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하성란 河成蘭
1967년 서울 출생.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등이 있음. gaeulhae@yahoo.co.kr
무심결
한 문예지의 ‘궁금했습니다’라는 난에 평소 남자가 좋아하는 시인 K씨의 수필이 실려 있었다. K씨의 글을 읽는 것은 근 2년 만이었다. 글을 통해 K씨가 올해 초 서울 근교에 단층 목조주택을 짓고 38년 동안의 서울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을 알았다. 짧막한 분량의 글은 대부분 그곳에서의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자칫 밟아 짓뭉개버릴 뻔한 달팽이가 사나흘쯤 뒤 거실 끝에 놓인 벤자민 화분 위를 기어오르고 있더라는 것이며 마당으로 내려온 독사를 어쩔 수 없이 삽끝으로 내려쳐야 했던 이야기며 어느새 남자는 K씨의 글에 몰입해 있었다. K씨의 산문은 그의 시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원색 화보란인 까닭에 글 사이사이 볕이 좋은 창가나 수국이 만발한 화단 앞에서 포즈를 취한 K씨의 크고 작은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K씨가 꿰고 있는 흰 고무신은 헐거워 보였는데 발등까지 뻘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사진상으로도 K씨의 시력이 급작스럽게 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글에선가 K씨는 자신의 두눈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기료 장수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지나친 욕심이 두눈을 멀게 할 거라고 했다. ‘신기료 장수는 땅속에 묻힌 보물을 볼 수 있다는 앉은뱅이 노인의 유혹에 넘어가 한쪽 눈에 마법의 풀을 바르게 된다. 과연 한쪽 눈이 멀고 나자 모든 땅과 바닷속에 감춰진 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료 장수는 더 많은 보물들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다른 한쪽의 눈마저도 멀어버린다면 이 세상의 모든 보물이 모두 제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쪽 눈에도 풀을 발라달라고 앉은뱅이 노인에게 애걸을 한다. 한쪽 눈이 마저 멀었을 때 땅속과 바닷속의 보물은 사라지고 암흑만이 남았다. 노인이 재빨리 신기료 장수의 등에 올라탔다. 걸음이 뒤처질 때면 노인은 깡마른 다리로 신기료 장수의 허리를 졸랐다……’ 하지만 남자가 알고 있는 K씨의 이력은 욕심과는 생판 무관한 것이었다. 남자는 K씨의 입가에 깊게 팬 주름이 그동안 그가 외곬으로 살아온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집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산 너머로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어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영락없이 물미역 냄새가 밀려온다고 했다. 이곳에 와서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머리 숙여지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K씨는 덧붙였다. 화보에 실린 어떤 사진 속에도 K씨가 직접 설계했다는 목조주택의 전경은 나와 있지 않았다. K씨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 위로 목조건물의 천장널이 슬쩍 끼여들었는데 침목처럼 시커먼 나뭇장 아래 어른 주먹만한 풍경이 매달려 있었다. 혹시 K씨의 산책 끝에 바다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흰 고무신창으로 뻘흙을 묻혀 나르고 있는 것일까. K씨의 산문은 시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잡념이 들끓게 했다.
글의 맨 끝부분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방금 읽은 한 문장 때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자식을 앞세우고 걸어가는 산책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 햇빛마저 서글프다.’
남자가 K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년 전이었다. 혼기를 한참 놓치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얻은 큰아들은 지금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아래로 다섯살 터울이 나는 딸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 혹시나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싶어 방금 전의 그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자식을 앞세우고 홀로 걸어가는 산책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 햇빛마저 서글프다.’ 이번엔 앞뒤 문장까지 함께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 문장의 이해를 돕는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K씨가 살고 있는 개포동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현관문을 열어준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K씨의 딸아이였다. K씨는 물걸레로 마루를 훔치고 있다가 걸레를 들지 않은 손을 뻗어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래된 시영아파트는 비좁았고 해가 잘 들지 않았다. 머리를 양갈래로 총총 땋아내린, 눈이 커다란 계집애는 제 아버지의 무릎에 한손을 올려놓은 채로 낯선 방문객을 멀끔히 바라보았다. 윤이라고 했던가 연이었던가, 외자로 된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K씨의 부인은 집에 없었다. 계집애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더니 오렌지 주스 두 잔과 초코파이 두 개가 놓인 쟁반을 내왔다. 계집애가 신고 있는 흰 면양말의 바닥은 맨땅을 디딘 것처럼 새까맸다.
