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이산적 정체성과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

 

 

박진영 朴眞暎

미국 워싱턴 소재 아메리칸대학 철학과 교수. 편저로 Buddhisms and Deconstructions, 논문으로 “Postmodernism: the End game of Literature?” “Zen Hermeneutics via Heideggerian and Derridean Detours” 등이 있음. jypark@american.edu

 

 

1. 들어가는 말

 

2003년으로 한국인의 미주 이민이 백년을 맞았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백여명의 한국인이 1903년 처음으로 이주한 후 한 세기가 지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과 그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민족, 국가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 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의 한국과 ‘우리’를 이해하는 데 그 나름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한다. 국제화·세계화라는 지난 수년간의 한국사회 진언(眞言)을 생각해보아도 이러한 작업은 의미있을 것이다. 한국내 외국인노동자의 법적 문제, 중국 조선족의 국적문제, 최근 송두율 교수 사건이 가지고 있는 명암 등을 통해서 볼 때도 한국사회가 더이상 닫힌 민족주의를 기존 체제의 유지나 사회화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한국문학과 미국문학에서 그 의미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또한 이들과의 만남은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단상이다.

 

 

2. 역사, 전제 그리고 흔적

 

한 작가 혹은 한 문학작품의 정체성이란 문자 그대로 그 작가와 문학작품의 참모습을 말한다. 정체성의 영어표현인 아이덴티티(identity) 역시 그러하다. 아이덴티티라는 단어가 “한 개인을 타인들과 구분짓는 특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 역시, 한 개인을 타인과 구분짓는 ‘다름’이 그 개인이 스스로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것과 ‘같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이를 ‘바른(正) 몸체(體)’라고 하여 ‘정체(正體)’라고 부르고 영어는 이를 ‘같음’이라 한다. 이는 서양의 사고에서 최고의 존재인 신을 ‘진리’나 ‘바름’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와 동일한 자”(I am who I am)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서양철학에서 오랜 동안 진리를 주체(마음)와 객체의 동일화, 혹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객체의 사실의 동일화로 규정해온 것과 유사한 양상이기도 하다.1 동일성이 바로 진리의 모습이며 한 개인의 참모습이라면, 정체성에 연자부호(連字符號, 즉 하이픈)를 가지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Korean-American)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의 문학이란, 그리고 그 문학의 정체성이란 바로 정체성에 대한 반란이다.‘동일성’을 참진리로 따지는 논리에서 진리란 연자부호로 연결될 수 없다. 그러한 정체성은 정체성의 불가능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분열된 자아의 시초이다. 정체성의 불가능성, 분열된 자아의 정체성은 곧 그들이 있는 사회에서의 위치 즉 주변인이라는 모습으로 현실화된다.

인천항을 떠나 최초로 한국계 미국인이 된 한인들은 한국사회의 주류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를 휩쓴 기근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며, 유교사회의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떠난 여성들이다.2 그들은 한국땅에서 ‘한국인’으로서의 한계를 안고 떠났지만, 결코 쉽게 ‘미국인’이 되지는 못했다.3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이 되지도 못한 이들은 결국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 이민자들의 존재에 관한 명상인 『우리 안의 이방인』이라는 저서에서 쥘리아 크리스떼바는 묻는다.“분열된 정체성, 정체성의 만화경(萬華鏡): 미쳤다거나, 거짓말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우리 이방인들의 전설을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4

정체성의 무정체성화(無正體性化) 현상은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 형성과 그 문학 읽기의 전제조건이다. 정체성의 무정체성화는 그러나 한국계 미국인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무정체성화는 기존 가치의 내재화와 내재화된 가치의 잔재 혹은 흔적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그러므로 정체성 문제는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주요주제일 뿐 아니라 정체성에 ‘연자부호’를 가진 작가들의 공통된 현상으로 나타난다.5 한국계 미국문학 형성의 문턱에서 강용흘(Younghill Kang, 1898~1972)은 『동양이 서양으로 가다』(East Goes to West, 1937)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이미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문학에서의 정체성 분열이 반복적인 주제일 것임을 보여주었다. 강용흘의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김은국(Richard E. Kim, 1932~ )의 작품은 강용흘과 달리 전적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역시 정체성, 특히 잃어버린 정체성은 『잃어버린 이름』(Lost Names, 1970)이라는 그의 작품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문학의 주요주제가 된다. 김은국은 말한다.

