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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우리동네 촌장 이문구

 

 

황석영 黃晳暎

소설가. 중단편전집 『객지』 『삼포 가는 길』 『몰개월의 새』, 장편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등이 있음.

 

 

 

지난 2월 25일,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형이 작고했다. 나는 그가 의식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임종의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것도 무슨 전생의 인연이리라. 장례식장에서 내가 읽은 조사(弔辭)를 인용해본다.

 

명천(鳴川) 이문구 형!

나는 지방에서 형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서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이 들린 지도 두 해나 지난 일이 아닙니까. 워낙에 형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고 더구나 번거롭게 걱정을 주는 일은 한사코 피하던 성미였습니다그려. 그래서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을 했으면서도 동료들에게 전혀 알리지를 않아서 시인 신경림 선생이 같은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우연히 형의 병세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몇달 전에 베트남 작가들 환영연에서 형을 만났을 때, 볼이 팬 형의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 ‘대안의학’의 치료법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섭생에 힘쓸 것을 역설하자 형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그냥 내버려둘 거여’라고 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이미 수술했을 당시부터 예전 같으면 가망이 없었던 병환을 두해 동안이나 버티어온 것도 형 특유의 생명력이었다고들 말합디다. 그러니 그 원망스러운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져 있던 사람을 보고 나는 섭생 운운하였으니 형의 무심했던 대답은 그야말로 죽음에 초연한 말투였던 것입니다.

내가 병원에 당도하여 형이 의식을 잃게 되기 직전에 마지막 작별을 나눌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우리의 인연입니다. 육체에서 이승의 것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정신만 남아 있는 형의 몰골을 바라보며 나는 차마 울 수도 없었습니다. 형은 내가 다가서자 그 두툼한 손은 어디로 가고 앙상한 뼈다귀 손을 들어 내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 손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나는 내심 놀랐습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는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지요. 형이 내게 뭐라고 여러 말을 했지만 가래가 끓는 듯 목구멍에 걸린 소리라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형에게 속삭였습니다.

‘문구형, 내가 나중에 가게 되어 미안해.’

그러자 다시 형의 알 수 없는 말이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형의 손을 쥐고 말을 그만 하라고 했지만 그 하고 싶은 남은 말은 그치질 않았지요. 내가 다시 ‘나 여러가지로 미안해’ 하니까 ‘아니 아니’ 하면서 형은 고개를 여러번 흔들었습니다.

형과 사귀고 얼마 후에 우리가 밤을 새워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형의 가족사며 소설을 쓰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나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남자이며 또한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몇몇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꾸리던 청진동 골목과 주점들을 어찌 잊겠소이까. 어느해 겨울에는 광주에서 후배들과 함께 벌이게 되었던 제사에서 형이 화장실 안에 들어가 울음을 삼키던 광경을 가슴 저리게 기억합니다. 나와 김지하는 그때에 슬며시 밖으로 빠져나와 자리를 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을 ‘토박이 이야기꾼’이라고 하면서 나를 ‘외방 이야기꾼’이라고 비교하여 부르기를 좋아합디다. 나는 형과 함께 맛과 개성이 다른 이야기 세계를 펼치며 늙어갈 작정이었습니다.

옛 속담에 ‘시시덕이는 영 넘어가고 새침데기는 골로 빠진다’고 했는데 형이나 나나 새침데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문을 쓰는 자는 도회지의 삶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쓰는 짓이 천업(賤業)이어서 제발 언젠가는 때려치우고 ‘요새두 소설 같은 거 쓰냐’ 하고 후배들에게 되물을 날이 올 거라며 웃기도 했지요. 근년에 와서 형은 문단의 여러 작태 속에서 외돌았습니다. 어느 시인은 이러한 인생의 회한을 ‘쓰러진 자의 꿈’이라고 이름지었지만, 누군들 온전하게 이 만만찮은 시정의 삶을 견디어낼 수 있었겠소이까.