‘궁금했습니다’는 한동안 근황을 알 수 없었거나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화계 인사를 찾아가는 난이었다. 남자는 K씨의 얼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K씨가 신고 있는 흙 묻은 고무신도 찬찬히 살폈다. 사진 속의 침침해보이는 눈은 노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끊임없이 흘린 눈물 때문에 여린 살갗이 짓물러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이 깊이 패게 다문 입술은 다시 보니 무언가를 견뎌내려고 이를 앙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8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K씨를 보았다. 간간이 이어지던 전화통화는 5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1년에 한번 정초에 부치던 연하장도 3년 전쯤 수취인 불명이라는 도장이 찍힌 채 반송되면서 끊겼다. K씨는 2년이 넘게 지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도대체 K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얼핏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바람 한점 불지 않았다. 꽃사과나무 위로 드문드문 펼쳐진 하늘은 기차 침목을 엮어놓은 것처럼 거무튀튀했다.
주방으로 뚫린 작은 창으로 커다란 양은 곰솥들이 보였다. 시퍼런 불꽃에 뚜껑에서 흘러넘친 멀건 국물이 가닿을 때마다 곰솥 밑바닥으로 그을음이 끼었다. 에어컨은 고장이었다. 가슴패기에 금색실의 회사 로고가 새겨진 작업복 차림의 기술공이 가게 바닥에 부품들을 잔뜩 늘어놓은 채 에어컨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걸린 선풍기들은 회전방향을 바꿀 때마다 꼬리 긴 마찰음을 냈다.
주문한 도가니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전에 읽었던 K씨의 산문에 대해 운을 뗐다. 편집장은 붉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훔쳐댔다. 셔츠 겨드랑이의 누런 얼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물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댈 때마다 소매 속으로 숱이 많은 겨드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편집장도 K씨의 근황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모양인지 아이쿠, 탄성과 함께 들고 있던 물수건을 떨어뜨렸다. 편집부의 정은 밑반찬으로 나온 장아찌를 소리내 씹었다. “개포동요? 요즘 거기 투기가 장난 아녜요. 그런데 올 초라면 한몫 잡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의 그 시인 맞죠?” 뚝배기를 들어 국물을 소리내 마시고 수육을 건져 쏘스에 찍어 먹는 사이사이 K씨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기술공은 허리에 양팔을 얹은 채 속수무책으로 먼지 낀 에어컨 필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갓 스물이 넘었을까, 이제 막 연수를 마치고 새 작업복을 입은 듯했다. 풀기가 가시지 않은 작업복의 솔기에 슬려 목덜미가 울긋불긋했다. 머리 속에서 줄줄 땀이 흘렀다. 왜 그런 흉사가 소문 하나 없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는지 알 수 없다며 편집장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훔쳐냈다. 정은 자꾸 K시인과 H시인을 혼동했다. 어린 자식을 앞세웠으니 아마도 가까운 친지들끼리 단출하게 장례식을 치른 모양이라고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2년 동안의 공백기간도 아마 그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며 정이 잇몸으로 음식을 씹는 노인처럼 수육을 우물거렸다. 살이 겹친 곳마다 땀으로 미끈덩거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던 덩치 큰 남자들이 식당의 열기에 기겁을 하고 도로 나갔다. 식당의 유리창으로 사차선 도로가 내다보였다. 미등을 켠 자동차들 위로 두꺼운 구름장이 몰려들고 있었다. 편집장이 구두를 신고 나가면서 이쑤시개를 빼물었다. “L선생은 알지도 몰라. 막역한 사이라고 전해들었거든.”
여자는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였다, 라는 문장에서 남자는 조금 민망해졌다. 작가의 글씨체는 악필이었지만 분명 그렇게 씌어 있었다. 남자는 그 문장을 그대로 재교지에 옮겨적었다. 맞은편에 앉은 정은 더위 때문인지 입을 반쯤 벌린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땀 때문에 숱이 적은 머리가 이마에 달싹 달라붙어 피곤해 보였다. 화장은 이미 지워져 잡티가 드러난 채였다. 정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뜨거운 냄비뚜껑에 덴 듯 시선을 피했다. 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끔 고개를 들 때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 정과 눈이 마주쳤다.
