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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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경숙 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장편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등이 있음.

 

 

 

혼자 간 사람

 

 

여태 뭐하고 있었길래 전화를 다 받니? 참, 거긴 이제 늦오후겠구나. 진작 전화해볼걸 그랬다. 두 시간 전부터 너한테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참고 있었거든. 나? 나야 뭐, 저 바람소리에 잠이 깬 후 다시 눈을 붙일 수가 없구나. 여기가 지금 몇시냐구? 새벽이야. 네게 전화걸기 전에 뻐꾸기 시계가 다섯시를 알렸다. 바람이 되게 분다. 들리냐? 저 바람소리? 커튼으로 가려놓긴 했는데 창문이 덜컹덜컹거려. 창문 바로 곁에 단풍나무 그림자가 커튼 위에서 이따금 한쪽으로 확 휘어지는구나. 저렇게 바람이 불다가는 잎사귀에 가을물도 들기 전에 오늘밤에 다 지고 말겠다. 여기는 11월도 되기 전에 겨울이 먼저 온 것 같다. 벌써 찬물에 손이 닿는 게 싫고 문밖을 나가면 목덜미로 찬바람이 훅 파고들어서 나도 모르게 옷자락을 여미게 되는구나.

오늘 아침엔 언젠가 네가 한 말이 생각났어. 아이를 낳아서 제일 좋던 때가 새벽에 깨어나서 아이를 꼭 껴안을 때라고 했지.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눈곱 달라붙은 얼굴을 끌어당겨 안고 있을 때 아이의 체온이 가슴에 깊이 닿는 게 참 좋다고. 아이의 체온이라. 그래, 잘은 모르겠다만 오늘 아침같이 썰렁할 때 아이를 꼭 껴안고 있으면 우선은 내가 따뜻하겠다. 원이의 시력이 더 나빠지진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지난번에 부탁한 동화책 챙겨 보내면서도 그 책이 애 시력을 더 떨어지게 하는 거 아닌가, 은근히 걱정했었어. 그앤 무슨 책읽기를 그리 좋아한다니. 지난번에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자는 다 배웠어?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네 메일주소를 잃어버렸어. 그동안 나는 집에서는 쭉 넷츠고라는 통신을 사용하고 있었어. 그 회사가 문을 닫은 모양이야. 말할 거리도 못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기계치잖아. 직장 다닐 때 눈치깨나 받았다. 후배는 나보고 끝내 인터넷과 친해지지 않으려면 돈을 많이 벌어 오너가 되든지요, 하면서 날 놀렸단다. 사방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렸는데도 나는 그냥 최근까지 PC통신을 사용하고 있었어. 나 개인으로야 뭐, 통신으로도 충분했지. 그런데 초고속 인터넷에 통신 자체가 버티기가 힘이 들었는지 자꾸 써비스를 중단하게 된다는 안내문이 뜨기 시작하더라.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될 텐데 하면서도 내 실력으론 어쩌지 못해 그냥 있었는데 어느날 통째로 메일이 다른 인터넷 주소로 옮겨졌더라구. 넷츠고 이용자는 그곳으로 가야 메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를 따라 클릭을 했더니 당분간 기존의 메일주소를 그곳을 통해 사용할 수는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동안 내 메일박스에 보관되어 있던 메일과 주소록에 있던 주소들은 다 날아가고 없었어. 나는 누가 메일을 보내오면 답장을 누르고 그곳에 내 말을 써서 다시 보내는 식으로 메일을 사용해왔어. 네게도 예외가 아니었지. 따로 주소를 적어놓지도 않았는데 다 없어진 거야. 얼마나 허전하던지. 편지하고는 정말 다르구나, 생각했다. 벌써 십년도 전에 네가 결혼해서 남편과 헝가리로 갔을 때 이따금씩 보내오던 엽서도 저기 어디 찾아보면 아직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니. 하긴 지금 네가 있는 밴쿠버가 여기에서 얼마나 먼 데니. 그런데 내가 쓴 메일이 십분도 안되어 네게 도착하는 게 수상했다. 그 댓가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전화를 건 용건을 말하라구? 내가 전화해서 놀란 모양이군. 전화비가 장난 아닐 거라구? 괜찮아. 네가 그곳으로 간 후에 내가 너에게 전화를 건 게 두 번도 안되잖아. 네가 웃겠지만 가끔 네가 여기 살았을 때 쓰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는 했다. P가 독일에 다니러 갔을 때 네가 하던 짓이잖니. 너와 P는 유별났었지. 매일 만나느라 매일 전화통화를 했던 너희들이었지. 밤늦게 헤어지고 귀가해서는 또 전화질이었고. 나는 P가 생각날 때면 P는 언니 만나러 독일엘 갔지, 그랬는데 너는 P가 없는 빈방에 전화를 걸어보곤 했지. P가 없는 빈방에 울려퍼지는 전화벨소리를 무작정 듣고 있다가 팔이 아프면 수화기를 내려놓았지. 내가 네 흉내를 내며 네가 여기에서 쓰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돌렸을 땐 누군지 모를 사람이 받더구나.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더라. 나는 네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저, K 좀 바꿔주세요, 했지. 상대방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하고선 탁 끊어버리더라. 그런 사람 없습니다,라는 말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상대편에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 전화를 건 내 쪽에서 그런 소리 듣는 게 당연한데도 그날은 왜 그 말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던지. 여러 날 혼자 웅얼거렸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네 가족이 이민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가는구나.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니 유학생 신분보다는 이민자 신분이 더 유리한 것 같아 이민수속을 밟았을 뿐 오년쯤 있다가 돌아올 거라고 했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니? 모르겠다구. 그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해. 너와 나는 학교를 같이 다닌 것도 태생지가 같은 것도 동갑내기도 아닌데 이렇게 친구가 되었잖아. 내가 일터에서 만나 아직까지 친구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너란다. 첫 직장에서 만나 그런 것이었을까? 가끔은 신기해. 무엇이 너와 이토록 긴 인연의 끈이 되어주는 것인지. 서로 일년씩 이년씩 연락 없이 지낸 적은 있어도 그래서 멀어졌다는 느낌은 없었어.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했어. 기억나니? 오래 전 어느 일요일에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네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영화보러 갈래? 한 적이 있었어. 동숭동에서 지금은 제목도 잊어버린 무슨 영화인가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헤어졌지. 그로부터 육개월쯤 지났을까. 네가 이번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왔어. 그저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삼개월쯤 지났을까. 너에게서 또 전화가 왔고 한 삼십분쯤 통화를 하다가 또 끊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바뀌었다. 훗날에 알고 보니 그때 너는 몹시 힘든 상태였다. 몸에서 물기가 싹 빠져 마른풀이 될 상황을 견디고 있었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응, 아니 따위의 영양가 없는 대답이나 하고 있었겠지. 갑자기 네가 여길 뜬다고 했을 때도 내심 낯선 땅으로 가서 상한 마음을 회복해보려는 것이겠거니 생각했을 뿐 네가 왜 그 먼곳으로 떠나는지 상세히는 알지 못했어. 네가 떠난 뒤 오히려 우리는 메일을 통해 여기 있을 때보다 자주 연락을 했지. 살다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말하기 싫은 일이 얼마나 많으냐. 멀리 있는 너는 그래서 더 가까워졌어. 그러더니 느닷없이 너로부터 소식이 뚝 끊겼다. 두달이 지나고 석달이 지났다. 너에게 무슨 일이 터졌구나, 직감했다. 여기 있을 때도 겨우 내색이라고는 갑자기 전화걸어 영화보러 가자고나 했던 너 아니었니. 무슨 일이 있니? 내가 몇번 다급하게 물은 지 한달이나 지나 너로부터 대답이 날아왔다. 큰애 원이가 뇌종양이라는 것이었지. 그래서 병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나날이었다고. 뇌종양?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난 겨울에 너 왔을 때 잠깐밖에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룻밤이라도 함께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서울에만 있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와 있던 2주일 중에 너도 1주일은 시댁이 있는 남도에 가 있었는데다 나도 또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으니. 그런데 너는 어떻게 된 친구가 내가 출판사 사직하고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는데도 그러니? 할 뿐 걱정하는 내색을 안하냐?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태 이렇게 백수로 지낸다. 노는 게 이렇게 좋아서 어떡하니. 혼자 노는데도 시간이 너무 잘 가는구나. 대학 졸업하고 지금껏 일만 했으니 앞으로 더 놀아도 된다구? 고맙구나. 영화 씨나리오를 쓴다는 네 여동생은 십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라. 니 말 참 잘 듣는 것도 똑같고. 그 밤중에 널 태우고 내 집 근처까지 와줘서 그나마 널 볼 수 있었지 하마터면 그냥 보낼 뻔했지. 그때 생각보다 네 얼굴이 밝아서 좋더구나. 더구나 무슨 여유가 있다고 내게 예쁜 책도 사다주었지. 그 책을 내가 어디다 뒀지? 잃어버렸냐구?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아마 어디다 잘 모셔두었을 거야. 그때 결혼식을 치른 시동생이 너 여기 살 때 함께 살던 그 시동생이니? 니 큰애 되게 예뻐했던?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아이가 워낙 오고 싶어해서 어렵게 왔다고 했었는데 돌아간 후 후유증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너도 참 독하지. 아이가 아픈 것을 여기 식구들한테 말하지 않다가 그때 알렸다며. 안들 먼곳에서 어쩌겠니,라는 게 네가 말 안한 이유였지만 그러자니 너 혼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여기 오고 싶어하는 아이의 소망이 너무 커서 시동생 결혼식 핑계삼아 아픈 아이 소망 하나 들어주자는 마음에 의사와 상의해서 2주일이란 시간을 얻어서 왔는데…… 말하다 말고 고개를 숙이며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늘어났다고 했던 아이 인대는 괜찮아졌니? 그래? 다행이다. 그때 말은 안했지만 아이의 시력이 4분의 1로 떨어졌다는 네 말에 나는 충격받았어. 밴쿠버의 계단은 한 계단 끝마다 노란 줄이 그어져 있어서 그걸 표지삼아 한 계단씩 올라가면 되는데 여기 계단은 그런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아이가 자꾸 헛발을 디뎌 인대가 늘어났다는 말에 어찌나 마음이 상하던지. 마지막이라고 여긴 계단 뒤에 또 계단이 있는 줄 모르고 자꾸 헛발을 디뎠을 아이. 멋진 건물의 대리석으로 된 계단은 내 아이 눈엔 아예 통짜로 보였을 거야, 하던 네 말. 계획했던 일은 아니지만 아픈 아이를 위해서는 거기로 간 것이 잘된 일이라고 했어. 그래, 네 말대로 여기는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이 살기가 힘든 곳이야.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한 엘리베이터나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해놓아 그것 찾느라고 더 힘들다는 네 말이 맞아. 너 가고 난 뒤에 나도 유심히 살펴봤거든. 시력을 잃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라니. 아이가 시력을 아예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점자를 배우게 하고 있다는 말을 담담히 할 수 있을 때까지 네가 겪었을 고통들. 이젠 울진 않는다구? 그래, 울지 마라. 뭐? 네가 자꾸 우니까 원이가 그랬다며. 엄마, 못 걷는 거보다 안 보이는 게 나으니까 울지 마세요. 아이가 할 소린 아니지. 아픈 아이도 널 위로하는데 어쩌니, 나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구나. 형이 아프고 난 뒤 달라진 생활에 적응을 못한 네 작은애가 밤에 오줌을 지리고 토했다는 이야기를 그냥 맥없이 듣고 있어야만 했지. 그때 너와 헤어진 시간이 새벽 두시가 넘었었지? 네 동생의 자동차에 올라 손을 흔들던 네 모습을 그냥 바라볼 뿐이었으니. 다시 밴쿠버로 돌아간 네가 보내온 메일의 제목은 “무사도착”이었어. 그곳에 돌아가니 폭설이 내려 온도시가 하얗더라고 했지. 새로 피기 시작한 수선화가 눈발에 얼어붙었더라고. 그리고 이렇게 썼지. 거기 머무는 동안 아이가 아플까봐 조바심이 나서 누굴 만나도 제대로 만날 수가 없었어. 아이가 다니던 병원 옆으로 돌아오니 안심이 된다. 외롭지만 이 적막한 안심이 나로서는 더 낫다. 그 메일들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하다니.

