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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
지방분권적 민주국가를 향하여
‘비전 2011’을 넘어서
김형기 金炯基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장.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 저서로 『새정치경제학』 『한국노사관계의 정치경제학』 『한국의 독점자본과 임노동』 등이 있음. hkim@knu.ac.kr
1. ‘비전 2011’의 비전
(1) 신자유주의 비전
2000년과 2001년에 새로운 천년과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새 천년 비전’과 ‘21세기 비전’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제시된 바 있다. 주요 언론기관들과 재벌기업의 몇몇 연구소들도 각자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 비전들은 서로 다른 철학과 관점에 기초하여, 1997〜98년의 한국경제의 전례없는 위기를 극복하는 서로 다른 길과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각처에서 제시한 비전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 즉 경제민주주의 비전과 신자유주의 비전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당국의 비전은 어떠한가? 1998년 초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내걸었다. 이는 대체로 정치에서는 민주주의, 경제에서는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국정지표는 민주주의를 우선하느냐, 아니면 시장경제를 우선하느냐에 따라 경제민주주의 비전으로 기울 수도 있고 신자유주의 비전으로 기울 수도 있다.
IMF 관리체제 아래 구조조정을 통해 파국적인 경제위기를 일단 극복한 2000년에 들어와 정부당국은 새 천년과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IMF 관리체제 이후의 한국경제의 비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2001년 말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의 보고서 「2011 비전과 과제: 열린 세상, 유연한 경제」에는 정부당국의 비전이 집약되어 있다.
‘비전 2011 프로젝트’라 이름붙여진 이 연구프로젝트는 재정경제부 주도 아래 16개 국책연구소의 연구진을 비롯한 경제전문가 290여명과 정부 각 부처 공무원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16개 분야에 걸친 개혁과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부문별 추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기업경영 개선, 금융개혁, 노동정책, 공공부문, 성장동력, 인력양성, 여성, 교통물류, 국토균형, 에너지, 복지, 환경, 문화, 농수산, 동북아 등 16개 분야의 개혁 추진과제가 총망라되어 있다. 정부당국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이 보고서는 한국경제에 대해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보고서는 2011년 한국경제의 비전을 ‘열린 세상, 유연한 경제’로 요약하고 있다. 이를 위한 핵심과제로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시장경제 구축, 지식정보시대의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지속적 성장을 지원하는 인프라 확충, 경제수준에 맞는 삶의 질 향상,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지로의 도약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 실현과 과제 수행을 위한 정책수립의 원칙으로서 전방위적 개방화, 법치주의 확립, 분권화, 전문화를 들고 있다.
‘비전 2011’의 비전은 유연한 시장경제 씨스템에서 지식기반경제에 걸맞은 새로운 성장기반을 구축하여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시장’ ‘경쟁’ ‘유연성’ ‘성장’ 등이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다. 복지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살짝 덧붙여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 ‘연대’ ‘공평성’ ‘생태’ 등의 용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3대 차별인 성차별·학력차별·지방차별을 없앨 수 있는 획기적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별이 국민적 에너지 결집에 장애가 되어 성장잠재력 그 자체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정부’가 집권 초기 내세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란 국정기조에서 민주주의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현 정부의 중반기에 자랑스럽게 내놓은 ‘생산적 복지’도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21세기 초 현싯점의 인류의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비추어볼 때, 시장경제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실패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대로, 시장을 무시하면 반드시 그 시장의 보복을 받게 된다. 또한 시장이 생산씨스템을 비롯한 조직의 혁신을 자극하는 가장 확실한 메커니즘이란 것도 증명되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불안정성과 불공평성이란 내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이것이 격화되면 파국적 경제위기와 사회의 양극화가 초래된다. 이에 따른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비효율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시장경제에서는 이러한 모순의 증폭을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사회안전망이 제도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주요 선진민주주의국가들이 2차대전 이후 추구해온 ‘사회적 시장경제’ ‘민주적 시장경제’ ‘복지자본주의’ ‘경제민주주의’ 등은 시장에 대한 국가·시민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 착근된 경제(embedded economy)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비전 2011년’에는 이러한 사회안전망 구축이란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 시장만능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장을 과신하면 시장의 재앙을 당하고, 성장에 집착하면 자연의 보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전방위적 개방화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초래할 위험을 인식하고 촘촘한 안전망을 정비하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특히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국민경제에 미칠 파괴적 효과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리고 보고서가 강조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임금과 고용을 신축적으로 조정하는 ‘수량적 유연성’(numerical flexibility)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수량적 유연성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생활불안을 가져온다. 고용안정과 생활안정에 기초한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기업 경쟁력 향상이 양립 가능하려면, 이러한 수량적 유연성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숙련이 높아지고 작업조직이 혁신되어 노동의 유연성이 증가하는 ‘기능적 유연성’(functional flexibility)을 추구해야 한다.