“L선생도 K선생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게 없더군.” 편집장이 남자의 담뱃갑에서 담배 한개비를 꺼내 물었다. ‘외려 그 사실이 확실한 거냐고 반문하시더라구. 그 양반 지난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딱 끊었던 모양이야.” 편집장이 천장에 대고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고리 모양의 담배연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남자는 K씨가 산문을 발표한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겨적었다. 어쩌면 잡지의 편집자는 K씨의 근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담당자가 지금은 외근중이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전해주었다.
전화를 걸 생각으로 송수화기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K씨의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남자는 매일같이 그와 전화통화를 했다. 5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전화보다는 편지가 나을 듯싶었다. K선생님께. 그렇게 쓰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태풍 루사가 북상중이라고 썼다가 편지지만 몇장을 구겨버렸다. K씨에게 연례행사로 보내던 연하장도 끊은 지 3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두 차례 직장을 옮겼다. 이제 직장을 옮기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라고 끼적거렸다가 이내 지웠다. 에어컨의 희망온도를 평상시보다 낮추었는데도 후텁지근하다며 정이 손부채질을 해댄다. 편집장이 앉아 있는 칸막이 너머에서는 도넛 모양의 담배연기가 올라온다. 건물 꼭대기 어디선가 누군가 변기 물을 내린다. 한참 만에 그간의 격조함을 부디 용서하시라고 썼다.
편지를 쓰는 동안 커다란 눈망울과 바닥이 시커멓던 양말로만 기억되던 K씨 딸아이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사진에서 얼핏 본 목조건물의 지붕선이 무척 아름다웠노라고 적었다. 화단에 핀 수국이 지기 전에 댁으로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K씨가 신고 있던 흰 고무신에 묻은 흙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다. 초코파이를 내놓고 남자가 빵가루를 흘리며 초코파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계집애와 그 계집애가 신발을 벗고 고무줄놀이를 하느라 더럽힌 양말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단지 죄송하다고만 썼다. 침목처럼 검은 목조건물이 불길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편지에 적은 글들은 모두 변죽울림일 뿐이었다. 혹 그때 보아서일까. 두 아이 중 흉사의 장본인이 꼭 그 계집아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읽은 선생의 산문에 마음을 다쳤노라고만 썼다.
남자는 간신히 막 버스시간에 댈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까지 내달리는 동안 온몸의 땀구멍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배어나왔다. 새벽 두시의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비구름들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맨 뒷좌석에 연인으로 보이는 한쌍의 젊은이들과 남자가 심야버스 손님의 전부였다. 버스는 냉방이 잘되어 있었다. 땀이 마르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버스는 조도 낮은 가로등이 박힌 외곽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 운전사는 가끔 룸미러 속의 버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전에 읽었던 K씨의 글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밤마다 산 너머 뻘밭까지 짐승처럼 배회하다 돌아오는 K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흰자위는 붉게 충혈이 되고 눈시울은 짓물렀다. 남자애의 손이 여자애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모양이었다. 여자애가 갈매기 울음 소리를 냈다.
계집애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제 한손을 아버지의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K씨는 이야기 중간중간 남자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계집애의 옆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어머니가 출타중인 티가 났다. 도배를 한 지 오래된 듯 도배지 곳곳에 어린아이의 낙서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비좁은 거실의 벽면이란 벽면은 온통 책장 차지였다. 책장에 꽂히지 못한 책들이 바닥 이곳저곳에 돌탑처럼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대낮이었지만 베란다 창으로는 해가 들지 않았다. 거실 창으로 내다보이는 베란다의 철창살에는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천장에 얼룩이 밴 부엌 쪽에서는 집안에 발을 들일 때부터 났던 시큼한 냄새가 계속 풍겼다. 초코파이는 녹아 있었고 파이를 쥔 손가락에 초콜릿이 묻었다.
