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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세방 李世芳

1941년 서울 출생. 1961년 자유문학사 신인상, 1965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조국의 달』 『서울 1992년 겨울』 『걸리버 여행기』 등이 있음. saelee@saelee.com

 

 

 

백화나무 숲속의 사냥꾼들

 

 

새벽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대지를 비추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눈부신 아침이다. 삼월 하순의 잔설이 더럽게 보였고 봄기운은 완연했지만 늦추위가 아직 물러서질 않고 있다.

눈산에서 비롯된 바람이 들판을 거쳐 평양 시내의 아파트, 빌딩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그 바람은 다시 인민들의 얼굴에 와서 윙윙거린다.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조선의 자주와 평화를 강탈하려는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까부수자” 평양시내 곳곳을 장식한 현수막들은 지금도 늦추위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마지막이다. 수선과 팔십난 친할머니의 상봉은 이번으로 세번째지만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해온 이땅의 수많은 조선인민들이 한순간에 처절하게 죽어갈지도 모를 세상의 마지막,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노망난 할머니는 수선이 미국에서 온 자신의 손녀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으며 어떤 때는 개처럼 축 늘어져 두 눈망울만 뻐끔거리기도 했고 심할 때는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봤다. 할머니를 열심히 간호해주는 삼십대 중반의 김영희 동무는 수선에겐 천사였다. 입에 하얀 마스크를 하고 손에는 투명한 비닐장갑을 낀 김영희 동무는 할머니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일을 저지를라치면 재빨리 손을 쓰곤 했다. 그렇게까지 된 할머니를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던 수선은 얼굴이 뜨거웠지만 차마 행동에는 옮기지 못했다. 양심에 걸려 자신이 치우겠노라고 하면 김영희 동무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저는 간호사로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야요. 기자선생님이 기자의 훈련을 받으신 것처럼 말이야요. 하나도 걱정하지 마시라요.”

아닌게아니라 그네의 손놀림 하나하나는 오랫동안 숙달돼온 간호사로서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그네는 오물을 처리한 뒤 그 자리를 뜨거운 물걸레로 말끔히 닦아놓았고 할머니에게 깨끗한 새옷을 손쉽게 입혀주곤 했다. 수선이 몇번이고 감사의 말을 할 때마다 그네는 당의 요구에 충실히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자고 있다. 수선은 할머니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잠들어버린 듯 입을 조금 벌린 채 숨소리가 가냘픈 할머니는 어떻게 보면 갓난아기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이미 죽은 사람 같은 섬뜩한 모습이기도 했다. 새벽 세시 반경 눈뜬 수선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에는 보려야 볼 수 없던 비둘기들이 밤만 되면 울었다. 또 밤이 되면 세차진 바람소리가 비둘기들의 울음소리와 섞여 사람의 신음소리같이 또는 아이의 울음소리같이도 들렸다. 그 비둘기 소리에 수선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네는 핼쑥한 얼굴로 창가에 기대어 백화나무숲 쪽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이 마을은 한폭의 그림 같다. 나지막한 분지에 정성껏 가꾸어진 마을은 평양 시내에서 이삼십분 거리에 있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열 채도 안되는 벽돌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집집마다 굴뚝이 있어도 연기를 내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한폭의 풍경화로는 어딘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사는지 안 사는지 억지로 만들어놓은 무대 같은 인상마저 있다. 그런데 이 마을 한복판에는 우람한 나무 서너 그루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도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별종의 질기디질긴 나무들로 그 가지와 잎은 사철을 두고 줄기차게 은빛 광채를 내뿜는다. 그 순백의 광채를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은 산천이 환해질 아침 무렵이다. 그때 백화나무 숲속에 내려앉는 햇살은 선녀의 비단결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황홀한 순간을 자아낸다. 이 순간을 별나게 체험할 수 있게 숲속 이곳저곳에는 한사람씩 앉을 수 있는 등나무의자들이 놓여 있다. 우람한 나무뿌리들이 땅속으로 뻗다가 다시 땅 위로 솟아올라 서너 마리 코끼리들이 엉긴 듯한 장관을 형성했다. 뿌리가 펑퍼짐한 곳에 큼직한 동판이 박혀 있는데 거기엔 ‘일찍이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이 지은’ 시 한수가 새겨져 있다.