생산성 및 품질 향상에 기여하는 기능적 유연성은 노동자들의 참여에 기초한 협력을 통해서 실현 가능하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협력적 노사관계만 강조하고 그 전제가 되어야 할 참여적 노사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참여 없는 협력 없다”는 명제를 생각할 때, 이러한 노사관계 비전은 불합리하다 하겠다.
전면적 개방체제 아래에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금융시장을 자유화하며 교육과 복지에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려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비전 2011’의 비전인 것이다.
(2) 생산적 국토관리를 위한 지방분권
그런데 이 보고서가 ‘비전 2011’의 실현을 위한 정책과 추진의 4대원칙의 하나로 지방분권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울-수도권과 지방-비수도권 사이의 격차가 날로 확대되고 지방이 황폐화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이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것이다.
보고서에서는 수도권과 지방의 상생(相生)과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지역별로 핵심성장역량을 배양하는 지역혁신체제를 구축하고, 국가공공기관을 지방에 이전하며, 지역개발정책의 기획과 집행에 관한 권한을 지방에 대폭 이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아울러 중앙정부와 자치단체 간에 상호협동적 지역발전 추진을 위해 프랑스에서 실시하고 있는 바와 같은 지역발전협약제도를 제안하고 있고, 지역균형발전의 강력한 추진을 위해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지역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국토관리, 낙후지역을 보강하는 지역균형발전 추구, 분권과 통합을 조화하는 국토관리체계 확립 등 생산적 국토관리와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지방분권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비전은 확실히 지금까지의 정부당국의 지역발전정책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할 우려가 있는 제안을 담고 있다. 수도권 관리의 합리화란 명분으로 수도권 입지규제를 완화하고 그 대신 수도권에서 발생한 소득의 일부를 지방으로 이전하여 그 재원으로 지방의 성장역량을 구축하도록 하자는 제안이 그것이다. 이는 수도권을 더욱 키우고 그 과실의 일부를 지방에 나누어주어서 지방의 발전을 돕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도권의 국물이나 떡고물이 지방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발상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심각한 서울-수도권 집중현상을 그대로 방치한 채, 중앙정부 의존적이고 서울 의존적인 종래의 지역발전을 계속 추구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지방을 중앙의 시혜대상인 주변으로 생각하는 서울중심주의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편에서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국가의 개입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도권 규제를 완화하자는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 하겠다.
극단적인 수도권 집중으로 인해 고지가·교통체증·환경오염이 발생하고 여기에 드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서울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서울의 경쟁력 향상이나 서울에 입지를 둔 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도 수도권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보고서의 내용은 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과 함께 보고서에는 지방분권이 지속적 성장을 위한 생산적 국토관리라는 좁은 시각에서만 취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경제·문화 등 총체적인 지방분권을 통해 새로운 국가경영 패러다임을 구축한다는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지방분권의 문제는 국토관리의 차원을 넘어 총체적 국가경영 즉 경세(經世)의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여기서 ‘비전 2011’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21세기 국가경영 패러다임으로서 지방분권의 비전은 무엇인가?