지워진 메일에는 지난 연초에 S가 보내온 메일도 있어. 응, 그래. 네가 좋아하는 작가 S. 저기 잠깐만. 오늘은 왜 이렇게 종일 갈증이 나냐. 생수를 3리터는 마셨을 게다. 마치 내 안에 메마른 구덩이가 하나 있는 것 같구나. 물을 마셔도 마셔도 밑바닥만 적시고 그만인 것 같아. 무슨 얘길 하다 말았지? 그래, S. 저기, 사실은 S 이야기를 하려고 네게 전화를 걸었나보다. 사람이란 참 야릇하기도 해서 때때로 실낱같은 연관성에 의지할 때도 있잖니. 네가 S와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S 이야기를 하고 싶어 너에게 전화를 건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다니, 나도 참. 언젠가 네가 S가 쓴 소설에 대해 길게 얘기했던 게 생각났어. 내가 교정을 본 소설이었지. 고아원 아이들 이야기였는데 기억나지? 아직은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바닷가의 조가비 같은 아이들이 부모 없이 살아가느라 진땀을 빼는 소설 말이야. 너는 그 소설을 좋아했지. 곁눈질로 취재해서 쓴 소설 같지가 않다고도 했던가. 직접 고아원에서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 같다고. 네 말이 맞았어. 나중에 들은 얘긴데 유학가겠다며 공부를 열심히 하던 S가 갑자기 사라졌던 때가 있었다더라. 그때는 그가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대. 그 자신이 글을 쓰는 데 뜻이 있는 줄 아무도 모르던 때겠지. 아니지. 그때는 그도 소설가가 될 생각은 없었는지도. 공부를 해도 그냥 슬렁슬렁 한 게 아니고 아주 열심히 하고 있던 S가 유학관련 시험을 하루 앞두고 사라져버려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했어. 그때 그는 남쪽의 고아원에서 몇 계절을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고 하더라. 아마 그때의 경험이 그 소설에 그려진 모양이야.

나도 S와 친한 사이였던 건 아니야. 그저 조금 친한 필자와 편집부 직원 관계지. 출판사에서 마련한 저녁모임 같은 데서 우연히 두번쯤 옆자리에 앉게 된 후론 나도 모르게 그가 편해졌어. 나에게 그는 존재가 희박한 사람처럼 느껴졌어. 부유하는 공기처럼 있어도 없어도 별로 티가 안 나는 그런 사람 같았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법도 없는 것 같았고 무슨 말을 하다가도 종종 말꼬리를 흐려버리곤 했어. 말을 하다보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투의 느낌이 전해지는…… 아마 그 점이 내겐 편하게 느껴졌나봐. 모임에서 밥을 먹으러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가서 어딘가에 앉아야 할 때 나는 슬그머니 S 옆에 가서 앉곤 했지. 그나 나는 주변사람들 속에 별로 섞이질 못한 채 멀거니 있다가는 옆자리에 앉은 벌로 간간이 말을 섞곤 했지. 내가 무슨 얘기를 그에게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그런 얘기였겠지. 그가 하는 얘기에 내가 자주 웃었던 걸 보면 아마 그가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주는 쪽이었는지도. 이야기들 속에 가끔 그의 아내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의 아내는 싱가포르 화교 출신이었어. 언젠가 또 한번 그가 방랑벽이 도져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때는 아시아 여기저기를 여행했었나봐. 그는 아내를 여행중에 만났다고 하더라. 일년인지 이년인지 후에 돌아와서 그의 아내와 결혼을 했어.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내 얘기를 할 적이면 입술선이 길어지고 눈가에 웃음이 많아지곤 했거든. 무슨 수줍음을 타는 사람처럼도 보였어. 그 모습이 좋아서 나는 가끔 일부러 그의 아내 얘기를 꺼내기도 했던 것 같아. 내가 그의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나라 여자가 아니라는 것뿐이었으므로 여기 생활은 잘 적응하냐? 한국음식은 좋아하냐? 그런 얘기들에 불과했겠지만. 내가 물으면 그는 마치 그 자신도 그때껏 아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씩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말하곤 했단다. 어떻게든 잘 표현해보고 싶은지 이렇게도 말해보고 저렇게도 말해보고 그랬어. 그의 아내는 그때 여기 말을 거의 배우지 못한 상태여서 그가 거의 아내의 입노릇을 하던 때였는데 그 때문에 웃지 못할 일들이 종종 생겼나봐. 그 둘 사이에도 어느 때는 의사전달이 엉뚱하게 되어 생겨난 일들을 여럿 들었는데 무슨 얘기들이었는지 기억이 도통 안 나네. 아, 고추 이야기. 그의 아내가 여기에 와 살면서 맛있어하기도 하고 질겁을 하기도 하며 좋아했던 게 우리나라 고추였대. 특이하지? 나는 아직도 혀가 매울까봐서 풋고추를 된장에 못 찍어먹잖아. 아직도 그러냐구? 그래, 아직도 그래. 그런데 싱가포르 출신의 그의 아내가 우리나라 땅에서 나는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먹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정말요?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아내는 눈물을 글썽글썽하면서도 아삭아삭 씹어가며 고추를 맛있게 먹었대. 한번은 그의 아내가 그에게 고추가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물었대. S가 땅에다 심는 거라고 대답을 했다는군. 어느날 그가 외출했다가 늦게 귀가했는데 그의 아내가 현관문 앞에서 그의 손을 이끌고 나가더래.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보여줄 게 있다면서. 그의 아내가 그를 데려간 곳은 아파트 뒤꼍의 공터였대. 이제 고추를 심었으니 얼마든지 고추를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구나. 고추를 심다니 무슨 얘긴가 하고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더니 공터 여기저기에 풋고추를 뿌려놨더래. 그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그의 아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한번 보고 싶기도 했지. S가 그의 아내에 대해 얘길 할 적이면 나는 물끄러미 S의 옆얼굴을 바라보곤 했어. 아, 우리나라 남자도 자기 아내 이야기를 저렇게 즐겁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거든. 나는 그가 얘기를 하면 조금만 재미있어도 과장해서 크게 웃곤 했어. 솔직히 그가 이야기를 멈춰버리면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그와 나 사이에 생길 침묵이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늘상 우스운 이야기만 했던 건 아니야. 한번은 소설에 붙일 제목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기도 했다. 그가 그즈음에 발표한 단편소설은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남자 이야기였어. 자기밖에 모르는 도도한 예술가가 옆방에 사는 또다른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던가, 하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던 나를 꽤나 긴장시킨 소설이었어. 내가 그랬지. 