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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방현석

1961년 울산 출생. 19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장편 『십년간』 『당신의 왼편』 등이 있음. bang80@jowoo.co.kr

 

 

 

존재의 형식

 

 

낡은 냉방기는 냉기가 아닌 소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일깨우고 있었다. 재우는 풍량 조절기가 떨어져나간 냉방기를 힐끗 보고 나서 원고더미 사이에 깔려 있는 부채를 집어들었다. 번역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고, 재우는 그사이 한번도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가 집안에 머무르는 동안 냉방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갔지만, 올 들어서만 두 차례나 수리공의 손을 빌려야 했다. 녀석이 벌릴 수 있는 벽 안쪽과 벽 바깥 사이의 온도 차이는 미미했다. 그나마 창문을 완전히 닫아둘 수 없어서 실내외의 온도 차이는 더욱 줄어들었다. 재우의 옆과 뒤에 앉은 두 사람은 줄기차게 담배를 피워댔다.

“이거 또 지뢰네.”

등뒤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희은이 담배를 뽑아 물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번진다, 이걸 어떻게 옮겨야 하나? 번진다……”

옆에 앉은 레지투이의 눈길을 피하며 재우는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웃음이 번진다, 이런 말이 이 나라에 있나……”

지뢰가 된 문장은,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였다. 이 한 문장을 놓고 벌써 20여분을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번지는 거 말예요, 이렇게.”

재우는 말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표정연기를 해 보였다.

“크이 또.”

레지투이가 말끝을 흐렸고, 재우는 고개를 저었다.

“크게 웃는 거 아니고, 이렇게 얼굴에 웃음이 퍼져나가는 거 말예요, 이렇게.”

화선지에 파스텔 터치를 하듯 웃음진 뺨을 가볍게 쓸어 보이는 재우를 향해 레지투이는 드디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뗀다.

“크이 뜨어이.”

“환하게 웃는 거 아니고요. 후유.”

재우가 바퀴의자를 굴려 책상에서 물러나자 침대에 드러누웠던 희은이 몸을 일으켰다. 만년필을 들고 책상으로 다가선 그녀는 원고 뒷면에 원을 크게 그리며 레지투이한테 직접 설명을 했다. 그녀의 동작에는 답답함과 짜증이 얹혀 있었다.

“이게 연못이란 말예요. 이 연못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돼요? 이렇게 물살이 번져나가잖아요. 이걸 뭐라고 그래요?”

큰 원 밖에서 시작한 화살표를 원의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조약돌을 빠뜨린 다음 그 둘레로 원을 겹겹이 둘러치며 희은은 한국말로 설명을 해댔다. 재우는 희은의 말을 레지투이에게 옮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의 농담 한마디 한마디까지 서로에게 옮겨주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버려두는 언어들이 늘어갔다. 재우는 둘의 대화를 놔둔 채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보호기능을 삭제해놓은 컴퓨터의 커서는 쉼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같은 속도로 반짝이고 있을 텐데도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같이 느껴졌고, 무슨 글자든 빨리 두드려넣으며 앞으로 나가자고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메일 도착을 알리는 강아지가 나타난 것은 커서가 손가락을 충동질하던 순간이었다. 입에 편지를 물고 화면 좌측상단에 나타난 노란 강아지는 고개를 흔들면서 방울소리를 냈다. 재우는 의자바퀴를 굴려 냉큼 컴퓨터 앞에 다가앉았다.

문태가 보낸 메일이었다. 클릭과 동시에 강아지의 입에 물려 있던 편지가 열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호텔은 사이공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예약해주면 되고, 하노이에서 심포지엄이 열리는 2박3일간 통역을 맡아줄 사람 한명을 구해주기 바란다. 서울에서 문태.’ 재우는 메일을 읽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문태가 처음 호텔예약을 부탁해온 것은 번역작업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니까, 한 열흘 전쯤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하노이를 거쳐 사이공에 오겠다며 호텔을 예약해달라고 했을 때 재우는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아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오면 숙소로 잡아주고 하던 찬슬리사이공 호텔의 예약을 후배에게 부탁했다.

재우가 호텔급수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 실수임을 깨달은 것은 어제 문태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은 다음이었다. 문태가 골프장 예약을 부탁하자 재우는 비로소 녀석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떤 급수의 호텔을 원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메일을 띄웠다. 어느정도 예상한 바지만 문태의 회신은 유쾌하지 않았다. 재우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행사에 일하는 후배에게 찬슬리호텔을 취소하고 사이공에서 제일 비싼 소피텔호텔 딜럭스룸으로 바꾸어달라고 하면서 재우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소피텔호텔 예약을 직접해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직접 소피텔호텔의 딜럭스룸을 얻으려면 방 하나에 140불이지만 여행사를 통하면 90불이었다. 여행사의 후배가 넣어준 가격은 그것보다도 25불 적은 65불이었다. 재우의 손님들에게는 여행사 수수료를 한푼도 붙이지 않는 후배는 재우가 미안해할까봐 언제나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형 아는 사람들은 다 돈 없잖아. 우린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벌면 돼요.’

다행히 오늘은 후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헝클어졌다. 처진 기분으로 하노이의 후배들에게 전화를 해서 통역을 맡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만만한 순서대로 걸었는데 세 사람째 불가였다. 모두 선약과 논문 따위를 이유로 들었지만, 혹시 너무 적은 통역료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우가 소개하는 사람들의 통역은 언제나 반값 이하였고, 심지어는 무료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거절당하기 전에 이번에는 조금 괜찮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미리 하려다가 말았다.

네번째까지 실패한 다음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보루로 남겨진 상환이를 찾았다.

“야, 통역 한번 뛰어주라.”

유학 초기에 재우에게 진 신세 때문에 그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녀석이었다.

“언젠데요?”

“내일 하노이에 떨어질 거야.”

“빨리도 얘기하네. 며칠간인데요?”

“사흘.”

“리포트가 밀려서 그런데, 이틀만 하면 안돼요?”

녀석이 다니는 하노이대학 역사학과는 과제물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길래 임마, 누가 하노이로 가래.”

녀석은 어학공부를 사이공에서 하고 대학원은 하노이대학으로 갔다.

“알았어요.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하죠. 그런데 이번에도 무료예요?”

“아냐, 임마.”

“얼마 주는데?”

짐짓 뻔뻔스러움을 가장하며 녀석이 물어왔고, 재우 역시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얼마주면 되는데?”

“형이 언제 우리한테 물어보고 줬어요. 주는 대로 받아야죠.”

“니들 정식으로 통역 나가면 얼마씩 받아?”

“그냥 나가면 학술통역이니까 하루에 250불씩, 못 받아도 200불은 받죠.”

“그러냐…… 그렇게 받아라.”

“정말이야, 형? 나중에 뭐라고 그러는 거 아냐?”

“이번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니까, 다 받아. 나중에 어려운 사람들 오면 또 좀 봉사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형이 아는 사람들 중에 부자도 다 있고.”

“짜식이……”

전화기를 내려놓은 재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커피잔을 향했다. 얼음덩어리가 녹아서 묽어진 커피의 맛은 밍밍하고 미지근했다. 열흘 전, 일년여 만에 문태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정말 반가웠다. 지난해 서울에서 얼굴을 붉히며 헤어지고 나서 가끔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커피잔을 입에 문 채 문태가 소집했던 동문회의 풍경을 떠올렸다.

 

10년 만에 찾은 학교 앞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당구장은 PC방으로 바뀌어 있었고,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웨스턴바가 들어서 있었다. 민주동문회가 열린 횟집은 그 자리가 한때 감자탕을 팔던 집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사시미가 상마다 오르고 소주잔과 맥주잔들이 뒤섞여 돌아가며 익숙한 추억과 무용담이 오갈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달아오른 얼굴들만큼이나 시끌벅적하던 술자리의 열기가 가라앉은 것은 보상금문제로 화제가 옮겨가면서부터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에 대한 설명을 맡은 것은 물론 문태였다. 녀석은 법률 해석에 이어서 민주동문회의 회원들이 선고받은 총 형량이 217년이고, 실 집행기간이 173년이며 제적 281명, 해고 43명이라고 보고하고 지급받을 수 있는 예상 보상금액을 여러가지 설에 따라 산출해서 제시한 다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으면 좋을지를 토론에 부쳤다.

