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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이름없는 우리들의 행진

심훈 일가족 이산가족 상봉기

 

 

심재호 沈在昊

1936년 충남 당진 출생. 작가 심훈(沈熏)의 셋째아들. 동아일보사 신동아부 기자를 거쳐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 1984년 미주동포신문인 『일간뉴욕』 창간. 1989년 조국평화협회 발족, 회장 역임. jaihoshim@hanmail.net

 

 

한 방의 총소리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는 청와대에서 가까운 북악산 아래 자리잡은 경기도상업중학교였다. 학교 이름을 줄여서 ‘도상’이라 했는데 지금의 청운중학교다. 고향에 있는 송악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문을 연 서산중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온 것이었다. 전학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6월 26일인가 27일, 전교생들이 학교마당에 모였다. 어디에선가 총소리가 났고 매캐한 화약냄새가 북악산 기슭을 타고 교정으로 스며들었다. 이날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나는 삼청동 집으로 돌아왔다. 밤중에 쾅쾅 덜컹덜컹 쇳소리가 들렸는데, 서울로 쳐들어오는 북쪽 군대의 탱크 소리라고 했다. 서울역에 불이 났다고 해서 뛰어나가 삼청동 언덕 위에서 불구경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삼청동에서 도렴동교회 목사관으로 짐을 옮겼다. 당시 감리교 총무였던 삼촌(심명섭 목사)이 맡은 교회였다. 최근 지나가면서 보니 그 자리에 굉장히 큰 교회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그 근처에는 개장국집이 즐비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쪽 군대가 밤중에 개를 짖지 못하게 해서 동네 개들이 개장국 신세가 됐다고 들었다. 나도 그때 처음 개장국을 맛보았다.

얼마 뒤 우리 형제들은 피난길에 나섰는데 삼촌 내외분은 서울에 그대로 남았다. 서울공과대학에 다니던 사촌형님과 휘문고에 다니던 큰형님, 나와 같이 ‘도상’에 다니던 둘째형님 그리고 나였다. 우리는 당진에 큰집이 있었으니까 오갈데없이 전쟁에 쫓기는 비참한 피난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 때만 되면 내려가곤 했던 시골 큰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사촌 큰형님이 살림을 맡고 있었다.

전 같으면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거나, 버스로 경기도 안중을 지나 만호리까지 가서 똑딱선으로 아산만을 건너 한진나루로 가는 즐거운 귀향길이었을 것이다. 한진나루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가 우리 고향이었다. 서울에서 하룻길인데 배편 사정에 따라 도중에 하룻밤을 자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짐보따리를 껴안고 뱃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인데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송악으로 빠지면 된다. 서해대교를 받치고 있는 섬은 내가 어려서 고기를 잡던 곳이다. 행담도인데 까치네섬 혹은 뱀이 많아서 뱀섬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유원지로 둔갑하고 말았는데, 아버지(심훈)의 수필 「칠월의 바다」에 나오기도 한다.

피난길은 즐겁지 않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배를 탔는데 미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흰 보자기를 우리 머리 위에 씌웠다. 강을 건너서도 전투기를 피해 되도록 나무 밑을 골라서 걸었다. 길목마다 팔뚝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 검문을 했다. 어린 중학생이던 나는 형들 뒤만 졸랑졸랑 따라가면서도 먹을 것만 살피는 덩치 크고 미련한 형들이 잡혀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길은 멀고 날씨는 또 왜 그렇게 찌는지, 가도 가도 쳇바퀴 도는 것만 같았다.“발안까지 얼마나 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턱으로 가리키며 “한 십리쯤”이라고 대답한다. 십리 넘게 걸어가서 또 물으면 이번에는 이십리로 늘어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귀신발안”이라고 했다. 뛰기라도 할라치면 뒤따라오는 사람이 “뛰면 앞에 떨어지는 폭탄에 맞아죽는다!”면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틀을 걸어서 아산만에 면한 경기도 조암의 나루터에 닿았다. 지금은 조암나루터 바로 건너편에 그 유명한 ‘한보철강’이 들어서 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이 배를 찾았지만 가난한 어촌에다가 전쟁까지 치르고 있으니 나루터에는 변변한 배 한척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악독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각다귀(모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피를 빤다. 아무리 때리고 뭉개도 어둠속 어디서 기습을 하는지 견딜 재간이 없었다. 어른들이 용케 배를 구해와서 우리는 쫓기듯 배에 올랐다.

고향은 평온했다. 과수원을 둘러싼 밤나무동산도 여전했고, 겨울에 썰매 타던 들판 너머의 아산만 조수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종잡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동네를 감쌌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집을 떠나온 피난민들이 동네로 파고들어 갈수록 새 얼굴들이 늘어났다. 충청도 사투리 속에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가 섞여들었다. 별안간 나타난 쌕쌕이(미군전투기)가 고향하늘을 설치고 다녔다. 전쟁이 한창이라는데 전선이 어디쯤인지도 알지 못했고 고향이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기도 전화도 신문도 없이 고요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느날 아침, 남산 쪽에서 총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그러고는 매캐한 화약냄새가 밤나무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서울 교정에 번지던 그 냄새였다. 평온하고 아름답던 고향은 이 한 방의 총소리로 모든 것이 뒤집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갈가리 흩어졌고 새도 울지 않았다.

 

 

전쟁터로 나가는 형제들

 

아산만을 건너온 인민군이 큰집 사랑방에 진을 쳤다. 군인을 처음 본 나는 그들이 신기했다. 좀 떨어져서 쭈뼛쭈뼛 주위를 빙빙 돌면서 구경하다가 말을 걸어 총을 만져봐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북쪽 군대 일진이 동네를 지나간 뒤 사촌형과 큰형이 동네 청년들과 함께 의용군에 동원된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자손이 귀해 친형제나 사촌의 구분이 없이 한집에서 어울렸고, 서울 집에서도 한방에서 뒹굴며 지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가 그렇게 다그쳤어도 우리 집안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견뎌냈고 아무도 일본군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고향땅에서 형제들이 전쟁터로 간다는 것이다.

의용군으로 동원된 동네 청년들의 이마에는 머리띠가 둘러졌다. 그들은 모여 무슨 소리를 지르며 내가 맨발로 학교에 다니던 언덕길을 넘어갔다. 멀리 떠나가는 형들을 바라보던 어린 내 가슴에는 소화되지 않는 이상한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손자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할머니는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씀도 없었다. 이기거나 져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사실을 할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형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미국 군함이 인천 앞바다에 진을 쳤다. 고향 언덕에 올라가 밤새 함포 사격하는 군함들을 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남쪽 군대와 경찰이 몰려왔다. 물러나고 몰려오는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희생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중에는 동네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주인 없는 시체들을 아무렇게나 파묻은 구덩이가 길가 여기저기에 있었고 원혼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우리는 한자리에 있었지만 전선은 오르락내리락했다. 소련 탱크가 밀려들어올 때는 인공기가 올랐고 미군 장갑차가 들이닥치면 태극기가 나부꼈다.

