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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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여 鄭福如

1958년 강원 화천 출생. 1993년 『문학정신』과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가 있음. bokyeoj@hanmail.net

 

 

 

어떤 미소

 

 

저 노인, 지금 저 웅크림은

한 무리의 산양이 풀을 뜯고

햇볕들이 와 와

막사를 짓고 빨래도 하고

온 동네 언덕을 불러

커다란 가마솥을 걸던 들판

그런 연애와 취직과 결혼의 초원

꽃뿌리도 힘껏 품고 있던 아궁이

그러다 천천히 무너져내린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동굴

푸르고 단단한 뼈도 묻은

컴컴한 저 조용함이

머뭇 활짝 금이 가는데,

 

오늘 노인정 작약꽃밭 앞에서

그때 무너지며 함께 묻혔던

햇살 병정들이

저기 옛 세월의 손가락들이

천근 침묵의 문을 막

밀치고 나오는 중이다

 

 

 

버려진 새장

 

 

그 집으로

바람이 들어간다

우리가 살다간 이부자리에

아직 남아 있는

충만한 지저귐과 몽실한 온기

바람이 손을 뻗어 더듬으면

홍매화 오얏향 아릿한

뼈가 만져지는 어떤 아침

자꾸만 다정함이 밥을 해먹으러 일어나고

바쁘게 달그락거리는

싱크대 후라이팬 예쁜 접시들

부엌 한켠에는 맺고 다시 맺었던

양파의 눈물겨운 언약

벗어놓고 간 슬리퍼는

조그만 평화를 끌고 내 정원을 산책한다

여기다 우편함을 놓아야지

머뭇거리는 추억을 밀어내며

바람이 들어앉자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는지

팔랑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는

가랑잎 한장

우리가 내다버린

연애나 동맹, 그리고 청춘 같은,

그 집 어디에도 우리는 없고

이제는 저 바람이 주인이다

 

 

 

크나큰 손

 

 

한 아이의 손에는

커다란 우주가 둥실 들려 있는지

뒤뚱 걸어와

내가 쥐여주는 물건을

자꾸 떨어뜨린다

동그란, 말랑한,

저 아이의 시간 위에는

어떤 빈자리도 없다는 듯

숟가락이나 나무인형, 그 무엇무엇의

딱딱하고 차가운 그런 것들이

안간힘을 쓰다 그만 밀려나간다

 

아직 이 세상으로 오는

손마디가 여물지 않았을 때

오므리고 움켜쥠이 채 생겨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네 손이 자란다는 건

네 우주를 조금씩 덜어낸다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