진보정당이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 기금으로 헌납하자는 의견에서부터 각자가 알아서 하자는 주장까지 사람 숫자만큼이나 분분한 의견이 나온 끝에 제출된 절충안이 40%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에 사용하고 10%는 민주동문회 기금으로 적립하며 50%는 각자의 재량에 따라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거의 합의에 이른 듯한 절충안에 대해 문태가 재우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매끄럽게 회의를 이끌어서 절충안을 도출하는 데 거의 성공한 문태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재우를 일으켜세웠다. 할말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는 재우를 일으켜세운 문태의 의도를 재우라고 모르지 않았다. 문태가 주재한 모임에서 재우가 결론을 내려준다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동문들도 이의를 달기 어려운 깔끔한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재우는 문태와 동기로 학생회가 부활되던 해에 같이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지하써클을 중심으로 한 활동에서 학생회를 통한 공개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무렵, 재우는 지하써클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총학생회 부활투쟁에 승리하면서 지하조직들 사이에서 직선제 학생회장 후보로 재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재우는 완강하게 출마를 거부하였다. 재우 다음으로 거명된 후보 창은은 성적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측은 3.0 이상의 학점을 요구하였고, 창은은 물론이고 학교수업을 우습게 알았던 지하써클의 핵심들 중에서 그만한 학점을 얻은 녀석이 있을 리 없었다. 창은의 후보자격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던 와중에 재우가 꺼낸 카드가 문태였다.

문태는 공개 종교써클의 대표였다. 지하써클의 대표자들은 문태를 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우자는 재우의 카드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문태의 써클이 정부에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지하써클들의 신뢰를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하써클에서는 생소한 문태가 학생회장 후보로 결정된 것에는 재우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우리가 직접 출마할 경우 방향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취약한 지하써클의 역량을 고스란히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정권의 정책이 다시 강경 탄압으로 바뀌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문태를 내세우면 공개써클들을 선거운동뿐만 아니라 합법공간의 전면에 포진시킬 수 있고 운동세력과 일반학생들을 분리시키려는 정권의 의도를 역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뒤에서 일하면 된다, 감투와 명예는 내주고 내용과 전망을 지켜가자’는 재우의 논리는 먹혀들었다. 문태가 당선이 되고 나서도 지하써클의 영향력은 확고했고, 그 정점에 재우가 있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요.”

문태에 의해서 반강제로 자리에서 일어선 재우의 첫마디는 어눌한데다가 떠듬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 순간 그가 몰랐던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그의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기어코 튀어나오고 말았다.

“우리가 언제 명예를 잃은 적이 있었나요? 지금까지 한번도 내게 회복해야 할 명예가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해서…… 난 잘 모르겠네요. 보상은 더욱 잘 모르겠네요. 누가 누구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누가 누구로부터 보상을 받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 앉았지만 술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여전히 잘났어요.”

불편한 침묵을 깨고 왼쪽 구석자리에서 날아온 그 한마디가 재우의 귀에 와 박혔다. 재우는 그 말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목소리의 임자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별말 없이 오른쪽 구석자리 앉아 있던 창은에게 눈길이 갔다. 앞에 놓인 소주잔에 시선을 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고개를 들던 그의 눈길이 재우의 시선과 엉켰지만 그는 슬쩍 시선을 비키며 술잔을 집어들었다. 술잔을 입술로 옮겨가는 창은의 왼손과 그 손을 덮은 허름한 셔츠가 재우의 눈에 와 박혔다.

여전히 잘났어요, 하는 그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창은의 왼손에 들린 술잔이 재우에게 상처가 되었다. 충분히 외로워서 이땅을 떠났고, 완벽하게 외톨이가 되어서 잠시 돌아왔다고 생각한 그 앞에 창은이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재우를 일깨운 것은 희은의 목소리였다.

“뭐 안 좋은 소식 있어요?”

“아냐, 아냐.”

그는 대답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커피잔을 들고 있던 손을 흔들었다. 책상과 바닥에 커피가 흘렀다. 원고지도 젖었다.

“정말 무슨 일 있나봐요?”

“아니라니깐.”

휴지로 원고지에 떨어진 물기부터 찍어냈다. 서너 겹의 휴지로 원고지를 누르자 커피 자국이 가장자리로부터 휴지 전체로 빠르게 번져갔다. 재우는 바닥에 떨어진 커피를 내버려둔 채 레지투이를 불렀다.

“이게 번지다, 예요.”

세 겹으로 접은 휴지 가장자리에 재우가 남은 커피 한방울을 떨어뜨렸다. 흑갈색의 물기는 빠르게 휴지 전체로 번져나갔다. 레지투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노 누 끄이?”

“오케이.”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일곱시에 맞춰진 탁상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재우는 탁상시계의 꼭지를 누르고 다시 방바닥에 누웠다. 탁상시계의 울음소리 대신 창밖에 잇대어 있는 옆집 양철지붕이 격렬하게 빗소리를 연주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침대 위에서 희은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자. 이 정도 비면 베트남에선 모든 약속이 자동 취소야.”

“우와, 만세다.”

어제 일을 끝낸 다음 맥주를 마시고 새벽 두시가 넘어서 건넌방으로 갔던 그녀는 더워서 잠을 잘 수 없다며 새벽녘에 베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침대를 그녀에게 내주고 바닥으로 밀려났다. 그의 침대를 빼앗은 그녀는 새근새근 잘도 잤지만 그는 오래도록 잠들 수 없었다. 그의 잠을 가로막은 것은 옆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세찬 빗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었고, 여리고 얕은 그녀의 숨소리였다.

“아저씨, 커튼 좀 쳐줘요.”

하늘이 어두웠지만 창밖에는 아침이 당도해 있었다. 커튼을 치기 위해 일어서며 그는 아랫도리의 묵직함을 느꼈다.

“야, 이희은, 너 말야. 내일부터 이 방에 자러 오지 마.”

“왜요?”

“책임 못 지는 수가 있다.”

“고자라면서요.”

“짜식이…… 잠이나 자, 임마.”

얼마나 뒤척였을까, 다시 잠들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뽑아서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일곱시 삼십분, 평소 같으면 레지투이가 와야 할 시간이었지만 이 폭우 속에 그가 올 리는 없었다. 가끔 장난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꽁무니를 내빼는 동네 꼬맹이겠거니 하고 돌아누우려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좁은 마당에는 들통으로 물을 붓는 것같이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건너뛰는 대여섯 걸음에 재우의 옷은 젖어버렸다. 빗장을 풀고 문을 열던 재우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레지투이였다. 폭우를 뚫고 달려온 그가 오토바이를 잡고 서 있었다. 배수로로 변한 골목길에 선 오토바이의 바퀴는 깊숙이 물에 잠겨 있었고, 그의 발목은 물길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적신 빗줄기가 목을 타고 연신 가슴으로 파고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 순간 레지투이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전율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담담함이 깔려 있었고 눈빛에서는 비애를 넘어선 짙은 슬픔이 뿜어져나왔다. 슬픔과 달관이 빗물에 뒤엉켜 흘러내리며 빚어내는 얼굴의 평화로움은 적멸감을 불러일으켰다.

“씬 짜오.”

그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베어물고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재우는 잡고 있던 대문을 열어젖혔다. 마당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나서 현관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돌아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어린 것은 분명 적멸감이었다. 재우는 의식적으로 무시해왔던 그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자신의 내부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시작되었다.

“힘들지?”

뒤늦게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은 그의 목과 어깨를 레지투이는 능숙하게 눌렀다. 재우는 마싸지를 많이 받아봤지만 레지투이만큼 금방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나른하고 시원한 그의 손끝에 어깨를 맡기고 있는 사이 희은이 들어왔다. 물기가 남은 머리를 수건으로 묶은 희은은 정해진 순서처럼 레지투이에게 등을 맡겼다.

“아, 시원하다.”

손에 커피잔을 든 채 희은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오늘의 비는 지나가는 스콜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우기를 예고하듯이 비는 간간이 가늘어지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도록 줄기차게 이어졌다.

