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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여성 리드보컬 록밴드에 대한 몇가지 생각
자우림, 체리필터, 롤러코스터, 스웨터
김지영 金知永
한국일보 기자. koshaq@hk.co.kr
2002년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의미있는 현상을 꼽으라면 단연 록과 밴드의 부상이다. 월드컵 기간중 거리로 몰려나온 수십만 인파를 호령한 윤도현 밴드가 ‘국민가수’ 대우를 받게 된 것을 비롯해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주류 가요계의 변방으로 완전히 밀려났던 ‘소수의 음악’ 록이 비로소 ‘대중음악’의 지위에 올랐다. 상반기에 독주했던 롤러코스터를 비롯해 하반기에는 부활, 자우림, 크라잉넛 등이 윤도현 밴드가 지펴놓은 록의 불씨를 살렸고 체리필터, 불독맨션, 트랜스픽션, 스웨터 등 신인밴드도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일부에서는 월드컵으로 인한 반짝 특수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모처럼 한 무리를 이룬 록밴드들과 각각의 면면은 80년대 중반 ‘록의 르네쌍스’를 다시 한번 기대해보게 한다.
성공한 록밴드들을 꼽다보면 가장 흔하고 단순한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리드보컬이 여성이냐 아니냐는 것. 자우림의 김윤아, 체리필터의 조유진, 롤러코스터 조원선, 스웨터의 이아립 모두 여성이다.
록밴드에서 보컬은 프런트 맨이다. 아무리 연주를 중시하는 밴드라 해도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노래하는 이에게 향하기 마련이다. 노래 실력이 변변치 않은 뛰어난 연주인들이 종종 보컬을 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록의 발생지인 미국은 물론 1962년 신중현이 ‘애드 4’를 결성하며 시작한 한국 록에서도 여성은 오래도록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 ‘피메일(female) 록’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서구에서도 ‘록=남성의 음악’이라는 도식은 꽉 끼는 바지, 땀에 전 민소매 셔츠,치렁치렁한 긴 머리 남성 같은 남성적 이미지와 함께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다. 하물며 변변한 여성 로커의 존재조차 떠올릴 수 없었던 한국에서 2002년 프런트 우먼을 내세운 록밴드들의 인기몰이는 반갑기 짝이 없다.
여성들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록에 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을까. 답은 90년대 중반 등장한 두 가지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홍대 앞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디 씬(indie scene)과 모던 록(modern rock)이다.
결성 초기 잠시 홍대 앞 무대에 섰던 롤러코스터를 포함해 자우림, 체리필터, 스웨터 모두 홍대 앞 클럽 출신들이다. 홍대 앞 인디 씬은 처음부터 기성 가요, 주류 문화에 대한 거부를 기치로 출발했다. 자연 인디 밴드들은 록은 남성, 발라드는 여성이라는 기존 성역할 구분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의 음악에 대한 생각 역시 종전의 무겁고 예술가연하는 록밴드들과 달랐다. 음악은 완벽한 테크닉을 갖춘 프로페셔널들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객과 밴드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일종의 놀이였다. 그러므로 반지하 셋방에서 지옥훈련하는 마음으로 못 먹고 칼잠 자며 음악에 매달릴 필요도, 굳이 멤버들이 남성만일 필요도 없었다.
90년대 초반 크랜베리스, 라디오헤드 같은 유럽 밴드들에 의해 처음 알려진 모던 록은 여성 리드보컬 밴드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특히 6,70년대의 정통 록은 물론이고 80년대를 풍미했던 헤비메탈과도 궤를 달리하는 모든 음악을 통칭하는 본래의 넓은 의미 대신 가장 먼저 들어와 인기를 얻은 몇몇 밴드들의 스타일로 그 의미가 축소되면서 모던 록 밴드는 으레 소프트한 록에 여성 보컬을 내세운 것인 양 받아들여졌다. 그것도 크랜베리스의 돌로레스 오라이어던, 캐나다의 앨라니스 모리쎗처럼 목 속에서 한번 굴렸다 나오는 것처럼 꺽꺽대는 창법이 크게 유행했다.
덧붙여 록과는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음악이지만 90년대 댄스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새로운 가요 씨스템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랩, 댄스의 주요 소비자인 청소년을 잡기 위해 TV가 뛰어들었고,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수의 외모와 이미지가 음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해진 상황에서 록밴드 자체의 의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팬들은 이미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이, 그것도 네 팀의 보컬들처럼 ‘비주얼이 좋은’ 여성이 노래한다는 것은 적어도 현재의 가요시장에서 분명 잇점으로 작용한다.
리드보컬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무리로 취급을 받는 이들이기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남성 리드보컬 밴드들과는 다른, 공통의 특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장 단순한 예는 리드보컬이 여성이므로 여성스런 음악을 할 것이라는 짐작이다. 굳이 꼽자면 네 팀 중 여성적인 느낌은 ‘톡톡 튀는 초록색 음악’을 표방하고 공중에서 부유하듯 맑고 울림이 강한 이아립의 보컬이 특징인 스웨터뿐이다. 건조하고 나른한 음색을 지닌 조원선의 롤러코스터는 다분히 중성적이고 힘을 바탕으로 저음과 비음을 적절히 구사하는 김윤아의 자우림은 때때로 상업적 여성미를 살짝 드러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저음과 비음이 섞인 묵직한 음악이다. 하드코어를 가미한 조유진의 체리필터는 강력하고 원초적인, 전통적 의미의 남성적 록을 구사한다.
좀더 나아가면, 여성이 밴드의 리더로서 남성 멤버들과 대등하거나 우월적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여성의 시각을 노래에 담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도 있다. 밴드 내에서의 비중이 가장 큰 사람은 자우림의 김윤아이다. 대중적인 이미지에서도 그렇고 작사·작곡 모두 남성 멤버들을 압도한다. 반면 롤러코스터의 조원선과 스웨터의 이아립은 각각 남성 멤버인 지누, 신세철과 협업하는 편이고, 대중 앞에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조유진은 음반 수록곡을 체리필터의 이름으로 싣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멤버들과 비슷한 정도의 역할을 한다. 역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여성으로서의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의식과 의사소통의 부재를 주로 노래하는 김윤아의 노래에서조차 여성보다는 개인과 젊음이 앞서 있다. 조원선이 만든 노래들 역시 무료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부추기면서도 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투여서 노래 부르는 이의 성(性)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왜 여성이 리드보컬이라고 해서 여성적인 느낌 혹은 여성의 두드러진 역할이나 문제의식을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는 것일까, 그것도 일률적으로. 무엇이 여성적이고 무엇이 남성적이냐를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윤도현 밴드나 크라잉넛, 부활 등 ‘정상적인’ 남성 리드보컬 밴드에게서는 록이라는 본령 외에 그 어떤 공통점도 묶어내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만 무언가, 그것도 공통의 무언가를 부과하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는 차별적 명제에 동의하는 것이다. 또 잘못 알려진 공통점은 앞으로 데뷔할 여성 로커들에게도 좋지 않은 가이드 라인이 될 뿐이다. 리드보컬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저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지닌 하나의 록밴드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한국 록의 성적 불평등 해소를 진정으로 지지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