당신은 그야말로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자신이었습니다그려. 스스로 나대지도 않고 엇구수하게 자신을 지킬지언정 악착같고 명료한 맵시를 멀리하고, 비루하게 몸을 굽히거나 자립하지 못하는 처신을 일컬어 ‘쇤네 기질’이라고 일갈하였습니다.

나는 당신과 작별하기 전에 당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산복이가 산복이가……’ 하기에 얼른 ‘산복이 다 컸던데 뭘’ 했더니 ‘갸가 씨원찮아서……’ 그러고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요. 혈육에 대한 당신의 남은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나는 당신에게 ‘형, 이제 말 그만 하고 쉬어요’하고는 허리를 굽혀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얇은 살갗은 아직 따뜻했습니다.

鳴川 이문구 형! 오늘도 고단하게 잠든 우리들 베갯머리 위로 저 고향의 실개천은 웃으며 재깔거리고 또한 울면서 한도 없이 끝도 없이 흘러갑니다. 나 이제부터 먼 세상을 돌아 누구에게 찾아와서 속마음을 나누리까. 우리는 지금 탯줄 묻은 고향을 지키고 있던 우리네 촌장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내가 형과 동시대를 살며 글을 쓴 것은 행운이었고 함께 기억될 일 역시 또다른 행운일 것입니다.

鳴川 선생! 고히 잠드소서.

 

내가 이문구를 만난 것은 1971년 한국문인협회가 있던 『월간문학』 사무실에서였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로 1972년에 불타기 전에는 서울시민회관이 있었고 문인협회는 그곳에 있었다.) 무슨 신인특집을 한다고 편집장이 만나자고 하여 방문한 자리였다. 줄을 친 두툼한 돗꾸리 스웨터 차림에 머리는 헝클어졌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술이 두툼한 것이 밥깨나 잘 먹게 생겼다. 게다가 순 토박이 충청도 사투리에 텃세는 아닐지언정 자기 사무실이라고 어찌나 당당하게 말을 잘하는지 서울내기라고 할 수 있는 나도 그때 첫눈에 기가 눌렸다. 시속 말에 병아리 적에 눌린 닭이 커서도 모이를 감히 함께 쪼지 못한다더니 이문구에 대한 내 처지가 그러했던 셈이다.

뒤이어 내가 「객지」를 창비에 발표하게 되고 이문구의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길 건너 수송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던 창비 사무실을 드나들게 되면서 청진동에서 그와 자주 부딪치게 되었다. 당시에 백낙청은 잡지를 창간하여 운영을 하다가 미국에 나가 있었고 염무웅 혼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염모와 이모는 41년생 동갑내기로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서로간에 배포가 맞는 동무 사이였다. 내가 둘러보니 문단에는 그 무렵에 41년 뱀띠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43년생인 나는 두살 위의 형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라 교실에는 두살 서너살 나보다 위인 나이배기들이 들끓었고 동네에서도 나는 중간쯤에나 끼일까 말까 할 정도로 형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충 기로 버티면서 맞먹을지언정 좀처럼 꿀리려들질 않았다. 하여튼, 그런 눈치를 아는지 한살 차이인 박태순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술 안 취했을 적에는) 또박또박 존댓말로 방어를 했고, 염무웅마저도 다 늙은 지금까지 경칭으로 일관한다. 처음부터 또라진 반말지거리로 이쪽에서 반말로 대꾸하는 것을 받아주다가도 가끔씩 서열을 확인하던 이들이 꼭 두 사람 있었는데, 이제는 세상을 떠난 조태일과 이문구가 그들이다.