 

나는 ‘잃어버린’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는 나의 세대에 대한 나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며, 또 현재의 나와 같기도 하다. 나는 소속된 곳이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하고 다시 북한으로 그리고 남한으로.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세대의 한국인들은 다른 시대들 사이에 존재했다. 일본의 점령…… 그 얼마 지나서는…… 조국의 분단…… 그리고 이주(移住)…… 다시 길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황량한 슈츠베리 같은 곳에서 리차드 같은 이름을 가진 신세가 되었다.(…) 나는 잃어버렸다. 두 문화 사이에서, 두 세계 사이에서,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6

 

여기서 김은국이 지적하고 있는 분열된 정체성은 한국계 미국작가라는 이중성조차 얼마나 단순한 일반화인가를 절실히 암시해준다. 그에게 분열된 정체성 혹은 방황하는 자아는 단지 통합적 한국과 총체적 미국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20세기 한국사에 존재하는 일본, 중국, 그리고 남북한의 분단사를 총괄한 것이며, 또한 이는 미국으로 이주한 김은국 개인의 역사일 뿐 아니라, 근현대 한국사를 살아온 한민족의 분열된 정체성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은국의 말은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이산적(離散的) 정체성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한다.7

김은국의 다음 세대로 그보다 30년 뒤에 작품을 발표한 이창래(Chang-Rae Lee, 1965~ ) 역시 정체성은 그의 문학의 주요주제이다. 미국 학계와 문단에서 한국계 미국문학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국어 사용자』(Native Speaker, 1995)에서8이창래는 주인공을 사립탐정으로 설정함으로써 정체성의 무정체성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정체성의 유동성과 겉으로 들어난 정체성의 가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작품의 끝부분에서 주인공 헨리 박은 생각한다.

 

얼굴에서 잠을 쓸어내며 나는 내가 어린시절 한동안 새벽이 오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 밖의 베란다로 나가곤 했음을 기억해냈다. 그럴 때면 세상은 마치 나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 완전한 적막과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한국인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나를 조롱하는 아이들도 없고, 내 영어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려는 미국인 선생님들도 없는 듯. 그럴 때면 나는 곧 안으로 뛰어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고독한 한순간이나마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그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 처절한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나는 이전보다 조금도 더 분명해지지 않은, 그 알아차리기 힘든 얼굴 모습에 붙박인 듯이 잠겨 있는 언제나와 똑같은 소년이었다.9

 

한국계 미국작가들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연자부호, 그리고 그 부호가 상징하는 이중적 정체성은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단선(單線)이 아니다. 단선의 하이픈은 시각적 환영일 뿐이며, 사실상 상하좌우로 다른 선이 얽힌 복합체라는 현실이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 읽기를 연자부호가 없는 문학 읽기와 다르게 만든다. 독자와 비평가의 위치에 따라 이들 문학의 해석학적 지평은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이 문학의 외연은 확대된다. 한국계 미국문학 읽기는 ① 한국계 미국작가의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 이중적 정체성, ② 한국독자가 읽는 한국계 ‘미국작가’와 미국독자가 읽는 ‘한국계’ 미국작가, ③ 한국계 미국인 독자가 읽는 ‘한국계 미국작가’라는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한 예로 유희석(柳熙錫)의 말을 인용해본다.

 

한국에서 이들 작가[한국계 미국작가-인용자]를 읽는 경험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역사의 가해자이면서도 가해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도 불행을 자초한 일본과 미국의 존재가 배후에 어른거리는) 식민지근대라는 한반도의 ‘현재적 과거’가 독서과정에서 끊임없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

한국의 독자들이 이런 한국계 미국작가를 동포의 애정으로써 읽는 행위가 간단하달 수는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로 돌리기 힘든 곡절이 켜켜이 쌓여 있기는 하지만 번역으로 접하기 마련인 대다수 독자에게 이들 작품은 영어라는 장벽이 가로놓인 엄연한 외국문학이다. 동시에 이들의 이질적 근대체험은 동포니까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자세 정도로는 올바로 수행하기 어려운 ‘독법’ 을 요구하기까지 한다.10

 

미제국주의라는 존재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다른 삶의 체험이 한국독자에게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을 쉽게 읽을 수 없게 한다는 말은 한국계 미국작가의 정체성에 내재한 ‘연자부호’ 그리고 그 연자부호에 대한 독자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미제국주의의 현실을 기억시켜주는 것은 꼭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문학 읽기에서 번역서로 다가오는 것이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만은 아니며 삶의 다른 체험을 그리는 문학이 꼭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가 이러한 요소들을 굳이 인식하는 것은 그들이 ‘한국’계 ‘미국’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한국 부평에서의 삶을 다룬 하인즈 인수 펭클(Heinz Insu Fenkl, 1960~ )의 『유령 형에 대한 기억』(Memories of My Ghost Brother, 1996)을 한국어로 번역했을 경우 어느만큼 언어의 장벽이 있을까? 혹은 미국 이민사회를 다룬 이문열(李文烈)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나 김한길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1989)를 한글로 읽었을 때는 왜 미제국주의적 역사의 흔적이 문제되지 않는가? 조해일(趙海一)의 중편 「아메리카」(1972)의 영어번역본11을 읽으면 어떠한 효과가 나타날까?