소설을 그렇게 애써 써놓고 제목이 “도시의 불빛”이라니 너무 무성의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런 종류의 제목에 별로 매혹을 못 느낄 뿐이지 어떻게 보면 그 소설과는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더구나. 그런데 S가 내 말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도시의 불빛”이라는 제목이 그렇게 무성의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고 정색을 하면서. 혹시 다른 작가들이 제목을 어떻게 짓는지 들은 바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기에 그건 비밀이지요, 했더니 그게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그는 크게 웃었어. 제목 짓기의 어려움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지. 소설을 쓰기 전에 제목이 지어지면 마칠 때까지도 그 제목 자체가 먼 불빛 같은 역할을 해주는데 다 쓸 때까지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작품이 있다고 하더라. 그런 작품은 어김없이 쓰는 동안 내내 애를 먹인다고 했어. 영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물으니 그럴 때는 화집을 들여다본다고 했어. 화집을 수북이 쌓아놓고 한장 한장 넘겨가며 그림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제목이 떠오른다고. “도시의 불빛”도 화집을 뒤적거리다가 떠오른 제목이라고 했지. 얘길 하다보니 그때가 그리워지는구나. 지금은 누구를 만나도 소설 얘기를 하지 않아. 내 손을 거쳐 만들어진 소설만 해도 수십권은 될 텐데 말이야. 다른 이야기들만 하지. 영화며 음악, 만화 같은 것들. 밤이 깊은 술집의 담배연기와 불빛 아래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누구 작품이 어떻고 누구 소설이 어떻더라는 얘기를 S와 나누던 때가 있었구나.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쉽게 헤어지지를 못하고 매번 술집과 까페를 순례하다가 신새벽이 되어 그것도 해장국집까지 들른 다음에야 헤어질 때가 많았지. 때때로 어떤 패들은 그때까지도 못 헤어지고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날으기도 했고. 나는 좌중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서 밤이 깊어지면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먼저 일어나곤 했는데 그때면 그도 따라 일어났어. 어두운 골목을 함께 걸어나와 택시가 많이 서는 곳까지 와서 그는 그의 아내가 있는 곳으로 나는 내 오피스텔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곤 했어. 어느 겨울날엔가는 택시가 잡히지 않아 서성대다가 지쳐 우리는 길거리의 계단에 오래 앉아 있었던 적도 있구나.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건 광화문에 있는 강북삼성병원으로 건너가는 신호등 앞이었어. 맞은편 병원의 영안실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우리 둘 다 아는 또다른 소설가가 안치되어 있었지. 서른다섯도 안된 나이였어. S와 조문을 함께 가자고 약속을 했던 건 아니야. 각자 따로 조문가는 길에 우연히 그 신호등 앞에서 마주친 거야. 꽃샘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지 싶다. 바람이 불면 옷이 벗겨질 듯했어. 단추를 꼭꼭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꾹 집어넣고 서 있었는데 그가 나를 보고 걸어오더라. 우리는 묻지 않아도 어디 가는 길인지 서로 알았지. 그나 나나 시무룩한 얼굴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서 있었어. 왜 그랬을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에 손을 꺼내더니 내 뺨에 대더군. 내가 고갤 들어 쳐다보니 그가 웃었어. 바람이 불긴 했지만 밝은 곳에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본 건 그때가 처음 아니었나 싶어. 우리는 늘 어두운 곳에서, 자연광이 아니라 형광등이나 다른 조명등이 켜져 있는 술집 같은 데서, 아니면 각자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던 한밤중의 찻길에서만 봤거든. 그는 어렴풋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건 그때 그의 입가에 고여 있던 것이 웃음이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희미해서 그래. 얼굴이 참 희구나, 생각했다. 눈, 코, 입이 저리 부드럽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곧 신호등이 바뀌었고 우리는 길을 건너 병원으로 들어갔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어. 이상하지. 그날은 S 옆에 앉고 싶지 않았어. S가 아니라 그 누구 옆에도 앉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맞겠지. 얼마간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나를 S가 쳐다보더니 따라나오더구나. 벌써 가요? 그가 물었지. 네. 나도 가도 돼요? 나는 물끄러미 S를 응시했어. 나도 가도 돼요?라니.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한참 후에야 그러세요, 해놓고는 이건 또 무슨 대답일까, 씁쓸하게 웃었지. 영안실을 나와 우리는 서대문 쪽으로 걸었다. 지금은 공원으로 변한 옛날 교도소가 있던 곳을 지나쳐 무악재를 지나 홍은동 쪽으로 걸었어. 그가 한발 앞서기도 하고 내가 두발 처지기도 하며 그렇게 녹번동까지 걸어왔을 때는 어두워졌어. 나는 대학시절에 그 근처에서 산 적이 있어 길이 낯설지 않은데 그는 처음 와본다고 했어. 옛날에 봤던 꽃집이나 신발가게, 동시상영을 하는 극장도 그대로 있었지. S는 혼자 웅얼거리듯이 정말 무력하네요, 그랬어. 글을 쓰며 사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글을 쓸 수가 없는 거, 그거 이해 가요? 묻더군. 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나봐. S가 곧 영화나 한편 볼까요? 했거든. 저 극장은 한편이 아니라 두편 상영해요, 내가 대답했어. 한편만 봐도 되겠죠, 뭐.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도 안 나. 그것도 중간에 들어갔으므로 내용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어두운 극장에 앉아 있다가 나는 끄덕끄덕 졸았어. 그가 조는 내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주더라. 내가 졸기를 그쳤을 때 그가 부시럭거리며 일어서길래 화장실에 가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 길로 돌아오지 않더구나. 설마 이런 삼류극장에 동행한 여자를 혼자 남겨두고 갔을라구 싶어 기다린다는 것이 나 혼자 다음 영화까지 다 보게 되었지. 그에게서는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전화도 없었어. 글쎄, 별로 분한 마음도 불쾌한 마음도 들지 않았어. 뭐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그런 그가 이해가 갔거든.