이문구는 당시에 나와 다를 바 없는 청년이었지만 그야말로 어른들 말로 속에 영감이 들어앉아 있었다. 고색창연한 옛날식 사투리에 속담과 명심보감 투의 고사성어를 적절히 섞어서 쓰는 그의 화법은 우선 점잖고 엇구수했으며,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과 동석해서도 타이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그는 ‘살아남은 자’였던 것이다. 그의 가족사는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직접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시골서 중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던 이문구는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밑바닥 노가다부터 행상이며 묘지 이장 인부에 이르기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이 도회지에서 당당히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고참’이었다. 그가 자유당 시절은 물론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일관되게 어용이었던 ‘문협’에서 이사장 선거에 총대를 멘 일은 어찌 보면 기묘한 일이기도 했다. 이사장으로 나올 사람도 정해져 있어서 조연현 김동리 양씨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당시에 문예지도 별로 없던 시절에 조연현이 잡고 있던 『현대문학』이 막강했고 김동리가 이사장이 되면서 문협 기관지로 만든 『월간문학』이 있었다. 조연현측의 오른팔은 조정래였고 김동리측은 이문구였다. 기존의 문단에서 한걸음 옆으로 비켜서 있던 사람들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나도 문협 선거에 참여한 적이 없어서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판이었다. 김동리가 낙마를 한 뒤에 이문구는 머리를 삭발하기까지 했다. 속 모르는 구경꾼들은 그러한 그의 열정과 울분에 민망스러워했다. 나도 전화로 욕깨나 먹어야 했다. 선거날 투표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화를 낸 이유였다. 그래도 이문구는 권토중래를 기다리면서 김동리 손소희 등과 함께 『한국문학』을 창간하고 청진동에다 사무실을 차렸다.

어쨌든 나는 이문구가 월간지나 계간지에 가끔씩 발표하는 단편소설들을 좋아했고 특히 이장 인부 시절의 체험을 그린 『장한몽』이 연재될 때에는 경탄하면서 따라읽었다. 그리고 이문구는 내가 그 시절에 편집자들의 소심함으로 몇군데 잡지들을 전전하며 되돌려받았던 「낙타누깔」을 속없이 『월간문학』에 싣기도 해서 사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나는 이문구 쪽에서 본다면 ‘의리없는 놈’이었던 셈이다. 『한국문학』 시절에 청진동 사무실은 이문구가 버티고 있는 한,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갈데없는 문인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누가 원고료라도 받은 눈치가 보이면 벌떼처럼 모여서 벗겨먹기도 했다.

그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지나가다 궁금해서 들러보니 늦은 밤인데도 『한국문학』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까 이문구는 혼자 집필중이었다. 그는 『장한몽』을 연재하던 무렵에 날마다 어중이떠중이 문인들로 북새통이던 사무실에서 동료들에게 일일이 대거리도 하고 싸움도 말리면서 한 손으로는 볼펜을 쥐고 대학노트에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문예창작’을 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집필과정을 아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밧줄처럼 튼튼한 신경줄’이라고 경탄 섞인 농담을 해댔다. 나와 이문구는 그날 날씨나 기분이나 그야말로 ‘날궂이’하기에 좋은 밤이라 새벽까지 소주를 네댓병 마셨다. 나는 그날 이문구의 고향과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청산유수 같던 그의 말솜씨가 어눌해져버렸다.

지금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연이지만 환가여손(患家餘孫)이라고 ‘환난을 겪은 집안의 남은 후손’으로서 그는 남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 사내다. 그는 사람의 ‘무서움’과 ‘정겨움’을 어린시절에 한꺼번에 겪었다. 그의 선친은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해방공간에서는 남로당 보령책으로 활동했다. 이문구는 어린시절에 아버지가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집에는 각처에서 다녀가는 연락일꾼들이 드나들던 일이며, 당보와 유인물을 각처에 돌리던 일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그의 선친과 두 형님은 검거되어 총살을 당하고 시신은 돌을 매달아 대천 앞바다에 던져졌다. 고은 투의 격정적인 말에 의하면 ‘대천 앞바다의 생선은 이제 한점도 먹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문구는 처절한 한을 표현한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 우리 주위에 그런 애비 없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던지. 가장과 두 자식이 참경을 당한 뒤에 할아버지와 모친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문구는 그야말로 하늘 아래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군식구 노릇을 해서 잔명을 이어갔다.

“문간방에서 혼자 자려면 을매나 배가 고프던지…… 안채에서 저희끼리 고구마도 쪄먹고 동치미 떠다 먹을라치면 무 쪼가리 씹는 소리가 와작와작허는 거여.”