얼마 전 그때의 공동묘지 터에 집들이 들어선 것을 보고 나는 눈을 돌렸다. 원혼들이 지금은 잠이 들었을까, 그때의 억울함을 다 잊었을까. 고향땅을 다시 밟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어쩔 수가 없었다.

9월 28일, 미군이 서울을 되찾았다는데 서울의 삼촌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를 두셨는데 큰아버지는 해방 후 6·25전쟁 전에 세상을 떠났고 셋째인 아버지는 해방 훨씬 전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할머니는 생전에 이미 두 아들을 궂겼으니 아들 하나만 남은 셈이었다. 일찍이 남편을 사별한 고모는 옆집에 살았다.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목사인 삼촌이 서울에서 철수하던 인민군에게 강제 연행돼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는 것이다. 납북인사가 된 것이다. 내가 한때 다니기도 했던 서산중학교에서 국어선생을 하던 사촌형도 휩쓸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촌형과 헤어진 사촌형수가 서산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당진의 시집으로 타달타달 걸어서 돌아왔다. 서울에서 삼촌과 생이별을 한 숙모도 시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전쟁통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고모, 이미 남편을 잃은 큰어머니, 남편과 생이별한 숙모 등 집안은 온통 과부로 붐볐다.

집안어른들은 할머니 속이기 작전에 들어갔다. 둘째아들이 급한 일로 일본에 갔는데 곧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둘째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편지를 하는데 몇달이 지나도록 왜 소식이 없느냐?”는 것이 할머니의 반응이었고 의심이었다. 손자들 셋을 전쟁터로 보내고 남은 아들 하나마저 잃어버린 할머니는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졌고 팔십이 넘었지만 정정하게 집안을 지휘했다. 제사 때면 가난한 동네 부인에게 음식을 듬뿍 싸주라 했다. 남쪽 군대나 북쪽 군대, 패잔병이나 진주군 모두 할머니한테는 똑같은 젊은이로 비쳤다. 그들이 들르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집 나간 아이들을 생각해 잘 먹여서 보내라”고 하면서 보살펴주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흩어진 식구들의 소식은 계속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구러 해가 지나갔다. 할머니 속이기 작전은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졌으며 할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아들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말 많은 동네 부인들이 가끔 들러서 “아드님이 실은 실종됐다는데요”라고 소곤소곤 고자질해도 할머니는 아예 못 들은 척했다. 그렇게 한해가 갔다.

1987년 내가 형제들을 만나러 평양에 가서 서울 삼촌의 소식을 물었을 때 북의 형들도 알 길이 없다고 했다. 형들도 둘째숙부가 납치됐는지 잘 몰랐던 것으로 보였다. 나를 안내하던 북쪽 인사는 심명섭 목사의 행방을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6·25전쟁 당시는 정국이 하도 소란스럽던 때라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이 왔다. 할머니가 숙모들과 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네 둘째숙부가 없어진 줄을 벌써부터 알고 있다. 더 속일 생각은 말아라. 속상해할 것도 없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고개만 떨구었다. 사태를 일찍부터 꿰뚫어본 할머니가 오히려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안방에 붙어 있는 골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에 놓인 관뚜껑을 열라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환갑을 맞으면 누구나 관을 짜고 그 안에 수의 등을 미리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관 속에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했는데, 그 관을 감히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방바닥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재호네 삼형제는 애비 없이 자라는 애들이다. 이건 전쟁에 나간 큰애 재건이 몫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재광이, 재호 학비로 보태 써라. 다른 아이들은 애비 에미가 있으니 알아서들 해라.”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큰형 몫은 금비녀였고 우리들 몫 역시 금붙이였다. 그러고는 당장 나를 학교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전쟁 탓으로 고향에서 2년 동안 빈둥빈둥 밭이나 매면서 놀던 나는 2년 묵은 재수생으로 예산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할머니의 유언

 

내가 예산중학교에 다닐 때도 전쟁은 계속되었는데 하루는 입대하는 선생님들을 환송하는 조회가 있었다. 그 선생님 중엔 시인인 성찬경 선생도 있었다. 당시 내 눈에는 얼마 전 의용군으로 동원되어 고향 언덕을 넘던 형들의 모습이 비쳤다. 같은 나라의 다른 군대가 아닌가.

예산중학교에는 사촌 큰형님의 아들인 큰조카(천보)와 가난고지라는 이웃동네에서 사는 작은할아버지의 장손자인 육촌동생(재우)이 같이 다녔다. 나이 많은 내가 반장이었다. 우리들 셋은 초가집 건넌방 한칸을 얻어서 자취를 했는데,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 안병태군도 한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즈음 고향 큰집은 경제적으로 거의 거덜난 상태였다. 아는 친척, 친척의 친척, 잘 모르는 친척의 친척 등 열세 세대가 우리집에 피난와 등대고 있었던 것이다. 열세 세대 식솔이 먹어대니 남아날 것이 있겠는가. 가을이면 밤을 따먹거나 과수원의 벌레먹은 과일을 골라먹었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마솥의 쇠죽 같은 호박죽 풀떼기를 퍼먹기 일쑤였다. 갯벌에 나가 나문쟁이라는 해초를 따다가 삶아먹기도 했다. 나문쟁이만 먹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동네 부인들도 눈에 띄었다. 수제비는 최상품 식사였다. 지금은 서울의 호텔에서 귀한 음식으로 나오는 호박죽과 수제비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피난시절에 물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자취를 하는 우리들이 가져가는 식량은 쌀 한톨 없는 통보리였다. 할머니가 희한한 반찬을 해주었는데, 굵은소금에 고춧가루를 섞어서 만든 소금볶음이었다. 꽁보리밥에 이 소금볶음을 슬슬 뿌리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알루미늄 양재기가 소금기에 구멍이 뻥뻥 날 정도였다.

예산중학교에서 우리 셋은 모두 우등을 차지해서 학비를 면제받게 되었다. 자랑삼아 보고했더니 할머니는 큰조카와 육촌동생은 칭찬하면서도 내게는 “네 이놈! 학교를 이태나 묵은 놈이 그게 자랑이라고 지껄이느냐?”며 벌컥 역정를 내셨다.

한번은 떼지어 몰려다니다가 장난기가 솟아서 제집 참외는 놔두고 남의 참외를 서리하다가 주인에게 들킨 적이 있다. 우리들은 사촌 큰형님에게 불려가서 대청마루에 꿇어앉아 한나절 동안 벌을 받았는데 나만 할머니에게 불려갔다.

