌집맨치로 바람구녁을 숭숭 뚫어삐릴 모냥이니깨!”

그 누구도 흰자위 승한 두 눈을 희번덕이며 미쳐 날뛰는 역사를 말릴 엄두를 못 냈다. 마침내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아, 연만허신 어르신네들도 기시고 커나가는 에린것들도 많은디, 지각있는 자네가 이게 무신 망발인가!”

“수틀리는 날이면은 선상님도 예외가 아녀라우!”

“예끼 사람! 어서 그놈에 숭칙시런 연장 저만치 치워놓고 우리 좋은 말로 해결허세.”

아버지는 서슬이 시퍼런 군용단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역사한테 다가가서 몬존하게 타일렀다. 역사에게 존경의 대상인 선생님 덕분에 끔찍스런 칼부림 소동은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그날 밤 창고 사람들 모두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희수네 온 가족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날마다 깨가 말가웃씩 쏟아지는 신혼살림 재미에 흠뻑 빠져 역사와 윤자는 한동안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비록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어쩌다가 엉겁결에 후딱 맺어지긴 했을망정 그들은 누가 뭐래도 이미 부부 사이였다. 자기 배에 벌집처럼 바람구멍이 뚫리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갈보 소리를 두 번 다시 입길에 올리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그들의 단꿈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해질녘에 중년의 여자 포주가 건장한 청년 둘을 데리고 갑자기 창고에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역사가 아직 귀가하기 전이었다. 포주를 보자 윤자는 사색이 되어 울며불며 매달려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사내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포주는 윤자의 머리채를 덥석 휘어잡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윤자 입에서 비명이 쏟아지고 역사의 노모는 사람 살리라며 마구 울부짖었다.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없이 구경꾼들만 우글대는 가운데 역사의 노모는 며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 손 싸게 못 놓겄냐!”

그때 우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분노에 떠는 역사의 목소리를. 그리고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듯 결기에 차 있는 역사의 얼굴을.

“요래봬도 나 오정섭이, 구시장파 쌍칼이라고 허면 시내가 다 알어주는 사람이다!”

어찌 알고 그리 때맞춰 나타났는지 역사가 겹겹이 에워싼 구경꾼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맹수처럼 포효했다.

“구시장파 쌍칼도 몰라보고 잠자는 사자 코털을 잘못 근디린 모냥인디, 느그덜 오늘 참말로 임자 만났다! 이 대 일? 좋아! 삼 대 일? 다 좋다! 우리 한번 근사허니 맞장을 떠서 쌈빡허니 결판을 내보자!”

역사가 포주측 청년들과 당장 실력을 겨룰 자세를 취했다. 가소로워 죽겠다는 듯 청년들은 서로 마주보며 히물히물 웃었다. 역사의 호언장담이 터무니없는 허풍이요 씨알도 안 먹힐 공갈이란 사실이 금세 드러났다. 구시장파 쌍칼은 변변히 기운 한번 못 써보고 청년 하나가 휘두르는 절굿공이 같은 주먹 한방에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이년을 계속 델꼬 살 작정이면은 몸값을 갖고 와, 임마!”

포주 일행이 윤자를 잡아끌고 창고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역사는 쓰러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한마리 벌레처럼 사지를 바르작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역사는 한동안 창고 안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역사도 없고 윤자도 없는 을씨년스런 거처를 노모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며칠 후에 역사가 윤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새 두 사람 모두 몰골이 많이 상한데다가 풀까지 잔뜩 죽어 있었다. 그토록 헤프게 쏟아내던 웃음은 가뭇없이 사라진 대신 근심 걱정이 기미처럼 검버섯처럼 두 얼굴을 온통 두껍게 뒤덮고 있었다. 윤자가 포주한테 진 빚을 역사가 일부 갚았다는 소문이었다. 빠른 시일 안에 남은 빚을 마저 다 갚기로 무슨 증서인가를 쓰고 윤자를 간신히 빼내왔다고 했다. 빚이 곱사 짐으로 하나 가득이라서 갚아도 갚아도 아마 다는 못 갚을 거라는 아낙네들의 쑤군거림이 뒤따랐다.

윤자를 되찾아 데려온 후 역사는 전보다 더욱 열심히 벌이에 나섰다. 윤자의 몸값을 갚기 위해 아무 호주머니나 닥치는 대로 털고 다니는 눈치였다. 역사를 한주먹에 때려눕힌 깡패, 윤자가 삼촌이라 부르는 그 건장한 청년이 이따금씩 한밤중에 창고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역사와 윤자는 사색이 다 되어 청년을 붙들고 애걸복걸하곤 했다. 뼈도 못 추릴 줄 알라는 둥 윤자를 다른 데로 팔아넘기겠다는 둥 한바탕 협박을 늘어놓은 다음 청년이 돌아가고 나면 역사는 자벌레처럼 움츠러들어 차마 못 봐줄 지경으로 왜소하고 초라한 몰골이 되곤 했다.

