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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새로운 노사관계와 총체적 학습사회
김장호 金章鎬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뉴패러다임포럼 공동대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원장. 저서로 『한국노동경제론 1: 새로운 생산방식과 고용』 『한국노동경제론 2: 새로운 노사관계와 보상제도』 『미국의 근로자복지제도』 『자동화와 고용』 등이 있음. jhkim@krivet.re.kr
1. 제2세대 질적 노동개혁의 필요성
우리는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개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오고 있다. 개발시대에 고착된 정부주도의 권위주의체제를 허물고 탈권위주의적이고 자율적인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개혁의 지향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의 청산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경제사회 운용의 기본틀을 정부주도에서 시장주도로 바꾸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보이는 손’에 의한 권위와 지시의 논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율과 경쟁의 원리로 우리 사회 전반을 재구축하려는 노력이었다. 따라서 정치민주화를 포함하여 개방화, 규제완화, 경쟁촉진, 공기업 민영화, 작은 정부의 구축 등이 개혁의 주요과제였다. 구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지금까지의 개혁은 근대적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틀을 갖추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개혁성과는 부문에 따라 그 명암이 교차한다. 그러나 21세기의 시대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차원에서의 개혁이 요구된다. 세계경제환경이 크게 달라지고 지식기반경제가 대두하는 21세기에 우리 사회의 통합과 도약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더욱 근본적인 질적인 개혁, 차세대적인 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와 의식 양면을 포괄하며 질적 변화를 수반하는 전면적 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사회의 종합적인 역량을 업그레이드 해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90년대 말에 우리가 경험한 소위 IMF 경제위기는 경제사회의 총역량을 지속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제2세대 질적 개혁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경제위기의 성격이 생산체제 자체의 비정합성에서 초래된 생산성 위기로 판명되면서 경제사회의 근본적 체질강화 없이는 지속적 발전과 성숙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제2세대 개혁은 국가와 시장, 특히 노사관계 분야에서 필요하다.
새로운 노사관계의 필요성은 사회경제발전의 핵심요소가 달라졌다는 데서 출발한다. 정보화·세계화(digital globalization)가 급속하게 진전되고 지식기반사회가 도래하면서 국가발전의 원천은 실물자본에서 기술력과 인적자원으로 전환되고 있다. 규모 경쟁 및 인건비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기존의 발전패러다임은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들의 추격으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제조업의 공동화(空洞化)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우리의 노동현실에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용형태가 비정형화되고 고용불안정이 크게 높아졌으며, 소위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 가시화되면서 절대적 고용기회의 부족이란 문제가 크게 대두했다. 노동계층간의 격차확대와 양극화 현상이 초래되면서 사회통합이 훼손되었고, 이러한 노동문제를 해소하는 데서 현 노사관계는 무력하기만 하다. 이는 지난날 공업화단계 개발시대의 고도성장기, 대량생산체제에서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노동문제의 성격 자체가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90년대 이후 노동개혁은 주요 개혁과제의 앞자리에 있어왔다. 국제기준에 맞추기 위한 노동법의 개정도 없지 않았고, 경제위기 국면에는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낸 바 있다.그러나 지금까지 꾸준하게 시도된 노동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노사관계는 분배주의 중심의 대결구도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사간의 신뢰기반은 대단히 취약한 실정이다. 노사가 경제사회발전을 이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왜 그런가? 여러가지 요인이 지적될 수 있지만 지금까지의 노동개혁이 제도와 형식에 치우쳐 행위주체들의 의식 및 관행이 철저히 전환되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21세기의 새로운 경제사회환경에 적극적으로 부합하기 위해서는 노사관계의 이념과 목표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제 노사관계의 목표는 단순한 노사안정에 머물 수 없다.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을 통해 거시적으로는 기업과 사회경제발전의 주요한 원동력과 원천을 찾아내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기업조직의 효율화와 사회적 공정성 제고라는 기업혁신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기업윤리와 노동윤리를 정립하는 계기를 찾아야 한다. 현재와 같은 갈등과 대립 및 불신이 팽배한 노사관계, 기업주는 주인이고 노동자는 객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확연한 노사관계를 그대로 두고서는 세계화·정보화시대의 기업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없으며 우리 경제의 선진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노사관계의 구축은 노사관계를 보는 새로운 사고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노동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바람직한 대안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이 정립되어야 한다.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효율과 형평이 조화되는 경제질서를 위해서는 노사관계에서 사람의 가치가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적 패러다임이 요구된다.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인본주의 기업패러다임과 노동편성원리의 방향과 과제를 현실 사례와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2. 생산적이고 인본적인 기업패러다임과 노사관계의 비전
한국 노동경제의 비전이 역사적 당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 자본주의의 특징과 그 생산방식·기업패러다임·노동편성원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기업의 본질(identity) 또는 기업패러다임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해왔다.21세기 노동세계의 기본구도도 새롭게 대두하는 생산방식과 기업패러다임에 의해 제어될 것이다.
