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정록 李楨錄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등이 있음. siin14@hanmir.com
얼음 목탁
산사 뒤 작은 폭포가 겨우내 얼어 있다.
그동안 내려치려고만 했다고
멀리 나가려고만 했다고,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안고 있다.
커다란 얼음 목탁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염주알들. 서로가 서로를 세수시켜주는 저 염주알을 닮아야겠다고, 버들강아지 작은 솜털들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네 마음도 겨울이냐?
꽝꽝 얼어붙었느냐?
안에서 두드리는 목탁이 있다. 얼음 문을 닫고 물방울에게 경을 읽히는 법당이 있다. 엿들을 것 없다. 얼음 목탁이 공양미 씻는 소리. 염주알이 목탁 함지를 깎는 소리.
언 방에서 살아가며 기도를 모르겠느냐?
나를 세수시켜주는 쌀 씻는 소리가 있다.
눈송이에 둥지를 트는 새
한겨울에 다리공사를 한 적이 있다
콘크리트를 치는 삽질 속으로 소복눈이 쏟아졌다. 내장을 삶는 가마솥에도, 김장김치와 돼지비계를 볶는 솥뚜껑 위에도, 수제비만한 눈송이 뛰어들었다. 공사를 마치고 거푸집을 떼내자, 돼지 부랄만한 구멍들 숭숭했다. 오줌보만한 것도 두엇 있었다. 그래도 볏가마니 그득한 경운기가 다니고, 트랙터며 콤바인 잘도 건너다녔다. 그런데 삼년 만에 다리를 철거해야 했다. 산골짝 다랑논까지 경지정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다리는 한나절도 안되어 가라앉았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냇물을 막고 철근더미가 둑에 쌓였다
엉성했던 콘크리트의 구멍과 교각 틈바구니에 둥우리가 껴 있었다. 새들이 지푸라기며 보드라운 이끼로 공사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둥우리 위로 리어카가 지나가고 트럭이 부릉거리는 사이, 주먹만한 비곗덩어리와 돼지 부랄 속으로 어미 새가 먹이를 나른 것이었다. 배고픈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게 한 꾸러미씩 새알을 건넨 것이었다. 얼었다 풀렸다 하던 너털웃음과 김 무럭무럭 솟구치던 솥단지를 점찍어놨던 새들. 눈송이와 새들의 하늘길처럼 아름다웠던 논두렁도 경지정리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논배미의 이름도 몽땅 사라져버렸다
사람 한명 부르지 않고 레미콘이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헛배 부른 익룡의 내장 안에 사람 하나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하늘 깊숙이, 다시 새들이 날고 있었던가.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 둥지를 트는 새가 있었다
운주사 천불천탑
구름이
아름다운 건
폐허를 꿈꾸기 때문이다
끝내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석탑석불이 아름다운 건
그 구름을 닮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탑석불보다 아름다운 것은
탑을 받들고 있는 겹겹의 바위이다
해마다 한층씩 마디를 늘여가는
앞산 뒷산 소나무들이다 다년생
풀뿌리들이다
잔디밭으로 변해버린
운주사 깊은 계곡
그중 아름다운 폐허는
그 잔디밭에 묻혀버린 계단식 논밭이다
불탑을 둘러보는 동안 우리는
폐허에 안착한 논밭을 밟을 수밖에 없다
노도 없이 바다도 없이 배를 밀고 가는 구름을 우러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