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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6·13선거를 치르고
이영주 李英洲
경실련 기관지 『경제정의』 편집장 역임. 현재 인천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6·13지방선거를 치르고 나서 한달을 훌쩍 넘긴 7월 하순에야 겨우 고되었던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주변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남편 고남석(高南碩)은 7년 동안 인천시 시의원으로 일했다. 그전에 남편은 학생운동을 했고 노동현장에서 일했다. 1989년 인천·부천 노동자회 사건으로 노태우 정권 최장기 수배자로 5년간 수배생활을 겪기도 했다. 수배가 풀려 집에 돌아왔을 때는 4살짜리 큰애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서로가 얼굴을 몰라 가슴 아파했던 기억도 있다. 나 또한 학생운동을 하다가 소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다. 남편의 활동이 험난하다보니 나는 가정경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도권으로 들어가 지역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활동을 해보겠다며 시위원으로 출마하게 됐고 그야말로 맨손으로 당선되었다. 인천시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시의원으로 선정되어 시민단체에서 주는 상도 몇차례 받았다.
이번 선거에서 남편이 구청장으로 출마했던 연수구는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라면 바다가 그리울 때 한번쯤은 와봤음직한 송도유원지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일산·분당과 같이 주민의 80%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신도시로, 이른바 인천의 강남, 정치 일번지로 불리며 17만명이나 되는 유권자를 상대로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곳이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 국민경선제가 도입되면서 지자체 후보들도 경선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일찌감치 선거운동이 시작된 셈이었다. 우리의 경우 다행히 경선자가 없어서 경선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보도된 바와 같이, 후보자를 민주적으로 뽑는다는 좋은 취지임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면 으레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경선 과정에서,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당원들간에 생긴 반목과 질시는 꽤 깊어서, 한목소리를 내도 시원찮은 판에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 보였다. 이러저러한 문제를 안 일으키려면 ‘그 후보가 아니면 안된다는 당위성’을 갖거나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활동비를 지급하는 것인데, 가난한 시의원으로 소문난 우리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당원들이, ‘열심히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며 흔쾌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갖가지 차를 사오고, 하루에도 몇차례씩 사무실을 드나들며 필요한 물건을 집에서 가져온 분들도 여럿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자원봉사자’가 어디 있겠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무실에는 일찍 나와서 몸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 접대하거나 전화를 받거나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일하는 자원봉사자가 몇분 있었다. 너무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해서 조금의 사례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안 나오겠다며 극구 사양했다.
이렇게 해서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바깥일에 너무 열중해 있는 사람들은 집안일에는 무심하기 마련이다. 남편도 예외가 아니어서 집에서는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두 번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적은 돈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규모가 달랐다. 지역도 두 배나 넓어졌기 때문에 사무실 규모, 선거운동원 수 등 시의원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제 선거비용을 마련하는 것부터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몇달 전, 남편이 구청장에 출마하겠다고 했더니 사람들 첫마디가 돈 걱정이더란다. “10억은 들 텐데”라는 말을 남편 친구들뿐 아니라 시민운동 하는 후배들도 서슴없이 말할 때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10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돈인데 사람들은 ‘억’ 소리를 저토록 쉽게 할까. 소위 사회를 변혁하고자 애쓰는 후배들도 쉽게 ‘수억’은 들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사람들 생각에는 ‘선거=돈’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준비한 돈은, 구청장 후보 법정비용인 9000만원에도 못 미치는 6000만원이 전부였다. 사실 6000만원이라는 돈도 얼마나 큰 돈인가. 시의원 활동비를 연봉으로 따지면 2200만원 정도니 3년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돈이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선거풍토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축구 열기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새벽부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유세에 열중했으나 월드컵 열기에 가려 좀처럼 분위기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듣는 말 중에 가장 거슬리는 말은 “그놈이 그놈 아닙니까?” “처음에는 잘하겠다고 해놓고 막상 되면 부정이나 하고”였다. 때마침 ‘홍삼 트리오’ 사건까지 불거져나와 가뜩이나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나는 억울했다. 남편은 서민들 편에 서서 민원을 해결하느라,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도 들여다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에 매달렸었다. 인천시가 분양한 서민아파트 5000세대의 분양가를 전국 최초로 결산검사를 통해 분석해, 인천시가 취한 151억여원의 부당이득을 가구당 650만원에서 120만원까지 돌려주게 했다. 하지만 집에는 월 120만원 정도만 던져놓고 노동운동할 때처럼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이 내 입장에서는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어쨌거나 일에 있어서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데 중앙에서 잘못한 일까지 다 뒤집어써서 비난받을 때면 마치 큰 벽이 가로놓여 있는 듯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감정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경상도 사람과 마주치면 눈빛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소위 학생운동을 할 때부터 본적이 경상도인 것이 부끄러웠다. 실로 우리나라의 지방색은 오랜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선거 기간 내내 나는 경상도 사람을 만나면 의도적으로 경상도 말을 했다. 서글픈 일이었다.