 

그대는 나의 기백이요

나의 기백은

기필코 조선의 광복을 찾을 것이니

백화여 영원하라.

 

백화나무숲은 김일성 장군이 이곳을 거쳐 ‘삼지연의 역사’를 펼쳤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백화나무숲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택된 몇몇 외국손님들이 아침이면 등나무의자에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갖곤 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초대된 특별손님들이 개별적으로 등나무의자에 정좌하여 고요 속으로 젖어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명상을 했지만 그중에는 장시간을 두고 불교식 참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제 나라로 돌아가 자신의 체험을 글로 쓴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 황금빛 불상으로 변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백화나무 숲속의 마을엔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곳만이 아니다. 일반 외국손님들이 묵는 고려호텔도 텅 빈 지 오래다.

수선은 외국인이라기보다 조선동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네는 조선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간간이 평양 사투리까지 곁들이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평양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네의 아버지가 열여섯살 소년시절에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에 잠깐 내려온 사이 그만 전쟁이 터졌는데 그후 반세기가 넘도록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평양에 둔 어머니, 아내와 생이별을 했다.

어디선가 군가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산등성이에서 줄지어 행군하는 인민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백여명쯤의 군인들이 쉽게 눈에 띈 이유는 산등성이 뒤로 거대한 눈산이 병풍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군가는 바람결에 간헐적으로 들렸다 끊겼다 하여 씩씩하기보단 오히려 나약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며칠 전 군중집회 때와 비슷했다. 수선이 초대석에서 내려다본 인민들은 개미떼와 같았으며 그들이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했다. 인민들은 언제라도 명령만 내리면 총대를 쥐겠다는 결의로 “미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수선의 양팔에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저 젊은이들, 아니 개미떼와도 같은 인민들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미군의 융단폭격에 몰살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 때문이었다. 희망찬 아침햇살을 받으며 행군하는 군대였지만 그 모습은 마치 물오리들이 뒤뚱뒤뚱 줄지어가는 듯한 애처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CNN 뉴스에서 자주 보던 미사일, 그리고 수백명이 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인민군 정예부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국방색 코트를 입은 두 여인이 산보에 나섰다. 때때로 매운 바람이 허공을 가르며 두 여인의 뺨에 와닿았지만 심한 추위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눈은 다 녹았으나 제설 때 밀어놓은 눈더미가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백화나무숲에 이르는 길가엔 벌써 빨갛게 봉오리를 맺은 진달래나무들이 비닐옷을 입고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산뜻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머지않아 아름다운 꽃들이 피갔디요?”

수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우리 조국에서는 진달래꽃으로 봄소식을 알디요. 진달래를 영어로 뭐라 하디요?”

“아젤리아라고 부르죠.”

“특별히 우리 조국에서는 위대하신 수령님 탄생일에 맞추어 강산을 진달래꽃으로 빨갛게 물들이디요.”

수선은 김영희 동무의 가슴에 단 빨간 김일성 뱃지를 얼핏 보았다.

“알고 있디요. 그런데 영희 동무, 저의 할머니께서 오늘 다시 요양원으로 가신다구요?”

“예, 맞습니다. 할머니께선 오늘 요양원으로 다시 옮겨지십네다.”

“몇시에요?”

“기자선생,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디요. 할머니와 손녀딸의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이라요. 애석하디요. 리별은 슬픈 것이라고 가요에서 내내 그러디 않습네까?”

“아니, 난 슬프지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마 나는 그동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봐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숲속에서 들려왔다. 참새들 소리 같기도 했지만 그중엔 유난히 낭랑한 새소리도 흘러나왔다. 그 낭랑한 소리가 시끌시끌한 다른 새소리들 속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우아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잔잔한 현악 사중주를 듣는 것과 흡사했다. 두 사람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걸었다.

“기자선생한테 질문이 하나 있디요. 물어도 됩니까?”

“물어보세요.”

“부친께선 무슨 리유로 살아 계신 노모를 뵈러 조국엘 오시지 않습네까?”

그 물음에 당황한 수선이 잠시 발걸음을 멈춰 김영희 동무를 바라본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수선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차차 가라앉는다.

“꼭 알고 싶습니까?”

“리해할 수가 없구만요. 오십년 동안 생리별을 한 오마니와 아들을 기꺼이 만나게 해주겠다는 공화국의 인도주의에도 불구하고 손녀딸만 수차례씩 오시니까 궁금하구만요.”