번역작업은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자주 창밖을 내다보는 레지투이의 무심한 눈길을 재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탁상시계가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마셔댄 커피 탓인지 그다지 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배고프지 않아?”

역시 아침을 건너뛴 희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그렇게 피워대니 무슨 입맛이 나겠냐?”

“아저씨는, 나보다 두 배는 독한 담배를 연짱 피워대는 사람도 있구만……”

희은은 말끝을 흐리며 베트남 담배 555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는 레지투이를 흘낏 쳐다봤다. 그는 아무리 권해도 희은이 피우는 디스나 던힐은 싱겁다고 마다했다. 다른 날보다 빨리 재떨이에 쌓여가는 꽁초들을 보며 희은이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재우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이 아저씨, 오늘 약간 이상하지 않아?”

“글쎄……”

“센치하게, 비 타나……”

희은은 레지투이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재우는 가정부를 불러서 라면을 끓이라고 시켰다. 식탁 옆에 놓인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막 둘러앉았을 때였다.

“아로?”

가장 가까이 앉은 희은이 수화기를 집어들며 제법 베트남말을 흉내냈다.

“뭐야, 한국사람이잖아. 베트남어로 대답 좀 해주려고 했더니.”

희은이 넘겨준 전화의 주인은 문태였다.

“그래, 벌써 도착했냐. 어디야? 호텔인가. 그래, 뭐가 문젠데?”

“여기 통역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재우의 말허리를 자른 문태의 질문은 묻는 것이 아니라 따지는 것이었다.

“왜, 통역이 안 나왔어?”

“오기야 왔지.”

“근데?”

“통역료를 굉장하게 요구하네.”

문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고, 그의 감정은 바로 재우에게 전달됐다.

“얼마나 달라는데?”

“250불.”

“그런데?”

“야, 여기 공무원 한달 봉급이 얼만데 250불이야?”

“………”

“의사 월급이 70불이고, 판사 월급이 65불인 나라에서 하루 통역료로 250불을 달라는 게 말이 돼?”

재우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희은이 라면가닥을 입에 문 채, 얕게 한숨을 뱉어내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재우를 빤히 쳐다봤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문태의 목소리는 희은이 알아들을 만큼 컸다. 재우는 희은과 레지투이에게 식사를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며 수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문태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우리가 봉이냐?”

“………”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강재우, 듣고 있냐?”

“말해.”

“우리한테까지 이래도 되는 거냐. 너무하는 거 아냐?”

“아냐.”

“하루 250불 줘야 한다, 이거야?”

“응.”

다음 순간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문태에서 낯선 사내의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당신들 사람 아주 잘못 봤어.”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우리가 외국에 한두 번 다녀본 줄 알아. 내가 학위를 미국에서 했어. 미국에서도 말야, 하루 통역비 50불이면 떡을 쳐. 그런데 베트남에서 250불을 내놓으라고. 이봐, 자네들 말야, 우릴 바지저고리 취급하지 말라구.”

당신, 이봐, 자네. 무시와 모욕의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대명사는 모두 동원되었다. 재우는 입술을 깨물며 목구멍으로 기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통역 없어도 괜찮아. 영어로 하면 돼. 영국, 미국에서 유학한 멤버들 즐비해.”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하라면 못할 줄 아나. 자네들 말야, 인생 이렇게 살면 안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더는 참기가 곤란했다.

“여보세요!”

하지만 재우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대답 대신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우는 온몸에서 맥이 쭉 빠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재우를 희은이뿐만 아니라 레지투이까지 의아하게 쳐다봤다. 입맛이 달아난 재우는 두어 젓가락 건드리다 말고 이미 붇기 시작한 라면을 물렸다. 희은과 레지투이도 덩달아 생각이 없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도 다시 젓가락을 집지 않는 그들에게 재우는 어쩔 수 없이 전후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도 개운하기는커녕 입안이 더 씁쓸해진 재우를 향해 레지투이는 싱긋 눈웃음을 날렸다. 희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람을 잡았다.

“우리 맥주 한 캔씩 어때요? 비도 내리고, 기분도 그렇고 한데.”

재우는 레지투이를 바라봤다. 하루 일이 끝난 밤에도 같이 한잔 하자고 하면, 내일 일하려면 오늘 일찍 쉬어야 한다며 한사코 뿌리치고 떠나는 레지투이였다. 그에게 낮술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로저을 줄 알았던 그의 고개가 끄덕이고 있었다. 희은은 그의 맘이 변할새라 냉큼 냉장고로 달려갔다.

캔맥주를 음미하듯 천천히 마시는 그에게 재우는 웬일이냐고 물었다. 현관 밖으로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그는 아주 짧게 대답을 했다.

“비가 오니까.”

현관 밖의 빗줄기로 다시 옮겨가는 그의 시선에서 재우는 아침에 보았던 적멸감 같은 것을 다시 엿볼 수 있었다. 현관을 향해 비스듬하게 돌아앉은 그의 등에서는 어쩐지 대화를 거부하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재우와 희은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상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도대체 이 사람들하고 형하고 어떤 관계야. 내가 언제 통역하겠다고 했어? 형이 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미안하다.”

“나 그냥 가버려도 괜찮아?”

“너한테 뭐래?”

“통역료를 깎자고 하네, 150불로. 형만 괜찮으면 나 이대로 가버릴려고.”

“니가 알아서 판단해.”

녀석과 전화를 하는 사이 재우의 손에 들렸던 캔은 비어버렸다. 레지투이의 캔도 빈 것을 확인한 희은이 한 캔씩만 더 하자고 했지만 레지투이는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고집스런 등을 향해 희은이 ‘온리 원 캔 모어’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 다 끝내놓고, 실컷.”

레지투이의 대답은 예의 그 한마디였다.

오후의 작업속도는 빨랐다. 재우가 두드려놓은 대부분의 문장이 그대로 통과되었고, 좀 걸린다 싶은 문장들도 ‘툭’ 하면 ‘호박’ 하고 받는 식으로 설명을 마치기 전에 이미 레지투이는 마땅한 표현을 찾아냈다.

오후 작업의 지뢰는 문장이 아니라 상황 자체였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일상을 그린 장면이 실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레지투이의 지적이었다. 그가 문제삼은 장면은 항상 허기를 느끼고, 남들보다 식탐이 강한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사인 ‘밥벌레’가 자기 몫 이상을 먹으려는 상황을 둘러싼 것이었다. 다같이 배가 고픈데 자기만 더 먹으려고 하는 ‘밥벌레’를 ‘짠돌이’라는 전사는 ‘야, 숟가락 속도 조절 좀 해’라고 나무랐다.

남들이 한 숟갈 먹을 때 두 숟갈 퍼먹는 밥벌레라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이 장면에 대해 레지투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게릴라들은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젓가락만 사용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밥을 한그릇에 퍼놓고 같이 떠먹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식기에 덜어서 먹기 때문에 젓가락질을 아무리 빨리 해도 남들보다 결코 더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표현이 아니라 상황 자체를 다르게 그려야 하는 문제였고, 번역자인 재우는 물론 그것을 검토하는 희은이나 레지투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씨나리오를 쓴 감독이 판단할 사항이었다.

서울로 전화를 걸어서 감독의 의견의 묻고 난 희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하래?”

재우가 묻는데도 희은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이 아저씨가 하자는 대로 하래.”

“그게 뭐가 이상해?”

“자기 씨나리오를 제작자가 건드리는 것도 못 참는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이 아저씨가 누구야?”

희은은 처음부터 씨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조감독으로서 감독의 의중뿐만 아니라 그의 스타일까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녀석이었다.

“니가 알듯이 여기 해방영화사 감독이잖아.”

“아냐. 우리 두목은, 감독이 아니라 감독 할아버지라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씨나리오 마음대로 하라고 할 사람이 아니거든.”

“더위 먹었나보지.”

“한국은 지금 겨울이에요.”

실제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비극적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표현해내고, 인물들이 감칠맛나는 대사를 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원래의 씨나리오는 식탐을 부리는 ‘밥벌레’와 그것을 나무라는 ‘짠돌이’의 행동을 보면서 관객들이 킥킥 웃지 않을 수 없게 짜여 있었다. ‘너 밥 좀 적게 먹어’라거나 ‘네 몫만큼만 먹어’라는 대사와 ‘숟가락 속도 조절 좀 해’라는 대사는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었다. 희은은 하루하루 배고픔을 견디며 싸워야 하는 게릴라들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비극적 방식이 아닌 희극적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감독의 의도를 설명했고, 레지투이는 아주 상세하게 게릴라들의 식사방식을 설명했다.

