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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영오 崔泳吾
1975년 충북 청원 출생. 협성대 문창과 4학년.
nailsi@hanmail.net
放生 외 2편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하고 묻는다.
고희(古稀)를 앞둔 어머니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다.
백수인 내가 MBC 「퀴즈가 좋다」에 빠져 세상의 지식과
내가 걷어들일 수 있는 돈을 셈하는 동안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와 어느 나라에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
어머니는 배운 아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어하셨다.
절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가 오늘
염불도 없는 목탁소리 빈 술청을 한동안 울리고 간 후부터
당신이 다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야 할 이유를 퀴즈문제처럼 또박또박
중얼거리셨다.
나는 몇번의 기회를 놓쳤고 「퀴즈가 좋다」가 끝나기 전에 상을 물렸다.
지붕을 가득 덮었던 상수리나무들, 잎 진 풀숲에서
푸드득 날아가는 멧새 바라보며
어머니 가슴에 갇힌 새 한마리 날려주리라 생각했다.
새알 같은 도토리 하나 뒤꼍의 가파른 벼랑을 타고 굴러왔다.
조급해진 나는, 도토리 옆구리에 담배를 비벼껐다.
할머니가 스님들을 따라다니며 곡식을 얻어와서,
그 다리품으로 손자들 죽지 않고 살았으니, 오는 스님들에게
한 됫박이라도 더 주려고 하는 거지. 다시 태어나기는 무슨.
썩어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신다.
당신이 난 아들들이 또 아들들을 낳으니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당신을 밟을 것이고
때로 먼 손자들 그리우면 그들의 신발에라도 묻어 다닐 거라 하신다.
나는 열심히 웅변하는 소년처럼
그래도 잘사는 미국에 태어나는 게 어떻겠냐고
아, 엄마는 영어를 모르니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아니, 내가 결혼을 하면 내 아들의 손녀로 태어나라고
흰소리를 한다.
밖은 이슬비가 내리고 푸드득 더 빠르게 찾아온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쪼그라든 어깨로 설거지를 하고 계신다.
어미새 날아간 풀숲에는 도토리만한 새알 하나
비에 젖고 있을 거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 가슴에서 막 부화했던 아기새
움츠린 새 한마리 꺼내
젖은 날개 닦아주고 싶어 어둔 하늘이라도 멀리
멀리 날려주고 싶어
알에서 막 깨어난 작은 새처럼 나는
끝없이 먹이를 달라 재재거렸다.
가을
한입 베어물었을 때
나는 바람과 만났다. 또
한입 베어물었을 때
나는 깊은 수심에만 산다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방생한 물고기들과 만났다.
나는 무엇이든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치원 버스가 떠나고 마을길로 들어서는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던지며 다시
받으러 뛰어가고 있었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려는 아이들의 작은 발에는 풀뿌리들이 보였다.
바람이 노란 모자를 더 멀리 날릴 때 아이들의 이마에는 한줌 햇빛이 머물렀다.
멀리 선착순 분양의 애드벌룬 낮은 구릉에 걸려 있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듯 천공기가 땅을 때리는 소리 가득했지만
입안 가득 씹히고 있는 과육,
과수원의 사과들은 우리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이제
노랗게 익은 벼포기 옆
물둠벙에서 송사리를 잡고 있다.
아버지의 무덤
추석 다가오는 공휴일
할아버지 산소 앞 우회도로가 자동차 전시장이다.
나는 내버려두라며 김치를 버무리는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지요.”
낫을 들고 막걸리 들고 산소에 올랐다.
막걸리 반은 내가 마시고 젖은 풀을 깎았다.
막차 시간은 다급한데 할아버지의 머리 반쪽 남았고
봉분 위에서 허리 펴고 본, 갈대 무성한 건너편 빈 묘
‘저것을 깎아야 하나!’
언젠가 친구 철이와 나눴던 말
우리나라의 매장문화를 걱정하며 우리는 화장을 하자.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들은 묻어드려야지.
하지만 우리의 아들딸들은 우리를 태울 수 있을 것인가.
남은 반쪽 머리도 다 깎아드리고 풀더미 치우려 할 때
언제 오셨는지 아버지 쪼그려 앉아 풋밤을 까고 계셨다.
내 낫은 묘지 하나 채 깎기 전에 날 무뎌졌는데
아버지의 조선낫은 밤송이를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왜 올라왔어요. 다 했는데.”
빈 막걸리 통이며 안주로 가져온 새우깡 부스러기 비닐봉지에 담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밤송이만 까고 계셨다.
고향에 태(胎)를 묻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멈춰선 자가용 속에는 장례를 치르고 온 듯
땀에 젖은 수건 하나씩은 보인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합장한, 할아버지의 묘가 군(郡)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하신 말씀. 金가네라든가 李가네라든가 이장(移葬)을 해간 묘.
아버지는 며칠을 두고 그 빈 구덩이에 봉분(封墳)을 올렸다 한다.
어머니가 모르는 척 신발을 빨며 타박을 하면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한다.
꽉 막힌 우회도로를 걸어 집으로 가는 길
언제 떴는지 멀리 고속도로에 걸린 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자가용 백미러를 반짝일 때
내 무딘 낫도 함께 빛나지만, 그제서야
‘막내가 갔어요.’