“네 이놈 도둑질을 해? 뭐, 남의 참외를 훔쳐?”

할머니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다짜고짜 내 팔과 허벅지를 마구 꼬집었다. 그러고는 나를 벌준 큰형님을 불러들였다. 큰형님은 집안 종손으로 나이가 아버지뻘이었다. 이제나저제나 큰형님을 좋아하지 않는 동생은 없고 어질고 어진 큰형님에게는 누구나 무조건 복종이다. 큰형님은 심재영, 그의 삼촌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인물로 알려져 있다. 몇해 전 시골집에서 그는 한많은 세상을 버렸다. 할머니가 큰손자를 보고 역정을 내셨다.

“앞으로 재호에게 손대지 마라. 애비 없는 자식은 내가 키운다.”

평소에 나는 할머니가 누구를 나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화가 나면 버릇처럼 혼자서 일에 열중하곤 했다. 할머니는 잠시도 일손을 놓는 법이 없었는데, 목화씨를 발라내고 물레를 돌리고, 밤에는 다림질을 하고, 키질과 체질을 하고 고추를 손질해 말리는 등 쉴새없이 움직였다. 서울에서 살림하던 과부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따르느라 진땀깨나 뺐을 것이다. 할머니는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시키지도 잔소리를 하지도 않고 그저 앞장서서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엄지손가락 하나는 호두알만하게 부푼 채로 굳어 있었다. 다치거나 종기가 날 때 할머니가 그 굵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발라주면 용케도 상처가 아물곤 했다.

밤이면 숙모가 할머니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드린다. 『삼국지』 『수호지』 『장화홍련전』 등이다. 읽다가 틀리면 할머니는 곧 “얘 그것 틀렸다”고 지적한다. 책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를 당하는 며느리가 없었다. 나는 중국 야사를 할머니한테서 많이 들었는데 커서 읽은 책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지방학교 졸업생에게 서울고 입학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나는 서울고로 진학했다. 큰조카 천보도, 육촌동생 재우도 내 뒤를 따라서 서울고에 합격해 우리는 또다시 동창생이 됐다. 정전(停戰) 직후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와서 만사 제치고 시골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바짝 마른 손으로 내 손을 더듬어 잡고 모로 누웠다. 눈물을 가리는 것 같았다.

“재호야, 네 형들은 살아 있다. 네가 형제들을 찾아라.”

그 말을 듣고 나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밖에서 괜히 서성거리는 동안 할머니는 운명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으나 할머니의 유언은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유언은 할머니와 함께 살아 있고 나와 함께 살아갔다.

 

 

아이들의 중국유학

 

1974년 1월, 나는 혼자서 미국으로 왔다. 그해 12월에 아내가 아이 넷을 데리고 따라왔다. 큰딸 영주가 중3, 둘째딸 영민이 중1, 아들 성보가 초등학교 5학년, 그리고 막내딸 인보는 돌이 갓 지나서였다.그 얼마 뒤에 어머니도 미국으로 모셔왔다.

1980년대에 영주는 뉴욕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영민과 성보 남매는 코네티컷 주에 있는 웨슬리언대학에 진학했다. 어느날 둘째 영민이가 중국으로 유학가겠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튼 뒤 대학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생겼는데, 난징(南京)대학에 유학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내외는 미국에서 공부한 일도 없고 영어도 서툴러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으며 관여할 처지도 못됐다. 졸업식 때도 뒷전에서 쭈뼛쭈뼛 얼굴만 내미는 것이 고작이었고 대학도 아이들 마음대로 선택했다. 하지만 몸이 가냘픈 딸이 혼자서 중국을 간다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학교에 찾아가서 안 일이지만 중국계 교수가 영민의 유학을 추천했다고 한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많았지만 유학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1919년 3·1운동 때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죄로 감옥살이를 한 아버지는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변장하고 중국으로 간 일이 있다. 그가 뻬이징을 거쳐서 항져우(杭州)에 있는 지쟝(之江)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민이 가겠다는 난징대학에서 지쟝대학이 멀다면 얼마나 멀겠느냐는 짐작이 갔다. 간 김에 경치 좋다는 항져우를 찾아가서 할아버지가 걷던 길도 걸어보고 지쟝대학에서 할아버지의 기록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미국으로 이민와 중국에 유학가기로는 영민이가 첫번째일 것이다. 지금 뻬이징에 가면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트지 않아 남한에선 중국에 유학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서 온 유학생은 꽤 많았고 사업하는 사람들도 자유롭게 왕래하는 모양이었다. 어느날 난징대학에 유학온 나이 많은 북한학생들이 영민을 찾아왔다. 영민이 북한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 머리에 뿔이 달렸느냐?”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남쪽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북한사람은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말을 지금도 믿지 않는다. 황당해도 너무나 황당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주책없는 농담으로 과장했다고 짐작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남쪽 사람으로서 남쪽 사람들을 너무나 무시한 것이다.그 자리에서 영민은 무안하고 창피했다고 한다.

누이 영민과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닌 셋째 성보도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중국유학을 가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얼굴이 노란 아들이 유명한 뻬이징대학에 돈 한푼 안 들이고 가게 돼서 속으로는 자랑스럽고 흐뭇했지만, 내가 기뻐한 데는 또다른 까닭이 있었다. 중국말도 잘 모르는 성보가 뻬이징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성보가 중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나는 형들의 본적과 주소, 생년월일을 자세하게 적고, 사진들을 찾았다. 또 다니던 학교와 그때 사귄 친구들의 이름, 남쪽 친척들의 현황 등 걸리면 꼼짝 못할 그물을 짰다. 성보가 태어나기 전에 행방불명된 저희 삼촌들을 찾는다 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 염려됐지만,35년 전 전쟁터로 끌려간 형제들의 소식을 ‘하늘의 힘’으로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가슴이 뛰었다.“네 형들은 살아 있다. 네가 형제를 찾아라.” 할머니는 왜 형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지금까지 의문이다.

그동안 형들을 찾느라 남쪽땅은 이리저리 다 뒤졌다. 제3국으로 간 포로명단에도 형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북한땅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향은 남쪽이고 북쪽에는 조상의 묘소 하나, 알 만한 친척 한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형들을 찾는다는 것이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같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자세한 자료를 적은 편지를 성보 주머니 속에 묻어주었다.

“뻬이징에 가면 북한학생들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눈치봐가면서 그들의 속을 떠보다가 슬쩍 정보를 흘려라, 낚싯바늘을 던져라, 말조심 몸조심해라, 꼬임에 빠지지 마라……”

이날 성보에게 한 잔소리는 내가 일생을 두고 할 잔소리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았을 것이다. 성보는 “알았어요, 아 글쎄 알았다니까요” 하고 헛김 새는 대답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이 일을 나는 어머니에게는 감추었다.