그나마 어린것이 자라 중학생이 되도록 인근 경찰서의 사찰계 형사는 잊지도 않고 다달이 동태조사를 나왔으며, 어른이 된 당시에도 그가 고향에 가기만 하면 형사가 나타나서 방문사유와 접촉대상에 관한 조사를 했다. 그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로 ‘얘기책’을 파기 시작했고, 무엇을 해서 입신(立身)은 못하더라도 당국의 방해를 받지 않고 먹고살 길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득 소설가가 되기로 작심했다. 글로 먹고사는 일이니 스스로 자랑삼듯 ‘한산 이씨 양반의 후예’인 이문구에게는 그다지 욕스러운 일도 아닐뿐더러 이름 뒤에 숨어살기도 편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서울에 와서 시장 행상이며 노동을 하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근검절약하여 2년제인 예대에 입학한다. 이문구는 거기서 김동리를 스승으로 만난다. 김동리는 무엇보다도 이문구 특유의 맛스럽고 유장한 문장을 인정해준다. 김동리는 해방 이후 전쟁에 이르기까지 좌우 대립이 소용돌이치던 시절부터 보수 우익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이문구는 김동리 같은 문인의 인정을 받고 그의 그늘에 들어가야만 멸문의 화를 당한 이래로 자신을 둘러싼 반공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김동리는 이문구를 수양아들처럼 거두었다. 이문구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스승과의 의리를 명분을 따지지 않고 끝까지 지켰다.

이문구는 사실은 남의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수줍은 사람이다. 그는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선배건 후배건 그의 문학적 경향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다만 한가지를 중요시했던 듯싶다.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 ‘괜찮은 사람’인가 ‘몹쓸 사람’인가를 따졌다. 그는 어리석거나 모자란 사람의 경우에도 평소 행태가 괜찮으면 인정하고 감싸주었던 반면에, 학식있고 지위가 있어 문단 내에서 내로라하는 자일지라도 인간적으로 못됐다 싶으면 거침없이 욕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인지상정’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모두들 그의 완고한 고집과 순박한 정에 반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와 사귀다보면 집에 돌아와서 후회하게 되는 때가 많았다. 그는 의젓하고 사리분별이 어른스러웠다. 아마도 세상고생을 나처럼 건성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은 탓이리라. 그는 자기가 수줍은 성격임에 반하여 나처럼 나대고 활발한 성격을 좋아했다. 이문구는 특히 내 재담을 몇차례나 들어서 ‘약장수’ 같은 것은 모든 구절을 외우다시피 할 텐데도 기회만 있으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성화였다. 이문구 때문에 실없이 모르는 자리에 가서도 몸을 판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 또 그는 자기가 내 매니저라고 자기도 어렸을 적에는 한가락했다고 우겼다. 하기는 그의 단편 「유자소전(兪子小傳)」에 보니까 읍내에 써커스 들어오면 앞장서서 깃발부대에도 동원되었던 모양이다. 이문구의 입담은 평소보다는 동료문인들의 인물평을 하는 대목에 가면 그 해학적인 면이나 날카롭게 본성을 꿰뚫는 면에서 남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러 동료문인들이 재미삼아서 또는 그의 입심에 오르고 싶어서 이문구의 인물평을 머리말로 받기를 원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끌어가던 무렵에 나도 초대간사 몇사람의 하나로 동원되었지만, 이문구의 ‘한국문학’이 발기사무실 겸 아지트가 되었다. 나중에 김동리로 인해 이문구와 작가회의 사이에 상처도 생겼지만 실상 김동리는 ‘한국문학’ 시절에 자기가 열어둔 사무실에서 이문구가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모르는 척 눈감고 있었고 이문구는 이것 또한 의리로 가슴속에 묻고 있었던 듯하다.‘자실’ 시절에 여러 사람이 모두들 제 깜냥대로 거들었지만, 난데없이 관변 문협을 바꾸려고 사십대 초반에 이사장 선거에 출마한 이호철의 수더분한 인정, 얼굴마담을 자청한 고은의 분투, 박태순의 꼬장꼬장한 원칙주의, 송기원의 거칠 데 없는 손발 노릇, 이시영의 신실한 헌신 등이 이문구 주위를 맴돌았다. 이문구나 우리들이나 모두 공안기관의 담당자들을 몇명씩 달고 다녀야 했는데, 유신 말기에 경기도 발안과 전라도 해남으로 내려간 이문구와 나는 지방이라 압박과 설움이 서울 사는 이들보다 더했다. 그래도 그가 우리와 다른 점은 그들 담당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나중에는 친척 아저씨로 만들어서 사이좋게 집회에 동행하곤 했다.

