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만해문학상 발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3년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만해문학상의 제17회 수상작이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11월 27일(수)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17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김지하 시집 『花開』
심사위원 신경림 김우창 임형택 최원식
2002년 7월
만해문학상 및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
◼ 수상자 약력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1969년 『시인(詩人)』지로 등단. 시집 『황토(黃土)』(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오적(五賊)』(1985) 『애린』(1986)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이 있음.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상’ 수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수상(1981).
심사경위 및 심사평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에 의해 제17회 만해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4인은 6월 21일 창비 사무실에서 1차 회동하였다. 실무진에서 마련한 자료목록에서 심사위원회는 김지하의 시집 『화개(花開)』(실천문학사 2002)와 유홍준(兪弘濬)의 저서 『완당 평전』 1·2(학고재 2002)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하였다.
7월 6일 다시 모인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심사위원회는 우선, 유홍준의 『완당 평전』이 우리 전기문학(傳記文學)의 탁월한 개척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근현대문학은 기이하게도 전기방면에서는 볼 만한 작품이 영성(零星)하다. 완당(阮堂)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역사학계의 금언처럼 완당은 오직 명성만 높을 뿐이다. 변변한 완당의 전기조차 부재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연구성과를 충실히 소화, 19세기 조선이 낳은 천재의 삶을 총체상에서 복원한 『완당 평전』의 출현으로 우리도 이제 모범적 전기문학을 보유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술가 완당이 실학사상가 완당을 압도하였다는 점, 그리고 완당 예술작품들에 대한 더 정치(精緻)한 분석이 베풀어졌으면 하는 점 등이다.
김지하가 오랜만에 펴낸 시집 『화개』에서 우리는 그의 시와 사상의 새로운 단계를 예감한다.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가장 날카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시대와, 석방 후 생명사상으로 이행하면서 동서고금을 왕래하며 공생(共生)의 상상력을 탐구하던 시대, 이 두 시간은 일견 상반되는 듯, 실은 전위적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그는 항상 대중의 감각을 앞질러 선취(先取)의 자리에서 예언자처럼 고독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시인은 무궁무진한 일상의 세계로 귀환하였다. ‘한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선다[一花開 世界起].’ 꽃은 보편에 포섭된 특수가 아니라 보편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단독자다. 단독자의 내면을 곡진히 응시함으로써 시인은 아(我)와 공(空), 두 가장자리를 여의고 단독자와 단독자가 서로를 머금으며 거대한 고리로 연결된 화엄의 세계로 방(放)한다. 이 시집은 따듯하다. 일상과 지혜가 서로를 포옹한 달즉한(達卽閑)의 경지, 그래서 시인의 삶이 실패였다고 고백하는 순간에도 지극히 따듯하다.
혼자 가세요//바다가 빛납니다//거기/혼자 가세요//고요한 복판의 한/거기서 들끓는 화요일의 혁명들//이젠/혼자 가세요
―「내가 나에게」 부분
오랜 전위에서 해방된 저 사무치게 따듯한 ‘혼자’에 새 세상의 씨앗이 옴작거리고 있다.