 

 

큰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는 어머니

 

이십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사십대 중반 전쟁통에 큰아들을 잃었다. 아들이 어디서 죽었는지, 살아 있으면 어디에 있는지 말 그대로 행방불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남편을 일찍 잃은 여성으로 온갖 수모와 고생을 겪어온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찾아서 남한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며 다녔다. 큰아들 심재건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종전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찾아갔으나 결국은 허사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겉돌던 소문들도 잠잠해졌다.

미국에 올 때 어머니는 통신과 여행이 자유롭다는 나라에 가면 큰아들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쪽 고향땅을 떠나온 사람이나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남쪽사람들은 이런 희망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남과 북을 지척에 두고 자식과 고향을 찾으러 멀리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로 오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머니는 큰형에 대한 말을 입밖에 절대로 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포로수용소까지 갔다는 것도 남을 통해 들은 것이다. 큰아들을 보고 싶다든가 찾아보라고 하소연한 적도 없다. 큰아들 얘기만 나오면 못 들은 척하기까지 했다. 칠십이 넘은 어머니는 미국에 오자마자 봉제공장에서 바느질을 시작했고, 방도 따로 얻어 살면서 푼돈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무슨 물건인지 남모르게 간수하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가 출세 못하고 돈 못 버는 것, 큰아들이 저렇게 된 것도 다 에미를 잘못 만난 탓이라는 것이 어머니가 평생 가지고 산 한이고 탄식이었다.

“얘, 성보한테서 무슨 소식 없니?”

하고 느닷없이 물으실 때가 있었다.

“잘 있대요.”

“아무 소식도 없구?”

“소식은 무슨 소식요.”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어머니가 묻는 ‘소식’은 큰형 소식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국에 간 성보와 나 사이에 무슨 꿍꿍이속이 꾸며지고 있는지 어머니는 다 알아차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는 태도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화투장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새벽부터 운수떼기를 시작했다. 운수 좋은 날이 많이 나왔을 텐데도 운수보기는 매일 계속되었다. 아들 만날 운수가 아직 안 나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또 감리교 장로교 천주교를 가리지 않았고 절에도 열심히 나갔다.뉴욕 원각사의 오법안 스님이 “어머니는 항상 아들을 위해서 불공을 드린다”고 귀띔해준 일이 있다. 어머니가 봉제공장에서 바느질해 번 돈은 교회연보(捐補)로, 불공드리는 데로도 많이 나갔을 것이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큰아들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것만이 어머니의 기원이었다.

큰형은 사실 어머니 속을 무척이나 썩였다. 지금 안국동 네거리에 있는 풍문여고는 일제 때 휘문소학교였는데, 큰형이 이 소학교에 다니면서 한 일은 공부가 아니라 일본학생이 다니던 종로소학교로 쳐들어가서 패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 조선학생들이 돌을 던지면 일본학생들은 칼을 던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우리 삼형제는 월세 단칸방에서 한동안 살았으며 당시 어머니는 어느 회사에 다녔다. 큰형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작은형과의 싸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락부락하고 괄괄한 큰형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깐죽대는 작은형에게 약이 올랐고 둘의 싸움은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어떤 때는 그 꼴이 지겨워서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어머니도 속이 상해서 훌쩍 집을 나간 적이 있다. 그런 큰형이 시골에 피난와서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바닷가에서 낚시하던 작은형을 금룡이라는 동네 불량배가 때렸다는 소리를 듣고 큰형이 그를 직사하게 패주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 뒤 아무도 우리 형제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큰형의 말썽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여학생 따라다니는 일로 전환되었다. 잠잘 때 교복바지를 얌전히 접어서 요밑에 깔고 자면 아침에 바지는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줄이 섰다. 그걸 받쳐입고 여학생 사냥에 나선 것이다. 용돈은 엄마를 다그쳐서 뜯어냈다. 그때 큰형과 연애했다는 분을 몇해 전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육십이 넘은 부인이 되어 있었다.

큰형처럼 전쟁 때 남쪽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됐건, 북쪽에서 어머니에게 등을 밀려 남쪽으로 피난왔건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 사정은 목숨을 내걸고 싸울 만한 어떤 이념이나 사상, 정견이나 종교 같은 것이 없었다. 분단의 대세에 휩쓸려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면서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꼴이었다.

 

 

행방불명된 성보

 

성보의 편지가 뻬이징에서 날아왔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성보는 뻬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갔다. 북한유학생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의 농구시합을 앞두고서였다. 말하자면 나라 대 나라의 유학생 농구시합이었는데 평소 한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북한학생들이 남쪽 출신이라고 해서 성보를 시합에 끼워주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북한대사관의 고위인사를 찾아가 자기를 소개하고는 “남북통일을 원하는 마당에 같은 뻬이징대 학생인데 나를 왜 경기에 끼워주지 않느냐”고 따졌다.“남북 선수가 한팀으로 같이 뛰면 그것도 통일이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도 당돌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대사관의 주선으로 성보는 한반도팀 선수로 뛰게 되었다.

이 농구사건 이후 성보는 북한유학생들과 북한대사관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내가 나중에 뻬이징에서 북한대사관 선생을 만났을 때 그가 이 이야기를 전해줄 정도였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성보의 이 돌출적인 행동이 저의 삼촌을 찾는 길로 통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성보의 편지 속에는 백두산에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장은 장백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고 다른 한장은 백두산에 올라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성보가 바라본 북녘땅 어디엔가 살아 있는 우리 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 둘째딸 영민도 압록강 가를 걸으며 북녘땅을 보고 돌아왔다. 숲속에 가려 있는 토끼를 채기 직전에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 같다고나 할까. 그때가 1980년대 초니까 중국 쪽 백두산이라도 남쪽 사람은 갈 수가 없었다. 이산가족들이 한·중 국교수교 후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서둘러 찾아 오르고 압록강변을 헤매며 고향땅을 바라보는 광경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훨씬 나중 일이지만 나 역시 1989년 7월 14일에 북쪽 우리 땅에서 백두산을 올랐는데 그때를 회상하면 감회가 새롭다.

뻬이징대학에서 예정된 공부를 마치고 뻬이징외국어대학으로 옮겨 중국어를 더 공부하겠다던 성보로부터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다.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보아도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여행을 떠날 때 그런 경우가 가끔 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그때가 1987년 초겨울이었다. 우리 가족은 원래부터 서로 떨어져 사는 데는 이골이 나 있어 편지가 좀 뜸하다고 해서 노심초사하지는 않는다. 몇년 떨어져 있다가 만나도 어제 본 사람들처럼 서먹서먹하지 않게 행동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이상했고,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편지 한장이 불쑥 뛰어들었다. 그 편지 속에는 또다른 편지와 사진이 끼여 있었다.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여기 큰아버지 편지를 동봉합니다.”