레지투이에 의하면 게릴라들은 몇개의 솥에 나누어 밥을 하는데 보통의 경우는 각자가 지니고 다니는 작은 식기에 한번씩 덜어 먹고, 식량사정이 조금 넉넉할 때는 두번씩 차례가 돌아왔다. ‘밥벌레’처럼 식탐을 부리는 친구들이 사용하는 가장 흔한 수법은 이쪽 솥에서 한그릇 퍼서 잽싸게 먹어치우고 다른 솥으로 가서 시치미를 떼며 한그릇 더 퍼먹는 것이었다. 다른 수법은 같은 한그릇을 퍼담더라도 꾹꾹 눌러 담아서 실제 양을 두 배로 만드는 것이었다.

희은과 레지투이는 두 가지 수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희극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놓고 따지고 또 따졌다. 하지만 재우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것은 게릴라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레지투이의 언어와 표정, 눈빛이었다. 조금의 더듬거림도 없이 게릴라들의 생활상을 설명하는 그의 언어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했다. 실제 그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해낼 수 있는 설명이 아니었다.

“식탐이 있는 전사들일수록 밥을 빨리 먹지 않아. 아까워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꼭꼭 씹어먹어.”

레지투이의 어투는 최소한 그런 인물의 곁에 있어본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어투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눈빛에서도 읽혔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순간 아득하게 흐려지는 것을 재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우는 레지투이가 해방전선의 게릴라 출신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에서 살아온 9년 동안 만났던 과거 해방전선의 전사들은 한결같은 특징이 있었다. 전쟁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올라갔고, 격정적인 무용담 한두 가지가 빠지지 않았다. 그들과 달리 레지투이는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았고 자신의 무용담이 없었다. 어쩌면 영화감독이라는 그의 직업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전쟁에 대한 풍부한 세부를 확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은과 레지투이는 밥벌레의 수법을 밥을 꾹꾹 눌러서 퍼담는 쪽으로 정했다. 밥솥을 옮겨다니는 것으로 하면 두 컷 정도가 더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희은에 따르면 현재의 씨나리오로도 적정 러닝타임보다 30분 초과였다. 지금보다 한 컷이라도 더 늘어나야 하는 경우라면 천하의 명장면도 불가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상황설정은 이루어졌지만 대사가 더 문제였다. 밥을 꾹꾹 눌러담는 ‘밥벌레’를 향해 ‘짠돌이’가 던지는 맛깔난 대사를 뽑기가 쉬울 리 없었다. 번역할 원문이 없었으므로 재우는 팔짱을 끼고 앉아 머리를 짜내고 있는 둘을 지켜보았다. 희은은 한국어로, 레지투이는 베트남어로 이런저런 대사들을 입에 올려보았지만 재우가 베트남어로 옮겨보기도 전에 스스로 아니라며 모두 취소해버렸다. 한참의 투망질 끝에 먼저 건져 올려진 활자는 한글이었다.

‘적당히 좀 눌러라.’

희은은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그렇게 두드려넣고는 통과를 외쳤다. 하지만 재우가 베트남어로 옮겨놓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레지투이는 고개를 저었다.

번역 초기에는 주로 희은이 제동을 걸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반대였다. 번역될 수 있는 몇가지 표현을 나열해놓고 희은의 선택에 맡긴 다음, 희은이 선택을 하면 다음으로 넘어가던 것이 레지투이의 초기 모습이었다. 사뭇 사무적이고 수동적이던 레지투이가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쯤 지난 다음이었다. 지쳐가던 희은이 대충 비슷하면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희은이 ‘통과’를 외쳐도 레지투이는 멈춰서 있었다. 그는 자기 성에 차는 표현을 찾아낼 때까지 진도를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한참 전에 지나온 문장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레지투이의 태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가는 이유를 재우는 쉽게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집요하고 의욕적으로 달려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충대충 넘어간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하고 초반전에는 의도적으로 마찰을 피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약삭빠른 처세술을 지닌 사람으로 보기엔 그의 눈이 너무 깊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레지투이가 다시 한번 만진 문장이 애초의 문장보다 훨씬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어떤 문장은 한국어로 된 원문보다 베트남어로 번역된 것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 씬까지 해놓고 저녁 먹죠.”

희은은 망설이고 있는 레지투이를 곁눈질하며 다음 씬을 ‘이 씬’으로 기정사실화하며 레지투이가 붙들고 있는 씬을 지나간 씬으로 못을 박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긴 레지투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헬프한테 저녁 준비시킬까?”

아침을 거르고 점심마저 제대로 먹지 않은 재우도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종일 굶었는데 저녁은 제대로 좀 먹어보죠. 된장냄새 팍팍 나는 거 뭐 없어요?”

희은이 입맛을 다셔가며 되물었고 재우는 시내의 한국식당으로 전화를 걸어서 보쌈백반 배달을 부탁했다.

“배달오기 전에 두 씬을 더 할 수 있겠죠?”

희은은 노골적으로 레지투이를 재촉했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해진 보름 안에 번역을 마치는 것처럼 보였다.

“적당히 좀 눌러라, 이게 어때서 그래요? 아니면, 너 혼자 밥 다 먹을래, 하든지.”

“느낌이 이게 아냐.”

레지투이는, 희은의 말을 빌리자면, 질기게 뭉갰다. 희은이 몇번을 침대에 엎어졌다 일어났다 하고, 재우가 커피를 두 잔이나 비운 다음에야 레지투이는 최종 표현을 찾아냈다.

“밥그릇 밑 빠질라.”

그가 부르는 대로 두드린 다음, 모니터 위에 뜬 베트남어에 성조를 넣어서 읽던 재우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어의 신비는 성조였다. 6성의 언어구조는 성조에 따라 노래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그가 찾아낸 대사의 성조는 한국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매혹적인 어감을 부여했다. 단어들 위에 얹힌 성조는 짠돌이의 대사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슬픔과 익살이 일렬선상에서 뒤집어지며 이어지도록 만들어놓았다. 그 상황을 드러낼 수 있는 더이상의 언어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베트남어를 처음 배울 때 수시로 재우를 절망에 빠뜨리던 까다로운 성조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마법을 레지투이는 요술주머니에서 꺼내놓았다.

 

저녁은 시킨 지 한시간 반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두 차례나 확인전화를 했지만 이미 출발했다는 똑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정말 출발하긴 한 거예요?”

“한참 전에 했지요. 비 때문에 좀 늦는 모양인데, 곧 도착할 겁니다.”

배달원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도 30분은 더 지난 다음이었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청년을 향해 재우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설날까지 기다려야 되는 줄 알았더니.”

“오는 도중의 도로들이 물에 잠겨서……”

청년의 변명을 뒷받침하듯 바구니를 든 그의 옷소매에서 빗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우의도 입고 있지 않았다. 청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훔치고 나서 서둘러 바구니 속의 음식들을 식탁 위에 꺼내놓았다. 재우는 청년의 바지자락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거실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것을 지켜봤다.

“얘들은 어떻게 된 게 미안하단 말을 할 줄 모르더라. 이렇게 늦어놓고서도 비 핑계나 대고.”

희은이 식탁 위에 올려진 보쌈접시와 청년을 번갈아 보며 쫑알거렸다. 희은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청년은 마지막 양념장 접시를 꺼내놓은 다음 바지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그 손으로 접시를 만지면 어떻게 해!”

희은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보쌈접시를 씌운 랩을 벗기려던 청년은 멈칫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시커먼 기름때가 묻은 청년의 손이 재우의 눈을 파고들었다.

“정말, 미치겠어. 음식 배달하러 온 사람이야, 쓰레기 수거하러 온 사람이야?”