“그러지 않아도 사실대로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수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저의 아버지께서는 두 해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네?”

“그러니까 할머니하고 두 번 전화통화를 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거예요.”

“아이구머니나, 애처롭구만요. 어떻게 위로해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만요.”

“아버지께서는 할머니와 전화하실 때 얼마나 우셨는지……”

그때 일을 수선은 또렷이 기억한다. 부모님 댁에서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평양과 어렵게 전화를 연결했다. 아태위원회측에서 특별히 마련한 통화였다. 온 가족이 함께 듣기 위하여 전화기를 스피커 모드로 해놓고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한 남동생, 그 아내와 다섯살짜리 조카 등 여섯 명이었다. 평양을 방문해 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있던 수선이 전화연결을 주선해주는 평양측 사람과 먼저 통화를 시작했다.

“여기는 평양입니다.”

“여기는 로스앤젤레스입니다.”

“네, 네. 기자선생이시구만요? 안녕하십니까?”

“네. 그쪽의 여러 분들도 안녕하시지요?”

“네. 잘 있습니다. 할머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레. 전화 바꾸겠수다레.”

“할머니? 저 수선이에요. 아빠 바꿔드릴게요.”

“오마니! 저야요. 불효자식 명식이야요. 오마니!”

어머니를 외친 아버지는 그만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안식구들도 모두 눈물을 훔치며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어린 조카는 어리둥절해했다.

“내 아들아! 명식아!”

비명처럼 아들의 이름을 부른 할머니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여기까지 수선의 기억은 또렷했다. 울음바다가 된 몇분 동안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반시간에 가까운 통화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기억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하루라도 빨리 달려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겠다고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던 소리는 귀에 쟁쟁하다. 그런 아버지의 말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수선의 귀를 쟁쟁히 울렸다.

“어쩔 수 없었어요. 살아 계신 할머니를 슬픔에 빠뜨릴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는 아들의 수많은 사진을 보시면서 다음번엔 이 손녀딸이 아버지를 모시고 올 것이라고 믿으셨어요. 그렇지만 나는 더이상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모든 것은 끝났어요.”

이쪽 세상을 뒤덮고 있는 전운으로 모든 것은 끝난 듯했고 암울한 하루하루가 간신히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라크 침공 3주기를 맞은 미국은 김정일정권을 더이상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었고, 이곳에서는 전쟁도발자 미국놈들 원수 갚기에 이를 갈았다. 인민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침략자 전쟁도발자 “미제국주의 타도”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있었다. 김영희 동무는 김일성 수령의 헌시동판 앞에서 두손 모아 시를 음미했다.

“기자선생께선 조선어를 읽을 줄도 압네까?”

“말만 좀 하는데 어떻게……”

이 순간 잔설 속에 드러난 나무 뿌리 근처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영롱하고 예리한 빛줄기가 수선의 눈에 비쳤다간 사라졌다. 그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눈의 결정 어느 모서리에서 생긴 미묘한 빛의 굴절이 아니었을까.

“위대하신 수령님의 헌시를 읽어드릴까요?”

“아닙니다. 지난번 왔을 때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보다는 할머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영희 동무 말씀 중에 할머니가 고통을 모르신다는 소리는 무엇인가요?”

“이런 일이 있었디요. 아니 숱하게 있었디요. 할머니는 자주 넘어지시는데 무릎에 멍이 들 정도로 다치셔도 아무렇지 않으시디요. 우리 같으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텐데 할머니께선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나봐요. 고통을 모른다는 사실, 얼마나 편하고 행복하기까지 합네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죽을 때도 아무 고통 없이 죽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데 있갔습네까?”

 

할머니는 떠나갔다. 아태위원회 소속 몇사람이 탄 검은 벤츠가 오더니 뒤따라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와 김영희 동무를 태웠다. 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위해 할머니를 며칠간 간호사까지 동반시켜 양로원에서 수선이 머물고 있는 초대소에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수선은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두손을 잡았다. 앙상한 손목이었지만 따뜻했다. 할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수선이 할머니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굿바이 그랜마. 아이 러브 유.”

그 말은 할머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앰뷸런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수선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던 모습이 생각나 그네를 못 견디게 한 것이었다.

“그만 눈물을 거두시라요. 정신을 차릴 때야요. 우리는 토론을 해야 됩니다.”