어머니의 타박에도 묵묵히 숫돌에 낫을 갈았을 아버지
운동화를 챙겨주는 어머니 보였다.
할아버지 산소 옆, 그 빈 무덤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아버지처럼
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 | 심사평
대학생은 사회 전체에서 가장 전위에 서 있는 세대다. 그 에너지는 시대가 앓을 때 함께 앓고 곪았을 때는 과감하게 떨쳐내는 힘으로 분출하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여러번 경험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학생 문학이란 한 시대의 문학의 전위요, 첨병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4·19를 기점으로 한 대학생 문학은 곧 그 세대의 문학이자 동시에 그 시대의 문학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80년대를 시작하는 대학생 문학 또한 그러하였다.
한 시대의 내면은 문학으로 가장 잘 투영된다. 특히 시는 곧 그 시대의 환부며 성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위에 속한 세대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흥분과 동시에 찬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축제가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근래 처음인 듯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작품들(응모자 총 604명)이 접수되었다. 예심과정 없이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이 접수된 작품을 나누어 1차로 10여편씩 추천, 다시 읽고 합평하기로 하였다.
1차 과정상의 소감은 접수된 작품들이 고른 시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의견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문법이 지켜지지 않은 시들이 의외로 아주 많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개인적인 푸념에 머물거나 도덕적 당위를 드러내는 것쯤으로 시를 오해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문장을 단순히 도치시킨 공허한 시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단 합평에 올려진 작품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문예창작 전공의 확산 결과인지는 몰라도 전문적인 수련의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최종 합평에는 주광혁(강릉대), 정지현(서원대), 이현숙(대진대), 김태헌(단국대), 최영오(협성대), 박경아(동국대) 들이 올랐다. 그중 심사의 기준이 되는 완성도와 표현력 등에 비추어 이내 최영오와 박경아의 작품으로 압축되었다. 두 사람의 작품을 두고 오랜 시간 토론을 거쳤다. 박경아의 시는 세련된 언어감과 완결성이 돋보이는 단아한 시들이다. 그리고 보내온 시들이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믿음직스러웠다. 「정물화」를 그려내는 미묘한 시선의 집중력은 유닉크하고도 마력적이다. 「초대」에서 “혼자 누워 천장만 바라봐 왜/거미는 모서리에서 출발할까”와 같은 관찰의 깊이는 좋은 시인의 자질을 갖춘 결과라 할 만했다. 그에 비해 최영오의 시들은 완결성 면에서는 전자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의 굵기나 말에 대한 왕성한 소화력이 큰 장점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放生」이나 「아버지의 무덤」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농경’과 ‘도회’ 사이를 왕래하는 정서적 긴장도 숨은 개성이다. 무엇보다도 시에 드러난 진솔한 마음이 자칫 재치에 빠져버리는 젊은 세대 시인들의 소재주의와 구별되어 믿음직스럽다. 두 사람의 장단점 사이에서 결국 정신적인 근기와 실험성 쪽을 택하기로 합의했다. 박경아에게는 좀더 정신적인 활기를, 최영오에게는 산문으로 빠져버리기 쉬운 사고의 정제를 주문하고 싶다.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입상권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음을 밝히며 계속 정진해줄 것을 당부한다. 그만하면 시단의 뒷물결은 아주 싱싱했다.
〔李時英 鄭浩承 張錫南〕
당선소감
어느날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방문 앞에는 라면 두 박스, 5킬로그램 쌀 두 포대, 김치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다음날 친구 철이에게 들을 수 있었다. 라면이나 쌀이야 근처 슈퍼에서 샀겠지만 김치를 싣고 학교까지 오셨을 최문자 교수님. 속마음을 표현하는 재주가 없는지라 전화도 못 드리고 넘어갔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때 방문 앞에 놓여 있던 사물들의 풍경이 스승의 따뜻한 관심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받는다는 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따뜻한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시를 쓰게 했다. 왜 교수님뿐이겠는가. 철마다 반찬을, 쌀을 나르던 철이. 매일 차비를 뺀 모든 돈을 내 손에 쥐여주고 가던 윤구형. 힘들어할 때마다 언제나 내 현실생활의 방향을 잡아주던 선영이형.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 같은 놈도 있소!’ 하고 나타나던 후배 범구. 그리고 경석이. 술은 공짜요 밥은 써비스라던 학교 앞 ‘무번지’ 누나. 술 먹고 보낸 메일에 술 드시고 답장을 주셨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박철화 선생님. 청주 제3문학동인회 희선이 선배와 영범이형. 그리고 김민형 선배님. 학교의 ‘세기말 동인’들…… 정말이지 말로는 다 호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시를 썼다.
수많은 인연들이 나를 키웠다. 그래!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사람들이다.
끝없이 저를 일으켜주신 최문자 교수님. 마침표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읽어주시는 채호기 교수님. 때로는 친구처럼, 그러나 엄한 스승으로, 말씀 한마디 없이 저를 가르치시는 박덕규 교수님. 그리고 정동환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도 담배를 찾게 만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겨운 어머니, 큰누나, 형제들, 조카 수지. 그리고 연숙이에게도.
원고를 보낼 때마다 당선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번에 안되면 10년 후에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던, 졸업을 앞둔 문학청년을 건져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대산문화재단에도 깊은 감사 올립니다.
이제 시작하는 풋내기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모자란 것들은 채워가면서 한걸음 한걸음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