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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성석제의 최근 소설들

 

진정석 陳正石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민중적 주체성의 복원을 위한 도정―송기숙론」 「모더니즘의 재인식」 등이 있음. jjsssj@hanmail.net

 

 

1. ‘작은 이야기’를 찾아서

 

최근 한국소설의 가장 뚜렷한 개성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성석제(成碩濟)를 드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른바 ‘성석제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한 그만의 화법과 소설전략은 동료 작가들과 문학지망생들 사이에서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는 상당수의 고정 독자층은 물론 일반독자의 호응도 점차 높아져가는 추세다. 비평계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어서, 그의 소설은 ‘자폐적 독백’과 ‘나르시시즘’의 늪에 빠져 있던 1990년대 한국문학의 어떤 난관을 유쾌하게 돌파해냈다는 상찬을 받아왔다. 전통과 현대의 문화적 단절을 원죄처럼 안고 있는 근대문학의 역사 속에서, 이 작가가 우리만의 고유한 서사적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지적은 이제 더이상 단순한 가능성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성석제 소설의 남다른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언어감각에서 온다. 시인 출신의 소설가라는 이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의 문장은 시적인 함축과 산문의 개방성을 겸비하고 있으며, 고문(古文)의 유장한 호흡과 현대문의 발랄한 리듬을 자재하게 넘나든다. 범속한 일상의 표면에서 생의 비밀을 들춰내는 섬세한 관찰력, 날렵한 비유와 의뭉스런 유머, 빠르고 정확한 달변의 화술, 간혹 말 자체의 리듬에 들려 주제에 비해 수사가 과한 경우도 없진 않지만, 이 작가가 아주 매력적으로 생동하는 말의 향연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한 작가가 아무리 탁월한 언어능력을 자랑한다 해도, 자기만의 독자적인 문학적 전략이 동반되지 않아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기 어렵다. 그런데 성석제는 개성적인 스타일의 능변가에 머물지 않으며, 한국문학의 관행적인 인식틀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전략가이기도 하다. 그의 ‘불순’하고 삐딱한 시선이 주로 겨냥하는 표적은 근대적 소설 개념, 구체적으로 말해 사실주의적 기율이며, 그중에서도 소설이 ‘진정한 가치 추구의 형식’이라는 루카치적 통념이다. 성석제에게 소설은 ‘근대의 서사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랜 뿌리와 더 깊은 충동에 기원을 둔 ‘이야기’의 일종이며, 그것도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소설은 ‘거짓말’이며, 거짓말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는 이 작가 특유의 소설관이 나온다. 물론 소설이 ‘재미나는 거짓말’이라는 인식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소설이 허구의 일종이라는 생각은 소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한국문학에서 소설이 허구에 바탕을 둔 문학형식이라는 당연한 사실은 그다지 존중받지 못한 편이다. 우리에게 소설은 그럴듯한 거짓말(fiction)이기에 앞서 창조적인 작품(work)이고, 자유로운 즐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엄숙한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대체로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묻힌 사실을 증언하는 데 주력했으며, 남의 이야기를 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매력을 느껴왔다.1980년대에 정점에 이른 계몽적 엄숙주의,1990년대에 성행한 독백적 자아숭배라는, 상반된 지향성과 동일한 인식구조를 공유하는 쌍생아적 문학관은 그 정점이었다. 계몽의 방향이 혼돈에 빠지고 내면적 독백이 감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거짓말쟁이와 이야기꾼을 자처하는 성석제의 등장은 우리 문학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 작가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도 아니며, 그가 가장 예리하게 해부해 보인 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런 질문은 근대적 서사양식으로서의 소설이 성립될 당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제기되어왔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양식적 정체성은 처음부터 자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의 경합과 논쟁을 통해 잠정적으로 정착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질문이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닌 작가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가 자신의 창작을 통해 이런 질문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는 사실이다. 성석제를 통해 우리는 소설이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정처없는 유랑이고, 엄숙한 계몽의 형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즐김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성석제 소설의 진정한 개성과 새로움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처럼 보이는 문학적 관습(convention)의 작위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는 점에 있다.