어심회전초밥전문점 화성갈비식당 강남주단 카페올리브 구구약국 아톰만화방…… 술이 취한 채 이 골목을 통과하고 싶은 날이 많았다. 하지만 술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진작에 깨어 남자가 골목에 발을 디딜 때는 하루 중 가장 머리가 맑았다. 백미터 남짓 길게 이어진 이 상가골목은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 한동안 신문지상을 달구던 재개발 붐은 산업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멈췄다. 아파트 딱지라도 얻을 요량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상가 뒤편의 낡고 오래된 집들에 눌러앉았다. 간판들의 불은 꺼졌다. 골목 어디서고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심회전초밥전문점의 유리창에는 10년 전 붙여둔 메뉴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매년 여름마다 물에 잠긴 부분의 글씨들은 획이 떨어져나가 온전한 글자 하나 없다. 초밥전문점의 사장 겸 주방장은 하루종일 잉크빛 대나무가 인쇄된 유까따를 걸치고 있다. 회전초밥틀은 돌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틀 사이사이에 간장때가 눌어붙고 녹이 슬었다. 유리창에 붙은 메뉴는 스무 가지가 넘지만 지금은 인근 공사장에서 점심을 대놓고 먹는 인부들을 위해 막회를 넣은 회덮밥과 간단한 김초밥을 말 뿐이다. 공사장의 인부들은 돌지 않는 회전초밥 틀상에 둥글게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손님을 끌기 위해 가게 밖에 세워두던 입간판들은 첫 수해 때 빗물에 휩쓸려가버렸다. 간판의 글씨들도 지난 10년 동안 한 획씩 한 자씩 떨어져나갔다. 획이 떨어져나간 부분은 한동안 먼지 테두리가 남았다. 바람과 빗물에 그나마 먼지 테두리마저도 지워졌다. 아무도 새로운 간판을 달지 않았다.
가게의 차양들은 물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골목을 들어오는 동안 또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해 바짓단이 맨살에 들러붙었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옷에서 건어물 냄새가 난다. 단 한번 이 골목까지 남자를 찾아오려던 여자가 있었다.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자고 있다가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여자는 교회에 예배를 보러 나온 길에 기차를 탔다고 했다. 역에 내린 지 십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뒷말이 자꾸 앞말을 앞섰다. 여자가 웃었다.
“역 앞에서 계속 직진하세요. 철로를 따라 좀 걸으면 어심회전초밥전문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골목이 나와요.” 하지만 어심회전초밥전문점이라는 간판을 여자는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간판의 획은 모두 떨어져나가고 어호저문저, 라는 글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 그럼 카페 올리브에 들어가 계시겠어요?” 카페 올리브의 간판도 마찬가지였다. 올 ㅣㅂ, 라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만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다. “아, 아닙니다. 그냥 역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남자는 철로를 따라 뛰었다. 자갈돌에 운동화 밑창이 미끄러지면서 몇번이나 바닥에 손을 짚었다. 여자는 신축한 역사의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대합실로 들어가지 않고 유리창 밖에서 여자를 지켜보았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개찰구로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기도 하다가 가끔 발장난을 치기도 했다. 남자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로를 따라 걸으면서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레 급한 일이 생겨 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갈밭을 딛는 소리만 이어졌다. 몇분이 흐르고 여자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 상가거리에도 호시절은 있었다. 지금은 모든 가게들이 해가 지면 문을 닫으려 서두르지만 한때는 늦은 새벽까지 문을 열어두는 곳이 많았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이곳은 주말이면 수천쌍의 연인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허름하고 작은 기차역의 출입구로 하루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 앞으로 주말 특수를 노리려는 주점들이 들어서고 선물가게와 공기총 사격장 같은 오락실이 생겼다. 딱히 볼거리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연인들은 철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상가 골목은 데이트 코스의 반환점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회전초밥집의 회전판은 갖가지 회를 얹은 초밥 접시들을 싣고 쉴새없이 돌았다. 새벽까지 노래방에서는 악을 써대는 노랫소리가 새어나왔다. 월요일 아침이면 데이트 코스를 따라 구토물과 여자들의 머리핀, 귀걸이 한짝, 생리대, 텅 빈 지갑, 동전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고는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시절 타령이었다. 그때 벌어둔 돈을 곶감 빼먹듯 다 썼노라고 했다.
K씨는 글에서 이곳에 와서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다. 8년 전 개포동의 K씨 집을 찾았을 때 남자는 K씨 그리고 그의 딸아이와 함께 뒷산에 있는 절까지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 중앙에 커다란 목련나무가 심어져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나무를 비켜서 걸어야 했다. 목련은 한창 절정이었다. 사십구재 준비로 바쁜 사람들이 절마당을 분주히 오갔다. 절 뒷마당은 인적이 뜸했다. 절 어딘가에서 나이 든 여자가 소리 죽여 울었다. 우연히 영단(靈壇)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빼곡히 놓인 위패들 가운데 새것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의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눈썹과 머리카락은 검은 여자였다. 여자의 사진 아래에는 빨간 리본을 단 미니 마우스 봉제인형이 놓여 있었다. 인형의 노란 장갑 부분은 손때가 타 있었다.
