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신동엽창작기금 발표
고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문학과 정신을 기리고 역량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제정한 신동엽창작기금의 제19회 수여대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수여금은 1,000만원이며, 수여식은 11월 27일(수) 오후 6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20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여대상자
시인 최종천(崔鍾天)
심사위원 구중서 이시영 김사인
2002년 6월
만해문학상 및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
◼ 수여대상자 약력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중학교 졸업 후 상경. 1970년대 초부터 용접공으로 일함. 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2년 첫시집 『눈물은 푸르다』 간행.
심사평
최종천 시인이 올해 신동엽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이시영·김사인·구중서 3인의 심사위원이 시와 소설 부문의 여러 작품집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이다.
『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2002)는 오랜만에 대하게 된 본격적인 노동 소재의 시집이었다. 시집 속의 작품 다수가 노동현장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시인 자신도 현재 현장에서 용접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집은 노동에 연관된 소재주의의 소산이 아니다. 또 지난 80년대 무렵에 접할 수 있었던 이념형의 시집들과도 다르다. 우선 최종천의 시집 『눈물은 푸르다』에서 느낀 바를 말한다면 날것처럼 생경한 시적 어법과 현실 속 삶의 깊은 의미이다. 이러한 시작업의 가능성과 특성은 무엇인가. 근래 문단의 시작업들이 감수성과 수사의 면에서는 많이 풍부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경향 안의 많은 시들은 삶의 의미를 육화한 진실의 언어를 보여주지 못한다. 공허한 상상력과 초월적 지혜를 머리로 꾸며낸 것들을 보게 된다. 시를 그렇게 쓰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자유이며 어느정도 다양성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종천의 시는 일상의 삶 안에서 사물을 본다. 가령 「십오촉」에서 담장을 넘어 들어온 남의 집 감나무 가지에 달려 잘 익은 홍시의 밝기를 오촉 정도는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시인의 활력있는 직관이다.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촉이고 홍시를 바라보는 꼬마의 얼굴은 홍시를 닮았다. 이 시에는 아름다운 서정과 함께 사회성도 담겨 있다.
부(富)를 배경으로 매일 공연되는 예술들이 있지만, “부(富)는 손상되지 않은 자연과/소외되지 않은 노동”(「부란 무엇인가」)이라는 노동 주체의 의지, 즉 삶의 가치관도 있다. 「지상의 척도」에서는 하늘 위에 있는 하느님이 지상에 좀 내려와 정면으로 인간을 보아주길 바란다. 위에서 수직으로 보면 동그란 머리밖에는 안 보일 것이고, 각기 다르게 생긴 불평등한 인간들의 실상은 안 보일 터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통찰 같기도 하다. 집과 장롱에 가둬두는 의미의 낭비, 언어에 대한 갈구(「집」)에서는 구도자의 풍모도 보인다.
이 시집에는 노동자의 희생에 대한 항의도 있다. 그러나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가치를 아는만큼 노동자의 전인적 인격에 대한 자기긍정이 이 시인의 정신적 기반으로 되고 있다.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에서 노동자의 기름 묻은 바지 뒷주머니에 철학서가 꽂혀 있음을 연상하게 한다.
이른바 거대담론은 꼭 이념이나 혁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시에 있어서는 전인적 인격, 인간다움의 추구에 거대담론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동이 있는 일상은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현실은 언제 어디서나 최후의 가치기준이다. 여기에 리얼리즘의 항구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편향된 과거 집착이라든가 불확실한 미래 예측결정론에 의미를 낭비하는 시간을 오늘날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게 된다. 오늘의 삶 복판에서 우리의 살이 된 언어로 울림이 큰 시를 우리는 만나고 싶다.
최종천의 시가 아직 원숙의 연륜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일상과 노동과 ‘녹슨 볼트를 푸는 법’에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 실감을 충전받게 되고, 역사에 대응하는 데에서도 시사받는 바가 있다.
[具仲書 李時英 金思寅]
수혜소감
노동과 예술 사이에서
최종천
나는 사실 내 무식한 어머니가 ‘이술’이라고 하셨던 예술을 믿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노동이다. ‘이술’이년의 눈에는 땀을 흘리며 어린것들을 길러내고 가난한 생활을 일구시던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신동엽 선생은 다른 것이 아닌 이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시를 불렀다. 기술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때에 생활은 곧 예술이었다. 예술은 곧 생활이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이 거대관념에 잘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역사로부터 얻은 상처를 통하여 존재를 보고자 한다. 거기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나는 시를 쓰든 안 쓰든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내 시는 이 괴리를 보는 데서 나온다.
신동엽 선생의 순정성은 그가 상처를 승화하는 결과였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을 때 비로소 평화가 가능하다. 예술로부터 우리는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치료받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신동엽 선생이 “짐승은 예술과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생명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라고 쓴 배경이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문화산업이란 어떠한 부(富)도 생산하지 않는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만이 부를 생산한다. 문화는 자연과 노동을 통하여 얻어진 기왕의 부를 다툴 뿐이다. 때문에 문화는 전쟁이며 갈수록 이 전쟁은 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자연은 신의 재산이며 문화는 인간의 재산이다. 문화를 발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치르는 수고는 엄청난 것이다.
내 생각에 시인이 할 일 중의 으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수고와 비참(悲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천만원이라는 거액은 우리 노동자들이 일년을 저축해야 마련할 수 있는 액수다. 이 작고 조용한 시를 더 힘차게 몰고 가는 것이 이 행운을 안겨준 신동엽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저를 선정해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문자와 언어로 이루어지는 문학은 문화의 중추신경이다. 우리를 길들이고 마비시키는 이른바 문화의 시대에 문화와 맞서는 문학을 위해 수고하시는 창작과비평의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