성보는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일부러 집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들, 특히 저의 엄마가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성보가 평양 기차역에서 저의 큰아버지를 껴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형은 조카를 마중하러 함흥에서 평양까지 왔다고 했다. 큰아버지와 조카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 서로가 첫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세월은 같은 핏줄 앞에서는 별 힘을 못 쓰는 모양이다.

성보는 평양에서 보름 이상을 묵었다고 했다. 평양에 있으면서 북에 있는 형제들을 다 찾아내고 북에서 태어난 조카들의 생년월일까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적어보냈다. 도깨비처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가족을 찾습니다” 하고 미국에서 조카 한놈이 나타나자 북에 있던 가족과 집안은 벌컥 뒤집힌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반갑고 놀랐대도 조카를 맞는 북쪽 형제들의 심정에다 비할까. 경계하고 등 돌리고 있는 미국에서 온 조카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조카를 앞세우고 평양거리 여기저기를 보여주는 형들의 사진이 속속 배달됐다.조카를 대견하고 고맙고 신통하고 자랑스럽고 미안하고 서럽고 안쓰러워하는 것을 형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북에서 오는 편지에는 성보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나는 좋은 일을 한번 멋지게 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겸손하고 싶지 않다. 남북을 갈라놓은 그 거대한 벽 한 귀퉁이가 내 가족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통쾌한 일이었다.

성보가 동봉한 큰형의 편지는 읽는 나보다도 그것을 쓴 형이 더 힘들어 보였다. 편지지에서 그의 눈물이 어른거리고 줄줄마다에 피가 맺혔다. 여기까지 힘들여 왔다. 그래 좋다, 다음 넘어야 할 고개는 어떤 것이냐? 그것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어머니에게 큰형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형의 편지와 사진을 보여드렸다. 그때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성보에게서 편지가 왔다. 큰형이 함흥에 살고 있는데 아이들이 6남매라고 한다. 별안간에 대식구가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조심스럽게 어머님에게 전했다. 그런데 그리도 찾던 아들의 편지를 보는 어머님은 의외로 담담하시다.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그후 일주일이 지나서 어머님이 식사를 제대로 안하시는 것을 눈치챘다. 단 한마디, ‘네 형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장서서 일을 저지른 성보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큰형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부탁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기다려보자고 했으나 어머니의 태도는 단호했다.“알았다. 나 혼자 가겠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 짐작하던 일이고 이제 사는 곳까지 알았으니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별안간에 무슨 죄를 진 사람이 된 것이다.

7월 초순 뻬이징에서 성보가 편지를 보내왔다. 북한정부에서 입국사증을 주기로 했으니 할머니를 모시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당장 입맛을 회복했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니까 짐을 줄이라고 해도 “그래 그래, 알았다. 고맙다, 우리 새끼들”이란 말뿐이었다. 처음으로 듣는 고맙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짐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언제부터 준비해온 것들인지 여러 보따리였다. 오래전 서울서부터 꾸려놓은, 형한테 가는 짐들이 분명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모성애다. 남성은 여성의 모성애 앞에서는 꼼짝 못하게 된다. 후에 벌인 ‘뉴욕 남북해외이산가족찾기 후원회’ 일을 맡고서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경험한 일이지만, 흩어진 가족을 찾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머니 할머니 누이 들이었고, 남성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두렵고 망설여지는 여행길

 

꿈에도 잊지 못하던 형제들의 생사를 알아내고 또 찾아가 만날 수 있다고 해도 북한땅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거리에서 반공시위도 많이 했으며, 대한민국 군대에서 복무도 했다. 북한땅을 밟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었다. 더구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혼자서 고향인 함경남도 단천에서 삼촌을 찾아 월남했던 아내는 내가 평양에 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칠십이 훨씬 넘은 어머니를 혼자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민은 저도 따라가겠다면서 졸업한 웨슬리언대학에서 여행경비를 받아왔다. 북한에 다녀온 경험을 강연하는 조건으로 경비를 얻은 것이다. 어머니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여행경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꽁치꽁치 뭉쳐놓은 돈이 있었다. 사실 자식이 북한에 있는 것을 알고도 돈이 없어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여비가 없던 딱한 부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걱정이 아니라 나는 무언가 두렵고, 불안하고, 망설여졌다. 아무리 어려워도 넘어야 할 산이지만 준비할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내가 먼저 용단을 내려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나는 뉴욕주재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공로명 총영사를 만났다. 어떤 친구는 미국시민권을 가졌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렸는데 나는 영 마음에 걸렸다. 북한방문을 남한의 총영사가 찬성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남한당국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우선 떳떳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싶었다.무엇보다도 부모 형제를 남몰래 숨어서 만난다는 게 참 웃기고 창피한 짓이 아닌가. 북한땅도 우리 땅이고 내 아내와 그곳에서 태어난 조카들의 고향인데 언제까지 외면하면서 살 것인가. 무엇보다 친형제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공로명 총영사는 선선히 “노모를 모시고 가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잘 다녀오세요”라며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아무리 개인적인 인사라고 해도 당시 뉴욕 총영사가 하기 쉬운 말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때의 고마움을 언젠가는 한번 직접 만나서 전하고 싶다.

여객기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으로 뻬이징에 갔다. 지금의 뻬이징 공항건물은 일본의 지원으로 상당히 크고 새롭게 단장됐는데 당시만 해도 보잘것이 별로 없었다. 활주로 부근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다닐 정도였다. 북한에서 뻬이징으로 나와 있던 천선생이라는 분이 입국수속을 맡아서 해주었다. 성보와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일행은 어머니와 나, 영민, 뻬이징에서 합류한 성보를 합쳐 모두 넷이었다.

‘조선민항기’에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는 북한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어디서 오십니까?”

“나? 뉴욕에서 와요.”

“예? 미국에서요?”

“그래요. 우리 아들 보러 가요.”

북한학생들은 놀라는데 어머니는 마실가는 듯 태연했고 표정도 즐거워 보였다. 반면 나는 어떤 초조함과 두려움 그리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영민 성보 남매는 이미 중국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비행기는 한시간 반쯤 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7월초 여름 더위가 후끈했고 모든 것이 조용했다. 우리 가족은 다른 승객들이 모두 공항을 빠져나간 뒤 비행기에서 내렸다.좀 떨어진 공항청사 주변에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공항대기실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급속도로 움직였다. 큰아들을 발견한 어머니와 어머니를 알아차린 아들이 어느 틈엔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둥켜안았고, 모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돌부처가 되어 굳어졌다.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과 좀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형에게 다가가서 “납니다”라고 했다. 이 한마디가 헤어진 지 37년 만에 나온 첫마디였다. 지난날 우리들의 고난과 분노, 두려움, 그리움, 억울함, 서러움 등이 이 순간을 위해서 있었던가.