나는 그후로는 그를 보지 못했어. 이따금 그에 대한 얘기를 전해듣기는 했다. 그가 자동차 운전을 배워 중고차를 하나 구해서는 깊은 밤중에 차를 몰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했어. 속도를 내어 아주 먼 데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더군. 문득 생각했지. 그의 귀여운 아내는 이제 나무상자에라도 고추 모종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말은 어느만큼 배웠을까. 세월이 흘러갔고 그에게 딸이 생겼다는 얘기도 얻어들었지. 그가 바둑을 둔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가 몸이 아파서 무슨 기(氣)치료를 받으러 다닌다는 말을 하더군. 그렇게라도 그의 얘길 들을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어. 이태 전부터인가 그는 작품조차 발표하지 않아 지면에서도 그의 작품을 대할 수가 없었다.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말이 들렸어. 그가 절친한 친구들도 만나기를 꺼려한다는 말이 들렸지. 가끔 얻어듣는 소식조차 드물어지는 사이에 올해가 되었어. 연초의 어느날 PC통신의 내 메일박스에 알 수 없는 메일이 한장 날아들었다. 처음 보는 아이디로 보낸 메일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내 이름이 씌어 있고 그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까지 씌어 있었지. 몸이 좀 아팠었다고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최근에 아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인지 그 선배의 전화목소리가 서먹하게 들렸다고, 그래서 이제 사람들한테 소식도 전하고 만나기도 하며 지내려 한다는 것이었지. 내 이름을 적었으니 나에게 보낸 메일이 맞는 것 같은데 처음엔 누가 보냈는지를 모르겠더라. 메일을 보낸 사람이 S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어. 그가 내 메일주소를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느닷없는 메일이었으니까.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럴 줄도 모르는 인간이니까. 누구지? 잠깐 궁금했으나 그냥 지나갔어. 그렇게 며칠이 흘렀단다. 어느날 밤에 다른 메일을 확인하다가 우연히 그 메일을 다시 열어보게 되었어. 참 이상한 일이지.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때는 S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다시 읽고 나자 혹시 S? 싶은 생각이 들더구나. 바람 부는 날이었지. 우연히 만나 조문을 함께 갔던 날이었어. 그날 어두운 영화관에서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가 다시 길거리로 나와 그와 함께 걸어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걸어갔던 생각도 나더라. 참 황당한 일이었는데도 그 일로 나는 그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야릇한 일이었지. 나는 며칠 전에 도착한 메일의 답장을 눌러서 “혹시 S인가요?”라고 써서 보냈지. 그랬더니 그에게서 다시 메일이 왔어. 맞다고 하더구나. 자기가 이름을 안 썼느냐고 답장이 없어 바쁜가보다 했다고 예전처럼 가끔 볼 수 있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지. 그래서 나도 이번엔 길게 답장을 보냈지. 그동안 몸이 아팠었다면서 이젠 다 나았느냐고 딸이 생겼다는 얘길 들었는데 이름은 무엇이냐고 썼지. 그의 아내는 아직도 매운 고추를 잘 먹는가 묻기도 했다. 하지만 S에게서 다시 메일이 오진 않았어. 역시 서운하지 않았어. 어딘가로 일년씩 이년씩 사라져버리는 사람이 메일 답장 안 보내는 것쯤이야 뭐, 싶었다. 나만 가끔 메일박스를 열어볼 일이 생기면 S가 보낸 지난 메일을 다시 읽어보곤 했지. 어째서라기보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