인본주의 경영이념
선진국을 기준으로 볼 때 20세기 자본주의는 대량생산방식과 관리중심의 기업패러다임이 지배한 경영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라고 할 수 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방식 중심의 작업조직과 대립적 노사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포드주의 노동편성원리는 경영자본주의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자본주의는 21세기 새로운 사회경제여건의 대두로 인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후기산업사회, 정보화시대, 탈자본주의시대 등은 21세기의 시대상(像)을 표현하는 용어들이다.이러한 시대의 기업경영이념은 한마디로 인본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경직적인 소품종 대량생산방식의 경영주의패러다임에서 점차 탈피하여 다품종 유연생산체제가 지배적이고, 또한 소비자와 노동자 모두가 중심이 되는 기업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인본주의 기업패러다임은 정보화기술조건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이 요구되는 시장여건에서 효과적인 대응역량을 갖출 수 있게 한다.
21세기 탈산업화·정보화시대에 기업발전의 원동력은 초기 공업화시대의 자본동원 능력이나 포드주의 대량생산시대의 경영능력이 될 수 없다. 이제 기업의 발전은 노동자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 숙련과 기능, 일에 대한 열성 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화해내는가에 의해 좌우될 것이고, 따라서 기업조직은 과거와 같이 관리자와 피관리자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수직적인 관료조직형보다는 지식노동자(knowledge worker) 중심의 팀(team)으로 구성되는 자기관리적이고 협동연대망(networks)형의 조직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업조직에서는 전통적인 관리와 복종보다는 참여와 자율이 조직효율의 제고에 더욱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할 것이다.
인본주의 경영이념이 요구되는 객관적 조건은 우선 새로운 기술토대에서 주어진다. 전통적으로 표준화·규격화된 제품의 대량생산은 기계식 자동화를 바탕으로 생산공정과 관리체계를 최대한 분해·단순화하여 불필요한 동작의 최소화로 조직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조직에서 노동자는 관리자의 엄격한 감시·감독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다품종 소량생산에 맞는 유연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업무는 점차 통합화되고 단능공보다는 다능공이 중시되고 명령과 지시보다는 자율과 재량의 확대가 요구되고 있어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가 경쟁력의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노동의 상품화를 극복하고 노동의 인간화를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도록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인간화는 주로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자의 권리의식의 성숙에 따라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소외 극복 필요성과 연계되어 요구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노동공급 측면에서뿐 아니라 정보화 및 세계화에 의한 노동수요 측면에서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물질적·기술적 존재라기보다는 정신적·정보적·심리적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여 인간 감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작업체계를 도입하지 않을 경우 진정한 유연생산체제의 정착은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이같은 변화는 앞으로 노동자의 경영정보 공유폭의 확대, 의사결정과정의 참여 확대, 자율과 창의의 제고, 공동결정과 공동책임의 강화 등이 점차 새로운 기업패러다임과 작업방식의 구체적인 내용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인본주의 경영이념에서 ‘노동자 주권’이 크게 부각됨에 따라 노동운동 이념도 종래의 노사대결주의를 벗어나 노사협동주의가 강조될 것이다. 이는 노사가 이해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 해소하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적 파트너관계(social partnership relations)로 발전될 것을 요구한다. 이제 노동조합의 목표와 기업의 목표가 과거 대량생산체제와 같이 대립·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향 통합이 가능한 관계로 변화해갈 것이다.