신경질적으로 랩에 묻은 기름자국을 닦아내는 희은의 하얀 손이 청년의 시커먼 손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재우의 시선은 희은의 긴 손가락에서 허리 뒤로 감춘 청년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기름과 물기가 뒤섞여 번들거리는 청년의 손 위로 오래 잊고 있었던 손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벌써 9년의 시간이 흘렀다. 재우가 창은을 만난 것은 무작정 한국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부평역 근처의 경양식집에서 만난 녀석은 그날도 왼손을 습관처럼 감추곤 했다. 초겨울의 노을은 2층 창가의 테이블 위로 짙게 드리웠고, 침묵은 오래 이어졌다. 녀석이 때묻은 왼손을 감추고 있는 동안 재우는 마음을 감춰야 했다. 돈까스가 그들 앞에 놓였고, 창은은 감추었던 왼손을 꺼내놓아야만 했다. 손톱에 낀 까만 기름때가 그날따라 유난히 재우의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남의 손은 왜 그렇게 보냐?”

무임금에 가까운 노조단체의 상근자로 있는 녀석은 새벽마다 아파트 단지의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왼손을 하도 잘 써서.”

“확실한 좌익이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서 슬그머니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탁자 아래로 왼손을 감추었지만 녀석에게는 바꿀 수 있는 다른 팔이 없었다. 녀석이 다시 손을 꺼내놓았지만 재우는 마음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녀석은 한손으로, 서투르지 않았지만 더디게 돈까스를 썰었다.

“끝내 좌익일 수밖에 없겠네.”

재우는 돈까스의 한쪽을 포크로 눌러주며 녀석의 칼질하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뭘 자꾸 봐, 임마.”

“보면 어때서 그러냐.”

“쪽팔리니까 그렇지 임마.”

작별인사를 위해 만났지만 서로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었다.

“베트남은 덥다며?”

“그렇다대.”

재우는 남의 얘기처럼 대답했다.

“강재우, 좋겠다.”

“뭐가?”

“베트남 여자들 이쁘다니까. 거기서 장가나 가라.”

헤어질 때까지 그들의 테이블 위로는 그런 싱거운 농담만 오갔다. 녀석은 재우를 밀치고 기어코 계산을 했고, 어깨를 부딪히며 내려오는 좁은 계단에서 재우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을이 사라진 역 광장에는 어스름이 드리우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잘 살아라.”

짧은 한마디와 함께 창은이 내민 것은 보자기로 싼 사각 플라스틱 통이었다.

“………”

얼떨결에 보자기를 받아들고 서 있는 재우에게 녀석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누라가,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고추장이 제일 그립다는 소릴 어디서 들었나봐. 싫다는데도 하도 떠맡겨서 들고 왔다. 쪽팔리게 어디 들고 다니겠냐. 가다가 버려버리든지 니가 알아서 해라.”

녀석은 말을 채 마치지도 않고 돌아섰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우는 오래도록 광장에 서 있었다. 소매를 주머니에 찔러넣은 오른팔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초겨울 저녁의 싸늘한 바람이 재우의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아저씨, 이게 얼마라고 쓴 거야?”

젖은 영수증을 들여다보며 희은이 물었지만 재우는 9년 전의 부평역 광장에서 발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희은이 다시 빽 소리를 지른 다음에야 재우는 시선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부평역을 엄습하던 한기를 털어내듯 어깨를 추스르는 그의 시야에 기름때 묻은 청년의 손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아저씨! 이게 7자야 9자야, 아니면 2자야? 알아먹을 수가 없네.”

투덜거리고 있는 희은의 손에 들린 영수증을 받아든 것은 레지투이였다. 레지투이는 배달 온 청년에게 영수증에 쓰인 액수가 맞는지를 물었고, 청년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레지투이의 심상찮은 목소리에 재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벌써 2층으로 난 회전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왜 그래?”

“이 영수증 보고 철가방이랑 뭐라고 하더니, 저 음식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홱 변하네.”

식탁 위에는 랩으로 싼 보쌈고기 쟁반이 놓여 있었다. 희은이 건넨 영수증에 적힌 금액은 37만동,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삼만천원 정도 되는 액수였다. 25만동 정도인 줄 알았는데 약간 비쌌다. 배달 온 청년에게 확인해보니 보쌈백반이 아니라 안주용 보쌈 큰 것이었다. 주문과정의 착오였다. 희은이 계산을 치르는 동안 재우는 2층으로 올라갔다. 레지투이는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밥 안 먹고 뭐해요?”

“자네들이나 먹게.”

“선생님 먹기 좋으라고 일부러 고른 메늅니다. 보쌈은 베트남 돼지고기 쌈하고 거의 비슷해요.”

“난 먹지 않을 거야.”

레지투이는 화가 나 있었다.

“뭐가 문젠데요?”

“………”

“뭐가 문젠지 말을 해보세요?”

레지투이는 재우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묻나. 자네들 지금 내 앞에서 돈 자랑하는 건가?”

“………”

“아니면 자네들도 서울에서 온 그 변호사들처럼 해보겠다 이건가. 자네가 하노이에 와 있는 변호사들에게 분개했던 이유는 도대체 뭔가?”

결국 모두 저녁을 굶고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작업을 마친 열한시까지 셋은 싸우듯이 일을 했다. 레지투이는 굳은 얼굴로 오토바이를 타고 비가 내리는 골목길로 사라졌고, 재우와 희은은 냉장고에 남은 맥주를 몽땅 비웠다.

“아저씨, 그 아저씨 정말 웃기지 않아? 자기가 뭔데, 자기가 뭐냔 말야.”

취한데다 장난기까지 발동한 희은은 혀를 공굴렸다. 재우는 333 빈 캔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확인하고는 가운데를 쭈그려서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바닥에 남은 맥주들로 희은의 잔이 거의 찼다.

“끝이다. 이거 마시고 가서 자라.”

희은의 앞으로 잔을 밀어주고, 재우는 랑흥으로 가득 채운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어, 아저씨 건 색깔이 다르네.”

희은은 쨍하고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바닥까지 비웠다.

“끝. 이제 없어.”

“무스은 소리야. 더 마시어야지.”

희은이 재우가 마시던 랑흥 병을 잡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너 이 베트남 소주가 몇돈 줄 알아?”

“45도래매.”

희은은 꼴깍 한모금을 삼키며 인상을 썼다.

“그거 마시려면 안주 먹어야 돼.”

재우는 눈을 흘기며 옆에 놓인 한치를 내밀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왜 안 먹는데? 나도 안 먹는다 이거야.”

희은은 한치를 방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재우가 짐짓 화난 눈빛을 하며 빤히 바라보자 희은은 고개를 들고 재우를 마주보며 헤헤 웃었다.

“그 아저씨, 집에 가서 밥먹었을까? 먹었겠지, 그치?”

“………”

“우린 아무것도, 끝까지, 안 먹었어. 단식투쟁, 우리도 한다 이거야.”

“이건 뭔데?”

재우는 즐비한 맥주캔을 가리켰다.

“이건…… 마신 거지, 먹은 건 아니지. 먹을 식. 우린 한치 다리 하나도 안 뜯었다 이거야. 근데 이 아저씨가, 만약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면?”

“먹었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의리불량, 용서할 수 없지. 내일 아침에 내가 꼭 물어볼 거야.”

 

초인종이 울린 것은 일곱시 십분이었다. 레지투이는 평소보다도 20분이나 일찍 왔다. 허겁지겁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나오는 재우의 눈에 레지투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날 같으면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차를 음미하고 있어야 할 그였다.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고 있는데 노크소리에 이어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고개만 살그머니 디밀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임자는 레지투이였다. 해맑게 깜박이는 그의 눈동자는 오십대 사내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재우는 장난꾸러기 소년을 마주하고 있다는 강렬한 착각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려와. 내려와서 아침 먹어.”

그는 얼굴보다 더 장난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

재우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까딱까딱하는 그의 손짓을 따라 방문을 나섰다. 레지투이는 같은 방법으로 건넌방에 있는 희은을 불러냈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나오는 희은의 얼굴에 번지고 있는 장난꾸러기 소녀 같은 웃음을 보면서, 재우는 비로소 자신의 얼굴에 이미 레지투이의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옮겨와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탁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별미로 즐기는 쌈 돼지고기가 차려져 있었다. 보쌈과 양념이 조금 다를 뿐인 요리를 내려다보며 희은이 픽 웃었다.