『유령 형에 대한 기억』에서 펭클은 부평 기지촌의 삶을 그리고 있다.한국에서 ‘헬로’라고 불리는 미군과 ‘양색시’ ‘양공주’ ‘양갈보’라고 불리는 미군의 배우자,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노꼬’ ‘혼혈아’ ‘튀기’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삶, 용산 미군기지와 PX, 도깨비 시장으로 알려진 미제상품의 암시장 등 미군의 한국주둔과 더불어 형성된 기지촌의 삶에 대해 한국어로 출판된 어떤 소설도 펭클의 작품만큼 잘 그린 경우는 없다.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을 알고 ‘양색시’ ‘양공주’ ‘튀기’라는 표현의 사회적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펭클의 작품을 읽으면서 영어로 쓰였으니 한국문학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무엇인가 시원하지 않은 점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마치 우리동네 뒷골목 일을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와서 들은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낀다고나 할까. 펭클의 그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영어로 읽었는지 한국말로 읽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그만큼 작품의 내용이 한국사회와 친숙하다.

한국에서도 기지촌 문학은 있었다. 앞서 언급한 조해일의 중편 「아메리카」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기지촌 문학은 한국 현대사에서 도시화와 근대화의 어두운 일면을 담은 호스티스 문학 혹은 창녀 문학과 형태상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70년대 호스티스 문학의 대표작품인 최인호(崔仁浩)의 『별들의 고향』(1973)이나 조해일의 『겨울 여자』(1976) 등은 내용의 선정성 때문에 대중소설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호스티스 문학은 그 성격에 있어서 사회고발 문학으로 시작됐다. 이 점에서 호스티스 문학은 근대화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같은 노동자 문학과 사회참여적 의미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기지촌 문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조해일의 「아메리카」는 한미관계의 예속성, 미국과 미군의 비인간성을 고발한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주인공은 동두천 기지촌 내부의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 사회에 들어가게 된 외부인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작가는 외부인으로 기지촌에 들어간 제대병 김효석과 양공주들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전자가 정상인이라면 후자는 일탈되고 왜곡된 인물로 묘사된다. 기지촌 문학은 흔히 비정상적인 삶과 타락의 상징으로 기지촌을 그리면서도 그곳에서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즉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 및 양공주의 순수함이라는 이원론을 통해 이들이 사회의 희생자라는 메씨지를 전한다. 그리고 작품의 끝에서 매춘부나 기지촌 사람들은 대체로 자살이나 죽음 같은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이는 작가나 작품내 주인공의 정체성 추구라는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대부분 근대화가 한국사회에 불러들인 비인간화, 한국전쟁과 미군의 한국 주둔이 낳은 삶의 어두운 면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펭클의 작품이나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 1965~ )의 두번째 소설 『여우 소녀』(Fox Girl, 2002)에서는 기지촌이라는 배경이 사회고발과 거리가 있어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들 작품이 기지촌 삶의 어두운 면, 그리고 그 삶의 도덕적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령 형에 대한 기억』에서 주인공 인수는 미국인 아버지가 같은 미국인인 그의 부하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조차 아버지에게서 느낄 수 없는 현실을 본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이라는 정치적 질서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간질서보다 우선권을 행사하기도 한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펭클은 기지촌 삶의 암담함 때문에 자살하는 여성의 모습도 보여준다. 기지촌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까지 미국이라는 신화(神話)를 위해 살고 있는 암담한 현실을 작가는 외면하지 않는다. 작품의 끝부분에서 주인공 인수는 회상한다.

 

십년이 지난 후 생각해볼 때도 나는 제임스의 비극이 그의 아버지가 흑인이라 데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제임스의 어머니가 한 행동과 장미의 어머니가 한 행동 사이의 모순과 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 두 행위의 균형은 얼마나 현실적이었던가. 새로운 백인 남편을 얻기 위해 흑인 혼혈 아들을 죽인 제임스의 어머니, 그리고 새로 얻은 흑인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흑인 혼혈아를 임신하려고 계획을 꾸몄던 장미의 어머니. 자신들의 복락과 아들을 맞바꾼 것이다. 피의 규칙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다른 사람의 아들과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 유령과 기억의 슬픈 영역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대차대조표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결국 나는 여자들이―심지어 지극한 어머니들조차―아메리카라는 환상적 약속을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매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서방국가의 해변에서 그들은 모두 후회에 젖어서 과거를 뒤돌아보고 있을 것이다.12

 

이처럼 펭클은 지극히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모습을 정상인(혹은 지식인)이라는 외부인의 고발형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기지촌은 작가가 사는 사회의 타락상이나 일탈적 양상이기에 앞서, 주인공 그리고 기지촌 사람들의 실존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수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한다.