아태위원회에서 나왔다고 자기 소개를 한 최순실 동무가 수선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

 

두 여인이 응접실에 마주앉았다. 용성 물병이 테이블 위에 있었고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서로 마주하여 양쪽 벽에 걸려 있었다. 사면은 벽이었지만 어느 벽엔가 문이 장치돼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영사기가 있었다. 첫번째와 두번째 평양 방문 때 「꽃 파는 처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벽 옆에 부엌이 있었으며 안내원이 쓰는 작은방과 욕실 그리고 그 건너편엔 손님이 쓰는 방이 있었다.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창은 딱 한군데인데 최순실 동무가 그 유리창을 마주하여 수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뚱뚱한 몸을 한 최순실 동무는 고위층 사람인 듯했고 목소리가 괄괄했으며 나이도 오십 중반은 넘어 보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 속담을 아시디요?”

수선은 최순실 동무의 말이 떨어진 지 몇초가 지난 후에야 간신히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자선생,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우리 당으로서는 불쾌했디만 리해하기로 하였습니다. 질문이 있시요. 기자선생은 단 한번의 기사를 보내놓고 더이상은 없습네까? 리유는 무엇이죠?”

그러고 보니 수선이 평양에 도착한 이후 e메일로 기사와 사진을 송고한 것은 단 한번, 평양 시내를 가득히 메운 군중대회 때였다. 그때 높게 자리잡은 초대석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두 페이지에 달하는 기사와 함께 송고했고, 그 사진과 기사는 이틀 후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톱을 장식했다. 노스 코리아의 수도 평양을 뒤덮은 수만명의 인민들이 군중대회를 하는 사진이 일면에 크게 자리했으며 기사는 네 면으로 나뉘어 게재되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후로는 일체의 전자통신이 두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모든 통신망이 마비돼 있지 않아요? 내가 쓰는 노트북 컴퓨터는 무영디무 아니 무용디물이라고 하나요?”

“쓸 수가 없다는 말씀이구만요. 감탄했시오. 어려운 말까지 아시고.”

통신망 두절 사실을 번연히 알고 있을 최순실 동무는 그냥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그렇지만 컴퓨터가 무용디물이 된 이쪽 세상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에 돌아가면 그 생각들을 정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알디요, 기자선생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디. 우리 공화국이 참담한 종말을 맞고 있다는 생각, 하루라도 빨리 북조선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 이런 것들로 가득 찬 기자선생을 우리는 잘 알디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갔시요.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우리 공화국을 친다면 전인민이 떨쳐일어나 싸울 것입니다. 기자선생께서 곧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신문에 무슨 기사를 쓰건 그것은 절대로 선생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선생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선생이 얕은 머리로 기사를 쓴다면 큰 오산입네다. 우리는 진실을 원합네다. 기자선생, 선생의 깊은 생각은 가슴속에 간직돼 있을 것입네다. 기자선생, 불우했던 민족전쟁 때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을 돕는답시고 북조선을 초토화했지만 그후 우리는 굳건히 일어섰습니다. 기자선생, 우리 조선의 력사에 조선민족이 다른 민족을 괴롭히거나 잡아먹겠다고 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네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된 겁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무력도발자 아니오? 인류 력사상 지금까지 핵무기를 쓴 나라는 미제국주의자뿐이며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첨단무기들을 생산하여 자신들만 잘살자는 모리배꾼!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이야말로 ‘악의 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최순실 동무는 용성 물병을 집어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한없이 물을 들이켜는 최순실 동무의 하얀 조선옷 가슴에 붙은 빨갛고 동그란 뱃지가 수선의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수없이 보아온 김일성 초상화가 새겨진 뱃지가 새삼스럽게 눈길을 끈 것은 지금 바로 이 시간 미국에서 연방 국회의원들이나 관리들 그리고 지방 관리들의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직사각형의 성조기 뱃지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있다면 그 두 종류의 뱃지가 뜻하는 것은 각기 무엇이며 또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 퍼뜩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나의 뱃지는 독립운동으로부터 비롯된 1인독재권력의 상징으로, 또다른 뱃지는 9·11에서 비롯된 미국인의 애국심 표현 또는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신제국주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수선은 생각했다. 자칫하다간 그것이 이것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이 그것으로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머리가 무거워졌다. 머리를 식히려고 수선은 몸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요. 앞을 보시라요. 내 눈을 보시라요.”