2. 민주적 대안으로서의 지방분권
(1) 개발독재적 중앙집권을 넘어 민주적 지방분권으로
지방분권은 중앙집권-서울집중체제 아래 중앙·지방 간의 격차와 지방차별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 현단계 한국사회에서 민주적 대안 중의 하나이다. 지방분권은 중앙정부에서 자치단체로의 권한이양과 서울-수도권에서 지방-비수도권으로의 자원분산이라는 두 측면을 포함한다. 이러한 지방분권이 민주적 대안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민주적 대안의 핵심적 과제는 자본주의 내에서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대안적 발전모델을 세계적 수준, 국민국가 수준, 지역수준이란 서로 다른 세 수준의 상호연계 속에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안적 발전모델은 구상과 실행을 통합하는 탈테일러주의(Post-Taylorism)적 노동과정과 고부가가치의 유연생산체제에 기초한 새로운 축적체제, 참여민주주의적 조절양식, 민주개혁적 헤게모니 블록, 생태주의적 사회패러다임을 중심내용으로 한다.1
한국사회에서 지방분권은 그동안의 개발독재적 중앙집권-서울집중체제를 민주적 지방분권체제로 개혁하려는 민주적 대안의 프로젝트로서 이러한 대안적 발전모델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된다. 민주적 지방분권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대안적 지역발전모델의 실현으로 연결될 때 민주적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지역에 일터와 삶터를 두는 지역주민 주체의 입장에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구조개혁과 체제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 지방분권론과 지방분권운동의 프로젝트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개발독재체제 이후의 대안적 발전모델로서 대체로 정치체제로서는 민주적 중앙집권체제, 경제체제로서는 민주적 시장경제가 상정되어왔다. 중앙집권적 민주국가에 의해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민주개혁을 추진하고 공평성과 효율성이 결합된 민주적 시장경제를 달성한다는 비전이 제시되어온 것이다. 이러한 발전모델이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체제를 지향하는 보수적 대안과 대립하는 민주적 대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적 중앙집권체제와 민주적 시장경제가 국가 즉 중앙정부에 의한 권력독점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때의 민주주의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민주화를 더 많은 사람에게로의 권력분산으로 정의한다면, 민주주의는 계급분권·삼권분립·지방분권이란 세 측면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가계급의 권력독점으로부터 노자간의 권력분점, 행정부에 의한 권력독점으로부터 입법·행정·사법 간의 삼권분립, 중앙정부에 의한 권력독점으로부터 중앙정부와 자치단체 간의 권력분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지방자치는 지방분권이 선행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지방분권 없는 지방자치 없다”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지난 10여년의 지방자치 경험은 지방분권 없는 지방자치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결정권 없는 지방자치’ ‘세원 없는 지방자치’ ‘인재 없는 지방자치’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의 지방자치2를 내실화하여 진정한 지방자치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풀뿌리 민주주의 혹은 주민자치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개발독재적 중앙집권에서 민주적 중앙집권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민주적 지방분권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앙집권적 민주국가가 아니라 지방분권적 민주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민주적 지방분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이 주민자치와 결합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의 기본방향이 ‘지방에 결정권을’ ‘지방에 세원을’ ‘지방에 인재를’이라고 한다면,3 민주적 지방분권은 여기에다 ‘주민에 결정권을’이란 요소를 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복지국가와 복지공동체의 결합을 위하여
지방분권을 통해 복지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은 민주적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이다. 교육·의료·육아·양로 등 지방정부가 제공하는 현물급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의 복지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지방분권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대로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중앙정부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실업급부금과 생활보조금 지급과 같은 화폐급부를 행하는 복지국가를 구현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이다. 현금급부 중심의 사회복지는 중앙집권적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전국 일률적인 국민적 최저수준(national minimum)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지행정의 중앙집권이 불가피하다.
이와 동시에 선진국이 경험한 복지국가의 문제점을 미리 예방하여 수준 높은 사회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을 추진하여 현물급부에 의한 사회안전망을 펼쳐야 한다. 현물급부 제공은 ‘가까이 있는 정부’인 지방정부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4 이처럼 지방분권은 복지국가(welfare state)에서 복지공동체(welfare community)로 나아가는 새로운 복지모델 구축에 필수적이다. 복지공동체는 지방분권이 이루어져야만 실현될 수 있다. 복지공동체는 복지국가를 해체하여 복지써비스의 시장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자유주의적 대안과는 달리 복지국가의 모순을 해결하고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려는 민주적 대안이다.5
복지공동체에서는 사회보장정책의 대폭적 분권화를 통해 광역자치단체가 현물급부 중심의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한다. 이때 지방정부와 지역시민사회의 비정부기구(NGO) 혹은 비영리기구(NPO)가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복지써비스를 제공하는 ‘제3터’(Third Sector)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장부문도, 국가부문도 아닌 시민사회부문의 제3터는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현물급부 중심의 복지써비스인 어린이 교육, 환자 간호, 육아, 양로 등과 같은 써비스를 생산하여 공급하게 된다.