 

뒤돌아보면―아니 심지어 지금도―내가 [제임스의 어머니에 대해-인용자] 복수심을 느끼고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는다면, 그럼으로써 그 사건에 종말을 고할 수만 있다면 상황은 훨씬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당시 내 마음속에 느꼈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느끼는 것은, 단지 커다란 공허감뿐이다.(…) 나는 제임스의 어머니를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행위에 대한 너무도 단순한 처사일 뿐이다. 결국 비난은 없다. 단지 인고가 있을 뿐이다.13

 

‘기지촌’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는 작품의 결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발표된 문학에서 사회 부조리의 희생자로 묘사된 호스티스나 기지촌 사람들은 결국 죽음이나 자살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와 달리 펭클과 켈러 작품의 주인공들은 기지촌 삶을 ‘살아내고’그 사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삶을 작품화하기에 이른다. 전자가 기지촌 삶의 당사자를 삶의 수동적 희생자로 보는 반면, 후자는 능동적 극복을 통해 기지촌 삶의 가장 어두운 심연의 바닥을 딛고 떠오르는 인간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삶의 공간에 대한 이러한 시각 차이는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는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데, 변수섭(1941~ ) 장편 『장군의 딸들』(지혜네 1999)이 그 예다.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온 세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민사회를 그린 이 작품은 한국작가들이 그린 이민사회의 부정적 모습에서 벗어나 이민사회 공간을 현실의 공간으로 읽어낸다. 지금까지 한국의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는 타락이나 도피의 공간으로 흔히 투사되어왔다.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파티성 동물로서 교포의 삶을 그렸다. 김한길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에 삶을 거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부정적인 한인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품이 모두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이민사회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부정적 관점을 입증한다. 이에 비해 『장군의 딸들』에서 이민사회는 긍정이나 부정을 떠나 하나의 현실공간으로 투사된다. 한국의 역사현실이 삶에 각인되어 방황하던 세 여인이 자신들의 삶을 바라볼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이민사회는 이 소설에서 문학적 상징공간으로도 사용된다. 어설픈 정치가 흉내를 내는 남편 순태와의 삶에 종말을 고하고 일본인 실업가 쓰루와 재혼하는 은영의 삶은, 장군인 아버지와 군사독재사회의 영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상징한다. 또한, 한때 복수의 대상이던 민상겸 의원의 아들 민석천과의 계약결혼을 진정한 결혼으로 이끈 미영의 삶은, 이제 그녀가 현실에 대한 복수와 반항을 넘어서 좀더 자유로운 삶을 구가할 것임을 보여준다. 세 자매 커플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술잔을 들고 건배하는 것은 새롭게 시작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의 시사이다. 198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 권력을 가진 ‘장군’의 딸로서 시작된 이들 세 자매의 삶은 그 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을 짊어지면서도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이러한 결론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에서의 비극적 종말과 큰 대조를 이룬다. 『장군의 딸들』에서 작가가 희망적인 미래를 기약하며 끝맺었다고는 해도 작가가 현실을 낭만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미국이라는 공간이 꼭 조국에서 떨어져나온 비정상적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그 나름의 삶의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삶은 한번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이 아니라 진실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많은 죽음을 견뎌내야 하는 현실적 여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삶은 달다고 해서 꿀떡 삼키거나, 쓰다고 해서 당장 뱉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모국어 역시 그러하다.14 그리고 민족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그 무엇 역시 그러할 것이다.

 

 

3. 연자부호의 반정체성

 

이산적 한국문학에 대한 글에서 김기중(Kichung Kim)은 영어권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에 대해 한국어로 씌어지지도 않았고, 한국에서 씌어진 것도 아니며, 한국에서의 삶과는 거의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을 어떠한 근거에서 ‘한국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묻는다. 나아가 이산된 한민족의 자손들은 어느 단계에서 이산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들이 새로 정착한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민족의 이산문학은 언제 그들이 새로 정착한 나라의 문학이 되고 더이상 한민족의 문학이 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15 한국계 미국작가 작품의 ‘국적’문제는 항상 이들 문학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되어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한국계 미국작가 작품의 국적문제는 ‘현실적’(혹은 규범적) 질문인가 ‘관념적’ 질문인가? 해외동포라고 불리고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국적은 ‘현실적’ 문제인 동시에 ‘관념적’ 문제다.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제도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들 그리고 그곳에서 시민권을 얻은 재미 한국인은 미국의 국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들을 해외동포, 혹은 가상적·관념적 공간에서의 ‘한국인’ 개념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한국계 미국작가 작품의 국적문제 역시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문학작품의 국적을 따지는 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언어와 작품주제이다. 우리는 앞에서 『유령 형에 대한 기억』을 통해 언어적 분류가 가지고 오는 한계를 보았다. 주제 역시 그러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계 미국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한국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창래의 두번째 소설 『제스처 인생』(A Gesture Life, 1999)과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Comfort Woman, 1997)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두 작품은 한때 정신대라고 불린,2차대전 중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당한 한국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1992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제기되고,1993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국제인권위원회가 “전쟁중 여성의 권리침해는 인권의 침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미국사회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10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계 미국작가의 대표작 중 두 작품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영어권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주제선정과 작품세계를 말해준다. 이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이 주제를 다룬, 한글로 씌어진 장편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16 이창래의 『제스처 인생』은 종국위안부를 돕지 못한 한 일본인의 도덕적 자책감을 다루고 있다. 켈러의 『종군위안부』는 과거의 유령을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와 현실을 무당이라는 매개를 통해 왕래하는 종군위안부였던 어머니와, 그러한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딸을 그리고 있다. 기지촌에 대한 접근처럼 종군위안부를 다룬 작품에서도 우리는, 사회 고발적이기보다는 이를 개인 삶의 아픔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한국적인 주제와 한국을 배경으로 씌어진 작품이 아니라 미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에서도 국적 정의가 쉽지 않다는 것은 곧 알 수 있다. 김란영(Ronyong Kim, 1926~87)의 『토담』(Clay Walls, 1987), 그리고 미라 스타우트(Mira Stout, 1960~ )의 『천 그루의 밤나무』(One Thousand Chestnut Trees, 1999)는 이를 잘 말해준다.