겁에 질린 수선이 최순실 동무의 눈을 보았다. 그네의 두눈은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 눈속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두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의 분노는 우리 당의 립장이요. 우리 당의 립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기자선생,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친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조선의 생존을 위하여 대포동미사일에 핵폭탄을 실어 워싱턴으로 날려버리겠습니다. 기자선생, 선생이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는 전적으로 선생의 자유입니다. 인류 력사상 오늘과 같이 위태로운 때는 없었습니다. 끝으로 기자선생,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요.”

상부에서 지시를 했건 그렇지 않았건 최순실 동무의 열변은 수선의 마음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이지 못했다. 일장연설을 끝낸 최순실 동무는 수선에게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갔다.

새로 온 안내원 동무가 자신을 소개했다.

“리숙자라고 합니다. 제가 기자선생을 보살펴드리러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새로 온 리숙자 동무는 영희 동무보다 훨씬 더 상냥해 보였고 나이는 이십대였다.

 

할머니와 헤어진 그날 밤 수선은 불면증에 시달렸다. 할머니와 나란히 드러누워 자던 지난 며칠간은 벌써 과거사가 되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둘기들의 우는 소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노트북 컴퓨터와 마주하는 일이다. 수선은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E메일이나 인터넷 통신은 아직도 마비상태다. 그래도 수선은 그날그날의 일기를 입력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되찾곤 했다.

 

오늘 할머니가 떠나가셨다. 나를 돌봐주던 영희 동무의 말이 생각난다. 참으로 할머니는 고통을 모르실까? 그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반세기 동안 아들을 보려고 이제까지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끝내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마도 그 인내의 벼랑 끝에서 그만 미쳐버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된 할머니를 어떻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3년 전 내가 평양을 처음 방문하여 할머니의 생존을 확인하고 전화했을 때 아버지는 큰 목소리로 “야, 우리 딸내미가 할머니를 찾았구나. 장하다 수선아!” 하면서 우셨다. 아버지는 즉시 할머니를 보려고 국무성에 평양방문 허가신청을 냈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드릴 갖가지 보약을 사기도 했고 여행가방도 마련했다. 모자간의 전화통화는 딱 두번 이루어졌고 그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 기구한 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대체 나는 무엇인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는가? 손거울을 보듯 나를 본다. 어머니 얘기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태몽으로 수선화가 만발한 아름다운 꽃밭을 보았고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수선이라고 지었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코리안 2세다. 미국인이다. 나는 미국 일류신문사의 기자생활에 만족하지만 때때로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신문에 옮기는 일은 나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무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따분하기 그지없다. 왜곡되지 않은 사실 그 자체의 보도를 신문독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상상력과 판단력을 동원해 해석할 것이다. 매일 아침 미국의 신문독자들은 한손으로는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다른 한손으로는 신문을 들추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신문사의 수십명 내지 수백명에 달하는 기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스토리를 모은 신문은 한잔의 커피만도 못하게 곧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힌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도 독자들이려니와 기사를 편집하는 신문사도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취재해왔지만 특히 싸우스 코리아의 반미데모 취재기사는 활자화되지 못했다. 그것은 여중생 사망사건이 반미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의 정당성을 기사화한 것이었다. 편집국에서는 내가 쓴 기사 대신 배은망덕한 한국의 반미데모에 대응하여 미군을 당장이라도 철수하겠다는 다른 기사를 실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갖는 의문과 회의는 최근에 더 자주 있다.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어머니가 그립다. 이 밤은 그 어느 밤보다 참으로 지루하다. 2006년 3월 28일.

 

이제 막바지다. 평양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매일 한차례씩 공습대피 연습으로 싸이렌이 울렸다. 밤에는 집집마다 소등을 하여 암흑 세계가 되었다. 대동강 근처의 지하철에는 수만명의 인민들이 대피할 수 있다고 했고 영변에도 대규모의 지하 대피소가 있다고 했다.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최후통첩을 한 셈이고 평양주재 외국 공관원들과 그 가족들은 서둘러 출국하기 시작했다. 수선도 이틀 후엔 평양을 떠난다.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지루했다. 혹시 출국이 좌절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출국이 좌절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자 눈앞에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있을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이미 오래 전에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일어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코리안들이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생이별을 한 채 그러한 고난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두 체제에서 살아왔다.