복지국가의 과제와 복지공동체의 과제를 동시에 압축하여 수행해야 하는 것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개발독재의 발전국가로부터 민주적 중앙집권의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지방분권체제에서 복지국가와 복지공동체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단계 한국에서의 민주적 대안이다.
3. 지방분권을 통한 대안적 지역발전
(1) 지방분권·주민자치·지역혁신에 기초한 내발적 발전
지방분권은 지금까지와 같은 중앙집권적 개발독재체제와 재벌지배의 경제체제 아래 서울과 재벌에 의존하는 종속적 지역발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역발전모델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 지방분권은 지역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 없이 지방분권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지방분권은 대안적 지역발전모델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지방분권은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과 자주관리(self-management)라는 철학적 기초 위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 조직과 집단의 문제는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한다는 사고, 자기혁신을 통해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지방분권이 대안적 지역발전에 기여하려면, 지역혁신 및 주민자치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
먼저 지방분권은 지역혁신과 결합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이 지역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중앙집권-서울집중체제의 구조개혁을 의미한다면, 지역혁신은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지역 자신의 낡은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주체의 개혁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개혁과 주체의 혁신은 맞물려 있다. 지방분권이란 구조개혁이 있어야 지역혁신이란 주체의 혁신이 가능하고 지역혁신이 있어야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실현할 수 있다. 지역혁신을 통한 지역주체들의 능력향상이 없으면 지방분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없다. 지역혁신체제는 지역의 자생력과 가치창출능력을 갖추게 하는 지방분권의 경제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방분권은 주민자치와 결합되어야 한다. 주민자치는 지역수준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주민자치와 결합되지 않는 지방분권은 지방정부 관료와 토호 들의 권력만 강화하여 지역수준에서 새로운 관료적 권위주의를 낳을 것이다. 주민자치를 위해서는 주민의 자치능력이 향상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민의 자기계발 노력과 참여의식은 주민자치의 필수적 조건이다.
지방분권에 기초한 주민자치를 통해 지역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분권화된 광역 지방정부(市道) 내에서 협역 기초자치단체(市郡區) 단위로 주민이 참여하여 창의성과 적극성을 발휘함으로써 지역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최근의 지역혁신체제(Regional Innovation System)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역혁신은 지역을 학습지역으로 만들어 주민들의 혁신능력을 높일 때 성공할 수 있다.6 따라서 소수 엘리뜨 중심의 지역혁신이 아니라 지역주민 주체의 지역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주민의 자치능력과 혁신능력을 높여야 지방분권에 기초하여 지역혁신에 성공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분권·주민자치·지역혁신’의 결합이 실현될 때, 대안적 지역발전의 핵심을 이루는 내발적(內發的) 발전(endogenous development)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내발적 발전이란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중앙정부의 사업이나 외부 대기업 유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부의 기술·산업·문화를 토대로 지역산업연관이 존재하는 지역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해 학습하고 계획하고 경영함으로써 자생적인 지역발전을 꾀하려는 것이다.7
내발적 발전은 중심/주변, 지배/종속 관계를 가진 종래의 발전에 대해, 공생과 나눔과 같은 인간 개개인의 상호의존관계와 조화를 중시하는 발전이다. 내발적 발전은 중앙집권적 발전을 배제하고, 인간의 물화를 거부하는 사상으로 생성·발전되어왔기 때문에, 내발적 발전의 경제적 요소로 중요한 것은 자력갱생에 기초한 지역발전이다. 아울러 내발적 발전에서는 공간적·시간적으로 최적의 공동체생활의 형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생태계 보전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8
내발적 발전의 요체는 지역 내부에서 형성되는 발전 잠재력을 토대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것에 있다. 그것은 결코 지역 내에 완결된 분업구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국내분업이나 국제분업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생산의 글로벌화 추세 속에서 내발적 발전은 다면적인 국제분업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도 일정한 지역산업연관을 가지고 지역혁신체제에 기초한 자기중심성을 가지는 지역경제구조를 형성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딸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내발적 발전모델은 지방분권에 기초하여 산업자치가 실현되고 지방정부와 협동조합조직·민간기업·시민 간에 민주적 협력관계가 형성되며 시민·기업가·행정담당자가 높은 자치역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9 이러한 사례와 같은 내발적 발전은 글로벌화와 탈포드주의(Post-Fordism) 시대에 지방분권·주민자치·지역혁신에 기초한 새로운 대안적 지역발전모델로서 가능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 참여·연대·생태를 지향하는 대안적 지역발전
분권·자치·혁신에 기초한 내발적 지역발전은 참여·연대·생태라는 세 가지 보편적 가치에 따라 추구되어야 한다.
