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함석헌 연구의 출발점
김성수 『함석헌 평전: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 삼인 2001
김용준 金容駿
고려대 화학공학과 명예교수
함석헌(咸錫憲) 선생께서 숨을 거두시던 날 나는 몹시나 바빴다. 40년을 가깝게 또는 멀리서 바라보며 또 나의 삶속에 깊이 들어와 계셨던 나의 스승을 잃던 날,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새벽부터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던 그날에 한 젊은이가 선생님의 시신을 보고 자기의 삶의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 자체는 나에게 그저 놀라운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 참으로 여러 분들의 고마운 보살핌을 받아서 현재의 세계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어로 “An Examination of the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hon: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Twentieth Century Korea”라는 학위논문을 썼다는 그 자체가 나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함석헌 평전: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라는 본 저서가 선생님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부로 우리말로 다시 정리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나로서는 감격스러울 뿐이다. 저자의 「책머리에」에 담겨져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지도교수가 요구한 논문은 ‘함석헌 전기’가 아니라 영문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퀘이커로서 그리고 20세기 한국에서의 종교다원주의의 개척자로서의 함석헌의 민중의 소리 즉 씨ᄋᆞᆯ의 소리를 비판하는 시론(試論)이라는 전제가 있는 글이기 때문에 글의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평한다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우선 이 저서는 함석헌의 생애를 대체로 네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1901년부터 1923년까지를 제1기로, 1923년부터 1945년까지를 제2기로, 1945년부터 1960년까지를 제3기로, 그리고 1961년부터 1989년까지를 제4기로 나누고 있는데, 제1기가 탄생으로부터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때까지이고 제2기는 일본에서의 생활에서 해방을 맞이하는 때까지로 잡고 있다. 제3기는 함석헌의 생애에 단 한번 있었던 국가공무원이라고 할까, 평안북도 교육부장을 맡게 되는 때부터 남하하여 『사상계』라는 월간지에 투고하여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까지로 잡았고, 1961년부터 1989년 돌아가실 때까지를 제4기로 잡았다. 대체로 이렇게 네 시대로 구분한 것은 별로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함석헌 선생이 평소 애송하신 영시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인생의 찬가」(A Psalm of life)이다. 이 찬가의 마지막 연에 “여전히 이루었다 하면서 여전히 좇아가면서”(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라는 시구가 있다. 저자가 이 사실을 알고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책머리에」에서 “다 성취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항시 추구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라고 서술한 데 대하여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이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는 저자와는 다소 차이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함석헌이 일생을 통하여 여러번 변신한 사실을 두고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 기리고 있는 그 나라를 향한 끊임없는 싸움으로 일관한 사람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전도 하나하나 귀한 자료를 담아 그것으로 완성된 작품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앞으로 끊임없이 그의 깊고 넓고 높은 인격을 추구하는 평론 내지는 평전이 출간될 것을 기대해본다.
이 저서는 제도권 내의 대학 학위논문이라는 제한을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역시 저자가 보는 함석헌은 1961년 이후 즉 저자가 분류한 제4기의 민주화운동 지도자라는 일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평전에 등장하는 함석헌과 가까운 사람들도 대부분 제4기의 함석헌과 가까운 인물들이다. 그것은 올해 4월의 문화인물 행사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 모든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귀결이고, 또한 거목의 어느 한 각도를 그 나름대로 올바르게 조명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이 함석헌의 전부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고개를 든다. 저자가 함석헌을 “순진한 사람이라기보다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23면)으로 표현한 대목이 저자가 함석헌을 보는 시각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가 「마치는 말」에서 “함석헌은 씨알의 저항을 위해 잘 짜여진 어떤 전략이나 전술 프로그램은 갖고 있지 않았다”(194면)라고 한 대목이나, 당신 스스로를 삶의 실패자요 바보새로 비유한 함석헌의 모습과도 상치된다.
저자는 또한 함석헌 선생의 과학관을 소개하면서 필자와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는데(123〜24면), 나는 40년 가까이 함선생을 곁에서 모시면서 화학자로서 선생을 대한 적도 없고 선생과 과학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일도 기억에 없다. 함선생의 과학관은 그 시대의 흐름이지 특별히 선생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소위 뉴튼의 결정론적 인과율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의 합리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신 것도 사실이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대목이라든가 종교의 진화를 논하시는 함선생의 글은 동시대의 기독교의 어느 목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보적 사상이었던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사실과 다른 기술이 눈에 띄는데, 첫째로 함선생이 동경에서 다니신 학교는 현재의 쯔꾸바대학의 전신인 동경고등사범학교이다. 동경사범학교로 기술된 것(53,57면)과 권두의 사진설명은 수정해야 할 것이다. 김교신 선생을 함선생의 오산학교 동창생이라고 한 것(54면)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김교신 선생은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김교신은 오산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없다(57면). 김석원은 친일파 경찰이 아니라 친일파 군인이었다(93면). 남강 이승훈은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은 일이 없다(47면). 이상의 지적은 적절한 방법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지면 관계로 칭찬보다 비판이 앞섰던 것을 자인하지만 이미 첫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함석헌이라는 인격을 영어로 소개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최초로 그 평전을 애써서 출간한 저자 김성수 박사에게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깊고 넓고 높은 함석헌의 사상이 앞으로 계속 연구되고 추구되어 새롭게 창조적으로 해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