“병 주고 약 주나, 어제는 쫄딱 굶게 만들더니.”

재우도 픽 웃고 말았다. 희은과 재우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며 먹으라고 권하는 레지투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소년 같은 장난기가 묻어났다. 레지투이는 공기에 밥을 덜어주며 숟가락 뒤축으로 밥을 꾹꾹 누르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 밥벌레!”

희은은 레지투이를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밥그릇 밑 빠질라.”

재우가 베트남어로 옮겼고, 레지투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맞받았다.

“정량인데, 내가 뭘.”

셋은 함께 깔깔거렸다.

레지투이는 베트남사람들이 호의를 표시하는 방식대로 연신 돼지고기를 집어서 둘의 접시 위로 옮겨놓았다. 희은이 배를 두드려 보이며 손을 내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접시 위의 음식을 다 먹어 없애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희은이 레지투이에게 음식을 마주 권했다.

“신 머이(드세요).”

“신 머이.”

레지투이가 맞지 않는 희은의 성조를 흉내내며 아예 쌈을 싸서 차례로 손에 쥐여주었다. 재우와 희은은 레지투이가 ‘밥벌레’ 흉내를 내며 누질러 퍼준 공기밥까지 다 비우고 나서야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배가 터지겠네.”

희은이 빵빵해진 재우의 배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레지투이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값이 모두 얼마인지 알아?”

“………”

“3만동이야.”

“한국 돈으로 2천4백원 정도 되네. 엄청 싸다.”

희은은 속없는 녀석처럼 헤헤거렸다.

“이거면 우리 세 사람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 왜 낭비를 하나. 앞으로 고기 먹고 싶으면 얘기하라고.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사가지고 올 테니까.”

“아이고, 이젠 한국식당에 밥 시켜먹기도 다 틀렸네.”

비명은 희은이 질렀지만 정작 더 암담해진 사람은 재우였다. 입맛이라는 게 참 묘했다. 베트남에서 5년이 지났을 때는 베트남 음식에 완전히 동화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5년까지는 점차 익숙해지던 음식이 그 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물렸다. 이제는 사흘에 한번은 고추장과 김치 맛을 봐야 생체리듬이 유지되었다.

“안 물어봐?”

뒤늦게 일어난 가정부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재우가 희은에게 물었다.

“뭘요?”

“어젯밤엔 난리를 치더니, 오늘 아침에 오면 확인한다고.”

재우는 입을 삐쭉 내밀며 희은과 레지투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 그거.”

희은은 곧장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차를 마시고 있는 레지투이를 째려보았다.

“아저씨, 솔직하게 대답해봐요. 어제 저녁에 집에 가서 밥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레지투이는 입꼬리에 웃음을 길게 매단 채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먹었죠? 배고팠죠, 그래서 먹었죠, 그렇죠?”

희은이 따발총처럼 쏟아부었다. 재우가 옮기지 않았지만 레지투이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만으로 이미 알아차렸다.

“우린 한끼 먹고 사흘 견디는 데 선수야.”

“어떻게요? 와, 그 방법 알면 다이어트 하는 데 죽이겠다.”

희은은 레지투이의 턱밑에 얼굴을 들이대고 쪼아댔다.

“………”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있지.”

그렇게 대답한 레지투이는 희은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먹었으면 또 행군을 해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레지투이의 등을 향해 희은이 펼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이고, 형장에 끌려 올라가는 기분이네.”

희은은 첫 계단에 발을 올려놓으며 벌써 길게 하품부터 했다.

몇 문장 나가지 않아서 졸기 시작한 희은은 제 뺨을 때려가며 견뎌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스르르 감기는 눈을 어렵게 몇번 치켜뜨다가, 끝내는 고개를 풀썩 떨구고 제풀에 화들짝 놀라곤 했다. 힘들기는 재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밤의 과음 위로 그동안 밀린 피로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그는 가정부를 시켜 코코넛을 사오게 해서 몇통을 마셔대며 겨우겨우 갈증과 졸음을 견뎠다. 점심 먹자는 소리와 함께 희은은 침대에 풀썩 쓰러졌고, 재우도 방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레지투이와 가정부가 번갈아 밥을 먹고 쉬라고 권했지만 재우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내젓고 말았다.

“우리 삼십분만 잡시다.”

실눈으로 레지투이를 바라보며 재우는 중얼거렸다. 희은은 이미 기척도 없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온 가방에 꽂힌 신문을 꺼내는 레지투이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졌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일 시작하고 첫 낮잠이었다. 레지투이는 재우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신문에서 그가 준비중인 다큐멘터리의 콘티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전화의 주인은 하노이의 상환이었다. 녀석은 잠에서 덜 빠져나온 재우의 목소리를 듣고 투덜거리기부터 했다.

“우이 씨, 남은 공부도 못하게 해놓고 형은 씨에스타야.”

“거기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심포지엄 하다가 밥 먹으러 나왔지.”

“통역은 하고 있는 거야?”

“끝내주게 하고 있지. 내가 오늘 회의장에서 무슨 통역을 했는 줄 알아? 하루에 하나씩 사흘로 나뉘어 있는 한국의 주제발표를 오늘로 모두 몰아주세요, 여기 있는 이 통역자의 통역료가 너무 비싸서 사흘 동안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하루에 끝을 내야 합니다. 그 말을 내 입으로 통역을 했어. 형, 재밌었겠지?”

재우는 잠이 확 깼다.

“내가 수강하고 있는 우리 학교 교수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그런 통역을 했다니까.”

“미안하게 됐다. 그 사람들 지금 옆에 있니?”

“응, 형이 미안할 건 없어. 어쨌든 내일까지 통역 안하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원한 것이야.”

“김문태 좀 바꿔라.”

“그러잖아도 연결해달라고 해서 전화한 거야.”

잠깐의 사이도 없이 바로 문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야 임마, 니들 뭐하는 놈들이야?”

“강재우, 흥분하지 마라. 너답지 않게.”

“니들이 뭔데 객지에서 고생하는 애들 가지고 놀아?”

“할말은 나도 많아.”

문태는 목소리를 착 가라앉혀서 재우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고 했다.

“………”

“어쨌든 여기 일은 만나서 얘기하자. 모레 사이공으로 가는데 거기서는 니가 직접 좀 나와라.”

“나 그때까지 바빠.”

“뭐 하는데?”

“아르바이트 한다.”

“잠깐만.”

문태는 아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야 임마, 니가 나오면 모든 게 간단하잖아. 돈걱정 하지 말고.”

“돈? 김문태, 많이 컸네. 내가 서울에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 시다바리 해주려고 여기 와 있는 줄 알아. 그런 새끼들 꼴 보기 싫어서 여기 왔어, 자식아.”

“너 왜 이렇게 꼬였냐? 우리 지금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수화기 저편에서 한국말이 시끄럽게 섞여 들었다. 전화를 끊으면서 재우는 감정을 고스란히 노출한 자신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늦었다. 쌓인 피로와 덜 깬 잠 탓이었다. 자다 말고 전화를 받으면 도무지 친절해지지가 않았다. 번번이 후회를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런 버릇을 누구보다 재우 자신이 잘 알았다. 깨어 있는 동안에 문태가 전화를 했다면 지금처럼 거칠게 상대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눈을 반쯤은 뜨고 반쯤은 감은 상태로 누웠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서울이었다. 아직 한밤중인 희은을 깨웠다. 짜증을 부리며 수화기를 집어들던 그녀의 태도가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는 완전히 바뀌었다. 희은은 한숨을 뱉어내며 욕실로 달려갔다.

“월요일에 우리 두목 들어온대.”

얼굴에 물을 끼얹고 나온 희은은 원고지를 집어들고 설쳐대기 시작했다. 월요일까지는 앞으로 사흘이 남아 있었다.

“23일, 원래 그날까지 끝내야 여기 문화통신청 허가일정에 맞출 수 있다고 한 거 아냐.”

“그래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영화판이거든요. 이번에도 최소한 며칠은 늘어질 줄 알았는데……”

“중부에 우기 닥치면 아무것도 못해. 그리고 23일 뒤에는 나부터 안되고.”

재우는 최사장의 일을 더이상 미뤄둘 수가 없는 처지였다. 모두가 그를 피하고 외면할 때 예전과 다름없이 대하며 일감을 준 최사장이었다.