탈포드주의 작업조직 및 노사관계
21세기에 우리가 장기적으로 지향해야 할 생산방식과 노동편성원리는 한마디로 탈포드주의(Post-Fordism)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모형은 생산체제가 좀더 유연하고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포드주의 노동편성원리의 부정적 요소를 극복한 것이다. 탈포드주의 노동편성원리는 기존의 구상과 실행노동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테일러주의적 작업조직과 대립적이고, 노동배제적인 노동편성원리를 혁파해 더욱 인본적이고 노동의 참여가 전제되는 유연적 노동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노동편성원리는 정보화기술혁신을 인간중심으로 활용하는 작업체계라고 할 수 있다.1 이러한 노동개혁은 새로운 방식의 인력개발과 학습체계, 작업조직, 보상체계, 노사관계를 포괄하며, 지식기반경제에서 노동의 위상이 후퇴하는 것을 방지하고 노동자계급 내부의 과다한 격차를 억제함으로서 경제사회의 활력을 담보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
포드주의체제에서 경영진은 노동자를 통제와 감독의 대상이라고 전제하는 데 반해 탈포드주의에서는 노동자도 창조적 기여자로 간주되는데, 이에 따라 탈포드주의 체제의 작업조직은 기존의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명령체계를 거부하며 각 프로젝트팀에 의한 수평적으로 통합된 직무가 중심이 된다. 그리고 포드주의 작업배치는 노동자와의 사전협의 없이, 그리고 현장지식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관리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이 보통이나, 탈포드주의의 작업배치는 노사가 협의하여 공동으로 결정하는 방식이 지배적이므로 소위 기능적 유연성이 높게 된다. 포드주의 노사관계는 대결구도와 분배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노사간 정보교류나 대화는 제한적이고 단체교섭도 불안정적이다. 그러나 탈포드주의체제에서는 관련당사자의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합의도출이 일반화되고, 공동체와 개체를 조화시키는 협동주의가 팽배한다. 한마디로 탈포드주의체제의 노사관계는 노사의 권력배분구조가 수평화·분권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형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3. 총체적 학습사회의 구현
인본주의 경영이념, 탈포드주의 작업조직, 노사관계 개혁은 곧 활력에 찬 인간중심의 작업장과 직업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자, 경제사회의 효율성과 고용안정성을 제고하고 노동계층의 양극화와 노동의 질적 저하를 줄여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 이는 바람직한 기업상이란 제품생산활동과 구성원의 인적자원개발을 동시에 수행하는 조직일 것임을 말해준다.