192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국인 가정을 그린 『토담』은 한국 양반집 딸인 해주가 일본인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남편을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직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전셋집을 보러 다니면서 해주는 자신이 어느 지역에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양인’에게 전세를 주는 일정 지역에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해주는 남편과 함께 집을 사러 나서게 되나 이번에는 ‘동양인’은 집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결국 남편의 미국인 동업자 이름으로 집을 사야만 했다. 이같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해주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국적을 가진 자신의 아이들에겐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려 할 때 ‘동양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후 해주의 아들 해럴드는 군에 지원하겠다는 결심으로 장교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그의 성적이 상위권 10% 안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은 장교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에 의해 그는 장교시험에서 낙방하고 사병으로 입대한다. 해주는 딸 페이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제인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금지한다. 제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해주 가족은 미국에서 살지만 한국인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주처럼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고 의식적으로 한국인의 본질을 고수하려는 부모의 세대나,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고, 단지 반년 동안 방문한 것 외에는 별로 한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 없는 해주의 아이들 세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내부 의지에 의해서건 외부 환경에 의해서건 한국계 미국인들은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어떠한 개인도)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순수한’ 정체성만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정체성에서의 이중성이란 한국계 미국인만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삶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천 그루의 밤나무』의 주인공 아나는 백인이 주로 사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에서 음악가인 한국인 어머니와 화가인 백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애너는 자신이 어린시절에 한국말 배우기를 거부했으며, 어머니에게서 듣는 서울에 관한 이야기는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렸고, 자신은 그러한 한국 이야기를 기억에서 의도적으로 차단해왔다고 고백한다. 미국에서 성장하는 한국인 2세대 대부분이 겪는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간과인 것이다. 이러한 애너의 의도적인 미국적 삶에 조금씩 한국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은 그의 외삼촌 홍도가 미국으로 유학와 방학 동안 애너의 집에 머물면서다. 애너는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장벽을 구실로 외삼촌의 행동을 관찰만 할 뿐 그에게 접근하지는 않는다. 외삼촌과 어머니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는 애너에게 딴 세상의 소리처럼 들렸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 애너는 뉴욕에서 생활하며 외삼촌 홍도와 가끔 뉴욕 한인거리의 한국식당에서 불고기 상추쌈을 한입 가득히 물고서 한국이라는 것의 정체를 문득 느끼게 된다. 애너는 자신의 삶에 빈 공간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완전하지 않은 그 어떤 느낌, 그리고 막연하게 한국에 가보면 삶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애너는 한국행을 단행하게 되고,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20세기 한반도 역사를 더듬으며 찾아나간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연구대상이 된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1951~82)의 『딕떼』(Dictee, 1982)에서도 우리는 근현대 한국사가 한국계 미국작가의 정체성 추구와 그들의 문학형성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시와 산문, 편지와 탄원문, 영어·불어·한자,글과 그림과 사진, 유관순과 잔 다르끄와 안중근, 그리스 신화의 여신과 작가의 어머니, 그리고 작가 자신 등 의사소통 수단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열, 접목해 기존 글쓰기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소설의 진수를 보여주었다고 인정받는17 이 작품에서 차학경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한국 근대사와 접목한다. 차학경의 『딕떼』는 쥘리아 크리스떼바가 말한 ‘이방인의 토카타와 푸가’인 것이다.18 유관순과 안중근의 의미,1905년 7월 하와이 한국인을 대표해 이승만이 로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3·1운동과 한반도의 분할 등 한국의 역사를 ‘받아쓰기’(dictée)하며 작가는 한반도의 역사를 자신 안에 새기고 분산시키며, 그리고 테두리 없이 분산된 그 역사로 자신의 무정체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

한국계 미국작가에 대한 우리의 근심은 문학의 수단(언어)이나 내용 자체가 불러일으킨 문제이기에 앞서 울타리를 쌓는 데 익숙해온 우리의 습관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마치 미국에서 1875년까지는 이민법 같은 것이 없었으며 미국시민이 아니어도 참정권까지 있었는데,20세기의 미국에서는 이민법으로 소수민족을 규제하며 특정 계급이나 민족의 권력 및 특권을 유지하려 한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19 이러한 울타리 쌓기라는 담론의 구조를 직시할 때, 우리는 한국계 미국인의 문학 읽기가 한국인과 한국문학 그리고 미국사회와 문학에 미치는 영향의 성격을 통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계 미국인의 무정체성, 그리고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무정체성은 정체성의 부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정체성은 정체성을 고정화하는 제도와 사회에 반기를 드는 반정체성(反正體性)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4. 이산적 정체성과 열린 사회