이왕 온 김에 약수를 떠서 천천히 내려가겠노라고 K씨가 딸아이와 뒤처졌다. 절마당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문득 산을 내려가다 돌아보니 K씨는 인사를 나눌 때 그대로 목련 아래에 서서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K씨에게 다시 목례를 했고 K씨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절마당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몇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남자의 이름을 따붙인 정육점 간판의 불은 꺼져 있었다. 가게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가면 살림집과 곧바로 통하는 철문이 나타난다. 어머니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인기척이 나자 어머니 방쪽에서 끙, 소리가 새어나온다. 어머니는 귀가가 늦어지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치면 푸념처럼 한마디하곤 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뒤통수로 기어코 그 말이 날아온다. “아무래도 늬 아부진 한길에서 초상을 치르게 될 거다.”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바람은 방충망을 건너오지 못한다. 비닐장판은 끈적해서 땀에 젖은 살갗이 자꾸만 가 들러붙는다. K씨를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매번 생각에서 끝나고 말았다. 손꼽아보니 K씨의 딸아이는 지금쯤 스물한살의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불현듯 그날 K씨와 산책을 갔던 절의 영단에서 본 젊은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젊은 여자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무섭도록 검었다. 그 여자의 사진 위로 K씨의 딸아이 얼굴이 겹쳐졌다. 초콜릿이 묻은 손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던 남자를 보다 비싯 웃던 계집애는 스물한살의 처녀로 자랐을 것이다, 만약 살아 있다면 말이다.
골목 저 끝에서 주정뱅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다.
1992년 처음으로 집이 물에 잠겼다. 밖이 소란스럽지 않았더라면 내처 잠을 자다 봉변을 당할 뻔했다. 방구들로 스며든 빗물로 비닐장판이 불룩하게 울었다. 어머니는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악을 쓰듯 남자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문지방 밖에 고여 있던 빗물이 삽시간에 방안으로 밀려들어 남자의 발목까지 차올랐다. 콘센트 가까운 곳을 지날 땐 두발에 저릿저릿 전기가 느껴졌다. 물속에서 전기뱀장어 한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는 듯했다.
영업중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모두 간판에 불을 밝혔다. 호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가 끊기면서 거리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부딪히며 나동그라지고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빗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낮은 지대를 찾아 흘렀다. 하수구에서는 오물 섞인 물이 역류했다. 상가 사람들은 두손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 통곡을 했다. 누구는 미친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불러댔다. 애들이 한꺼번에 울어대기 시작했다. 남자들 몇이 가게로 뛰어들어가 물을 퍼내다가 양동이를 내던지면서 주저앉았다. 치킨집의 플라스틱 의자들이 물위로 둥둥 떠올랐다. 물살은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쓸릴 정도로 거셌다.
비가 멈춘 후 이틀 뒤에야 빗물이 빠졌다. 가게와 살림집에는 붉은 토사가 쌓였다. 쓸 물건과 쓰지 못할 물건을 추려내느라 시간이 다 갔다. 상가 골목 곳곳에 고장난 가전제품과 흙투성이의 책과 옷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주머니들은 울다 웃다 했다. 살수차들이 물을 뿌려 토사를 씻어내고 가자 급수차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주전자와 페트병을 들고 급수차 앞에 길게 줄을 섰다. 하루에 한번씩 소독차들이 하얀 연기를 뿌리면서 골목을 빠져나가면 반벌거숭이 아이들이 인디언처럼 괴성을 질러대면서 꽁무니를 쫓아갔다. 골목은 커다란 빨래터가 되었다. 며칠 동안이나 빨아넌 이불호청과 옷가지들이 바람에 날렸다. 정육점의 대형냉장고 안에서는 해동된 고기들이 썩기 시작했다. 파리가 들끓었다. 어디서 왔는지 개들이 가게 앞으로 모여들었다. 고기는 개들에게도 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돌멩이를 던져 개들을 내쫓았다. 정육점의 고기들을 버리는 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아톰만화방의 만화들이 모두 젖어 종이죽처럼 못쓰게 되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아톰만화방의 만화를 보면서 남자는 한글을 뗐다.
