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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한국에서 진보정당 당원으로 산다는 것
이근원 李根元
1984년부터 92년까지 노동현장에서 활동. 백기완 선거대책본부 울산본부장, 권영길 선거대책본부 기획국장, 민주노총 조직실장 역임. 현재 민주노총 산하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 교육선전실장. leekw@nodong.org
1. 십년의 약속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보령 삽시도라는 섬으로 도망(?)갔다.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쌓이는 것은 소주병뿐이었다. ‘좌절’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휘감고 있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역사에 남을 1996년 노동법 총파업을 지휘했던 권영길 후보는 전체 조합원 수의 절반에 머무르는 30여만표의 표만 얻었다. 초라한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결과였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술을 먹다, 낚시에 가끔 걸리는 망둥이를 놓아주다 하면서 오기가 발동했다. 어차피 대통령 선거를 끝내고 그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했다면 힘들지만 해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딱 십년만 더 해보자. 안되면 이 판을 떠나든지, 이민을 가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 삽시도를 떠났다.
지금도 나는 교육을 가면 “길게 보자. 오십년 이상을 유지해온 보수정치가 한꺼번에 바뀔 수는 없다. 십년만 해보자”라는 말을 즐겨한다. 온 국민을 열광시킨 월드컵 4강 신화가 달성된 이후에는 더욱 말하기가 편해졌다. “한국 축구가 16강에 들어가는 데도 4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이념을 내세운 정치는 이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이제 시작이고,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해보자. 축구도 되는데 정치라고 안되겠는가?”라고 곧잘 얘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 선거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을 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예고한 것이었다. 선거를 치른 지 얼마 후 마포에서 삼선동 교회 2층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마침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마치 변두리로 쫓겨난 회사처럼 초라하고 왜소한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집기도 다 들어가지 못했다. 잔치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 시작해야 했다.
2. 당은 곧 돈이다
한번은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부탁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제목을 ‘돈 내는 기계들 앞’이라고 쓴 적이 있다. 살려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만이 아니었다. 2년이 넘게 꾸준히 발간되면서 이제 정기독자가 5천명을 넘어선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赤旗)만한 신문을 만들자”는 의욕만으론 신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노동조합은 물론 개인에게도 신문구독을 강제했다. 휴가철이나 연말에 박봉의 기자들에게 쥐꼬리만한 보너스라도 주려면 돈이 필요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게 된 단어다. 어디 그뿐인가? 당의 상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나는 연맹에서 파견되어 월급을 받고 있었다. 업종회의와 민주노총 준비위원회에서 일했던 나는 노동조합과 긴밀한 관계였다. 따라서 노동조합 위원장들의 판공비를 뜯어내거나 자연스럽게 손을 벌릴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위원장님, 삼선동으로 이사했는데 한번 오셔야죠?”라는 전화는, 한번 와서 점심을 사거나 술을 사라는 압력이었다.
‘국민승리 21’이 종묘공원에서 ‘실업자를 위한 문화제’를 기획했을 때였다. 2천만원 정도의 경비가 소요된 문화제는 많은 노동조합의 협찬과 지원 속에서 치러질 수 있었다. 연예인 노조 등을 통해 김수희·이용 등 유명 가수들을 그야말로 저렴하게 무대에 세웠다. 매달 열린 ‘실업자 대회’ 역시 그런 방법을 통해 개최됐고, 이로 인해 진보정당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돈이 들어가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데는 역시 선거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 내가 사는 일산에서 후보를 출마시켰는데, 정치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을 설득해서 출마하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본인보다 주변 사람을 설득하는 건 더 어렵다. 아주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정치판은 가까이해서는 안될 대상이다. 후보의 부인을 설득하고, 아이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자연히 돈얘기도 나온다. “후보에게 단 한푼도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 나면 돈 마련은 당연히 출마를 강제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때부터 아는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한다. 돈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과거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고, 운동권이었다 하더라도 선뜻 돈을 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다 내가 출마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출마하는 데 돈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체계적인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는 사람의 목록을 정리하고 표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수입여부를 신중히 판단한다. 가격(?)을 정하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다. 은행 계좌번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외워진다. 학교 동창, 옛날 교회 친구, 야학의 선후배, 부천·안산·서울·울산 등 노동운동을 하며 지나온 모든 지역의 아는 사람들, 전·현직 노동조합 간부, 같이 ‘비합법운동’을 했던 선후배 등에게 전화를 걸고 필요하다면 술을 한잔 하기도 한다.