 

이중적 정체성이라는 담론의 효과 중 가장 보편적인 것 중 하나는 기존 ‘분류법’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 분류는 문학에서의 장르(시·소설·전기 등)일 수도 있고, 학문 내에서의 분류(문학·철학·사회학 등)일 수도 있으며, 또한 정체성(한국인·미국인 등)의 분류일 수도 있다. 동양사상에 대한 서구 학계에서의 분류를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유교-유가, 도교-도가, 불교-불가 같은 동양사상은 미국의 철학과와 종교학과에서 모두 강의되고,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같은 작품은 세계문학 시간에도 읽힌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은 철학·종교·문학 등의 복합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분류방식에 제동을 거는 것은 단순히 형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특정 담론이 특정 사회에서 특정 이름, 예를 들어 철학, 소설 혹은 민족문학으로 분류된다면 거기에는 그 사회가 철학, 소설 혹은 민족문학의 ‘참모습’[正體]이라고 규정한 내용이 있다. 기존 사회의 분류법에 연자부호를 불러들여 철학-종교, 소설-수기와 같이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기존 사회가 정한 ‘참모습’의 한계를 가시화하는 일이다.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미국문학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중국계 미국작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맥신 홍 킹스턴(Maxine Hong Kinston)의 『여전사』(Woman Warrior)가 1976년 미국 비평가 동아리상(National Book Critics Award)을 수상했을 때, 이는 소설부문이 아닌 비소설부문이었다. 물론 25년이 지난 지금 킹스턴은 전기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며, 『여전사』는 서점의 소설부문에 꽂혀 있고 우리도 그렇게 분류한다. 이와 반대되는 상황으로 하인즈 인수 펭클의 『유령 형에 대한 기억』은 처음부터 출판사에 의해 자서전적 ‘소설’로 분류, 광고되었다. 펭클 자신은 이 글을 ‘회상록’(Memoir)으로 출판하려고 했지만, 출판사에서는 시장성을 문제삼으며 소설로 출판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출판사가 말한 ‘시장성’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회상록’이란 유명한 사람이 쓰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 독자가 관심을 가지고 사서 읽는 것이지, 당시의 펭클처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쓴 것을 출판해봐야 읽을 독자가 없다는 것이다.20회상록은 유명한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관념은 거대담론을 통해 삶을 획일화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유명한 사람의 삶은 흥미로울 뿐 아니라 우리가 부러워하고 따라해야 할 삶이며, 문자화하거나 출판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알 필요도 없고, 따라서 글로 쓸 필요도 없으며, 출판을 해도 관심을 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유명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란 이름으로,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주변을 맴돌도록 강요당하며 사는 이들이다. 백인 남성 중심의 미국사회에서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그리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 자기 삶을 기록해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존 권력에 대한 반란인 동시에 그 권력의 한계성을 입증하는 행위이다.21 이는 또한 특정 담론, 특정 집단의 삶만 특권화하여 거대담론을 형성한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민족문학 담론은 거대담론(meta-narrative)이면서 국소담론(les petits récits)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22 민족이라는 단위는 개인을 넘어서지만 타민족들과의 관계에서는 특정 민족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민족담론의 이러한 이중성을 간과하고 국소담론을 거대담론으로 포장할 때 일어나는 제국주의라는 역사를 우리는 보아왔고 여전히 목격하고 있다. 민족에 대한 애정이 국수주의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처럼, 국소담론과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의 인정이 꼭 민족개념의 해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세계시민주의 시대의 민족문학은 열린 민족문학 및 열린 사회로의 길을 의미하며, 여기서 우리는 탈현대시대의 민족주의가 ‘하나’와 ‘여럿’을 다 인정하는 불교적 세계관과 만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계 미국작가 작품의 국적에 대한 논의는 그 국적을 확정할 수 없다는 바로 그 현실, 아니 국적의 논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우리의 닫힐 수도 있는 민족주의 개념에 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을 한민족의 문학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논의 자체는 번번이 민족에 대한 재성찰을 요구하며, 민족개념의 이산성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을 염두에 두면서 미국의 한인작가들을 읽는 것 자체가 민족문학에 대한 진지한 ‘의심’과 그 시효만료 운운하는 논자들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겸하는 것”이라고 한 유희석의 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23 최원식(崔元植) 역시 이산문학에 대해서 그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문학은 해외동포문학을 거울로 민족주의적 함몰을 해독하고 또 후자는 전자를 거울로 탈민족주의적 탈주를 돌아보는 상호균형을 위해 더 늦기 전에 만날 때가 되었다. 차이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차이에 투항하지 않는 황금의 고리는 어디에 있을까?24

 

한국계 미국작가, 나아가 다양한 양상의 한민족 이산문학 읽기 작업은 그들이 한국문학이냐, 아니면 이산되어 있는 지역국가의 문학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분류와 닫힌 사고를 넘어서 이산문학 자체가 말해주는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이산된 정체성으로서의 민족개념을 환기하는 장(場)이 되어야 한다. 고착된 질서에 제동을 거는 것이 문학의 근본적 성격이라면,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하듯, 문학은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근본적으로 반란하는 반정체성(反正體性)을 그 정체성으로 삼는다면25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작품 읽기는 한국문학 혹은 미국문학이라는 기존 개념을 넘어 문학이 가진 반정체성의 재확인일 수 있다.