 

 

우리 가족들의 행진

 

호텔에 들겠느냐는 제의도 있었지만 내가 되도록이면 조용한 곳이 좋겠다고 해서 우리는 대동강변에 있는 숙소로 안내를 받았다. 모인 식구들은 함흥에서 온 큰형과 처음 보는 조카 남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영민이와 성보에다가 평양의 사촌누님 내외분이었다. 사촌매부는 생물학자인 리정구씨로, 분단 전에 서울의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전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도 제자였다고 들었다. 그분의 부친은 이만규 선생으로 해방 전에 배화재단에서 교사로 일했고 여운형 선생의 비서를 지내신 한글학자다. 한글글씨로 유명한 리각경·이철경 쌍둥이 자매는 매부의 누님들이다. 북으로 간 리각경 선생과 남에 있던 이철경 선생 자매는 후에 아버지의 시 「그날이 오면」을 쓴 족자를 선물해주었다. 리각경 선생은 북에서, 이철경 선생은 남쪽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몇해 전 세상을 떠났다. 리정구씨의 아들딸 모두 박사여서 북한 텔레비전에서 가끔 박사 가정으로 소개된다.매부는 당시 생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양 교외의 숙소에 모인 우리 식구 아홉 명과 우리를 안내한 북쪽선생들이 저녁상 앞에 마주앉았다.37년 만에 만나 공항에서 서로 껴안고 난리를 치던 가족들은 몇시간도 안돼 바로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처음 보는 큰조카 효란과 석보도 사촌인 영민·성보와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던 북쪽선생들과도 술잔이 몇차례 돌면서 격의가 풀어졌다. 그들은 아주 정중하고 모든 성의를 다했다. 사람을 막상 만나보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은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평양으로 떠날 때 품었던 어떤 불안함과 망설임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예의를 잃지 말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자, 서로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찾아보자,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나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도 서로를 알고 친해지면서 순서 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손자 둘과 손녀 둘이 저희 할머니를 주위에서 시녀처럼 모시고, 큰형이 수문장처럼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홀가분하게 숙소 앞뜰로 나섰다. 처음 맞는 평양의 아침이었다. 소나무가 주위를 가렸고 떡갈나무 숲속으로 꿩이 걸어다녔다. 소나무 너머로는 대동강이 흐르고, 공기가 맑아 기분이 상쾌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데 외롭지가 않았다. 북쪽선생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나는 그냥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좋았다.

“피로하실 텐데 오전에는 쉬시지요.”

절에 가면 스님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 북에 가면 꼭 그날의 일정을 의논하는데 대체로 미리 짜여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 오후 숙소에서 영화 「상록수」를 보았다. 북쪽 인사들은 우리가 작가 심훈의 직계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영균과 최은희가 주연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였다. 서울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질 때 나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평양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뜻밖이었다. 신상옥 최은희 내외가 북한을 빠져나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간 뒤였다. 북에 있는 가족들은 처음 보는 기회였다. 일본을 통해 수입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마 일반에 공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양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인민대학습당 도서관에서 서울의 민중서관이 발행한 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가 들어 있는 심훈 작품집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출판된 책이었다.

나는 ‘뉴욕 이산가족찾기 후원회’ 사업으로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한 스무번쯤은 평양에 다녀왔다. 북녘땅은 한번 보는 것과 두번째로 보는 것, 그리고 세번째 네번째로 보는 것이 크게 다르다. 남쪽에서 북쪽을 가는 사람이나 북쪽에서 남쪽을 가는 사람이나 한번 보고 그 사회를 속단할 수는 없다. 한번 언뜻 본 느낌이나 경험으로 그 사회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선입견을 낳을 수가 있다. 그만큼 오늘의 남북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북한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요즘 남쪽으로 내려와서 떠드는 것을 보면 무슨 까닭이 있는지 솔직하지도 않고 자기들이 자란 고장 밖의 일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평양만 보고 북한을 아는 척하는 것도 속단이다.

한 이틀 동안 평양 주변을 구경한 우리는 함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함흥에서 다른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쪽선생이 처음에는 밤기차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는 낮기차를 태우지 않는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오전에 떠나는 기차로 바뀌었다. 평양에서 두만강으로 가는 제1호 열차의 편한 침대칸이었다. 내가 북녘땅을 달리는 기차를 탄 것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한참 뒤의 일인데, 나는 전남 강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김창영 민유심 내외분이 나를 보살펴주던 그때, 그분의 조카인 김항익 형이 나를 데리고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와서 다시 함경북도 경성까지 가는 기차를 태워준 일이 있다. 경성에는 큰이모가 살고 있었다. 큰이모부는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의사로 이름은 배헌이다. 자식이 없던 김창영 부부는 나를 아들로 삼으려고 했는데 내가 아버지라는 소리를 끝까지 안했다고 한다. 하여튼 나는 그 부부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 부부나 김항익 형은 지금은 다들 이 세상 분들이 아니다. 그후에도 경성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를 여러번 탔다.

평양에서 기차를 탈 때마다 나는 일제시대에 타던 기차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 타던 기차와 지금의 것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침대칸도 비슷하다. 나는 창가에 기대앉아서 50여년 전에 지나던 강산과 기다란 굴과 동해바다와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많이 변했을 텐데도 내게는 어려서 보던 옛 산천 그대로였다.

 

 

함흥에서 만난 사람들

 

평양을 떠난 기차가 평성과 양덕을 지나 고원에서 한동안 쉬었다. 고원은 원산으로 가는 기찻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기차가 쉬는 동안 아이들은 기차에서 내려 처음 보는 그곳 분위기를 살폈다. 나도 따라 내려서 기지개를 켰다. 어머니는 기차 안에서 북쪽선생들과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화투놀이가 유행하지 않고 대신 주패라고 해서 서양 카드와 비슷한 놀이를 한다. 나이가 든 북쪽선생들은 화투를 금방 배웠지만 화투로 돈내기를 한 어머니에게 졌을 것이 뻔했다. 고원은 민요 「신고산타령」의 고향인데 예술인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들었다. 고원을 떠난 기차는 정평·금야를 지나고 함주벌(함흥평야)을 가로질러 오후 늦게 함흥역에 도착했다.