지난 얘기지만 오래 전에 네가 헝가리로 날아갔을 때 그때, 참 너 보기 좋았지. 왜 그런 거 있잖아. 나는 그렇게 못 살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 내가 가끔 자서전이나 여행기를 즐겨 읽는 이유이기도 하지. 결혼하자마자 티셔츠 차림으로 헝가리로 튀었던 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때 너네 신혼부부가 튀었던 나라가 헝가리였던 것은 첫번째 이유가 아마 그때 백만원 가량이면 그곳의 아파트를 일년쯤 임대할 수 있다는 것, 두번째가 물가가 싸다는 것, 세번째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었지? 그런데 너, 그때 일년 동안 그곳에서 뭘 배웠니? 네가 학교 같은 델 다녔다고 한 말이 기억나는데 전공이 뭐였는지는 통 떠오르질 않는구나. 사진 찍는 걸 배웠다구? 어마, 그랬었니. 그건 몰랐네. 일년쯤 후에 돌아와서 묵을 데가 마땅치 않아 까페를 하는 친구 곁방이나 때로는 여관을 거처로 사용하던 네가 했던 말들만 드문드문 생각난다. 헝가리에서 사는 동안에 쓴 돈보다도 돌아올 무렵 한달쯤 유럽여행을 하는 데 든 비용이 더 많았다고 했지. 대학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까지 모은 돈이라고는 천만원이었는데 그것 쓰는 데 고작 일년 걸렸다고 했던가. 그랬어도 좋았다고 했다. 헝가리라는 나라 자체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 그렇게 가난한 나라인데도 어디서나 연극이나 오페라가 공연중이었다고 했어. 광장의 계단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즉석으로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고 했지. 마음만 내키면 누구라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 관람료가 싸다고도 했고. 그때껏 그렇게 한가하고 풍부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놀아본 적은 없었다고.

잠깐만, 물 좀 마실게. 바람은 종일 불고 나는 종일 갈증이 난다.

무슨 바람이 저렇게 부는지 모르겠다. 네가 떠나기 전 우리집에 왔던 날은 겨울밤이었지. 꼭 저렇게 바람이 불었어. 내 옷장에서 오래된 검은 코트를 네게 줬더니 너 되게 좋아했는데 그거 입고 다니니? 아직 때가 아니라구? 여기는 점점 가을이 없어지는 것 같아. 여름이 지나더니 가을볕을 느낄 새도 없이 금세 저런 바람이 분다. 하루이틀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냥 이대로 겨울이 될 기세야. 게다가 오늘 부는 바람은 음산하기까지 하다. 오늘밤은 거리가 텅 빌 것 같구나.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저 바람이 사람들을 서둘러 귀가시킬 것 같구나.