사고양식과 삶의 방식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 나아가 이를 지향하려는 태도는 현단계 한국사회가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항목 중 하나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 ‘읽기’ 현상학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열린 사회로의 길을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열린 사회는 개인의 정체성과 민족개념의 열림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열림은 삶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고정된 가치의 부재에 의한 허무주의로가 아니라, 삶에서 부단한 창조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쥘리아 크리스떼바의 말처럼 “이방인은 우리 안에 산다. 이방인은 우리 정체의 숨겨진 얼굴이며 우리 거처의 갈라진 공간, 그리고 우리의 이해와 공감이 비틀거리는 그 순간에 존재한다.(…) 타자와 나 사이의 이질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 때 이방인은 우리에게 나타나고, 연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르기 힘든 우리를 발견할 때 이방인은 사라진다.”26 우리는 사회와 공동체의 연대를 거부하는 이방인과 이산자를 민족적 연대의 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와 민족적 연대가 요구하는 것이 누구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요구의 부조리성에도 불구하고 생존이라는 현실 때문에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하여 스스로의 사회에서 이방인이면서도 이방인임을 인정할 수 없는 다수의 ‘우리’를 생각하면, 이방인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 된다.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문학은 한민족의 이산문학일 뿐 아니라,미국사회와 미국인의 이산적 정체성을 증언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민족의 이산문학 읽기는 ‘이산’이라는 현상의 지정학적, 역사-사회학적 의미와 더불어 한국사회 안에서의 이산적 정체성과 연결될 때 새로운 민족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디딤돌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__