기상청은 태풍 루사가 오늘 오후 세시 전남 고흥반도 남쪽 해안지방에 상륙,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북상중이며 북진 또는 북북동진하면서 전북과 강원 등지를 관통, 남부와 강원 지방에 많은 비를 뿌릴 것이라고 예보했다. 남자는 신문에서 구름 사진을 보았다. 태풍 루사는 둥근 구름띠 모양이었다. 편집장이 피워올리는 도넛 모양의 담배연기와 비슷했다. 태풍의 눈은 별자리도 볼 수 있을 만큼 투명하다고 했다. 가끔 태풍의 눈에 갇혀 열대지방의 새가 이동해오기도 한다고 했다. 남자는 별자리를 관찰하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꽃사과나무의 이파리가 조금 움직였다.
이듬해 여름에도 집들은 물에 잠겼다. 상가골목을 아우르고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일 거라는 추측들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다. 고지대에 자리잡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빗물이 저지대인 이곳으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끊기고 암흑이었지만 상가 사람들은 예전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입고 있던 흰 내의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괜찮으냐고 안부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빗물이 집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리 챙겨둔 가방을 짊어지고 상가 사람들은 대피장소인 초등학교 강당으로 모여들었다가 물이 빠지자 집으로 흩어졌다. 토사를 퍼내는 데도 한결 요령이 붙었다.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에서 찾아와 수재민들에게 컵라면을 나누어주었다. 이번에는 젖은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를 바르지 않았다. 물이 빠지고 벽이 말랐는데도 물이 차올랐던 자리에 얼룩이 남았다. 그땐 이만큼 물이 차올랐었지. 사람들은 추억을 이야기하듯 벽의 얼룩을 어루만졌다. 아주머니들은 울다 웃다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이불을 빨아널고 흙탕물을 뒤집어쓴 그릇들을 퐁퐁 탄 물에 닦았다. 가끔 개구쟁이들에게 소리를 칠 뿐이었다. 물을 그냥 마시면 안된다. 꼭 끓인 물을 마셔야 한다.
망가진 가전제품을 청소차가 싣고 가면 집안은 또다시 중고제품들로 채워졌다. 두 번의 침수소동을 겪고 나자 이곳은 상습침수지역이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사람들이 피신한 초등학교 건물이 두 해 연속 뉴스를 탔다. 띄엄띄엄 찾아오던 부동산 중개사들의 발길이 아예 끊겼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K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편지를 막 넣으려는 순간 뚝,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빗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서로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목청을 높여야 했다. 창밖의 꽃사과 나뭇잎들이 빗줄기에 찢겨 떨어졌다. 푸른 꽃사과 열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우두두 떨어져내렸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직원들의 신발 밑창에 으깨진 꽃사과 열매가 묻어 들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물비린내에 달큰한 사과향이 섞여 났다. 행인들은 우산대를 두손으로 바투쥐고 종종걸음쳤다. 시도때도 없이 여자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뒤집어진 우산을 접었다 펴느라 여자들은 울상이 되었다. 날아가는 우산을 잡으려 사람들이 허둥댔다. 간판이 바람에 덜컹거리고 입간판들은 일미터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우산도 받치지 않고 거리를 걸어갔다. 질질 끌리는 드레스 자락으로 스며든 흙물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가 있었다. 신부의 뒤를 커다란 골프우산을 받쳐든 턱시도 차림의 신랑이 뒤쫓아갔다. 신부의 얼굴은 화장이 번져 얼룩덜룩했다. 신부가 신랑에게 뭐라고 고함을 쳤다. 빗물 때문에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들의 줄기가 바람에 날리면서 채찍소리를 냈다. 문득 오늘 점심에 결혼식에 간다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제본 과정 전에 오자를 잡아낸 건 다행 중의 다행이었다. 편집장이 남자의 책상에 교정지를 던졌다. 곧 출간계획이 잡혀 있는 ‘붉은 강’이라는 소설의 재교지였다. 편집장은 직원들을 성(姓) 하나만으로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야, 강! 이제부터 널 가랑이라고 불러주마.” 남자는 영문을 모른 채로 붉은 줄이 그어진 교정지를 들여다보았다. 붉은 볼펜의 교정은 분명 남자 자신의 필체였다. 정은 어느새 남자의 의자 뒤에 와 서서 교정지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정이 붉은 줄이 그어진 문장을 소리내 읽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랑이를…… 정이 폭소를 터뜨리면서 남자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제 보니 강선배……” 남자는 허겁지겁 초교를 찾아 펼치고 손가락으로 글씨들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행을 놓치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여러번 확인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가랑이를…… 이라고 읽었던 그 문장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여자와 남자는 실랑이를 벌였다, 라는 문장만 있을 뿐이었다.