지난 유월을 기억한다. 겨우 몇개월 전인데 왜 이렇게 옛날 같으니. 가을만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봄도 그래. 유월이면 초여름에 불과한데 지난 유월은 얼마나 더웠는지. 너도 알겠지만 지난 유월은 대단했었다. 월드컵 얘기하려고 하느냐구? 그래. 대단하지 않았냐? 축구 좋아하냐구? 뭘 알아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지. 몇년 전부터 월드컵 얘기가 화제가 되곤 했으나 나는 관심이 없었어. 국가적인 무슨 행사가 치러지는 것쯤으로 생각했지. 교통이 복잡할 것이고, 좀 시끄러울 것이고, 그러다가 지나가겠지, 했다. 본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나라하고 프랑스의 평가전이 있었을 때까지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단다. 스코어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우리가 졌어.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지 뭐냐. 분명 졌는데도 비판이 아니라 칭찬 일색이더라구.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너무나 잘 싸웠다는 거야. 아니 졌는데 뭘 잘 싸워? 엉뚱하게 그게 궁금했어. 이겼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칭찬하나 싶을 정도로 흥분들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난 월드컵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첫 이유가 경기에 졌는데 잘 싸웠다니 무슨 뜻일까? 하는 거였다고 보면 된다. 나는 그때야 프랑스가 지난번 월드컵 때 1위를 했다는 걸 알았고 지단이라는 선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어느 신문 스포츠면에서 그의 몸값을 계산해놨는데 하루에 2억원이라던가. 그게 시작이었어. 믿지 않겠지만 지난 유월 내내 내가 얼마나 축구 때문에 들떠 있었는지 아니? 정말 내가 그랬나, 꿈처럼 느껴진다. 16강에 들기 전까진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를 봤어. 생각해봐봐. 혼자 사는 여자가 축구경기를 보며 혼자 흥분해서 소리치고 아쉬워하고 한숨 쉬는 모습을. 그러다가 갑자기 축구를 혼자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랑 모여서 보면 더 즐거울 것 같았거든. 그때부터 독일과 4강전을 치를 때까지 내가 축구 보러 다닌 이야기를 하다보면 날이 샐 거야. 한번은 강남까지 나가보았고 한번은 사직동 친구집에 모여서 봤고, 한번은 광화문에 있는 높은 빌딩에 올라가서 봤단다. 정말이냐구? 그래, 정말이야. 지난 유월은 혼자 있기가 싫었어. 마치 바람난 사람처럼 틈만 나면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어. 우리나라가 선제골을 내주었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우리 쪽에서 골이 터졌을 때 또 얼마나 환호했는지 몰라. 내가 소리를 그렇게 잘 지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은 응원하느라고 어깨가 아프고 목이 얼얼하고 그랬어. 완전히 중독되는 기분이었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붉은악마들이 외치는 응원구호가 이명처럼 들렸다니까. 경기가 있는 날은 그걸 보러 다니느라 없는 날은 기다리느라고 지난 유월은 아무것도 못했구나. 하긴 실업자라서 뭐 할 일도 없었다만. 정말 어이없게도 그땐 축구에 휘둘렸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랬다니까. 축구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종목이든 스포츠에 대해서는 늘 할말이 없는 사람 아니냐. 본래 게으른데다 패자가 있어야 승자가 있기 마련인 게임을 즐길 줄 모르는 성격이라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럴 수도 있구나, 기이해하곤 했지. 더구나 올 초부터 본격적으로 월드컵 얘기가 나올 때마다 무슨 시끄러운 일을 만난 사람처럼 이마를 찌푸리곤 했던 내가 그리 될 줄 알았겠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프랑스와 평가전이 있기 전까지 베컴이니 오언이니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박지성이 누군지조차 전혀 사전에 아는 바가 없었어. 내 인생에 축구경기를 전후반 다 본 것이 한국과 폴란드전이 처음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냐. 한창 인도여행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인도에 겨우 사흘 머물다 온 사람이었다고 하잖아. 그 다음은 삼주일, 그 다음은 석달 순으로 한 삼년쯤 지내다 온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월드컵이 개막되고 난 후에 내가 그 꼴이었어. 모르면 그저 얘기나 듣고 있으면 되련만 너도나도 축구 얘기만 하는 통에 나조차 분위기에 휩싸여 업싸이드가 무어냐고 물어서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가 하면 업싸이드와 오프싸이드의 차이점이 무어냐고 또 물어 망신을 자초하기도 했지. 네가 여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너는 안 그랬을까? 글쎄, 그건 모를 일이야.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다니까. 길거리 응원단이라고 이름붙은 붉은악마들의 기세가 정말 대단했단다. 우리 세대는 응원이 아니라 데모를 하러 길거리에 나갔지. 거리로 쏟아져나온 것만 같았을 뿐 우리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어. 생각해봐봐. 칠백만인지 팔백만인지가 거리로 쏟아져나왔으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겠는지 짐작이 가니?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건 꿈처럼 여기던 16강에 우리나라가 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우리팀이 포르투갈을 무찌르고 16강에 오르던 날부터 거리는 온통 축제였다. 경기가 끝난 뒤에 피구라는 포르투갈 선수가 탄식하는 표정을 너도 봤어야 하는데. 솔직히 사람들은 우리팀이 포르투갈을 꺾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 같더라.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한 게 뭐 나뿐이었겠냐. 8강전 상대는 이딸리아였단다. 후배가 전화를 걸어 만나서 8강전을 함께 보자고 한 말에 동의했던 건 이번 월드컵에서 그 경기가 마지막이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때까지도 붉은악마들이 장악하고 있는 광화문이나 시청 근처엔 나가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 그러나 혼자 있기는 싫었어. 그래서 강북의 이 끝자락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걸어서 약속장소인 강남의 실내포장마차까지 갔단다. 내가 그랬다는 게 너도 믿기지 않지? 어떻게 하면 바깥에 안 나갈까, 나는 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잖니. 이딸리아와 경기를 할 때는 안절부절못했다. 골이 터지지 않아 연장전까지 가서야 안정환의 골든골이 나왔어. 그때 내 목이 터지는 줄 알았다. 거리에서 마음껏 소리지르고 거침없이 즐거워하는 젊은이들이 어찌 그리 이뻐 보이던지. 모두 함께처럼 보였단다. 모르는 그들의 어깨를 깊이 싸안아주고 싶었다. 거리의 젊은 남녀 비율이 반반은 되어 보이는 것도 이색적이었지. 흔히들 축구는 남성들의 스포츠라고 하지 않니. 지난 유월의 거리에는 거칠 것 없이 함빡웃음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 여성들의 물결을 볼 수 있었지. 동네에서도 붉은 티셔츠를 입은 꼬마들과 마주치곤 했지. 어디에나 붉은색투성이였어. 나는 여전히 축구에 대해서 무지하지만 그런 감동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 선수들이 감사했어. 그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며칠 전에 지하철을 탔는데 월드컵 때 붉은 옷을 입고 열광적으로 응원하던 사람들 사진 옆에 아주 큼지막한 글씨로 다시 한번 붉은 힘을 모읍시다, 라고 써 있어서 무슨 얘긴가 하고 살펴봤더니 헌혈 광고더라. 너, 웃었니? 나도 그날 지하철 안에서 혼자 피식, 웃었다.