성석제는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민음사)로 본격적인 산문을 쓰기 시작한 이래 단기간에 놀라운 생산력을 발휘하면서 지금까지 10여권에 이르는 단행본을 상재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앞에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문학적 응답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주의적 재현이 외면한 이야기의 즐거움, 탐색의 서사가 놓쳐버린 무용한 탕진의 욕망을 긁어모아 그의 소설적 에너지로 적극 활용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자원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수법에서 전(傳)이나 행장(行狀) 등 전통적 서사형식, 그리고 악한소설이나 무협지 같은 하위장르에 이르기까지 사뭇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소설의 오랜 장르적 규범과 정면으로 맞서, 오늘날 소설의 가능한 방식은 무엇인지 숙고하며, 소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성석제의 문학적 모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중이다. 이 글에서는 2000년대 들어 발표된 세 권의 소설 『순정』(문학동네 2000)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작과비평사 2002)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 2003)을 따라 읽으며 그 성과와 문제점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순정』: 공감의 언어와 진술의 언어

 

『순정』은 시골 소읍 ‘은척’을 배경으로 도둑 이치도의 성장과 편력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성석제 소설의 독자들에게 ‘은척’이라는 지명과 ‘도둑’이라는 직업은 이미 낯설지 않다.‘은척’은 첫 장편 『왕을 찾아서』(웅진 1996)에서 신화적인 깡패 마사오의 장엄한 몰락을 지켜본 ‘지역’의 고유명사이며, 그 외전 격인 첫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1994)의 악당 조창용이 “엄마, 무서워”란 비명을 남기고 물에 빠져 죽은 곳이기도 하다. 『궁전의 새』(하늘연못 1998)의 소년 화자 원두가 나고 자란 고향도 바로 그곳이니, 성석제 소설의 정서적 근원이자 소설적 원점에 해당되는 지명, 아니 단순한 지명 이상의 인격적 실체가 바로 ‘은척’이다. 『순정』은 은척을 무대로 한 성석제 소설의 한 종합이며,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바치는 문학적 헌사이기도 하다. 한편 ‘도둑’이라는 예외적 직업 또한 성석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변인, 예컨대 「해방」의 술꾼, 「꽃 피우는 인간」의 노름꾼, 그밖에 무수한 깡패, 건달 들처럼, 정상적인 삶의 궤도 바깥에서 역설적으로 정상성의 의미를 심문하는 존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순정』은 변두리적 성격과 몰락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척’과 ‘도둑’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보여준다.

『순정』의 줄거리는 영웅소설, 또는 이를 뒤집은 반(反)영웅소설의 플롯을 따라 진행된다. 작부 춘매의 아들로 태어난 이치도는 일찍이 도둑의 도(道)에 눈을 뜬 이래, 왕년의 대도 왕확의 제자가 되어 일로매진 끝에 마침내 “천하의 도둑”, 도둑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 중의 도둑”으로 성장해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은척’을 배경으로 한 이치도의 성장기이며, 후반부는 ‘은척’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치도의 편력기에 해당된다.

이치도의 성장기를 장식하는 다채로운 삽화와 풍경 들은 1960년생인 작가의 유년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은척’ 역시 산업화의 진전과 농촌공동체의 해체로 요약되는 1960~70년대 시골 소읍의 전형적인 운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석제는 붕괴되어가는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은척’을 생의 원초적인 활력이 넘치는 신화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은척’은 몰락해가는 것들의 비감한 정조가 아니라 유동적인 활기와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함이 들끓는 카니발적 장소로 되살아나게 된다. 비가(悲歌)이기는 하되 애상 어린 비가가 아니라 활기찬 비가인 것이다.