여기서 참여(participation)는 지방정부의 정치·경제·문화 등 각종 정책결정과 정책평가 과정에 지역주민이 일정한 형태로 참가하여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민의 직접 참여와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NGO의 참여를 포함한다. 참여에는 일반시민 참여와 전문가 참여가 결합되어야 한다. 지역수준에서 실현되는 참여민주주의, 즉 지역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방정부에 대한 지역시민사회의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연대(solidarity)는 시장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이 보장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연대는 시장만능주의를 거부하며 시장의 역동성을 살리면서도 공동체 내부에서 사회정의와 공평성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연대는 복지국가와 복지공동체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추구되어야 한다.
생태(ecology)는 생태계 보전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업은 환경친화적 생산방식을, 지방정부는 환경친화적 지역계획을 도입하고, 주민들은 생태주의적인 대안적 생활양식을 영위하는 것이 생태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장지상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적 ‘경성 에너지 경로’가 아니라 지방분권적 ‘연성 에너지 경로’(soft energy path)를 지지한다.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은 이러한 참여·연대·생태라는 보편적 가치에 따라 추진되어야 대안적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주민 참여 없는 지방분권은 지방정부 관료와 토호 들의 권력만 강화할 것이다. 따라서 지방분권은 참여민주주의로서의 풀뿌리 민주주의와 결합해야 한다. 중앙집권적 개발독재국가가 해체된 이후 시장이 국가를 대신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지향적 분권’(market-oriented decentralization)이 아니라, 지역공동체가 지방정부와 함께 국가를 대신하는 민주적인 ‘공동체 지향적 분권’(community-oriented decentralization)이어야 한다.
연대 없는 지역혁신은 소수의 엘리뜨만을 위한 혁신이 될 것이다. 지역혁신의 성과가 공동체 실현의 관점에서 지역주민들에게 배분되는 메커니즘이 구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없는 지역혁신은 지역 주민대중을 배제한 엘리뜨 지향적 사회를 만들 것이다. 따라서 참여와 연대를 지향하는 지역혁신이 되어야 한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은 지역발전을 지속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생태를 지향하지 않는 지방분권은 지역개발을 명분으로 지역수준에서의 환경파괴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 또 그것은 성장의 댓가로 환경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생태를 지향하는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참여·연대·생태를 지향하는 지방분권·주민자치·지역혁신은 21세기 대안적 지역발전모델이다. 그것은 동시에 대안적 국가발전모델이기도하다. 이 대안적 지역발전모델은 내발적이고 주민중심적이자 공동체 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다. 참여민주주의와 인적자원개발을 촉진하고 복지공동체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인간발전이란 비전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제 뜻있는 민주시민들이 ‘비전 2011’이 가지고 있는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주의를 넘어서, 참여·연대·생태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지방분권적 민주국가를 향하여 용기있는 선택을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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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ain Lipietz, Towards a New Economic Order: Postfordism, Ecology & Democracy, Polity Press 1992 참조.↩
- 김형기 「지방분권과 지역혁신: 지역발전의 새로운 비전」, 『한국민족문화』 제16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0 참조.↩
- 같은 글.↩
- 神野直彦 「21세기 새로운 분권화 모형」, 제10회 21세기발전모델포럼(대구사회연구소·경북대학교 공동주최) 발표논문, 2000 참조↩
- Alain Lipietz, 앞의 책 참조.↩
- 이철우 「신산업환경과 지역혁신시스템」, 제11회 21세기발전모델포럼(대구사회연구소·영남대 영남지역발전연구소 공동주최) 발표논문, 2000 참조.↩
- 황한식 「주민자치와 지역경제의 내발적 발전의 길」, 『지역사회연구』 제3집, 한국지역사회학회 1995 참조.↩
- 西川潤 『人間のための經濟學: 開發と貧困を考える』, 岩波書店 2000 참조.↩
- Michael J. Piore & Charles F. Sabel, The Second Industrial Divide, Basic Books 1984; 重森曉 『分權社會の政治經濟學: 産業自治と生活者民主主義』, 靑木書店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