“이제 내일모레면 기자선생은 평양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가시디요?”

“네.”

“그간에 여러가지로 불편이 많으셨겠디만 조국의 사정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 수고해주신 많은 분들께 무엇이라고 감사의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선과 리숙자 동무는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들고 있는 점심은 오붓했다. 서너 마리의 학이 새겨진 옅은 옥색 사기그릇에 소복이 담긴 잡곡밥, 찐 달걀, 시금치 나물, 취나물, 연근조림, 장조림, 그리고 짭짤하게 소금을 뿌려 정사각형으로 자른 김모듬이 가지런히 차려 있었다. 식사 때면 늘 그랬지만 수선은 먹는 것보다 남기는 게 훨씬 많았다. 입맛도 그렇게 왕성하지 않았지만 잘 차려진 음식 앞에서는 배고파하는 수많은 인민들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수선은 몇 숟가락의 밥과 몇 젓가락의 반찬으로 식사를 끝낸 지 오래지만 리숙자 동무를 위해 빈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기자선생은 오늘도 식사를 다 못하시는구만요?”

“죄송해요.”

“서양식이 아니라서 드시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늘 우리 음식을 먹는걸요. 집에서도 밥 잘 안 먹는다고 어머니가 늘 꾸짖으십니다.”

“살찌지 않으시려고 그러시겠디요? 미국음식은 아마 살이 많이 찌겠디만 우리 음식은 태반이 남새 아닙네까?”

“네. 우리 음식은 몸에 좋아요. 여기 있는 시금치나 취나물은 겨울철에 보기 드문 것들인데요.”

“이제 우리도 사철을 두고 갖가지 싱싱한 남새를 다 재배하디요. 옛날 같으면 꿈도 못 꾸던 일이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남조선의 기업체가 들어와서 대형 온실을 건설한 덕분이야요. 이제까진 시험단계지만 머지않아 전체 인민들에게 배급이 가능하다고 합네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고 북과 남이 손을 잡고 통일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수선은 한탄 섞인 말을 했다. 사실 그러한 한탄의 소리는 북조선 인민들 입에서 늘 나오는 것이었으나 남한의 경우엔 좀 달랐다. 수선이 십여 차례 남한을 방문했으나 남쪽 사람들에게서 민족통일의 절실함은 느낄 수 없었다. 남쪽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현실에 두고 있었으며 그들의 경제적 우월감은 지대한 것으로 기존현실을 파괴할지도 모를 통일에는 냉정한 의견들을 갖고 있었다.

“물론이야요. 북남이 어서 통일을 해야 되는데 우리 민족의 통일을 훼방놓는 미국은 세계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왜 우리 북조선을 치겠다는 겁네까? 그들은 정말 우리 인민들을 몰살시키려는 것입네까?”

‘아닙니다. 인민들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며 김정일정권을 무너뜨려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지만 수선은 참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수선아, 사람은 중요한 때일수록 한마디의 말이라도 열번 생각한 뒤 해야 된다.” 미국이 악의 축 타도라는 기치 아래 무차별 폭격을 저지른다면 애꿎은 수많은 인민들과 자신의 할머니와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리숙자 동무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그 전쟁을 어떻게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밖에서 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놀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흑인 남녀가 안내원 동무와 작별을 하는데 흑인여자는 통곡을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말로 떠들었다. 리숙자 동무가 놀란 수선을 다시 밥상 앞에 앉혔다.

“미친 여자라요.”

“미쳤다니요?”

“저 흑인 부부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인데 자기들을 돌봐주던 우리 동무에게 도둑의 루명을 씌웠디 뭡네까?”

“도둑이요?”

“흑인여자가 끼고 있던 반지에서 다이아몬드가 빠졌다는 거예요. 그 다이아몬드를 우리 동무가 훔쳤다는 거디요. 우리 공화국에선 도둑질이란 상상도 할 수 없디요. 도둑질이란 미제국주의 사회에서나 있는 것 아니갔시오? 그 나라에선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벼간다면서요? 가난한 사람도 도둑질, 있는 사람도 도둑질, 그래서 그 나라에선 집집마다 호신용 총을 갖고 있다면서요?”

“그 말씀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네다. 그런데 리숙자 동무, 지금 이 백화나무 숲속 마을에는 방문자들이 몇명이나 있디요?”

