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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월드컵과 한일관계
하종문 河棕文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일본사. 저서로 『戰時期におけるに日本の勞/力動員政策』 『일본사 101장면』(공저) 등이 있음. moonstar@hanshin.ac.kr
온 나라와 온 백성을 붉게 물들이던 월드컵 축구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과 ‘짜작 짝 짝짝’의 박수소리의 환청에 시달려야 했던 건 한국인만이 아니다. 전세계 수십억의 축구팬들이 TV 앞에 진을 치고 공의 행방을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했다. 이제 전지구인은 녹색 잔디와 선수들의 드라마를 추억으로 접어두고 차분히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축제의 망아(忘我)도 그랬거니와 원대복귀 또한 우리에게 난관이다.
지난 5월 초부터 일찌감치 나는 월드컵 홍역을 톡톡히 치렀다. 일본의 월드컵과 인권을 주제로 발표를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관련 자료와 인터넷을 이 잡듯이 들쑤시고 다니게 되었고, 정작 나만의 월드컵 열기는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김이 새버린 꼴이 되었다. 물론 폴란드 전에서의 꿀맛 같은 역사적인 첫승에서 금세 회복했지만.
이번 월드컵을 들어 최초의 아시아 지역 개최, 최초의 공동주최, 21세기 최초의 월드컵 등 ‘세 가지의 최초’가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지만, 다른 둘보다 역시 공동주최 쪽이 무게가 있어 보인다. 지난 20세기 전반의 역사적 응어리 때문에라도 우리에게 한일전은 종목을 불문하고 ‘총성 없는 전쟁’이어야 했다. 이번 월드컵도 다르지 않았다. 나만 해도 일본이 이겼으면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런 자신에 대한 반발심이 불쑥 치밀곤 했다. 그런 앙숙끼리 월드컵을 공동으로 주최하게 되다니, 피버노바의 오묘한 반발력만큼이나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과연 한국과 일본의 사귐은 매스컴에서 그리는 대로 ‘축구 화해’를 도약대로 삼아 탄탄대로로 갈 것인가?
자, 먼저 용어의 문제부터 꺼내보기로 하자. 얼마 전에 들은 얘기인즉슨, ‘왜 축구가 영어로 풋볼이 아니고 싸커냐’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FIFA)도 그렇고 대한축구협회(Korea Football Association)에도 분명 풋볼(football)이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말이다. 그 배후로 지목된 나라는 다름아닌 미국. ‘국기’인 미식축구가 풋볼이란 말을 꿰차고 앉았으니 축구는 밀려나서 싸커(soccer)로 불리게 되었다나. 제 잇속에 너무나 밝은 피파의 방침을 존중하더라도 당연히 풋볼인데. 아프간과 팔레스타인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람보’가 미워서도 내 사전에서 싸커를 지우기로 했다.
그 얘기를 떠올리면서 문득 일본은 더 심각하다 싶었다. 중국이 족구라 부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일본의 경우는 아예 축구의 일본어가 사까(サッカ-)인 것이다. 일본의 축구협회 약칭은 JFA(Japan Football Association), 그러나 일본어 공식명칭은 ‘일본사까협회’이다. 분명 사전에는 풋볼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사어에 가깝다.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려던 일본의 머리띠에는 불과 10년 전의 ‘귀축미영(鬼畜米英)’에서 180도 바뀐 ‘친미’가 새겨져 있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두번째 얘기. 일본의 첫 상대는 벨기에였다. 그날 나는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TV 앞에 앉았다. 물론 게임의 승패도 중요했지만, 내 관심의 촛점은 일본 축구의 영웅 나까따 히데또시가 과연 키미가요(君が代)를 부를 것인가에 있었다. 시합 전의 국가 제창 때 카메라는 선발선수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화면 가득히 채운다. 나까따의 입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미동하고 있었다. 그의 좌우로는 덤덤하게 서 있는 선수들도 적지 않은데.
사실 패전 후 히노마루(日の丸)·키미가요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많은 일본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해왔고, 일본의 우파들은 통분을 금치 못하던 차였다. 하지만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전후한 시기에 인터넷에는 ‘생전 처음 상쾌한 기분으로 키미가요를 불렀다’는 관전기가 속출할 정도로 젊은 써포터즈에게 히노마루와 키미가요와 같은 국가상징이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까따는 1998년 벽두 ‘키미가요를 부르면 기분이 처진다’라는 말을 신문 인터뷰에서 내뱉었다. 이전부터 시합 전의 의식 때 키미가요를 부르지 않는다고 밉보였던 그였기에 우익과 우파 여론의 혹독한 비난이 계속되었다. 귀화한 로페스(당시 국가대표)가 ‘키미가요를 부르면 힘이 솟는다’라고 한 발언이 나까따에 대한 야유로 실리곤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호텔을 전전해야 하기도 했다.
국가대표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축구를 한다던 당찬 ‘신진루이(新人類)’ 선수였지만, 약관의 그가 견디기에게는 너무나 음습하고 힘든 시련이었다. 참고로 일본에서 프로축구는 ‘개인’이 허용되는 드문 종목이다(스모를 떠올려보시길). 결국 나까따는 타협을 했고, 그해 이딸리아로 가는 것으로 사건은 매듭이 지어졌다. 그리고 1999년 일본에서 히노마루·키미가요는 국기·국가로 법제화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주위 이웃나라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까따는 충분히 이름값을 해냈다. 하지만 그라운드의 격렬한 충돌과 스탠드의 ‘울트라 닛폰’의 푸른 물결 속에서 나는 한 선수에의 애틋한 연민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의 은밀한 ‘월드컵 보기’였다.
5월 31일의 개막식.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온 진객이 귀빈석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의 황족인 타까마도노미야(高円宮) 부처가 한국땅을 밟은 것이다. 한일 우호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천황가의 대표로서 말이다. 오래 전부터 아끼히또(明仁) 현 천황의 한국 방문이 물밑에서 때로는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작년과 올해 잇달아 교과서 문제라는 악재가 터지면서 결국 현 천황의 동생으로 낙착이 된 것이다.
한국의 매스컴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간단히 그가 방한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화면을 통해 본 그 사람은 분명 한반도 강점과 침략전쟁을 상징하는 ‘일제’의 총책임자 히로히또(裕仁) 천황의 아들이다. 연좌제를 들먹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온통 천황 찬미로 채색되어 있는 역사교과서가 일으킨 파문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월드컵의 화려한 무대 뒤에서는 ‘역사’를 얼버무리는 천황가의 첫 방한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월드컵의 성대한 향연에 온갖 이목이 쏠리면서도 직업상 근심 또한 지울 수 없다. 스포츠 제국주의는 고식적인 주제라 치부해서 잠시 접어두자. 하지만 히노마루 페인팅에 키미가요의 합창, 게다가 지난 전쟁 때의 해군기마저 휘날리는 축구 경기장. 한일 양국의 젊은 써포터즈끼리 어우러지는 ‘순수’한 격돌의 장. 그들에게 우리는 이제 양국의 미래를 맡겨도 되지 않느냐는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껄끄러운 과거사는 회피하고 뚜껑을 덮어버린 채 ‘한일 신시대’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발진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