심사위원회는 공교롭게도 김지하와 함께 심사에 오른 유홍준을 안타까워하면서 김지하를 제17회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김지하 시인의 뒤늦은 수상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申庚林 金禹昌 林熒澤 崔元植]
수상소감
반비례에 관하여
김지하
나는 오늘, 대낮의 영광보다는 한밤의 고통이 더 깊은 한 문학상, 웅변보다는 침묵이, 그러나 명백한 고통과 침묵임에도 그로부터 영광과 웅변의 빛이 스스로 배어나오는 한 문학상, 바로 만해문학상 수상결정에 접하고 그 수락을 결단합니다. 혹 물으실 것입니다. 수락에 무슨 결단까지 필요한가라고. 까닭은 이렇습니다. 이 시집 『화개(花開)』는 우선 허름하고 어수룩하며 수월하고 부드럽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나의 시적인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명백히 말씀드려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 지나친 언어적 금욕주의 시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수락을 결단한 것은 이 시집 안에 나의 새로운 시학적 명제인 ‘흰그늘’의 단초가 여기저기 싹트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결단은 이 새로운 시학에 대한 각오 위에 터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수상 사유 또한 이 점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나는 오늘, 한송이 꽃이 피어날 때 온 세계가 다 일어선다는 그 한 소식에 관한 몇마디 말로써 수상과 수락 결단의 소감을 대신할까 합니다. 그것은 ‘반비례’와 ‘흰그늘’에 대한 말입니다. ‘흰그늘’은 그 자체로서 모순어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음양법이요 연기법이며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생명논리입니다.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은 ‘흰그늘’이면서 ‘반비례’입니다. 먼저 스님의 시 「반비례(反比例)」를 앞에 겁니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흑암(黑闇)의 흰 얼굴, ‘백암(白闇)’. 하아얀 어둠. 광명인 그림자. ‘흰그늘’은 ‘반비례’입니다. 그러매 생각해봅시다. 고통의 어둑어둑한 그늘이 결여된 밝은 희망의 흰빛이 공허이듯이 신성한 생명의 흰빛의 생성과 절연된 죽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검은 집착은 맹목입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 빛나는 저 유월개벽(六月開闢)의 나날들, 거리를 가득 메운 저 젊은 군중의 함성 속에서까지 검은 중력장과 흰 초월성의 ‘3박 플러스 2박의 엇박’ 그 ‘흰그늘’을 보고 들으며 또한 그 ‘반비례’를 듣고 봅니다. 민족은, 민족의 모든 개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님의 침묵의 시대가 아닌, 님의 침묵의 모순어법에 가까이, ‘흰그늘’의 지혜에 가까이 있으며 ‘반비례’의 역동 속에서 춤을 춥니다. 왜냐하면 민족은 바야흐로 자기의 젊음 속에서 반비례하는 고통의 광명, 침묵의 웅변을 스스로 맞이하고 스스로 발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리거리에 가득 찬 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그리고 저 ‘역동적 균형’의 ‘카오스모스’인 ‘엇박과 치우와 태극’은 이제 민족과 새 세대의 새롭고 웅숭깊은 문화적 코드로 되어가고 있으며 장차 그것은 온 인류가 앓고 있는 집단적 정신분열의 치유와 통합에 대한 결정적 처방으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난날 ‘검은산’과 ‘하얀방’의 깊은 분열로 긴 세월을 고통받았으며 3년 전 어느 한날 ‘흰그늘’의 묵시(默示) 속에서 통합과 치유의 가능성의 빛을 보았습니다. ‘흰그늘’은 도무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순이면서 통합입니다. 만해 스님의 그 ‘님’이 아픔이자 기쁨이고 ‘모심’이자 ‘살림’이듯이 ‘흰그늘’은 ‘소롯한 예절’이면서 ‘힘찬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우주로 열리는 고요한 삶의 ‘화개’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주 자체의 혁명적 ‘대역사’입니다. ‘흰그늘’은 그 현대적 전개과정에서의 동이적(東夷的) 상상력의 알심이기에 나아가 농경정착적인 생명의 에콜로지이며 또한 유목이동적인 영성의 싸이버네틱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바, 세계를 품에 안은 남북한 민족과 동아시아의 새 문명, 대륙과 해양이, 세계의 남과 북이 교류 교차하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서로 교합(交合)하는 새로운 후천세계(後天世界)의 구체적 창조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너는 너고 나는 나로되, 너와 내가 서로 얽히듯, 이미 지양(止揚)이나 해소(解消)가 아닌, 그러한 공존·동거의 ‘얽힘’ 속에서 통합의 새 차원을 모색하는 자유와 평등, 인권과 복지는 물론, 신비와 과학, 신화와 역사, 환상과 사실, 명상과 변혁,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상생과 상극, ‘아니다’와 ‘그렇다’, 그리고 당연히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또한 그 ‘얽힘 속에서’ 통합하려는 ‘활동하는 무(無)’ 곧 ‘태극(太極)이며 궁궁(弓弓)’일 것입니다.