다만 그 시절 집회에서 확인했던 바이지만 이문구의 연설은 선동성이나 조리가 빠져 있어 변호사 이돈명이나 홍남순 식으로 ‘우리동네’ 면장 선거용이었다. 대중 앞에 나선 일도 드물지만 작은 무리를 앞에 두고 얘기할 적에도 빙빙 돌거나 변죽만 울려서 씨원하지가 않았다. 아, 인간 이문구를 어떻게 다 이야기하랴. 아마도 그의 투로 말하자면 ‘이자대전(李子大傳)’이라도 써야 직성이 풀리겠다.

시대는 광주의 죽음을 겪고 8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가혹해졌다. 세상의 가장들이 생계를 꾸려가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쉽지 않지만 문인들에게는 더욱 먹고살기가 팍팍했다. 나는 그래도 『장길산』 같은 대중적인 이야깃감을 만나서 대하소설 연재로 먹고살면서 그 십년 왕가뭄 같던 재해의 시기를 운좋게 견뎌냈다. 훨씬 뒤에 시절이 좋아진 때에도 이놈 저놈 모두들 책도 팔아보고 연재고료도 챙겨보고 했건만 이문구의 소설은 동료작가들은 좋아했을지언정 대중적인 인기를 누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당시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기업의 사보에 글을 쓰고 농민신문이니 새농민이니 하는 데다 연재를 하여 고료를 벌어야 했고, 떠들썩하게 광고도 나가고 인세도 받고 했던 것은 이례적으로 90년대에 가서야 『매월당 김시습』 하나가 유일했던 것 같다. 언젠가, 아마 80년대였을 텐데, 염무웅과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문구의 최근 소식을 들었다. 염무웅이 그의 집에 갔었는데 그 덩치 큰 사내가 몸을 돌릴 틈도 없는 좁은 아파트에서 책더미 사이에 파묻혀 쪼그려앉아 글을 쓰던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누군들 도회지에서 살림 꾸려나가는 일이 만만하겠는가마는, 내가 보기에도 서푼 가치도 없는 소설 잡기들이 국민작가의 이름을 달고 나와 판치던 시절에 그는 원고료와 생활비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밥은 ‘쉰다’고 말하고 사람은 ‘늙는다’라고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뒷전으로 외돌게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80년대는 사회 분위기가 ‘문학’을 개떡으로 취급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는 우리편인 것처럼 보이던 이른바 소장 사회과학자들 중에는 ‘소설 읽을 시간 없다’고 감히 뻔뻔한 상판을 들고 당당하게 선언하던 때였다. 나처럼 외향적이고 서슴없이 출분하여 몸으로 때우는 성격의 작가도 ‘문예반’을 할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끼던 때였다. 그러니 이문구인들 오죽 삐쳤으랴. 그가 얼마나 불편했으면 공공연하게 ‘아이구! 민중문학인가 뭔가 지겹고 꼴 보기 싫다’고 했을까. 최초의 불화는 김동리가 발단이 되었다.