그러나 이치도가 ‘은척’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후반부에서 작품의 어조와 분위기는 일변한다.‘은척’이 쾌락 원칙이 지배하는 시의 세계라면, ‘은척’ 바깥의 세상은 현실 원칙이 지배하는 산문의 세계이다.‘은척’을 떠난 이치도는 더이상 영웅도 반영웅도 아닌, 그저 시골 소읍 출신의 그 당시 “숱한 청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종로의 야바위꾼, 콘돔공장 직공, 술집 웨이터, 음악다방 디제이 등을 전전하는 이치도의 ‘편력 시절’은 물론, 대권을 가져다준다는 ‘태자관’을 빌미로 한 이치도의 일시적인 성공과 예정된 추락 역시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잠시 끼어든 아웃사이더의 일반적인 스토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은척’과 도시의 공간적 차이는 『순정』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다.‘은척’의 서술자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내막과 곡절을 시시콜콜히 꿰고 무시로 참견하지만, ‘은척’ 바깥의 서술자는 객관적인 진술과 사실 보고에 주력하는 편이다.‘은척’의 서술자가 ‘공감’하는 시인이라면, ‘은척’ 바깥의 서술자는 냉엄한 산문가이다. 가령, 이치도의 의붓아비 봉달이 죽어가는 장면을 그리는 전반부의 언어와 도시로 떠난 이치도의 행적을 전하는 후반부의 언어는 이처럼 확연히 다르다.

 

봉달이 죽어가던 그 시각, 읍내에서는 불길한 고요가 저녁 안개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하루 한번이 멀다 하고 악다구니를 벌이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십수년 전 전쟁이 끝난 뒤로 제 손으로나 남의 손으로나 사람에 의해 목숨이 끊긴 이는 없었다. 대기는 셈하고 있었고 나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벌레들도 그런 사실을 알았다. 바람이 멈추고 나무들은 잎을 낮추었으며 벌레들은 번식을 위한 울음을 멈추었다. 이제 은척에서 나서 은척에서 자라 은척에서 살며 호흡하고 부딪치며 짓뭉개지던 한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이다.(30면)

 

이치도를 보아도 이치도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무관심한 사람, 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이치도를 본 것을 누구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치도는 그 당시의 숱한 청년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이치도 역시 누구에게 내가 무엇을 한다고 보고하고 다니며 살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관련이 없는 한 그는 남에게, 남들은 그에게 무관심했다.(165면)

 

『순정』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활달한 구어체의 향연은 그 자체로 근대적 소설언어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며,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소설언어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성석제는 전통적인 구연가가 아니라 근대적 소설가이며, 그중에서도 기법에 대한 자의식이 유난히 강한 작가에 속한다. 『순정』의 전반부를 주재하는 ‘이야기꾼’ 역시 근대소설의 서술자가 잠시 빌려쓴 일종의 가면일 뿐이다. 구어체를 비롯한 전대의 언어유산을 아무리 풍부하게 활용한다 해도, 『순정』은 결국 제도화된 근대적 소설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것은 구전(口傳)되는 대신 책의 형태로 읽히며, 그것이 유통되는 공간은 떠들썩한 장터 한구석이 아니라 익명화된 독서 시장이다. 『순정』은 구어 전통의 현대적 변용의 빼어난 사례인 동시에, 장르 경계를 넘나드는 미정형(未定形)의 글쓰기로 출발해 전형적인 모더니즘 기법을 시험하면서 소설의 장르적 관습에 대한 자의식을 예리하게 다듬어온 작가적 모색의 한 도달점이기도 하다.