이번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내가 속한 공공연맹에서는 22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연맹 상근자인 여성국장도 서울시 광역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광역비례대표 출마에는 돈이 별로 안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서울시의 각 가정에 들어가는 선거공보물 제작비용만 해도 엄청났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에서 조합원 1인당 2천원의 모금을 결의했지만 경험으로 미뤄볼 때 돈이 부족할 것은 뻔했다. 또 돈을 모아야 했다. ‘서울시 광역비례대표와 함께 하는 노동자 100인 선언’이라는 그럴듯한 행사를 마련해 1인당 10만원씩 내라고 했다. 기부할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캐나다에 이민간 전 노조위원장에게도 계좌번호를 이메일로 보냈다. 그리하여 목표로 한 천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여성국장은 당당하게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어떤 때는 “차라리 내가 출마하는 게 낫겠다”는 농담을 한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출마하면 나가야 하는 돈이 만만찮다. 인간관계상 후환이 두려워 자진납세를 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받으면 “이번에는 얼마냐?”라고 묻기도 한다. 지구당이 어렵다면 특별당비를, 선거철이 되면 특별 선거비용을 내야 하는 당원들의 힘으로 민주노동당은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8.1%라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나는 이 지지율을 대통령 선거 이후 3~4년 동안 당이 버텨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버팀 속에는 진보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를 받는 상근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의무적으로 매달 만원 이상의 당비를 내는 2만 5천여명의 당원이 있는 명실상부한 진보정당으로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다가 처음으로 분기마다 1억 이상의 국고보조금도 받게 되었다. 이제 ‘돈 내는 기계들’의 이메일 주소를 없애도 될까?
3. 민주주의는 정말 힘든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 막 개업한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성경 구절만큼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담은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미약하고,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1992년 한국노동당이 무역전시장에서 창당할 때 5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당원들이었다. 비합법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지하 골방을 박차고 햇살 따사로운 지상으로 나왔을 때처럼 벅찬 감동을 받았다. 같은 해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운동을 마치고 나는 정말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공장에 다니던 울산지역 노동자 당원들은 야근을 하고 철야를 해서 모은 돈으로 나를 먹여살렸다. 그 바탕이 아마도 민주노동당 조승수 구청장을 울산 북구에서 당선시킨 뿌리리라.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당선이라도 되어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숱한 유혹의 손길이 뻗쳐온다. 대덕 연구단지에는 공공연맹 산하 전국과학기술노조가 자리잡고 있다. 조합원들이 모두 유성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몰려살고 있는 과학기술노조는 지난 95년부터 지방의회에 후보를 내어 당선시켜왔다. 그러나 당선되어 활동하던 4명 중 3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제명해야 했다.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자민련을 기웃거리거나 구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는 사람, 뇌물 등 비리에 연루된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나왔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진보정당운동은 다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냉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몇년 전 브라질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 브라질 노동자당(PT당)의 대통령 후보인 룰라(Lula)를 만나서 이런저런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혹시 당원 중 탈당하는 사람은 없나요?” 내가 물어본 것 중의 하나였다. 시장이나 의회 의원 중에 탈당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점차 탈당자 수가 적어지는 데서 위안을 삼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책을 뒤적여보니 조선공산당도 그런 경우를 겪었다고 한다. 이제 출발에 불과한 민주노동당이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조만간 닥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또하나 내가 민주노동당원으로서 힘든 것은 ‘장시간 회의’다. 때때로 서로 다른 의견들이 팽팽히 대립하는데 한번 회의를 하면 끝을 보려고 한다. 거기다 ‘이론’이라면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저녁 일곱시경에 시작한 중앙위원회 회의가 아침 여섯시에 끝난 적이 두 번이나 된다. 꼬박 밤을 새우며 회의를 하는 사람들.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하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결코 빈소리가 아닌 것 같다. 긴 회의가 끝나면 한마디 덧붙인다. “이렇게 질기게 회의를 하는 걸 보면 민주노동당은 쉽게 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 민주주의는 정말 힘들고 지루한 것이다.
그런데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역사에 대한 낙관에서 온다고 믿는다. 머리는 냉엄한 현실에 두고 있더라도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 내가 전두환에 반대하면서 밧줄에 몸을 감고 데모를 한 것이 1982년이다. 그러나 십년도 채 안되어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고 전두환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제야 비로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민주노동당이 십년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나는 노동조합운동에 몸담은 것만 이제 이십년차를 바라보고 있다. 전태일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노동조합을 과거보다 편하게 하고 있음을 나는 기억한다. 따라서 지금 할 일은 다음 세대에 진보정당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나는 오늘을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