고마운 일도 많았다. 아무리 당이 인기가 없어도 한 일이 많은데 꼭 될 것이라며 격려해주는 분들, 아무 댓가 없이 모임에 불러주는 분들, 동네분들 불러서 국수 삶아 먹으면서 열심히 홍보해주시는 분들, 참 고마운 분들이다. 아울러 우리의 선거풍토를 건전하게 이끄는 분들이기도 하다.
남편은 시의원이 되면 경조사에 다니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래서인지 4년 전에도 향응을 제공하라는 제의를 거의 안 받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제의는 별로 없었다. 나는 향응 요청을 하는 그분들에게 ‘고남석 후보조차 그러면 안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합동연설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무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편에 비해 좀 썰렁해 보였다. 첫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13평짜리 집 한칸 얻으려 석달도 안된 아이를 안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그 여인네의 눈에서 흐르는 것을 어찌 제가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랬다. 작년에 시대아파트 주민들과 건교부에 가서 데모하고 새벽에 들어온 남편은 나에게 중얼거리듯이 똑같은 말을 했었다.
월드컵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6·13선거에 대한 관심은 냉각되는 것 같았다. 온 국민이 열광하는 잔치에 나도 기뻤지만, 제 고장 일꾼을 뽑는 선거는 축구 열기에 비해 뒷전인 듯해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 가족들은 그 열기만큼이나 서운했을 것이다.
선거 나흘 전에 마지막 합동연설회가 있었다. 7년 동안 남편의 땀과 눈물이 밴 이곳의 주민들이 많이도 나와주었다. 그런데, 상대방 후보가 우리의 사적인 일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패륜아로 몰고 간 것이다. 선거법에 의하면, 상대방의 사생활에 대해 비방하는 행위는 진위에 관계없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남편이 이혼한 것은 민주화운동 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아픈 개인사이다. 그 현장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홍글자』의 헤스터처럼 ‘A’자를 가슴에 크게 달게 된 것도 같고,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나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을 뒤로 한 채 그 곤혹스런 자리를 총총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연단에 앉아서 끝까지 들어야 하는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이렇듯 비방이 난무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남편이 정치만 하지 않는다면 이혼했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날 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사람들이 말하면 먼지는 안 나오겠지만(하늘을 우러러 이권에 개입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이 선거 때마다 간간이 나와서 우리를 괴롭혔다. ‘다시는 이런 일로 계수씨 눈에서 눈물 흘리지 않게 시민운동을 열심히 할 것’이라는 선배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선거를 축제처럼 치르자고 선거에 임하면서 남편과 다짐을 했지만,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일이라 엉뚱하게 오해와 미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후보자 아내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칭찬이 무척 인색하다. 한 예로 후보자 부인 때문에 떨어졌다는 말은 쉽게들 하지만 부인 때문에 득표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틀쯤 잠적하고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이렇게 망중한을 즐길(?) 수 있지만 남편이 참 안됐다 싶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조수석이나 뒤에 탄 사람들은 바깥의 경치를 즐길 수 있지만 운전자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듯 후보자는 모든 것을 감싸 안아야 하니 얼마나 외롭고 힘들 것인가.
월드컵 축제에 견줄 바는 안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낸 세금의 약 30조를 집행하고 각종 민허가를 쥐고 있는 지방자치의 선택은 그렇게 끝났다. 떨어져 괴롭다는 건 우리 한 가정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남편은 이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지역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지난 7년간을 돌아보며 지금 힘들어한다. 선거가 끝난 후 처음에는 나를 위로하려 애를 쓰더니 시간이 갈수록 힘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당한 평가로 주민공동체를 이루고 싶어했던 전국의 뜻있는 일꾼들이 한 정당이 심판당한 탓이건 혹은 저주를 받은 탓이건 이번 지방선거로 인해 무참히 꺾여져나간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선거처럼 후보자의 됨됨이는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정권의 선택과 지역 일꾼의 선택 중 정권의 심판을 위해 일꾼의 신중한 변별은 접어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은 이제 사라졌으면 한다.
낙선한 우리 동네 구의원 후보는 “추첨을 잘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기초의원은 정당선택이 아님에도 ‘가’번 즉 제일 앞 번호를 뽑은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이런 선거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남편에게 말하고 싶다. “어찌 살거나 신발 팔다 남은 거 많응께 갖다 신으소” 하는 이웃이 있고, 지금도 문제가 생겼을 때 남편을 찾는 송도어촌계 주민들, 이것저것 반찬까지 싸주며 마음 짠하게 하시는 이웃들이 있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