십오년 전 그해의 유월을 기억하냐? 그날 아침 일찍 연세대학교 이한열 장례식에 너와 함께 갔었지. 살벌한 시대였지. 죽음은 사람을 결집시키지. 처음부터 다시 생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죽음이야. 최루탄에 맞아 숨진 눈썹이 유난히 짙었던 청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처럼 많은 인파 속에 섞여본 게 처음이었다. 아침도 안 먹고 일찍 그곳엘 갔었지. 일찍 간다고 갔는데도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벌써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어.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차례로 줄을 지어 앉았지. 그 행렬이 정문 바깥까지 이어졌지. 담장 위, 가로수 사이 어디에나 정말 어디에나 사람들이 가득이었지 않았니. 질서정연했다. 간간이 구호를 외치고 나면 거대한 침묵이 사람들 사이를 흘러다녔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이어지는 운구행렬 뒤를 따르는 인파는 수십만이 넘었어. 고통은 가슴을 태양은 눈을 찔렀지. 그날의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열기를 기억하니. 덕수궁 돌담 위 지하철 출입구의 지붕 위까지 사람들이 모래알같이 모여들었지. 모르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한마음이 되었던 그날. 울분과 슬픔 속에서도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역사를 새로 짜보고자 했던 그 희망의 열기. 늘 원인 모르게 시달리던 두통도 걷히고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던 무기력도 사라지던 날이었어.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걸었으나 다리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데도 흐트러짐이 없었지. 결국 또다시 최루탄이 터지는 와중에 너를 잃어버리고 가방도 신발도 잃어버린 그날 코리아나호텔 유리문 앞에서 T선배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집에 걸어와야 했을 거야. 거리를 헤매다니다가 저만큼서 안경을 닦고 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T선배였어. 그가 내 행색을 보더니 배는 안 고파요? 묻더라. 고파요, 그랬더니 그는 난장판인 거리에서 뒷골목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 처음 보는 내게 밥도 사주고 차비도 주고 그랬지. 그러곤 다시 난장판인 거리로 나와 깊은 밤중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거야.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뜻밖에 친구의 부음을 들었다. 그때 기분. 무슨 허방으로 몸이 송두리째 빠지는 느낌이었어.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고 거리를 쏘다닐 때 내 친구였던 그녀는 혼자 빈집에서 죽었어. 수줍고 말을 더듬는 친구였어. 그 친구의 사인을 나는 지금도 정확히 몰라.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그녀가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고만 전해들었다. 상상이 안돼. 지금도 간혹 소스라칠 때가 있어. 얼마나 오래 밥을 먹지 않아야 목숨을 잃게 되는지. 이후로 시청 앞을 지날 때면 저절로 그날의 열기가 떠올라 깊은 숨을 쉬곤 했다.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연이어 굶어죽은 내 친구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어.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 자책. 어느 때는 홀로 프라자호텔 이십 몇층에 있는 커피숍에 올라가 시청 광장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 열기는 다 어디로 갔나, 싶어 괜히 얼굴을 매만져보곤 했지.

십오년이 흐른 후에 그 자리에 축구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모인 거야. 4강을 눈앞에 둔 스페인과의 경기 때는 숨이 막혔다. 그날 나는 드디어 광화문에 나갔구나. 그 수많은 붉은 옷을 입은 인파 속에 서 있었구나. 연장전 전후반을 다 치르고도 무승부여서 승부차기를 했지 않니. 와– 어쩌면 그처럼 완벽하게 사람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는지. 스페인 선수가 한 골을 실축하는 통에 우리가 4강에 오르던 그날 거리에 울리던 그 경적소리라니. 소음이 다 뭐냐. 오토바이와 트럭과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경적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어. 뺨에 태극기를 붙이고 양손을 쳐들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 친구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은 모르는 나를 향해 함빡웃음을 쏟아내며 손바닥을 부딪쳐왔어. 어디서나 누군가 오– 하고 운을 떼면 일제히 합창하며 마무리를 짓는데 어쩌면 그렇게 착착착 맞아떨어지는지. 둥둥둥– 땅이 울렸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흥이 나 있는 젊은 친구들 속에 섞여 있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단결심이 없고 개인적이며 국가와 민족에 무관심하다고 하더니. 그들은 정열적이었고 서로 협력했으며 질서정연했다. 게다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으며 투명하기까지 했단다. 아, 우리나라에도 이제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구김없이 축제를 즐기는 세대가 등장했구나, 싶어 내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밤이 늦어 버스는 끊기고 오가는 택시도 눈에 띄지 않아 집에까지 걸어가야 되나 어쩌나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데 태극기를 단 승합차 한대가 멈춰서며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외치더라. 승합차는 사람들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고 출발했다. 차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끼리 신나게 웃고 떠들었단다. 동네 어귀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오다가 주차장으로 내려가 그 깊은 밤중에 구석에 있는 내 차에 올라타 경적을 한번 울려봤구나. 거리에서부터 왜 그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지. 다음날에야 자동응답기 재생버튼을 눌러봤다. 너처럼 S의 소설을 좋아하는 출판사 후배가 내 이름을 부른 후에 숨을 고르더구나. 그러고는 멈칫거리며 S가 타계했다는 메씨지를 남겨놓았더구나. 순식간에 피가 식고 전신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어. 확인해볼 엄두도 나지 않더라. 먹먹한 느낌으로 한참을 자동응답기만 보고 있었어. 얼마가 지나 P에게 전화를 걸었구나. 왜? 저기…… S가. S가 누군데? 소설가 S 말이야. 그런데? 그가 죽었대. 나는 P가 너처럼 S를 잘 알고 있는 줄 착각했나봐. P가 S를 어떻게 알겠니. 책 읽는 걸 히말라야 등반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P인데.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구? 그때까지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던 P가 짜증을 내더구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더 자, 하며 전화를 끊었어. 내게 다시 메일을 보내진 않았지만 S는 얼마 전에 장편소설을 출간했어. 내가 근무하던 출판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왔지. 아마 S는 내가 아직도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책 속지에 그가 손수 싸인한 책이 출판사로 배달된 것을 후배가 가져다주었어. 그가 계간지에 연재소설을 쓸 거라는 소식도 후배를 통해 들었어. 그래서 나는 이제 그가 건강을 완전히 되찾은 모양이구나, 생각했어. 이제 사람도 만나고 바깥출입도 할 모양이니 언젠가 볼 수 있겠지, 했단다. 그의 장례식엔 가지 못했어. 그의 소식을 알았을 땐 이미 그의 장례식이 끝난 뒤였으니까. 고인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해서 가족끼리 장례를 치른 후에야 알린 거래.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신문에 S의 부음이 실렸더구나. 신문에 실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이제 겨우 마흔인데.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축구팀이 유럽의 강팀들을 꺾은 기쁨에 들떠 있을 때 그는 홀로 다른 세상으로 간 거야. 우리들이 축구에 빠져 모두들 함께 있었을 때 말이야. 무더웠던 날, 장충동에 있는 절에서 그의 49재가 있었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 내내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후에 옷장을 열어 무채색 옷을 찾아입고 그곳에 가보았어. 어째 그래야 될 것 같았어. 언젠가 강북삼성병원으로 건너가는 신호등 앞에서 S를 우연히 만나 조문갔던 사람의 미망인을 이번엔 그의 49재가 있던 절 앞에서 우연히 만났구나. 함께 갔지. 이런 곳에 절이 있었나, 싶은 도심의 거리에 절이 있더라구. 중국스님들이 거주하는 절이었다. 단청이 되어 있는 초입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4층 건물로 된 절이었지. 안으로 오르려다가 수없이 섞여 있는 모르는 사람들의 신발들을 물끄러미 바라봤구나. 절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페인트 냄새가 코를 자극했어. 계단을 타고 49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보니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듯싶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어. S의 아내 쪽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온 모양이었어. 그의 49재는 중국식으로 거행되었어. 발음이 부정확하지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스님이 49재를 이끌어갔는데 나는 그저 맨 뒷줄에 서서 형식에 따라 내리 절만 했어. S가 이 절에 다녔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S의 고통을 지켜보는 게 너무도 힘에 겨웠던 어느날 S의 아내가 정처없이 여기저기 걸어다니던 중에 우연히 들어가보게 된 절이라고 하더구나. 우리나라 절보다는 말이 통하는 그 절이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지. 그날 S의 아내는 절에서 모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했어. 이후 힘들 때마다 그 절에 가게 된 것이 S의 49재까지 그곳에서 치르게 된 것 같더라. 49재에 가보았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었겠냐. 팔월의 무더위와 향냄새 그리고 한국말이 서툰 중국스님의 나직한 말씀들 속에 절을 하거나 서 있었을 뿐. S의 얼굴조차 잘 떠오르질 않았어. 가물가물하더구나. 그날 처음 본 S의 아내는 단정하고 청순한 인상이었어. S의 어린 딸은 아직 키가 1미터도 안되어 보였다. S의 아내는 그동안 익힌 우리말로 천천히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어. 그날 처음 알았다. 지난 2년 동안 S를 알고 지낸 사람 중에 그의 가족을 제외하곤 S를 만날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S의 친구들이 S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S가 만나주지도 찾아오게 하지도 않았다는구나. S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의 가족 외에는 누구도 S가 이 세상을 뜰 정도로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져서 일년씩 이년씩 지내다가 돌아오기도 하는 그였기 때문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 그의 49재에 가서도 그의 병명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위가 아팠다는데도 의사들은 그의 병명을 정확히 찾아내질 못했다고 했어. 최후엔 S의 아내조차도 S 곁에 있을 수가 없었나봐. S의 아내는 S가 몸 때문에 너무 오래 고통을 겪었다고 했어. S가 몸을 버리고 싶어했어요, 죽는 것은 몸을 버리고 다시 만나는 일이라고도 했어요, 하더구나. 이제 다섯살 된 S의 딸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그의 아내는 오히려 웃으려고 애쓰면서 우리를 위로하려 하고. S는 종내는 아내를 서울에 두고 부산의 부모 곁으로 갔고 그곳에서 임종을 보는 이도 없이 혼자 간 것 같아. 그가 자신의 몸과 그렇게 처절하게 혼자 싸우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니. 그 고통 속에서도 그가 한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고 하는구나. 하루에 얼마간씩 성실하게 꼬박꼬박 써나갔다고 했어.