전반부에 나타난 화려한 입말의 성찬에만 주목하는 것은 『순정』의 소설 언어를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의 언어적 괴리, 그 이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순정』의 언어적 이중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사실주의적 재현의 충실성 여부에서 담론적 연행방식의 차이로 관점을 이동할 필요가 있다. 성석제는 사라져가는 고향을 정서적 공감의 언어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적 공간을 사실적 진술의 언어로 재현한다. 이러한 언어적 이중구조 뒤에는 근대적 산업화의 필연적 추세를 거스르는 일종의 의고(擬古) 취향이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아니겠지만, 가능한 세계이해의 한 방식이며, 『순정』의 경우에는 생산적인 성취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순정』의 언어적 이중성은 어쩌면 소설의 반영적 기능이 사실주의적 재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통념에 일정한 수정을 요구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3.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검은 ‘구멍’ 같은 존재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성석제의 다섯번째 소설집이다. 장편보다 단편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아온 이 작가는 첫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부터 이미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완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어지는 네 권의 소설집은 질적 발전이나 성숙보다는 주제의 확장과 변주라는 각도에서 읽혀진다. 먼저 기존의 장르 개념으로는 분류하기 어려운 68편의 짧은 산문으로 구성된 첫 소설집은 그 완성도에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데뷔작’으로 묻혀버렸다. 해학과 익살, 형식실험과 반사실주의적 시각 등이 특징적이며, 기벽을 지닌 독특한 인물들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기성 문단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두번째 소설집 『새가 되었네』(강 1996)에서는 단편소설의 규범에 어느정도 적응하는 한편, 소설의 문체와 형식에 대한 자의식은 여전히 지속되는 양상을 보여준다.이 당시 성석제는 놀라운 생산력을 과시하면서 다음 해에 바로 세번째 소설집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민음사 1997)를 출간하는데, 풍자와 아이러니, 유머와 해학을 능숙하게 변주하는 성석제식 스타일은 여기서 한 정점을 보여준다. 한편, 수록된 모든 작품이 ‘인간’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는 네번째 소설집 『홀림』(문학과지성사 1999)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일관성과 집중력이 돋보인다.

앞서 발표된 네 권의 소설집과 비교해볼 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가 최상의 높이를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홀림』에 비하면 집중도가 부족한 편이고,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시절의 발랄한 창의와 도발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들은 각각 성석제다운 수준과 특색을 보여주지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기왕의 틀 안에서 다소 답답한 반복, 힘겨운 모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의심하고, 관습적인 패턴에 대한 의도적인 비틀기를 즐기는 성석제 소설에서 이것은 어떤 위기의 징후, 또는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풍자적 세태관찰에 속하는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과 자전적 요소가 가미된 「욕탕의 여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편은 대체로 『홀림』과 같은 성석제식 인간 탐구의 일환으로 씌어진 것들이다. 그중 수작으로 꼽히는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유형에 속한 다른 작품들을 평가하는 의미있는 지표를 함축하고 있다. 주인공 황만근은 남보다 모자라게 태어나 평생을 주변의 놀림감으로 지내다 끝내 외롭게 죽어간 인물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타고난 바보가 아니라 상황의 아이러니에 의해 만들어진 바보일 뿐이다.

 

신문 보는 사람도 없던 시절, 기껏해야 군대간 자식에게서 오는 편지가 뉴스이던 시절,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라도 드라마를 만들어 웃고 싶어했다. 황만근은 가장 그럴듯한 소재였고 배역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실수나 바보짓도 늘 황만근에게 가탁해서 그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갔다.(18면)

 