  1. 마르틴 하이데거는 특히 그의 후기 철학에서 이러한 ‘veritas’에 근거한 진리의 동어반복성과 무근거성을 비판하고 존재와의 만남의 진리 즉 ‘aletheia’를 주장한다. Martin Heidegger, “The Anaximander Fragment”(1946), Early Greek Thinking, trans. David Farrell Krell and Frank A. Capuzzi, HarperSanFrancisco1975, 13~38면;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 15~87면 참조.
  2. 신성려 「하와이 사탕밭에 세월을 묻고: 한국여성 북미 초기이민 실화」, 『창작과비평』 1979년 봄호 269~97면.
  3. 같은 글 참조; 더불어 Daisy Chun Rhodes, Passages to Paradise: Early Korean Immigrant Narratives from Hawai’i, Los Angeles, CA: Keimyung University Press 1998; Wayne Patterson, The Korean Frontier in America: Immigration to Hawaii, 1896~1910,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Wayne Patterson, The Ilse: First Generation Korean Immigratns in Hawai’i, 1903~1973,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0 참조.
  4. Julia Kristeva, Étrangers à nous-mêmes, Paris: Gallimard 1988, 25면; 영어번역본은 Strangers to Ourselves, trans. Leon S. Roudiez,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 14면.
  5. 아프리카계 미국문학의 형성기에 나타난 흑인 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Native Son(1940),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의 Invisible Man(1952) 등이 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6. Kathleen Woods Masalski, “History As Literature, Literature as History: An Interview with Lost Names Author Richard E. Kim,” Education about Asia, vol. 4, no. 2(1999년 가을), 25면. 김은국은 그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자신의 대학교 학장이 그의 한국이름을 발음하기가 힘들어서 둘이서 전화번호부를 보고 영어이름을 살펴보다 ‘사자왕 리차드’라는 표현에서 리차드란 이름을 알았기에 자신이 그 이름을 선택했다고 바로 직전에 말했다.
  7. 사회학자 존 리는 이산적 정체성에 관한 글에서 한국계 미국인 혹은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일반화된 정체성의 문제를 첨예하게 지적한다. John Lie, “Diasporic Nationalism,” Cultural Studies <> Critical Methodologies, vol. 1, no. 3(2001), 355~62면.
  8. 한국계 미국작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강용흘이 1930년대부터 작품을 발표했지만, 미국 학계와 문단에서 한국계 미국문학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유선모는 한국계 미국작가의 효시를 류일한(Il-Han New, 1895~1971)의 『내가 한국의 소년이었을 때』(When I was a boy in Korea, 1928)로 잡고 있다. 『미국소수민족 문학의 이해: 한국계편』, 신아사 2001, 42~52면 참조.〕 동양계 미국문학 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일레인 김(Elaine H.Kim)의 저서 Asian American Literature:An Introduction to the Writings and Their Social Context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82)에서 언급된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은 강용흘의 『초당』(The Grass Roof, 1931) 『동양이 서양으로 가다』와 김기중(Kichung Kim)의 단편 「귀향」(A Homecoming, 1973)뿐이다. 일레인 김의 책보다 11년 후에 출판된 싸우-링 씬시아 웅(Sau-Ling Cynthia Wong)의 Reading Asian American Literatur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에서 역시 논의된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은 강용흘의 『동양이 서양으로 가다』,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의 『딕떼』(Dictee), 그리고 김란영(Ronyoung Kim)의 『토담』(Clay Walls)뿐이다. 한국계 미국작가 작품에 관한 개관으로 Elaine H. Kim, “‘These Bearers of a Homeland’: An Overview of Korean American Literature, 1934~2001,” Korea Journal 2001년 가을호 147~97면 참조.
  9. Chang-rae Lee, Native Speaker, New York: Riverhead Books 1995, 300면.
  10. 유희석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현주소: 민족문학의 현단계 과제와 관련하여」,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268면, 270면.
  11. 조해일 「아메리카」의 영어번역본으로 안정효 옮김 America(동서문화사 1990)가 있다.
  12. Heinz Insu Fenkl, Memories of My Ghost Brother, New York: Dutton Book 1996, 232면.
  13. 같은 곳.
  14. 그러므로 한글권 한국계 미국시인인 김윤태는 그의 시 「모국어」(『아사달』, 영하 1994)에서 말한다.“빛을 주면서도/소리를 내지 않는/긴 하루/해같이//너의 본색은/청색의 구슬이거나/자태가 우아한/침묵//애비가 품고 온/모국어를/아이들은 떠다밀어도//소리없이 기다리는/먼 나라/이조의/손님//가야산 기슭/하늘 고인 샘물같이/한송이 꽃을 꽂은/대기실의 신부같이//웃으며 기다리는/만고의 여인//죄가 있어도/물을 수 없는/어머니의//목숨이여.”
  15. Kichung Kim, “Affliction and Opportunity: Korean Literature in Diaspora, a Brief Overview,” Korean Stuides, vol. 25, no. 2(2002), 272~73면.
  16. 종군위안부에 대한 주제를 다룬 한국작가의 작품으로 윤정모 장편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당대 1997), 정현웅 장편 『그대 아직도 거기 있는가』(대산출판사 1999), 그리고 이영희 단편 「아빠까바르 마마」(『파두』, 하늘재 2003) 등을 들 수 있다.
  17. 예를 들어 Juliana M. Spahr, “Postmodernism, Readers, and Theresa Hak Kyung Cha’s ‘Dictee’,” College Literature, vol. 23, no. 3(1996.10), 23~43면. 한글 논문으로 조영희 「형식 파괴를 통한 저항적 글쓰기: 차학경의 『딕테』를 중심으로」, 김종회 엮음 『한민족문화권의 문학』(국학자료원 2003)84~105면.
  18. Julia Kristeva, 앞의 책 9~60면, 특히 11면(영어번역본 1~40면, 특히 3면) 참조.
  19. John Lie, 앞의 글 357면.
  20. Heinz Insu Fenkl, “Future of Korean American Literature,” Hahn Moo-Sook Colloquium on One Hundred Years of Korean American Literatur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Washington DC, USA, 2003년 10월 25일.
  21. 김란영의 『토담』에 관한 글에서 제인 필립스는 『토담』이 1986년에 발표된 이후 주목을 받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일이 걸렸는가 묻는다. 필립스는 김란영의 소설이 흔히 소수민족 소설의 전형을 탈피했기 때문이라는 지적과 더불어, 결국 동양계 미국인이라는 그녀의 인종과 여성이라는 그녀의 성별을 주요원인으로 지적한다. Jane Phillips, “‘We’d be rich in Korea’: Value and Contingency in ‘Clay Walls’ by Ronyoung Kim,” Melus, vol. 23, no. 2(1998년 여름호), 특히 177면.
  22. 거대담론과 국소담론은 쟝-프랑쑤아 리오따르의 용어다. 그의 탈현대철학에서 리오따르는 근대를 거대담론이 지배한 시기로, 그리고 탈현대를 국소담론의 시대로 설명하고 있다. Jean-Franç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A Report on Knowledge (1979), trans. Geoff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4 참조.
  23. 유희석, 앞의 글 271면.
  24. 최원식 「민족문학과 디아스포라: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읽고」,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39면.
  25. Jacques Derrida, “This Strange Institution Called Literature: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Derek Attridge (ed.), Acts of Literature, New York, London: Routledge 1992, 33~75면 참조.이는 시적 언어를 기존 질서에 대한 반란으로 보는 크리스떼바의 시론에서도 나타난다. Julia Kristeva, La révolution du langage poétique: L’avant-garde à la fin du XIXe siècle: Lautréamont et Mallarmé, Paris: Éditions du Seuil 1974 참조.
  26. Julia Kristeva, 앞의 책 9면(영어번역본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