사실 그의 전통적인 인정주의를 주변 친구들도 이해는 하면서도 나중에 시대가 험해져서 진영이 날카롭게 갈렸을 적에는 차마 포용할 수가 없었다. 유신시절 내내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박태순도 대판 싸우고 서먹서먹해졌다. 발단은 시인 김남주의 석방운동에 대하여 김동리가 김남주는 빨갱이가 분명하므로 절대로 석방되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국제펜대회에서 하고, 뒤이어 염무웅을 비롯한 당시의 작가회의측과 논쟁이 일어나면서, 김동리가 교수로 나가던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교수퇴진운동을 벌이면서 불거졌다. 이문구는 정면으로 작가회의 집행부를 공박하면서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젊은 문인들과는 달리 오래 사귀어왔던 동료들은 이문구의 김동리에 대한 두둔과 분노를 이해는 했다. 그러나 그를 대장부로 아는 동료로서 어쩐지 조금 쓸쓸하고 섭섭했다. 나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5년의 망명 끝에 귀국하여 구속되고 나서, 그가 쓴 어느 산문 모퉁이를 읽다가 당시의 미운 감정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글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아랫것’이라 여전히 이문구를 좋아했고 스스로의 편향에 대해서 조용히 반성했다. 모든 움직이는 사물은 균형을 지향한다고 했던가. 그가 나의 석방을 위하여 요로의 사람들을 만났던 소식이 감옥으로 묻어들어왔다. 나는 인사로 짤막한 편지를 보냈으며 그는 별로 한 일이 없어 미안하다며 겸양의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이문구를 좋아는 하면서도 까닭없이 그의 언저리에 드는 일은 피했다.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로의 사는 공간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문단’ 주변과 거리를 둔다. 무슨 전략이나 술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동업자를 만나면 별로 할 얘기도 없고 재미도 없던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딴 동네에 가서 일을 벌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문구는 문단이야말로 구식이든 신식이든 자기의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는 그야말로 마당발이어서 엊그제 나온 어느 동인지 출신의 신인들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나도 요새는 많이 달라져서 문학행사나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편인데도 후배들에게서는 ‘정 없다’고 핀잔을 듣는 축이다.

이문구와 교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건만 그중 몇사람이 떠오른다. 한남철은 백낙청의 동갑내기 친구로 인천 출신의 소설가다. 첫인상이 도회적이고 서정적이어서 깔끔하지만 나약하게 보이는데 사귀고 보면 엄정하고 단호하며 사내답게 시원시원하다. 그의 독설이 그럴듯해서 모두들 흉내를 낼 지경이다. 그는 수십명의 대가족이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집도 없이 부대끼며 유년 청년 시절을 보냈다. 70년대에 한남철은 문인들에게는 좋은 직장이던 신문사에 다녔는데 용돈이 좀 생기면 꼭 이문구를 찾았다. 이문구도 한남철이 찾아오면 모든 일 제치고 다른 놈들 따돌리고 저희끼리 단둘이서만 만났다. 나는 두 사람이 뭘 하느라고 은밀히 만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에게 은근히 물어보니 그냥 고깃집에 간다고 했다. 아니, 그럼 고기나 먹으려고 쩨쩨하게 둘이서만 가느냐고 하면 ‘그렇다, 이문구와 오랜만에 고기를 먹으면 정말 맛이 좋다’는 대답. 두 사람은 생고기가 나오면 말없이 석쇠에 척척 얹어서 먹으란 말도 없이 서로 자기 것을 구워서 실컷 먹는다. 소주잔만 오락가락할 뿐 두 사람은 종내 말이 없다. 한남철은 살아생전에 나는 언제나 어린애 취급하면서 이문구는 속깊은 장정 대접을 했다. 이문구의 대답도 그럴듯했다. ‘그 양반이나 내나 먹는 경쟁이 치열해서 맛이 좋다’는 대답.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버렸지만.