일종의 ‘현명한 바보’ 유형에 속하는 황만근의 진정한 인간적 가치는 그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입증된다. 남의 일, 동네 궂은일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고,“남이 꺼리는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을 섰”던 그는 알고 보니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황만근이 살아서 지나치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든가, 죽어서는 반대로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라는 식으로 과장된 칭송을 받는다든가 하는 사실은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인물이 존재를 통해서건 아니면 부재를 통해서건 언제나 자기가 속한 집단과 의미있는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네 작품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성석제는 전작 『홀림』에서 각기 무엇인가에 홀려 그 방면의 정점에 이른 인물들, 예컨대 도통한 술꾼, 최고의 도박사, 희대의 춤꾼 등을 여럿 선보인 바 있는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도 이처럼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기이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은 경국지남(傾國之男)이라는 말이 어울릴 절세 미남이거나(「천하제일 남가이」), 서음(書淫)이라 불릴 정도로 책에 홀린 당숙(「책」), 도박의 도리를 깨치기 위해 고행을 감수하는 도박사(「꽃의 피, 피의 꽃」), 한번도 잘나가본 적이 없는 사회 부적응자(「천애윤락」), 한마디로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도 스스로의 유별난 행각이나 무용한 탐닉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남다른 천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작가 역시 그들의 행동에 어떤 인과성을 부여해 납득할 만한 인물로 조형하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일회성” 속에서 “나름대로 극한까지 가본” 그들의 특이한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 기괴한 인물들은 보편적 가치를 체현하는 개별성 곧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개별성 그 자체를 즉자적으로 구현하는 개성적 인물에 속한다. 다양한 개인들의 고유한 가치를 평균적, 등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예외적 인물들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적 가치의 범속함과 규범적 질서의 억압성을 날카롭게 환기한다. 한편, 소설사적 맥락에서는 전형적 인물 혹은 내면적 인간이라는 한국소설의 지배적 인물형상에 맞서는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떠한 일반화도 거부하는 이런 즉자적 인물들은 보편적 가치와의 연관 속에서 인물형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익숙한 해석적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특이한 본성을 통해 인간의 내면 속에 어떤 심오한 것이 들어 있다는 가정을 우회적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모든 상투화된 관행에 대한 도전이라면, 이런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런 인물유형이 그 자체로 소설적 탐구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식이 가능한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고, 소설 안에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단서도 없다면, 그들의 기이한 행동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잉여, 일종의 광기의 상태에 접근해간다. 소설이 일상적 삶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일상의 궤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은 소설적 인물로서 심각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얼핏 보기에 성석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깡패, 악한, 바보 등과 유사한 것 같지만, 그 본질적 성격이나 역할은 전혀 다르다. 가령, 깡패는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규범적 질서의 실정성(實定性)을 조롱하고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바보는 웃음을 통해 인간적 약점과 어리석음을 감싸안는 데 특히 쓸모가 있다. 둘 다 일종의 반어적 관계를 통해 더 큰 단위 집단과 연관되어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기괴한 인간들은 스스로 자족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상 어떤 관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의 일부가 아닌, 관계 속에 있으면서 관계 바깥에 있는, 말 뜻 그대로 절대적 타자들인 것이다. 그들의 삶은 자주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지만, 그 일탈이 반드시 정상적인 궤도에 대한 의도적 거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들은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지도 수락하지도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그들은 안전하고 평온하게 영위되는 것처럼 보였던 일상의 표면에 느닷없는 파열구를 내는 검은 “구멍” 같은 존재들이다.

 

 

4. 『인간의 힘』: 소설의 인간학을 위하여

 

『인간의 힘』은 경상도 고령 출신의 시골 양반이자 “가출 몇번으로 당당히 정2품 벼슬에 오른” 가출의 달인, 문경공 채동구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역사소설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채동구의 실존모델인 채이항이 성석제의 외가 쪽 먼 조상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상상적 공간의 폭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석제는 액자형식을 통한 대상의 간접화 효과, 실록·행장·상소 등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논평적 거리 유지, 풍자와 해학을 통한 인물과 상황 묘사 등의 방법으로 역사의 압력과 실명(實名)의 무게를 우회하면서 필요한 허구적 공간을 확보해낸다.

과거의 역사를 핍진하게 재현한다거나,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현재적 삶의 의미를 살피는 역사소설의 일반적 과제는 『인간의 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대신 이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다움의 진정한 의미를 탐문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힘』의 소재는 역사도 역사의 기록도 아닌, 채동구라는 인물과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기록을 참조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재구성한 주인공 채동구는 한빈하고 영락한 조선시대 향반의 전형적인 속성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저명한 문신(文臣) 채담의 3대손으로 태어났다는 것, 동생에게 더부살이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 과거는 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임금과 나라 걱정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내우외침으로 도성과 임금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떨쳐 일어나 출분을 감행했다는 것 등이 그의 간단한 내력이다.