함흥에서 태어난 처음 보는 조카들의 안내로 역 밖으로 나가다가 뒤를 돌아보는데 어머니가 어떤 노인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외삼촌, 어머니의 바로 손위오빠였다. 우리는 그때까지 외삼촌이 함흥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가 하얀 팔십에 가까운 오누이가 어린아이들처럼 서로 붙들고 울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이렇게 가끔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고나 할까. 외삼촌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느라 바깥세상에서보다 감옥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낸 분이다.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태어난 외삼촌은 이름이 안병학(후에 ‘동학’으로 개명)으로 틈만 나면 우리들을 찾아와 먼발치서 살피곤 했다. 전쟁 때 시골에 있던 우리들을 찾아와 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상봉 이후 외삼촌은 미국으로 자주 편지를 했는데 “한강물도 보고 싶고 삼각산도 보고 싶은데 그 땅을 지척에 두고 멀리 미국에 있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누가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지 한심한 세상이다”라며 탄식하곤 했다.

가족이 갑자기 더 늘어난 우리는 밀고 당기면서 역에서 가까운 형네 집으로 들어갔다. 동네 부인들이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수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고는 6남매나 되는 조카들에게 둘러싸였다. 외삼촌네 여섯, 형님네 사위 둘, 손자손녀들까지 해서 열셋, 우리 넷, 그러니까 스물세 식구가 방 세 개 있는 아파트 속에 비집고 들어갔다. 아파트가 비좁은 것을 안 북쪽선생이 넓은 호텔로 옮기자고 했으나 “식구들이 사는 집에서 지내고 싶다”고 우겨서 있게 되었다. 나는 무척이나 바빴다. 외삼촌 말씀을 들어야지, 어머니 모습 살펴야지, 아이들이 어떻게들 닮았는지 봐야지, 처음 만난 형수는 어떤 분인지 눈치로 더듬어야지, 북쪽선생들 눈치도 가늠해야지, 지쳐서 잠도 좀 자야지,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시차를 느끼지 않았다. 시간개념이 없어졌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둑어둑해졌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카들이 미국의 사촌들을 데리고 만세교가 있는 함흥 성천강변으로 나갔다고 한다. 거기에 모인 아이들에게 미국에서 온 사촌들을 소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서해안에서 자란 나는 동해를 좋아한다. 큰이모가 살던 함경북도 경성(‘북경성’이라고 했다)의 독진 앞바다에서 나는 처음으로 동해를 만났다. 정전 이후 찾아간 강원도 낙산사 앞바다는 항상 내 속에서 산다. 뉴욕에서 자주 찾는 곳도 동해와 닮은 몬토크 해변이다. 대서양은 물빛이 검고 음산한 기분을 주지만 그래도 동해를 닮아서 좋다. 샌프란시스코 언덕에서 조국땅을 향해 바라보는 태평양도 아득하고 시원하다.

좁은 아파트에서 복작거리기보다는 바닷가로 나가자고 제안했는데 북쪽선생이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음식은 부인네들이 밤새워 장만했고 북쪽선생들은 차편을 마련했다. 조선조 태조인 이성계가 살던 동군을 지나니까 곧 마전해수욕장이 펼쳐졌다. 어른들은 소나무 그늘 아래에 마련된 돌로 깎은 들놀잇상에 불고기판을 내려놓았고 아이들은 몰려서 바닷가로 달려갔다. 모래사장은 활대처럼 휘어지면서 길게 뻗었고 바다는 파랬다. 칠월의 바다는 차지 않았다.

형과 나는 헤어지기 전에 고향 앞 바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번에는 동해안 마전 바닷물 속으로 같이 뛰어들었다. 멀리까지 헤엄쳐가면서 고향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고향의 밤나무동산은 논으로 변했고 그때 사람들은 다들 죽었거나 흩어졌다. 남쪽과 북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전해수욕장 모래밭에서 경주를 하면서 뛰어놀고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젯밤에 못 끝낸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음날은 온 가족이 금강산으로 가기로 했다. 물론 나와 어머니도 그랬지만 북쪽 가족들도 그때까지 금강산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형수님이 남겠다는 걸 말리니까 큰조카딸이 남겠다고 나섰다. 나는 역시 안된다고 반대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선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눈치가 분명했다. 내가 나서서 “식구 중 누구라도 빠지면 나도 안 간다. 도둑이 없다는 사회에서 집은 왜 지키느냐. 도둑이 많은 미국에서도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다”고 힐난했다.“알겠습니다”라는 북쪽선생의 한마디로 문제는 해결됐다. 나는 가족들보다는 우리를 보살펴주는 북쪽선생들과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예의는 지켰지만 격의는 사라졌고 두려움은 괜한 염려로 둔갑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나이 오십이 넘어서 옛이야기도 쉽게 통했다. 내가 참외서리 하는 재미를 말하니까 그쪽에서는 한술 더 떠 남의 돼지새끼를 자루에 넣어 훔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그건 서리가 아니라 도둑질이라고 했더니 “정말 그랬다”고 정색하고 우겨서 배꼽을 빼고 웃기도 했다.

원산역에서였다. 어느 노부인이 두리번거리다 내 앞으로 뛰어오더니 “너 재호지?” 한다. 둘째 사촌누이였다. 얼굴이 많이 상해서 얼른 내가 알아보지를 못했다. 곁에 있던 어머니가 “너 명희 아니냐?”면서 껴안았다. 작은누이는 내가 온다는 통보를 받고 천내에서 원산역으로 나왔는데 북쪽선생들이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이다.

작은누이는 남편을 따라서 북으로 갔었다. 작은누이가 원산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기 전 기도를 해서 나는 속으로 놀랐다. 사촌들은 전쟁 때 북으로 납북된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모두가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래도 기독교가 배척당한다는 이북땅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었다. 식사 전에 꼭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다고 했다. 작은누이를 모시고 나온 큰 조카딸까지 모두 금강산 가는 길에 어울렸다. 우리는 구룡폭포를 보고 삼선암을 돌아서 만물상을 바라보며 천선대에 올랐다. 오는 길에는 삼일포를 들렀다.

우리들은 내친김에 묘향산으로 갔다. 나는 금강산보다 묘향산이 좋았다. 묘향산에서 지낸 서산대사가 한반도의 5대 명산을 꼽은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지리산은 웅장한데 아기자기한 데가 부족하고 금강산은 아름다운데 푸근한 데가 없다고 했다. 구월산과 삼각산에 대해선 무어라고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은 묘향산인데 이 산은 정기와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했다. 내가 본 묘향산은 높고 웅장하며 서해가 바라보이게 앞이 시원하게 터져 있다. 그러면서도 산꼭대기까지 나무가 무성해 푸근한 느낌이었고 산 중턱에서 뛰어내리는 폭포는 장관이었다.