정은 남자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그럼 그때 내 시선을 피했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요? 응큼하긴……” 워낙 비좁은 곳이어서 삽시간에 직원 모두가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요 며칠 남자는 K씨와 그의 딸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편집장이 남자의 책상에 와 걸터앉으면서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편집 1, 2년차들은 틀린 글씨만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해. 화장실 낙서에까지 교정을 본다니까. 편집 4, 5년차들은 틀린 글씨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생각되는 거야. 그런데 편집 7, 8년차들은 어떤 줄 알어? 지들이 소설을 쓴다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자와 마주친 경리부의 새내기 최도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남자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쏜살같이 사무실로 뛰어들어가버렸다.
집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유실되었다. 커다란 개천이 도로를 가로지르며 새로 생겨났다. 붉은 흙탕물이 흘러넘쳐 도로가의 나대지들에 물이 찼다. 좌석버스는 길이 끊긴 곳에서 유턴해 돌아갔다. 승객들 몇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고 몇은 버스에서 내려 빗줄기 속에 서 있었다. 붉게 흘러넘치는 물을 보고 있자니 K씨의 글이 생각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머리 숙여지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 도로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저 물길이 원래 제자리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야 버스 속에서 가끔 아스팔트 도로 아래를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K씨의 글은 언제나 남자의 머릿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어머니도 남자도 목청을 높였다. 상가 골목이 침수되었다고 했다. 화장실이 넘치고 하수구가 역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런데 어쩌냐. 니 아버지가 여적 안 온다”라고 했다. 말끝에 무어라 이야기를 이었지만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남자는 좌석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도 비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에 가로수들의 뿌리가 드러났다. 쓰러져 엉킨 가로수들 때문에 행인들이 도로로 걷고 있었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행인들은 고스란히 물세례를 받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사십대 남자가 감전사고로 숨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남자는 편집부의 장의자에 누워 밤을 새웠다. 밤새도록 비는 멈추지 않았다. 논의 물꼬를 살피러 나갔던 육십대 남자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공원묘지가 산사태로 무너져 백여 개의 무덤이 유실되었다. 조간에서 남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육십대 사내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사내의 사망 추정시간은 토요일 오후였다. 연초록 양복을 입고 키는 170센티미터쯤이라고 했다. 사내는 남자 고등학교의 뒷담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학교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던 학생들의 교복에서 그 이름을 본 것 같았다. 아버지는 토요일 오후 상가번영회 회원의 딸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여름 정장은 연초록빛의 양복, 단벌뿐이었다. 후미진 골목이었다. 2미터 높이의 슬레이트 담 너머 고등학교 운동장이 있었다. 보충수업을 위해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 아무곳에서나 쓰러져 잠을 자는 부랑자로 오해받을 만했다. 예식장의 피로연장을 나올 무렵 이미 걸음을 제대로 떼어놓는 것이 힘들 만큼 만취해 있었을 것이다. 남자가 K씨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때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던 사람은 길가에 쓰러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두운데다가 거친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오른손 손등 위로 자전거 바퀴가 지나갔다. 아니, 아니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신문활자는 너무 작았다. 남자는 다시 그 기사를 읽었다. 사내의 인상 착의는 방금 전 남자가 읽은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사내는 돛을 펼친 요트가 프린트된 비치 셔츠에 면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사내가 발견되었다는 학교도 남자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학교였다. 여자는 남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여자는 남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심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남자는 요즘 부쩍 K씨의 일에 신경을 썼다.