작가는 근왕사상(勤王思想)에 철두철미한 당시 시골 양반의 성격을 희극적으로 과장하고 다시 주인공에게 투사함으로써 채동구를 “맹목적 충성”과 “허황된 명분”에 들린 돈끼호떼적 인물로 제시한다. 중세 기사담의 세계관에 맹목적인 확신을 가진 돈끼호떼의 그로테스크한 모험이 중세적 가치의 결정적인 소멸을 반증하는 것처럼, 봉건적 근왕사상에 철저한 채동구의 ‘가출’은 주자학적 질서의 내재적 취약성을 반어적으로 폭로한다. 이점에서 채동구는 성석제가 즐겨 다루는 주변부, 일탈자, 방외인의 계보에 속한 인물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술꾼, 도박사, 춤꾼 등 ‘구멍형’ 인물이 아니라 깡패, 악당, 바보와 같은 ‘거울형’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좌충우돌하며 주변의 비웃음을 한몸에 받던 채동구는 친척 명선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세번째 가출과, 죽음을 각오하고 청(淸)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자진해 끌려간 네번째 가출을 거치면서 “시대와 사람들과 자신의 존재가 합일되는 인간적인 성숙”을 달성한 것으로 그려진다. 채동구의 우행을 해학적으로 꼬집던 서술자도 이 지점에 이르면 장중한 톤으로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칭송한다. 채동구의 태도와 언행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극적인 익살꾼이 숭고한 인간으로 고양되는 과정은 다소 돌발적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바깥 액자에 등장하는 외숙의 말을 빌려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두고 있다.“뭘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문제라는 것,“신념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그걸 지킨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념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형식, 대상이 아니라 그에 대한 주체의 태도를 중시하는 입장은 ‘극한까지 가는’ 성석제 소설의 현대판 주인공들이 구현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장년기의 채동구가 도달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근대적 인간관의 표현”이라고까지 고평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일탈과 탐닉, 위반과 전복의 삶에 대한 성석제 소설의 아낌없는 지지, 애호는 전통적인 이야기꾼, 유서 깊은 거짓말쟁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이 작가의 또다른 얼굴, 예컨대 낭만적 탐미주의자, 급진적 개인주의자의 면모를 상기시킨다. 『인간의 힘』은 성석제 소설의 인간 탐구가 도달한 잠정적 결론임과 동시에, 성석제 특유의 윤리학을 명시적으로 확립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5. 맺음말

 

성석제의 작품에는 길과 관련된 표제가 유난히 많은 편이다. 그의 첫 시집에는 『낯선 길에 묻다』(민음사 1991)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첫 장편은 『왕을 찾아서』 가는 길의 이야기였으며, 가장 최근에 나온 소설은 가출하는 인간의 일대기(『인간의 힘』)이다. 그에게 길은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의 행로(「유랑」)를 암시하기도 하고,“도도히 흘러오는 산업문명과 전통의 씨앗을 온존하며 웅크리고 있는 농경 문화의 중간”(「길이네 점방」)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 세속의 다양함을 숭상한다”(『홀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변함없이 가져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소설 쓰는 인간’이 된 이후 지금까지 성석제 소설의 대부분이 길 위에서 씌어졌다는 말은 비유의 차원이 아니다. 그의 소설은 세속의 수많은 길 위에서 갈무리되고 다양한 시정의 언어로 씌어진다. 성석제 소설의 매력으로 거론되는 화려한 언어, 다양한 취재, 즐거운 유희정신 등은 많든 적든 길의 은혜를 입고 있으며, 길 위에 선 자의 날카로운 긴장과 게으른 방심에서 나온다. 막힌 길을 뚫기도 하고, 끊어진 길을 잇기도 하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오래된 길을 되짚어가기도 하는 성석제의 소설전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 위의 정신으로 최근 십년간 한국소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소설의 길을 열어온 성석제 소설은 최근 들어 약간은 피로의 기미, 휴식의 욕망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다시 채비하고 길을 나설 것이다. 그가 다시 길 위에 서서 열어갈 소설의 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한국문학 지도에도 선명한 자취를 남길 것이다. 성석제는 지금도 여전히 길 위의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