어느날 꼭두새벽이었다. 식전부터 한바탕 또 난리가 벌어졌다. 포주와 함께 창고에 들이닥친 건장한 청년들이 역사네 알량한 세간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역사네 거처는 이미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주민들은 밤새 역사네 식구들이 살림살이는 그대로 둔 채 몸뚱이만 살짝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빚을 갚기로 약속한 마지막 날짜를 하루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역사는 사라졌다. 역사와 함께 역사의 청바지 뒷주머니에 신분증처럼 또는 명함처럼 노상 꽂혀 있던 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도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역사가 빠져버린 창고생활은 마치 새 고무신을 신고 등교한 첫날 미처 사랑땜도 못 마친 그 아까운 고무신을 도둑맞았을 때만큼이나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니, 허전하다 못해 절통한 기분마저 들었다.

“엿들 사. 개똥이도 쇠똥이도 얼른 와서 엿들 사. 뭣이든지 다 갖고 와 엿들 사.”

역사말고도 창고 안에 괄목상대할 인물이 또 있다고 주장하듯이 봉자 아버지가 갑자기 구성진 목청을 뽑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엿장수 타령이었다. 아마도 신참 엿장수 패거리를 다시 그러모은 모양이었다.

“고무신짝 운둥화짝 지까다비 떨어러러진 것, 내오간에 쌈허다가 요강단지 찌그르르러진 것, 고부간에 쌈허다가 머리끄뎅이 뜯으드드낀 것, 동서찌리 쌈허다가 인두자락 뿌르르르러진 것……”

나는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서둘러 봉자를 찾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만만하기만 한 봉자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시간에 창고에 없다면 그 계집애가 갈 만한 데는 뻔했다. 변솟간 앞에 길게 늘어선 줄 가운데 끼여 있을 것이었다. 나는 창고를 벗어나기 무섭게 변솟간 쪽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과자장시 똥구녁은 바삭바삭! 뚜부장시 똥구녁은 물컹물컹! 지름장시 똥구녁은 미끌미끌! 엿장시 똥구녁은 찐득찐득!”

 

 

3

 

잠을 밑져가며 여태껏 여러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홍성만의 이야기가 기중 덜 비극적이고 조금 더 인간적이며 낭만적이라는 품평들이 낭자하게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 셈이라며, 마치 진흙 속에 핀 연꽃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며 소매치기 역사와 창녀 윤자의 사랑을 무턱대고 아름답게 보려는 감상파도 있었다. 역사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취한 나머지 그의 후일담을 무척 궁금히 여기며 그가 끝끝내 우리나라 소매치기 분야에서 제일인자로 대성했기를 바라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인철이네 집은 폭발사고 때 쑥대밭이 되고 말었다지?”

이미 초저녁에 한번 화제에 오른 적이 있는, 지난 77년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를 새삼스레 다시 끄집어내는 자가 있었다. ‘인철이네 집’이란 곧이곧대로 철인동 사창가를 입길에 올리기가 차마 거식할 경우에 사용하던 은어였다.

“쑥대밭인지 갈대밭인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얼추 원자폭탄 맞은 폭은 되지. 사고 당시 우리집은 현장에서 이 킬로 정도나 떨어져 있었는디도 열차 제동장치 부속으로 뵈는, 수박만헌 쇳뎅이가 널어와서 지붕을 뻥 뚫을 지경이었으니깨 역에서 엎어지면 코방아찧을 인철이네는 으쨌겄는가. 완전히 쏘가 되고 말었다네.”

교장선생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연방 치를 떨었다. 6·25 같은 전쟁과 관동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한꺼번에 짬뽕으로 일어난 것 같았다고 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에 혼비백산한 시민들이 모두 길거리로 뛰쳐나와 일제 정전이 되어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속을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우왕좌왕 헤매고 다니며 피난 아닌 피난을 도모하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아아니, 그렇다 허이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우리 인철이네 집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져뿌렀단 말인가?”

“인철이네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니깨 일단은 사라졌다고 봐야지.”