 

 

즐거운 송별회 그리고 남은 일들

 

떠날 날이 다가와 묘향산 자락에 자리잡은 향산호텔에서 송별회를 가졌다. 나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불렀다. 조카 예란은 노래 대신에 할아버지 시 「그날이 오면」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낭송했다. 음정이 고르지 못한 성보는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가 사랑을 했더래요”를 부르면서 맨 마지막에 “갑돌이와 갑순이는 이렇게 만났더래요”라고 가사를 바꾸어 웃음을 안겨주었다. 외삼촌과 어머니도 손자손녀들이 노는 모습에 너무나 행복해하며 농담과 재담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들은 평양 숙소로 돌아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한패는 함흥으로 떠났고, 또 한패는 중국을 거쳐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남은 일이 있었다. 평양에서 처음 잠깐 만난, 둘째 사촌형이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우리가 찾아온 바로 그때 형수가 평양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체류하는 동안에 세상을 버렸다. 형은 우리를 만난 기쁨 속에서 사랑하던 부인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희비의 쌍곡선을 타고 있었다. 형수는 서울 출신이었는데, 그분의 사진을 조카딸을 통해 나중에 받았다. 왜 병원을 방문하지 않게 했는지, 그리고 모든 것을 숨겼는지, 나는 북쪽선생들에게 몹시 섭섭했고 지금도 섭섭하다. 평양의 사촌 큰누이가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도 당시 평양에 있던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사촌 큰형님이 함경북도 선봉(옛날의 웅기)에서 평양 큰누이 집으로 왔다. 충남 서산중학교에서 국어선생을 하다가 전쟁 때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사라진 형이다. 나를 만나는 표정이 얼떨떨했다. 첫마디가 “기환이 잘 있냐?”였다. 기환은 남쪽의 아내, 내 형수다.“아이들은?”“은보 은경이 잘 있지요.” 자기 딸들이다. 형은 천장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두고 떠나온 부인과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들을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한이 천장에 서린 것일까. 나는 형수와 은보 은경이를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하고 별별 고생을 다 한 형수, 그리고 아버지와 헤어진 조카 자매의 서러움과 억울함과 야속함, 월북가족이라고 해서 당한 수모 등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곧 서울로 갈 텐데 형수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특히 형수는 나에게 누님 같은 분으로 남쪽에서는 유일한 형수였다. 조카들도 내가 시골길에서 많이 업고 다녔다.

나는 형님의 손을 만져보고 무릎도 만져보고 얼굴 표정도 자세하게 살폈다. 서울에 가서 조카딸들의 손을 만지면 같은 핏줄이 내 손을 통해서 전기처럼 찌르르 전달될 것으로 상상했다. 형은 건강이 아주 좋지 못했고 불안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는 북에서 새장가를 들어 5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넷은 이미 결혼해 있었다. 그러니까 사위 며느리까지 해서 식구가 열 명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얼마 뒤에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았다. 남쪽에 남겨둔 부인과 딸들의 소식을 듣고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할머니 묘소 앞에 서다

 

북한땅에서 찾은 가족이 30명이 훨씬 넘었다. 남쪽에 있는 가족을 대충 손꼽아도 30명이 넘는다. 이들이 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직계자손들이다. 두 분의 손자들은 전쟁을 치르고 모진 세월의 풍랑을 헤치면서도 상한 사람이 없었다. 북쪽선생 말마따나 기적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손자들 중에 남쪽이나 북쪽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무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밤낮 봉제공장 친구들, 화투 친구들에 둘러싸였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어머니가 이북에 빨갱이 아들을 두었다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후레자식들”이라고 한마디로 무시하고는 다시 봉제공장에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다음번에는 이북에 두고 온 큰손자 석보 결혼식에 갈 터였다.

내가 평양을 떠나려 할 때 북쪽에서 해외이산가족찾기 사업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를 조직했다. 최고 발기위원으로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 이행우 선생, 고강희 박사, 김응택 교수, 함성국 목사, 뉴욕 원각사 오법안 스님, 뉴욕 천주교 정토마스 신부 등이 참여했는데 뉴욕주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1988년 3월 1일 정식으로 발족했다. 다른 사람의 이산가족찾기에 나선 것이다. 힘겹고 외로운, 이름 없는 우리들의 행진이 또다시 시작됐다. 나는 그때 동포신문인 『일간뉴욕』을 운영하면서 이산가족찾기 사업에 참여했다.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는 1995년까지 활동했는데 1천2백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찾아 신청자들에게 통보해주었다. 접수된 가족찾기 신청서류는 5천건이 넘었다. 회비 없이 우편으로 접수받아서 신청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가지각색의 많은 사연들이 눈물겨웠다.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들이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 부인 형제 자식 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극성스럽게 찾는다는 점이다.‘세월이 지나면 만나겠지’가 아니라 세월을 바꾸는 데 자신들이 앞장선 것이다. 이런 분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가족을 찾게 된다.“하늘도 무심하지 않다”는 말을 믿고 싶다.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의 사업으로 평양 가는 길에 서울을 들렀다. 우선 형수와 단둘이서 만났다. 형수의 손을 잡고 북에서 살고 있던 남편의 소식을 전했다.

“건강해?”

형수의 첫 반응이었다.

“아니요. 형수님의 안부를 제일 먼저 물어봅디다.”

형수는 “피이” 하고 웃고 말았다.

다음날 내가 묵고 있던 호텔로 형수가 찾아왔다. 남편을 만나고 온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남편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 형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북에서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나는 내 조카딸들이 괴로워하고 거북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저희 아버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 아이들도 이제는 아들딸 키우는 나이가 됐으니 언젠가는 아버지 때문에 가슴속에 맺힌 앙금이 풀리겠지……

형수가 사망한 얼마 뒤에 은보 은경이가 나를 찾아왔다.

“아저씨, 아버지가 저쪽에서 자식은 얼마나 두었대요?”

“오남매.”

“아이구 많네.”

내가 수첩에 적은 그들의 명단을 내놓았다. 들여다보던 자매가 “아들도 있네” 한다. 그리고 이북에 있는 형제들의 생년월일과 이름들을 잽싸게 베낀다. 언젠가 때가 되면 호적에 올리고 싶은 모양이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전쟁 때 우리 형제들이 헤어진 곳이다.“네 형들은 살아 있다. 네가 형제들을 찾아라”라고 40년 전에 유언을 남기신 할머니 묘소가 있는 곳이다. 나는 혼자서 당진행 버스에 올랐다. 내가 졸업한 송악초등학교 앞 가게에서 소주 한병과 마른 오징어를 샀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 앞에 섰다.

“할머니, 형제들을 다 찾았습니다. 다들 살아 있습니다.”(200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