조태일은 덩치도 이문구와 비슷하고 성격은 시인이라 그런지 취하면 광증이 있다. 이들 대물은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서로 소가 닭 보듯 했다. 그러나 중요한 때에는 반드시 상대가 거기 없어도 서로 편을 들었다. 80년대 초반에 전남대에서 송기숙이 해직되어 있던 때인데 산에나 다니던 이 산꾼이 느닷없이 흑산도 지나 가거도(可居島)라는 사람 사는 섬에 바다낚시를 가자는 것이었다. 송기숙의 장광설도 유명한데 그의 말인즉 ‘암껏도 필요웂고 초장만 가져가면 회는 배 터지게 멕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문구, 조태일, 한승원, 이시영, 손춘익, 나, 그리고 전남대 해직교수들이 배타고 갔는데 도착하는 날부터 태풍이 불었다. 꼼짝없이 2주 동안을 좁은 섬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갯가의 민가에서 붙어살아야 했다. 회는커녕 멸치 한마리 보지 못한 채 섬에 갇혀 있는 모든 낚시꾼들이 추렴하여 소 한마리를 잡아 사나흘 구워먹었더니 트림만 하면 목젖 너머로 고깃점이 올라왔다. 한 집에 붙어서 수십일을 지내려니 모두의 성격이 대충은 드러나게 되었다. 이시영과 나는 이문구와 조태일의 장엄한 영역대결을 킬킬대며 구경하게 되었다. 조태일은 문간방의 벽 가녘을 자기 터로 잡고는 담요 한장 깔고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문구는 손춘익과 함께 안쪽의 부엌 옆 비좁은 방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앞의 시원한 마루방에는 나와 이시영과 한승원이 널찍하게 활개를 펴고 누웠다. 이문구 조태일은 절대로 함께 섞이지 않았다. 섬에서 유일한 연락처로 다방이 있었는데 주인은 그곳 초등학교 교장선생이었다. 이문구는 원래 시골사람들과의 이바구를 좋아해서 늘상 교장선생이며 어부며 촌부 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나도 덕분에 여러번 막걸리를 마시고 재담도 했다. 조태일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 이문구가 그의 게으름을 비아냥거리자, 조태일은 ‘큰 물건이 재빨리 자주 움직이더냐, 부르도자나 굴착기를 봐라 발동이 꺼져 있다가도 때가 되면 성큼성큼 움직인다’고 맞받았다. 거의 말다툼 수준의 고약한 기싸움이었다. 조태일은 비오는 날 별식이 먹고 싶었던지 어디서 밀가루를 구해다가 손수 부뚜막 앞에서 수제비를 뜯어 넣었다. 우리도 도와준 덕분에 한그릇씩 돌려먹게 되었는데 조태일은 절대로 이문구에게 먹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문구도 절대로 한그릇 달라고 하지 않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조태일이 뒷산에 가면 이문구는 오지 않고 이문구가 갯바위에 가면 조태일은 보이지 않았다. 태풍이 지난 뒤 소흑산도에서 목포로 와서 각자 방향이 달라 헤어지게 되었다. 이문구가 ‘아이구 지겨워. 앞으로 석삼년은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석별의 말을 했다. 그러나 뒤에도 어쩌다가 보면 사람 많을 때에는 서로 멀찍이 피해서 앉고, 남들 없을 때에는 서로 이죽거리면서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오래 마셨다. 나는 글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워도 그런 관계들이 좋았다. 해가 반짝 들자 모두 좋은 시절 왔다고 지지재재하건만 이런 사내들은 몸이 진작에 망가져서 가버렸다.

박용래라는 충청도의 철딱서니 없이 착한 시인이 있다. 일제 때 강경상업학교 나와서 진작에 은행원으로 돈 부댓자루 싣고 북선 지방과 만주를 나다니던 사람이다. 말년에는 그 지긋지긋한 술에 지친, 조산원인 아내에게 얹혀 시난고난하며 살았다. 박용래가 외롭고 슬프면 무작정 대전에서부터 전화로 지목하고 찾아가는 자가 바로 이문구였다. 나도 말로만 듣다가 청진동 빈대떡집 구석자리에 덩치 큰 이문구 앞에 쪼그라져서 훌쩍이는 작은 사내를 보게 되었다. 그런 자리에서 저 유명한 ‘문구야, 조게 눈이데? 조따윈 싸락눈도 아녀. 저어 함북에선 개마고원 비탈에 내리는 주먹만한 눈송이가 하늘에 빼곡 찼는디……’ 하는 푸념이 나오게 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 박용래가 술에 못 이겨 오리의자 위에서 무너지면 이문구는 넓적한 등판에 눈물만 한 주머니 남은 가뿐한 늙은 시인을 업고 여관으로 날랐다. 그리고 곁에서 코를 골며 함께 자던 것이다.