월요일 오후에야 길은 복구되었다. 상가 골목의 물은 그때까지도 덜 빠진 채였다. 흙탕물에서 온갖 냄새가 났다. 남자는 바지를 무릎까지 접어올리고 흙탕물속을 첨벙첨벙 건너갔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어머니는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며 앉아 있었다. 물에 젖어선 안될 것들은 미리 가방 안에 싸두었다고 어머니가 남자를 보고 웃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길이 끊긴 참에 친구집에 눌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토사를 쓸어내고 물에 젖은 물건들을 골목에 쌓아두는 일들이 상가 사람들에게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듯했다. 살수차가 동원되어 거리의 오물을 쓸어가고 급수차가 들어와 물을 배급했다. 조무래기들도 쓰레받기를 들고 제방에 스며든 흙을 집밖으로 떠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침수된 집의 물과 흙을 떠내면서 잔뼈가 굵을 것이다. 집안에 들이찬 빗물의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벽에 걸어놓은 달력이 젖었다. 달력을 떼어내면서 남자는 내년엔 좀더 높은 곳에 못질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빗물을 쓸어내다 방바닥에서 시작되는 틈을 발견했다. 틈으로 검지손가락이 쏙 들어갔다. 해마다 빗물에 지반이 쓸려가면서 집의 뿌리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몇해가 지나면 물위로 둥둥 떠다니는 건 플라스틱 의자나 소쿠리, 가벼운 가전제품들이 아니라 집들이 될 것이다. 금세 파리가 들끓었다. 소독차가 하얀 연기를 뿌리면서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낯익은 냄새다. 이런저런 잡음에 섞여 주정뱅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연기 때문에 골목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틀림없다.
“강선배, 누가 왔는 줄이나 알아요? 사장실에?” 정은 흥분해서 두 손바닥을 비벼댔다. “지금 사장실에 귀신이 와 있다구요, 귀신. 도대체 강선배 요즘 왜 그래요?” 남자의 어깨를 내리치던 정이 턱짓으로 편집부 문을 가리켰다. 문가에 커다란 눈망울을 한 젊은 여자가 서 있다. 남자는 한눈에 그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귀신, 귀신.” 정이 입을 벙긋거린다. 여자는 한번에 남자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여자가 입술을 작게 오물거렸다. 불현듯 머리를 총총 땋아내린 K씨의 딸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K선생님? 그렇다면 윤?” 그제서야 여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아니요, 연이에요. 윤은 제 오빠고……”
사진에서 느낀 것처럼 K씨의 시력은 2년 전부터 급작스레 나빠지기 시작했다. 시를 타이프하거나 출판사에 전해주는 일을 이제는 연이 도맡아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후부터 아버진 좀 까다로워지셨어요. 어렸을 때 비닐로 된 비료부대를 쓰고 논 적이 있었는데 사물이 전부 그때처럼 부옇게 보인대요.” 그렇다면 흉사의 주인공은 딸아이가 아닌 장남 윤이었을까. 연이 가방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K씨에게 보낸 바로 그 편지였다. “아버진 강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즐거워하세요. 그런데 읽어드릴 수는 없었어요. 지난 태풍에 우편물들이 모두 젖어버렸거든요. 글씨가 번져 읽을 수가 없었죠. 간신히 강선생님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연과는 출판사 앞에서 헤어졌다. 연이 뒤돌아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에 초등학교 6학년 계집아이의 장난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초콜릿이 묻은 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전긍긍하는 남자의 모습을 계집애는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아버진 수국이 지기 전에 강선생님이 한번 오셨으면 하세요. 웬일인지 요즘 그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분들로부터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지요. ……눈이 나빠지고서부터 아버지의 즐거움이란 윤 오빠와 절 앞세우고 산책을 하는 것뿐이랍니다.”
남자는 문예지를 뒤적여 ‘궁금했습니다’란을 다시 읽었다. L선생이 K씨의 근황을 확인하려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K씨의 산문은 여러번 읽어도 새롭게 읽혔다. 삼박사일간에 걸친 달팽이의 여행과 뒤꿈치를 물릴까 어쩔 수 없이 뱀의 모가지를 향해 삽끝으로 내리쳐야 했던 이야기에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침침한 눈으로 어떻게 달팽이를 발견했고 뱀의 모가지를 단번에 겨냥해 내리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심은 품지 않았다. K씨는 글에 그렇게 썼다. 이곳에 와서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고개 숙여진다라고.
남자는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그 문장에 이르렀다. 연의 지적대로였다. ‘두 자식을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산책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 햇빛마저 서글프다.’ 전혀 다른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성한 아들과 딸의 보폭은 크다. 시인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다. 눈부신 햇살이 아이들의 어깨에 걸려 있다. 왜 그런 오독을 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무심결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K씨는 8년 전보다 훨씬 노쇠해 보였다.
두 자식을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산책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 햇빛마저 서글프다. 그 문장은 늙어가는 것, 사그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노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