“외국 손님들은 다 떠났디요. 하지만 이곳은 다른 귀한 손님들로 꽉찰 것이라요.”

“다른 손님들이라니요?”

“지금 남조선의 애국투사들이 공화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인간사슬이 되어 미제국주의자들의 폭격에 항거할 것입니다. 유명하신 목사님을 위시하여 남조선 대학생들이 투숙하고 있디요.”

“그 목사님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을까요?”

“상부 허락을 받아야 합네다. 시간상 어려울 겁네다. 기자선생께서는 급합네다.”

 

수선이 기다리던 그날은 왔다.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으며 냉기가 대기 속에서 일렁이고는 있지만 백화나무 숲속의 마을은 따뜻했다. 수선이 묵고 있는 초대소 근방에 드문드문 있는 다른 초대소들 쪽엔 남쪽 대학생들인 듯싶은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당장 다가가 인터뷰를 시도했겠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하여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평양을 빨리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반나절만 지나면 그네는 평양을 아주 떠나게 되며 할머니는 한점의 슬픈 과거사로 아버지와 함께 아득한 기억 속에 묻힐 것이다. 마지막 반나절의 시간은 초조와 불안과 흥분이 엇갈렸고 혹시나 하는 기우가 그네를 에워싸기도 했다. 수선은 진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마지막으로 백화나무숲에 가서 정신을 가다듬고 싶었다.

하늘에서 뿌려지고 있는 아침햇살은 눈부셨다. 이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아 백화나무는 춤을 추듯 은빛 가지며 이파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군가 벌써 등나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수선은 한 남자의 맞은편 등나무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남자는 명상이 아니라 기도를 하고 있었다. 간혹 간절한 중얼거림과 함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조용한 시간을 가져볼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수선의 주의는 이미 중년남자에게 뺏겨 있었다. 그는 머리가 긴 편이었으며 입고 있는 카키색 외투로 미루어 북쪽 사람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의 무릎에는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아마도 리숙자 동무가 말한 남쪽의 목사인 것 같았다. 그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는 동안 그의 두눈이 떠졌고 반사적으로 수선은 얼굴을 떨구고 눈을 감았다. 그네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명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새소리들이 유난히 그네의 귀를 자극했다. 지금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어느 사이에 시끄러움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선은 그만 눈을 떴다. 명상하는 시늉을 하기보단 유난히 떠들어대는 새들을 올려다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들은 옹달샘에서 목욕을 하듯 그 푸덕이는 깃털들로 눈부신 햇빛을 물방울인 양 튀겨댔고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었다.

“왇 어 뷰티풀 모닝!”

남자의 예기치 않은 유창한 영어에 수선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후 아 유? 아니, 당신은 누구이며 왜 나에게 영어로 말하지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남쪽에서 온 목사입니다.”

“남쪽이라면 싸우스 코리아?”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웃음은 곧 사라졌다.

“저는 당신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선이 마주한 이 중년남자는 그네가 만나보았으면 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저도 목사님을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인터뷰에 응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목사님 성함은 무엇이죠?”

“문일남입니다.”

“저는 수선 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어떻게 성경책을 마음대로 갖고 다니시죠?”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이 이상한가요?”

“이쪽 세상에서는 종교를 믿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쪽 세상이 지니고 있는 엄연한 아이러니를 말씀드릴까요? 북한에서는 기독교를 인정해주지 않으면서도 일력 표시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한 서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나 불교의 소규모 목회는 용인하고 있습니다. 그 목회내용에 얼마만큼의 진가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만.”

문목사는 침착했으며 자기의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듯한 눈치였다.

“어쨌든 북한에서는 십자군 식의 무모한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평양에 오시게 됐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왔습니다.”

“목사님, 기자와의 인터뷰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대화를 원하시지요?”

중년남자는 조금 전보다 몸자세를 더욱 꼿꼿이 세운 뒤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하나님의 사도로서 잘못된 미국의 폭력에 항거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잘 이해가 안되는데요.”