효율과 형평의 조화를 추구하는 이러한 노동경제 비전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기업패러다임의 변화를 포함해 여러가지 제도개혁과 의식변화가 요구된다. 그 가운데서 노동부문에 해당하는 주요과제로는 충분한 고용기회의 보장,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구축, 인본적 노동편성원리의 확립, 경쟁 낙오자에 대한 적극적 의미의 사회안전망 구비, 기본권으로서 교육훈련 기회의 사회적 보장 등을 들 수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동개혁은 이러한 노동경제의 비전 실현이 기본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노사관계의 목표를 단순한 갈등해소를 통한 노사안정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 경제사회발전의 핵심기제로 작용할 씨스템과 관행 구축을 의미한다. 세계화라는 새로운 경제환경에서는 전통적인 정책수단인 재정·금융정책의 유효성이 상대적으로 제약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방향의 노동개혁은 경제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중요한 견인차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개혁의 기초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은 교육훈련과 노동부문이 쌍방적으로 작용하는 저숙련 균형 함정(low skill equilibrium trap)에 놓여 있었다. 노동부문에서 창의적인 고숙련이 요구되지 못함에 따라 교육훈련부문에서도 고기술인력의 창출유인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숙련 함정은 포드주의 생산체제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이제는 이를 극복하고 고숙련·고성과·고신뢰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개인과 조직은 더욱 학습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총체적 학습사회의 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총체적 학습사회는 수평적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모든 조직이 학습조직화되고 상호 학습네트워크가 구축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며, 수직적으로는 모든 구성원에게 평생에 걸친 학습체제가 마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의 생애주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평생학습사회의 개념보다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총량적 수준에서 고용기회 부족 및 노동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는 현상황에서 총체적 학습사회의 구축은 여러 측면에서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총체적 학습사회 구축은 인간의 삶을 학습주기와 노동주기로 교차 편성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해 실업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학습과 교육 자체를 새로운 산업으로 육성하여 총수요를 확대하는 사회 전체의 선순환(善循環)을 조성함으로써 지식기반사회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작업장 내에서의 학습조직화는 산업경쟁력을 높이고 한층 지식집약적인 상품생산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4. 지속적 고용과 학습의 선순환 모형: 유한킴벌리 사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는 일류기업에서는 사원의 교육훈련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외국의 초일류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학습지향적 기업모델은 기업구성원의 가치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 경영이념에 부합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우량기업의 경우 학습조직의 대상은 기업구성원 중 핵심인력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학습조직모형은 많은 나라에서 당면한 고용기회의 부족문제를 해소하는 데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지속적 고용과 학습의 선순환을 이루어내고 있는 유한킴벌리(YK)의 경영혁신사례는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전 사원에게 평생학습의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YK사례는 우리가 당면한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뉴패러다임 기업혁신모형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2
80년대 말 YK는 경쟁환경의 심화, 경영악화, 심한 노사간의 불신 등으로 경영위기에 처하게 되었다.YK는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감축이라는 일반적인 대처방식 대신에 일부 경영진과 노조가 합심하여 3조근무 방식을 4조근무 방식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경영혁신을 추진했다. 단순하게 보면 이것은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나, 일자리 나누기와 함께 모든 노동자에게 교육훈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주간 4일 12시간씩 근무 후 3일 휴식 및 1일 교육, 이어서 야간 4일 12시간씩 근무 후 4일 휴식”이라는,16일을 주기로 하는 4개조 2교대 근무방식을 채택한 YK는 예비학습조를 도입함으로써 노동자에게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비조 도입에 따른 인건비 및 교육비 증대는 설비가동률 제고와 생산성 향상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YK모델은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이 수반되는 일자리 나누기 모형인 동시에 전 사원 대상의 학습조직화 모형이며, 고정자산의 적극적 활용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YK모형은 외국의 초우량기업에서 볼 수 있는 제한된 핵심인력 중심의 학습조직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생산성 향상이 수반되지 않는 단순한 일자리 나누기 모델을 능가한다.