베트남이 개방경제 노선을 채택하면서 갑자기 외국기업이 몰려들 무렵, 재우의 손을 거치지 않은 한국기업은 거의 없었다. 재우의 베트남어 실력만큼은 그를 외면하는 사람들조차 인정하는 최고 수준이었다. 그가 호치민대학에 남겨놓은 베트남어 성적은 아직 깨어지지 않는 기록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재우가 단순한 번역과 통역을 넘어서 탁월한 코디네이터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거의 유일하게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사람이었다. 사회주의의 이념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그것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한국사람은 그 이외에 없었다. 선례도 체계도 없던 개방 초기에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기업들이 줄을 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들어오는 돈, 1달러당 1만2천동으로 환전되는 베트남화폐가 한 가방씩이었다. 그 무렵 사이공에 유학온 후배들 중에서 재우의 신세를 지지 않은 녀석들은 별로 없었다. 상환도 그중의 하나였다. 4층 주택을 통째로 세내서 살던 재우의 집은 처지가 곤란한 한국유학생들의 무료기숙사나 다름없었다.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디는 후배들은 그의 집에 머물면서 정착할 곳을 찾았고, 말문이 조금씩 트인 친구들은 재우를 통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누가 거주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많은 후배들이 집을 거쳐갔고, 상환은 2년을 그의 집에서 지냈다.

일과 후배들에 둘러싸여 외로움이란 걸 모르고 지내던 시절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을 거쳐간 한국기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그는 견디기 어려운 장면을 자주 목격해야만 했다. 베트남에서 조금 자리를 잡기 무섭게 우쭐거리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흔해서 일일이 보아줄 수조차 없었다. 그를 결정적으로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노동자들을 대하는 한국기업의 태도였다. 70년대 한국의 주력산업이 베트남으로 이전해오면서 노동자를 다루는 습성도 70년대 한국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의 주선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공장에 들렀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신발로 때리는 한국관리자를 목격한 날, 그는 밤을 새워 통음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진출하는 데 첨병노릇을 한 자신을 주먹질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가 쓴 글이 한국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그가 멀리하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그를 멀리했다. 쓰는 글의 횟수가 늘면서 그는 교민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을 넘어 저주의 대상으로 바뀌어갔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고립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기업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가까이 있던 후배들까지 그의 곁에서 떠나갔다. 그는 벌이가 끊겼고, 베트남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처럼 완벽한 외톨이가 되었다. 한국식당에 가면 사람들은 그의 자리 가까이에 오려고 하지 앉았고, 어떤 경우에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반갑게 손을 내밀고 합석을 청하는 사람은 최사장이 유일했다.

“힘들지?”

재우에 대한 교민들의 응징이 절정에 달할 무렵에도 최사장은 그전과 똑같은 얼굴로, 아니 더 반가운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최사장의 일은 그후로 재우에게 일 이상의 것이었다. 24일부터 중부의 꽝아이성에 함께 가기로 다짐을 하고, 하던 일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빠져나온 재우였다. 그는 꽝아이성에서 발주하는 도로건설 사업의 수주 여부가 최사장에게 중대고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사장이 부탁하지 않아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 마땅했다.

희은은 입이 쀼루퉁해졌다. 무엇보다 자기를 먼저 걱정해줄 만큼 그동안 재우와 꽤 정이 들었다고 생각한 희은이었다.

“실망이네요, 아저씨.”

“원래 일 시작할 때 다 했던 얘기야. 24일부터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중부에 가 있어야 해.”

“아저씨는 인생을 원칙대로 살아요? 아직까지 결혼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글썽이는 희은의 눈망울이 재우의 입을 막았다. 이럴 때 보면 녀석은 감정이 참 풍부했다. 희은의 감정이 누그러들기를 기다려서 재우는 변명삼아 레지투이를 끌어들였다.

“나야 그렇다 치고, 레지투이는 또 어떤데?”

레지투이는 호치민 루트에서 헌팅을 하다 말고 내려와서 이 작업에 참여했다. 스탭들 모두가 손을 놓고 대기중이었다. 재우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이제 씬 89번이 활자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속도로 143번 씬까지 마치려면 사흘이 아니라 그 두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암담한 표정으로 남은 씨나리오를 반복해서 주르륵 넘기며 두께를 가늠하고 있는 희은의 어깨를 레지투이가 툭툭 쳤다.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눈을 찡긋하며 농담처럼 던진 레지투이의 그 말은 전쟁 당시 해방전선의 슬로건이었다. 호치민 루트를 통과해야 했던 전사들에게는 뼛속까지 스며서 지워지지 않는 자기암시가 되어버린 슬로건이었다. 베트남 현대사를 전공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재우는 호치민 루트를 통과한 이들이 이 슬로건을 입에 담을 때 성조에 실리는 특별한 떨림을 알고 있었다. 레지투이가 아무리 농담으로 위장했다고 해도, 그 순간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는 성조와 함께 흔들리던 눈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재우는 레지투이가 호치민 루트를 통과한 전사라고 확신했다.

“이제 무조건 막 나가는 거야, 아저씨. 씨나리오대로 영화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영화 만들고 나면 어차피 씨나리오는 쓰레기통으로 가는 거예요. 알죠?”

레지투이가 한 말의 내력을 희은이 알 리 없었다. 막 나가자고 해서 막 나갈 레지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정까지 강행군을 한 끝에 하루 작업분량으로는 신기록을 세웠다. 낮잠 잔 것을 생각하면 다른 날보다 작업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진도를 많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해온 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뢰가 줄어든 대신에 앞에서 나왔던 동일한 단어와 유사한 문장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흘 안에 작업을 끝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막판에 와서야 붙기 시작한 가속도가 얼마나 더 붙어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처음으로 희은은 맥주 한 캔 마시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호흡이 잘 맞아 들어가면서 작업이 탄력을 받아갔다. 셋의 생각이 거의 동시에 일치해서 때로 하이파이브까지 터져나왔다. 오후 들어서 희은은 한 씬이 넘어갈 때마다 이대로 나가면 모레까지 확실히 끝낼 수 있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쾌속주행을 하던 작업이 복병을 만난 것은 해질녘이었다. 복병의 정체는 씨나리오 속에 묻혀 있던 지뢰가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날아든 유탄이었다.

레지투이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은 그가 몸담고 있는 해방영화사였다. 소년 같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농담으로 인사를 주고받던 레지투이의 얼굴이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점점 굳어갔다.

“꽝형, 어떻게 그들이 이 다큐에 대해 그런 요구를 할 수가 있어요?”

레지투이가 준비중이던 다큐멘터리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증선산맥이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는 곳이에요?”

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로 사용된 증선산맥은 남북을 잇는 베트남의 등뼈였다.

“내가 묻는 건 형의 생각이에요. 우리가 증선을 그렇게 다뤄도 된다고 생각해요, 꽝형?”

미소가 사라진 레지투이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것은 짙은 슬픔이었다.

“형, 난 그렇게는 못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차라리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요. 미안해, 꽝형.”

전화를 끊는 그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재우와 희은의 시선을 피하며 그는 말없이 일어섰다. 화장실에 다녀온 레지투이의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미안해. 잠깐만 쉬었다가 하자고.”

레지투이는 담배를 뽑아 물며 재우에게도 한개비를 내밀었다. 레지투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재우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잊고 있었다.

“꽝형이 누구예요?”

재우는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고 물었다.

“사장. 아 참, 담배 안 피우지.”

재우의 입에 물려 있는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다대던 레지투이가 손을 거둬들였다.

“꽝사장도 ‘반협정 인민’이었어요?”

재우의 질문에 레지투이가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다.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부로 지원군을 내려보내던 북베트남을 비난하는 남베트남 정부의 유일한 근거가 제네바 협정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등에 업고 협정의 핵심사항인 총선거에 의한 남북단일정부 구성을 거부한 남베트남 정부가 협정 위반을 거론할 자격이 있다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모순된 논리를 빗대서, 사람들은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내려와 남부의 게릴라전에 참여하고 있던 전사들을 가리켜 ‘반협정 인민’이라고 불렀다.