“오호 통재라! 청춘시절 우리네 동정의 고향이고 무덤이던 그 인철이네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솔직허니 얘기허자면, 내가 총각딱지를 띤 게 바로 그 집이여. 나맨치로 그런 놈들이 요 중에도 아매 여러 뭇놈 있을 거여. 우리 세대는 다행히도 그렇게 넘어갔는디, 인철이네도 없는 판국에 우리 후손들은 장차 뉘 집에 가서 한 많은 그 총각딱지를 띤단 말인가!”

송인모가 비통한 어조로 장탄식을 늘어놓는 바람에 웃음가마리가 되었다.

“참말로 걱정도 팔잣속이구만. 원래 사창가 역사는 인류 역사랑 어깨를 짱짜란히 맞대고 발전헌 거여. 그러니깨 우리 후손들 문제는 우리가 염려헐 필요 없단 말여.”

송인모를 위로하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잇달았다.

“그것은 그것이고, 폭발사고가 박통 음모라는 설이 일본 매스콤에 보도된 적이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음주 운전자처럼 송인모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의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그때 당시 유비통신을 통해 그 비슷한 소문을 접한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시의 치부인 역전 주변 사창가를 정화하고 재개발할 목적으로 박대통령이 은밀히 지시해서 화약열차를 폭발시켰다는 설이었다.

“시방 사실 여부를 묻는 게 박통 음모설이여, 일본언론 보도설이여?”

“물론 박통 음모설이지.”

“우리네 같은 힘없는 백성들이 그 땅두께맨치로 짚고 짚은 정치 속내를 어찌 다 알 것인가. 하도 기가 맥히고 분통 터지니깨 무신 소문이 들리면, 참말로 그런갑다, 허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지.”

오랜 세월에 걸쳐 시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암적 존재로 수많은 시민들이 철인동 사창가를 꼽고 있었다. 때마침 박통이 순시차 시를 방문했다. 시민 대표들이 시의 숙원사업인 사창가 근절을 박통에게 건의했다. 박통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쯤 시일이 지났다. 각종 화약과 폭약 30.3톤을 그득 쟁여 싣고 인천을 출발한 열차가 광주로 향하는 길에 이리역 구내에 정거했다. 화약류는 도착역까지 직통 열차를 이용, 운송한다는 철도운송규정도 외면한 채 화약열차는 무슨 까닭인지 이리역 입환선에서 무려 22시간여나 대기했다. 밤이 되자 화약호송 책임자인 신무일이란 작자가 역 앞 식당에서 술을 마신 후 열차로 돌아와 화약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은 채 졸기 시작했다. 폭발물 취급 자격증도 없는 호송자 신무일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양초가 쓰러지면서 화약상자에 불이 옮겨붙었다. 잠결에 뭔가 타는 냄새에 놀라 일어난 신무일은 겁에 질려 불을 끄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결국 30톤이 넘는 엄청난 양의 화약이 콰르릉 폭발하고 말았다. 사망 59명, 중경상 1300여명의 인명피해와 가옥파손 7800여채에 달하는 미증유의 대재난이었다.

“좌우지간 그 사고를 계기로 시는 숙원사업을 해결혔지. 있던 사창가는 없어지고 없던 공업단지는 생겨나고 인구가 사정없이 팽창험시나 시가 발전헌 것만은 영축없는 사실이여. 발전을 최소한 삼십년은 앞당겼단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니깨 만약에 음모설이 사실이라면 그 음모는 아주 본때있이 성공을 거둔 심이지.”

놀랍게도 교장선생은 폭발사고와 관련해서 범인 이름은 물론 각종 수치들까지 그때껏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끔찍한 사고를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과 그냥 풍문으로 듣기만 한 사람의 차이점인 듯했다. 하지만 음모설 쪽에 대체적으로 공감을 표시한다는 점에서는 교장선생과 거개의 재경 동창생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그 어처구니없는 대재난을 해석할 방법이 음모설말고 다른 무엇이 또 있겠는가. 박통 음모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과 불신과 원망과 분노는 개발독재 시대가 낳은 비극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는 김교수의 결론에 섣불리 토를 달고 나서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이런저런 처참시런 야그들을 하도 많이 들어놔서 암만혀도 꿈자리가 뒤숭숭헐 것만 같단 말여.”

이젠 정말 시간이 없으니까 어둡고 슬프고 아픈 비극은 이쯤에서 그만 막을 내리자는 소리가 나왔다. 좌중은 가슴 훈훈해지는 인정가화(人情佳話)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한사람 이야기만 더 들어보고 잠자리에 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니깨 싱싱헌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따우 디저트로 쌈빡허니 입가심허딧기 어느 독지가가 후딱 나서서 진짜 순애보 같은 야그로 대미를 멋지게 장식혀보란 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