이런, 날이 밝아온다. 거긴 이제 어두워진다구.

원이는 좀 어떠니?

이 말을 물어보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그동안 네 메일주소를 잃어버려서 네게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 건 변명이었는지도 몰라. 네 동생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일주일 전에야 네 동생한테 전화를 걸어서 자동응답기에 네 메일주소를 잃어버렸으니 알려달라는 메씨지를 남겼다. 내가 외출한 사이에 이번엔 네 동생이 전화를 걸어서 네 메일주소와 바뀐 자기 핸드폰 번호를 남겨놓았더라. 받아적어놓고는 또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어딘지도 알 수조차 없는 곳에서 아이의 투병을 지켜보는 너에게 점점 할말을 잃어가고 있었어. 너에게 무슨 말을 해도 내 말은 너에게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서야 글을 쓰며 사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글을 쓸 수가 없는 무력감을 이해하느냐고 물었던 S의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겠더라.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던 그때에서야. 저 바람소리 때문인가. 오늘은 고통 속에서도 매일 꼬박꼬박 글을 썼다는 S 생각이 여러번 났다. 그래봐야 여전히 나에게 그는 희미한 기억 몇조각뿐이지만. 저 음산한 바람소리 때문에 오늘은, 아니 이제 어제구나, 어제는 내내 더욱 무력한 기분이 들었지. 그 무력함을 참고 너에게 끝끝내 얘기를 하고 나니 이게 무슨 조화 속이니,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구나.

바람이 계속 부는데도 까치가 단풍나무에 내려와 앉은 모양이다. 소리가 요란하다. 어느새 저리 날이 밝아버렸담. 그쪽은 해가 저문다구?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실감난다. 저기, 조금만 더 이야기할게. 혼자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어야겠지만 그냥 하고 싶네. 지난 여름 끝무렵의 어느 해저물녘에 일산에 다녀올 일이 있었단다. 일산은 네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지. 그 시간에 그곳에 가보기는 처음이었는데 퇴근 무렵이어서인지 구파발에서부터 차가 꽤 밀렸어. 간신히 원당을 지났을 뿐인데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버렸어. 짜증스럽게 앞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도로 중앙에 서 있었지. 문득 시야를 가득 메워오는 어떤 기운에 눈이 시어서 눈을 찡긋거리며 멀리 내다보게 되었어. 네가 살던 일산 쪽 하늘 전체에 노을이 가득했다. 눈 속으로 붉은 물이 가득 차올랐지. 도로 중앙의 자동차 안에 앉아 있던 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요해지더구나. 그 느낌을 어떻게 전해야 할는지. 영원을 느꼈다면 과장일까.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서향이어서 날 좋은 날의 웬만한 노을은 죄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껏 보아왔던 노을이 그날의 노을에 다 합쳐진 것 같았지. 마음이 텅 비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노을빛은 처음 보았다. 회색구름 사이로 사방으로 퍼져 있던 붉은빛이 어느틈에선가는 위로 치솟으며 인도자처럼 먼 하늘로 길을 만들고는 한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어. 빛물결이었지. 저절로 눈이 감기며 마음이 간절해졌던 그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네 아이를 위해 기도를 했단다. 그러려 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어. 그날 이후로 가끔 벅차게 아름다운 것과 순간적으로 마주치게 되면 네 아이 생각을 한다. 아침에 산에 오르다가 산등성이에 퍼지고 있는 투명한 아침햇살이나 나무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계곡에 소리없이 고여 있는 맑은 물을 보게 되었을 때, 며칠 전에 깨끗하게 늙은 어떤 어른의 눈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을 때, 그런 때에. 전화 끊었니? 왜 대답이 없니? 응? 뭐라구? 아, S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느냐구? 내 메일박스가 통째로 날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메일은 키가 1미터도 안되는 어린 딸과 함께 싱가포르로 돌아간 S의 아내가 보낸 메일이었단다. 아마도 S의 메일박스에 기록되어 있는 주소로 보냈을 테지.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썼더구나. S 때문에 친구들이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는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S는 자주 친구들 얘기를 했었다고도 썼더라. 가끔 내 얘기도 했었다고. 그런 친구들이 49재에 와줘서 S는 외롭지 않았을 거라고. 자기는 떠난 자리로 돌아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열심히 살다가 S가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을 때쯤 자기도 S에게 갈 거라고 써 있었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거든요,라고. 그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