박용수는 허바허바 사진관의 사진기술자였다. 그의 자전적 장시에도 나오지만 진주 출신의 박용수는 처음에는 잘 듣고 말하다가 열병에 걸려 청각장애자가 되었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상경해서 간신히 얻은 직장이 당시 결혼사진으로 떼돈을 벌었던 시청 앞 허바허바 사진관이었는데 노조를 만들겠다고 이문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해고를 당하자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이문구가 곁에서 보살펴주었다. ‘자실’이 조직된 뒤에 그는 이문구와 함께 현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더니 80년대 내내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시위현장을 돌아다니며 생생한 현장사진을 찍었다. 나중에는 토속어를 모은 『우리말갈래사전』을 편찬해서 감옥의 나에게도 들여주어 말공부에 큰 힘이 되었다. 이문구의 동구 앞 느티나무 같은 그늘에는 박용수말고도 그렇게 스쳐간 무명씨들이 무수하게 많았다.

이제 돌아보매 이문구와 가슴을 나눈 이들은 하나 둘이 아니건만, 추억은 끝이 없고 말로 꺼내놓으니 허전하구나!

나는 그의 겨레말과 문장의 흐름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관촌수필』의 삶에 대한 깊이와 결연함에 자세를 바로하면서도 외고집의 봉건성에는 비판적이다. 『우리동네』의 생생한 현장성이며 인물의 살아 있음에 축제 같은 경이를 느끼다가도, 한결같이 엄청난 수다에서는 매너리즘을 엿보기도 한다. 나는 소싯적부터 지금까지도 ‘토박이 이야기꾼’들의 3대 명작으로 천승세의 「신궁(神弓)」, 송기숙의 「당제(堂祭)」 그리고 이문구의 「해벽(海壁)」을 꼽는다. 자아, 이제 그의 시나위 가락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고 빛나는 서사를 음미하자.

 

그는 매일 밤 그렇게 바닷소리를 들어왔던 것이다. 처연한 가락으로도 들리고 천둥과 회오리바람으로 들리기도 하는 소리였다. 황오리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갈매기 울부짖음도 섞여 있었다. 물수리도 함께 활개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물총새 소리까지 섞인다면 더욱 꿈결같은 가락이 될 성싶었다. 이윽고 물너울이 자치락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귓결에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을 치며 울부짖는 처참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시퍼런 물굽이, 하늘의 정기를 핥아먹어 밑바닥 끝까지 짙푸른 하늘보다 더 넓은 파도가 가슴을 쳐대는 거였다. 돋을 볕에 눈이 부시던 물보라…… 황혼을 노래하던 물안개…… 저 높다란 성주산을 헐어뭉갤 듯, 하늘을 입은 채 밀려와 둔치를 물어뜯고 모래톱에 몸부림치던 파도, 파도…… 그 물바람 속에 사철 깃을 갈며 나비처럼 나부끼던 그 여러 물새들…… 댕기물떼새며 민댕기물떼새의 가슴은 또한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 참게를 잡으면 그 자리서 배꼽만 떼어내고 그참 어적어적 씹어먹었다. 그 비리칙한 맛은 날로 먹어야 제 맛인 쌀새우 맛에 진배없었다. 눈만 뜨면 으레 개펄로 달려나갔었다. 온몸을 뻘로 매흙질하곤 갈밭과 목새를 뒤져 잡히는 대로 구럭에 담으며 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배가 출출해지면 무엇이든지 갯물에 헹구어 날로 먹어치우곤 했었지. 참굴이며 반지락 따위, 목이 아리도록 먹어도 물리지 않던 것들은 물때를 따라 먼개로 나가야 됐었고, 둔치의 모래톱이나 갈대밭엔 하잘것없는 것들만 흔히 주울 수 있었다. 잔꽃발게, 알락게, 능쟁이, 황바리, 그것들은 그토록 흔할 수가 없었고, 부게미 눈머럭대 같은 고동도 원두밭에 개미 기어다니듯 지천이었었다. (중편 「해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