이 ‘흰그늘’은 본디 우리의 풍류(風流), 우리 민족미학의 한 핵심원리로서 윤리적 삶의 패러다임과 미적 창조의 패러다임 사이의 당연한 일치를 요구하며 ‘天·地·人’의 삼재(三才)에 대응하는 영성·이성·감성의 삼자 결합을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흰그늘’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을 통일하고 그 체(體)인 황극(皇極) 속에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통전하는바 그 용(用)인 율려(律呂)의 숨은 ‘무늬’요 드러난 ‘아우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2박’인 ‘아래로부터의 기제’와 ‘위로부터의 기제’를 오늘날의 ‘3박’인 ‘삶·사람·살림’의 생명운동 속에서 새롭고도 오래된 ‘엇박’으로 통합하는 문예부흥, 문화혁명의 한 메타포가 또한 ‘흰그늘’입니다. ‘흰그늘’ 아래서 우리는 신비적인 내관(內觀)과 상수과학적(象數科學的)인 현상학이 서로 협동하여, 이미 성취된 오감통합(五感統合)의 매개에 의해 새 차원의 깨달음에 이르는 대중적인 명상의 문화 또는 현실변혁적인 초월의 예술로 가는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문학은 마침내 디지털과 싸이버세계의 도전을 도리어 자기 안에 ‘반비례’로 흡수하면서 ‘흰그늘’과 같은 콘텐츠를 쉬임없이 심화개혁(深化改革)하여 차원을 바꾸어가며 엄존(儼存)할 것이고 더 깊은 성실성, 더 넓은 실천적 경험과 더 높은 재능으로 동아시아 주도의 문예부흥과 세계적 문화혁명의 중요한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민족문학은 이제 자기의 존재보존과 존재확장을 위해서도 양(量)과 형식(形式) 방면만이 아닌 문학·역사·철학이라는 질(質)과 내용(內容) 방면으로부터 그것을 포용하면서 도리어 새로운 우주적 차원으로 비약하는 새 시대의 새로운 정보체계, 새로운 결승(結繩), 새로운 역(易)을 창조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민족문학이 겪는 고통은 바로 그 정보체계, 그 결승, 그 역의 흰빛, 대광명을 창조하기 위한 ‘기름’으로서의 ‘그늘’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또한 ‘반비례’의 수더분한 역설(逆說)로, 또는 그 오묘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민중의 저 허름하고 어수룩한 민족문학의 그릇 안에 담지 않는다면 그것을 결코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 통합이자 동시에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만해 스님의 시 「나는 잊고자」와 나의 시 「단시(短詩) 하나」는 운명적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갑니다.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잊고자」 부분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하나」 전문
운명적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간다는 것. 이것이 나의 만해문학상 수상의 또하나의 수락 사유이기도 합니다.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신헌법 공포 직후 내설악 백담사 골짜기에 피신했을 때입니다. 그때 만해 스님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여울 1」이란 시올시다.
밤하늘 가득 찬 비구름 바람
산맥 모두 잠든 저기서 소리지르네
촛똥을 모아 가난하게 일군 불
아슴히 여위어가는 곁에 있어 밤새워 소리지르네
옛 만해의 아픔
가슴속 타는 촛불의 아픔
바위에 때려 부서져
갈 곳을 가려 스스로 끝없이 바위에 때려 부서져
저렇게 소리지르네 애태우네
여울이 밤엔 촛불이 나를 못살게 하네
백담사 한귀퉁이 흙벽 위에 피칠한
옛 옛 만해의 아픔
내일은 떠나
떠나 끝없이 나도 여울 따라가리라
죽음으로밖에는
기어이 스스로 죽음으로밖에는
살길이 없어 가리라 매골모루*로 가리라
아아 타다 타다가
사그러져 없어지는 새빨간 새빨간
저 촛불의 아픔.
*매골모루: 이조 때 대역죄인을 육시(戮屍)하여 토막토막을 나누어 각각 함경·평안·전라·경상 등 각도의 남북단 ‘매골모루’란 곳에 매장했음.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살려고 애씁니다. ‘반비례’올시다.
감사합니다.
단기 4335년(서기 2002년)
양력 7월 13일 一山에서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