YK의 경영혁신은 단순히 노사관계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측면에서 모범사례로 평가되고 있다.4개조 운영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연간 300시간에 이르는 훈련과 워크샵 방식의 특이한 인적자원개발, 작업장 혁신을 통한 세계수준의 품질과 생산성 향상, 윤리경영과 환경경영에서 YK는 다른 회사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산업안전의 개선과 고용안정을 이루어냄으로써 소위 ‘품위있는 일자리’(decent work)의 유지와 창출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YK모델은 노사가 모두 상생하는 인본주의 경영이념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YK모델의 핵심인 4개조 2교대 작업방식은 기존의 통상적 작업체계에 비해 여러가지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산업안전성이 크게 높아졌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전문가로 될 수 있었으며, 다양한 경영참여 기회가 주어짐에 따라 일에 대한 보람과 만족도가 크게 제고되었다. 더욱이 근로주기와 여가주기의 규모화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삶의 질’을 제고해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활동에도 참여의 가능성을 확대시켜준다. 또한 기업에는 고신뢰 노사관계의 실현, 고정자산 절감에 따른 재무구조의 개선, 지속적 기술혁신에 의한 기업경쟁력 제고 등 여러가지 성과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개별기업 차원에서의 노사관계 혁신이 집적될 경우 국가 전체 노사관계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인데,YK사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분단구조를 해소할 수 있는 메씨지도 주고 있다. 기존 기업패러다임에 비해 설비와 시설을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유연하게 활용할 경우 더 많은 사람이 고용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은 사회경제 차원에서도 여러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설비가동률이 낮은 일부 공공부문과 장치산업에서 일자리가 상당정도 추가로 창출될 수 있다는 의미로, 고용위기가 다가오는 현싯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1주 5일, 하루 8시간, 낮시간 근무’라는 소위 표준근로시간제의 일반적 관행을 탈피할 수 있는 더욱 유연한 노동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현재 산업화시대의 표준근로시간제를 고집하는 것은 경제사회의 활력을 위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YK사례는 단순히 일자리 나누기 모형이 아니라 노동과 학습이 함께 병행되는 학습사회모형이라는 점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 사례는 특정 장치산업의 혁신사례로, 다른 업종이나 산업에 바로 적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비조 또는 학습조의 도입을 통한 고용기회의 확대와 평생학습기회의 제공이라는 기본원리는 많은 부문에 접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고용위기와 노사갈등을 동시에 풀 수 있을 것이다.
개발시대에 구축된 한국의 발전모형은 기본적으로 인건비 경쟁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형은 중국의 급부상, 그리고 지식기반경제의 대두로 현실정합성이 점차 상실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은 장시간노동으로 과부하(overload) 상태인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모순구조가 심화되고 있다. 기존 모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중심의 새로운 모델을 정립해야 한다. 기업내 학습을 통한 인적자원 개발, 신경쟁력 및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의 기반이 되는 이러한 인본주의 모형은 노사협력과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근간이 될 수 있다.YK는 인본주의 기업패러다임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이다.
이제 노사가 모두 상생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선순환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YK와 같은 선순환 모형이 우리의 산업현장에서 자생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은 척박한 상황이다. 많은 기업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접근과 시도에 대해 그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냉소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분배주의 노동운동 이념과 상호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노사관계도 이러한 인본주의 모형 확산을 위한 대타협 도출의 장애요인이다. 따라서 노사의 자율에 맡겨서 새로운 모형이 구축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인본주의 기업패러다임을 확산시키는 민관(民官) 협동에 의한 국민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운동과정에는 전문가들의 자발적 참여가 더 많이 있어야 한다. 이제 시민운동은 결코 일부 운동가의 몫일 수 없다.
5. 맺는말
지금까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요구되는 인본주의 노사관계를 다루었다. 활력이 넘치면서도 공평한 노동사회가 구축되기 위한 기조는 인본주의가 되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탈포드주의 노동편성원리는 노동소외의 극복과 형평 제고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의 효율성 확보를 위해서도 요구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비전은 당위적 차원뿐만 아니라 기술조건·기업환경·노동시장여건 등의 변화를 고려할 때 역사적 필연성도 갖는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이제 사회 전체가 노동중심사회에서 노동과 학습이 병행되는 총체적 학습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가와 시장, 기업과 노조 모두 새로운 원리로 재정립되어야 하는데, 지속적 고용과 평생학습을 통해 강한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YK사례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발상을 전환할 경우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고용위기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동개혁은 인본주의 기업패러다임과 노사관계의 구축인데, 이는 노사관계를 갈등해소를 통한 노사안정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 경제사회 발전의 핵심적인 기제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세계화라는 새로운 경제환경에서는 전통적인 정책수단인 재정·금융정책의 유효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제약되고 있으므로 노동개혁은 경제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중요한 견인차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경제개혁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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