“저는 앞으로 있게 될 미국의 폭격에 인간방패로 서기 위해 왔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복잡한 국제정치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문일남이라는 저는 이곳에 이미 도착한 수백명의 인간방패 중 한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판문점을 통해 이북으로 진입하려는 인간방패 자원자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만명의 완전무장한 미군과 한국군이 초비상 경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젊은이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해 북한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의도적으로 인간방패를 환영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절대로 북한정부의 의도는 아닙니다. 북한이건 남한이건 우리의 한반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일촉즉발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한반도의 전쟁은 인류의 멸망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사랑을 심어주셨고 지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지혜는 평화와 번영에 목적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휴머니스트이십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님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요? 현실은 지나간 과거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이 현실에서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많은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왜 그때 그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합니다. 현실은 숨쉴 사이도 없이 내일이라고 하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는 앞으로 올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사랑과 지혜를 이해하고 실천에 옮긴다면 미래에는 과거에 있었던 잘못의 되풀이는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에 절대 동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의 복잡한……”

“네, 그렇습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미래는 곧 닥쳐올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 미래를 맞이할 차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저는 머잖아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 앞에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아니, 목숨을 빼앗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순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의 책임이 마치 저에게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갓 블레스 아메리카’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지요? 하나님의 가호가 인류 전체에,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 내려지는 것은 안됩니까? 왜 아메리카만이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야 합니까? 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제가 믿고 있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억압한다거나 어느 특정한 나라의 부를 위하여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행사하고 있는 힘이 과연 약한 자를 위한 것인지, 더 나아가서 그 막강한 힘이 잘못된 폭력은 아닌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그 어떤 직책도 갖지 않은 남한의 목사다. 수선은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고만 있던 질문들을 이 목사에게 퍼붓고 싶었다.

“목사님은 인민을 탄압하는 이땅의 공산독재정치에 동정적이십니까? 해마다 세계인권위원회가 이땅의 비참함에 대해 내놓는 보고서를 아십니까? 김일성 주석 이후 그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넘겨받은 권력이 현대 국제사회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독재정권이 가지고 있는 핵폭탄은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일남 목사는 백화나무 잎들 사이로 번져내려오는 빛나는 햇빛을 보고 있었다. 은빛 광채를 내는 나뭇가지들과 팔랑거리는 이파리들을 보면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목사가 공산주의니 독재정치니 하는 것에 동정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얼굴을 돌려 수선을 바라보았다. 수선과 마주친 문일남 목사의 두눈은 처음과는 달리 힘이 없어 보였다. 수선이 다그쳐 물었다.

“목사님,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시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문일남 목사는 곧 침착해지더니 두손으로 무릎 위의 성경책을 꼭 잡고는 은빛 나뭇잎들 사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천천히 입을 뗐다.

“네. 사랑하는 아내와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있습니다.”

“목사님, 당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당신의 죽음을 값진 죽음이라고 자랑스러워할 줄 아십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죽음보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목사님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죄가 아닙니까?”

그렇게 허둥지둥 말한 수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일남 목사를 내려다보았다. 꼼짝도 않고 하늘만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카키색 외투에 움츠린 그의 몰골엔 이미 겨울을 잃어버린 힘없는 잔설이 흙바닥에 뒤범벅이 된 듯한 그런 슬픔이 엿보였다.

수선은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노, 노’를 되풀이했다. 전쟁은 안된다. 그러면서 그네는 설마 미국이 이라크 침공 때처럼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겠지 하는 한가닥 염원을 가슴에 간직했다. 설마 자신의 할머니나 리숙자 동무나 문일남 목사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지는 않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한국속담이 그의 머리에서 자꾸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저는 시간이 급합니다. 우리는 헤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주신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부디……”

“마지막으로 꼭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꾼 꿈 이야기입니다. 며칠 전 저는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힘찬 목소리가 백화나무 숲속에 울려퍼졌다.

“꿈은 온통 환희의 울음바다였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수백만 젊은이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얀 옷을 입고 손에 손에 새파란 한반도 깃발을 휘날리며 백두에서 한라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지나간 월드컵 축구경기 때보다 수십배 수백배나 더 될 그런 장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했으며 사랑의 가슴으로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남북한의 위정자들도 어찌할 바 모르다가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아, 우리나라 삼천리 강산은 그야말로 환희의 울음바다였습니다.”

 

백화나무숲은 깊은 적막 속에 있었다. 낮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눈부신 햇빛 속에서 재잘거리기도 했으며 간간이 낭랑한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허공에 긴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밤이 되면 아이 우는 듯한 기분 나쁜 비둘기 소리만 있을 뿐 사람의 기척이라곤 종적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