“꽝형은 반협정 인민이 아니었어. 호치민 루트에 있긴 했지만.”

“꽝사장은 남쪽 해방전선 출신이었나보죠.”

레지투이는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눈빛으로 물었지만 재우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아저씨만 반협정 인민이었군요.”

전쟁 당시에는 일상적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베트남의 젊은 세대들도 잘 모르는 ‘반협정 인민’이란 용어가 재우의 입에서 다시 나오자 레지투이는 빙긋이 웃었다. 계속되는 둘의 얘기에 희은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끼여들었다.

“무슨 일이래? 뭐가 잘못된 거야? 전화한 게 누구래?”

희은이 한꺼번에 몇가지를 물었다.

“해방영화사 사장.”

“사장 이름이 꽝이야? 근데 사장한테 형이라고 불러?”

“형이라고 그런지 어떻게 알았어, 똑똑하네.”

“우리가 지금까지 번역한 단어 중에 형이 백번은 더 있었우.”

희은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호치민 루트 다큐멘터리에 문제가 생겼나보죠?”

재우의 물음에 레지투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로 너무 시간을 많이 뺏겨서 그런가요?”

“아니, 아니야.”

레지투이는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럼요?”

“기획과 제작은 우리가 하지만 제작비는 일본의 NHJ TV가 대기로 한 것이거든. 그들이 내용을 또 고쳐달라고 요구해왔다네. 이미 두 차례나 그들이 요구한 방향으로 고쳤고, 좋다고 서로 협정서에 서명까지 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말야.”

레지투이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NHJ측은 호치민 루트 주변의 소수민족 마을을 비롯해서 일본인이 갈 만한 관광상품 소개를 대폭 늘려달라고 주문한 모양이었다.

“너희 자본주의에서 좋아하는 말이 있지. 고객은 왕이라고.”

레지투이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난 그렇게는 안해. 그렇게 증선을 찍을 수는 없어. 병사들의 3분의 2가 증선에서 죽었지.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몇대의 줄담배를 피우고 나서 레지투이는 모니터에 다가앉았다.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레지투이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일이 될 리 없었다. 도저히 안되겠다며 레지투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아무래도 회사에 좀 들어가봐야겠어.”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희은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일본을 원망했다.

“으휴, 하여튼 일본놈들은 도움이 안돼요.”

갑자기 둘은 할 일이 없어졌다. 모니터 우측하단의 시계는 아직 오후 여섯시에도 못 미쳐 있었다. 레지투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다음 둘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봤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희은이었다.

“하는 데까지 우리 둘이서 해보죠.”

“난 문학도가 아니라고 했어. 이건 계약 위반이야.”

“직역이라도 해놓자구요. 안 해놓은 것보다는 나을 거 아녜요.”

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레지투이가 만들어왔던 것과는 격이 다른 문장을 계속 나열해나가자니 재우 스스로 맥이 빠져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두 시간 가량 해놓은 일을 몽땅 지워버리고 일어서자 희은이 난리를 쳤다.

“미쳤어, 미쳤어. 한 문장이 아쉬운 이때에.”

희은은 삭제한 블록을 찾아서 되살려놓고는 재우를 흘겨봤다.

“어차피 레지투이 오면 다시 해야 할 일인데, 차라리 좀 쉬자.”

재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갑을 찾아 주머니에 챙겨넣고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쉬자면서 어딜 가려고요?”

“친구가 와 있다고 했잖아.”

“그 변호사님들.”

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나간다고 그 사람들에게 이미 얘기해놓고서.”

“낮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시간이 생겼잖아.”

“나가려면 같이 나가야죠.”

“누가 보면 마누라라도 되는 줄 알겠다.”

문을 가로막고 선 희은의 양팔을 꽉 잡아서 옆으로 밀어놓고 재우는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 구석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돌리려는데 손의 느낌이 이상했다. 뒷바퀴의 바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바람만 빠진 것인지 펑크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름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였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라고 멀쩡한 건 하나도 없네.”

현관 앞에 서 있던 희은의 목소리는 참깨라도 씹은 듯했다.

“사람은 멀쩡한 게 있고.”

재우는 오토바이를 원래 자리에 세워놓고 대문을 나섰다. 비포장의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자 대기하고 있던 오토바이 사내가 손을 치켜들었다. 재우는 호텔 이름을 알려주고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2차선 도로를 거쳐 하이바쭝 거리에 들어섰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내면서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떤선녓공항 쪽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 연인들의 오토바이가 싱그러운 물결을 이루었다. 재우는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시 이십분, 거리가 한창 생기를 얻을 시간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혼자 오토바이를 몰고 스쳐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늘씬한 뒷모습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등과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낸 탱크톱 차림의 멋쟁이 아가씨들이 거리를 누비는 것도 이 시간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거리의 주인은 핸들에 감아쥔 아오자이 자락을 살짝살짝 날리며 둘 셋씩 짝을 지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여학생들이다. 자전거 사이에 드문드문 섞인 오토바이의 여학생이 친구의 자전거와 나란히 흘러가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오토바이의 여학생이 뻗은 한쪽 팔은 자전거를 탄 여학생의 어깨에 얹혀 있고, 자전거는 무동력으로 흘러간다. 재우의 시선은 예의 오토바이를 탄 여학생의 팔에 머물렀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보폭을 맞춰 흘러가는 풍경을 구성하는 절묘함은 둘을 연결하는 팔의 곡선에 있었다. 누가 누구를 밀고 간다고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슬쩍 걸친 팔이 하얀 아오자이의 물결을 밀고 갔다.

“이 밤중에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호텔 앞 노천까페에 마주앉은 문태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넘실대는 도로를 바라보며 물었고, 재우는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두 개나 든 맥주잔을 비웠다. 문태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재우의 빈 잔을 채웠다.

“하노이의 그 친구 통역 잘하더라.”

“통역료 없어서 회의일정까지 바꾸신 분들이 계집애들 있는 술집에는 왜 가냐?”

“그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 교민사회가 그렇게 넓은 줄 알아?”

문태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냐. 일행 중에 박변호사라고, 그 사람 친구가 하노이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나봐. 뒤늦게 연락이 닿아서 한턱 낸 거야. 미리 연락을 했으면 자기가 다 알아서 했을 거라고 하면서 어찌나 설쳐대는지, 난 아주 얼굴도 못 들었다.”

“친구라고 있는 게 손님들 단란주점에도 한번 못 모셔서 미안하다.”

이 친구가 언제 다시 베트남에 오겠나, 어떻게든 덜 섭섭하게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재우의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말은 자꾸만 삐딱하게 나갔다.

“너한테 아무도 그런 거 바라지 않아. 너 어떤 놈인지도 다 알고. 사이공에 있는 이틀 동안만 같이 다녀주라.”

“골프 치는 데 내가 같이 가서 뭐하냐. 난 골프를 손으로 치는지 발로 치는지도 모르는데.”

문태는 벽을 앞에 둔 눈빛으로 재우를 바라보고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바닥에 빈 병이 즐비하게 늘어갔지만 재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을 비우고 있는 두 사람을 옆자리의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복권과 안주 따위를 팔러 온 행상들도 분위기에 밀려 그들의 자리에서 얼른 발길을 돌렸다. 말이 끊긴 둘 사이를 술잔만이 부지런히 오갔다. 둘 다 잔뜩 취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지난번 일로 아직도 나한테 감정 남았냐?”

휘청거리는 상체를 곧추세우며 문태가 물었다.

“창은이가 하지 않는 보상신청을 우리가 왜 해, 임마. 그 자유주의자 새끼도 받지 않는 보상을 우리가 왜 받아?”

함께 공장으로 갔던 셋 중에서 끝까지 공장에 남은 것은 창은이었다.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제일 먼저 별을 단 문태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청년단체로 자리를 옮겼다. 신분이 노출되어 해고당한 재우가 노동단체로 옮기고 문태가 별 하나를 더 달 동안에도 창은은 공장에 붙어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게 몰아치던 해의 여름에도 녀석은 그 흔한 노조 간부자리 하나 맡지 않았다. 활동하는 공간이 달랐지만 그들은 같은 비합법조직에 속해 있었고, 서로의 활동상을 보고받고 있었다. 문태가 청년운동에서 이름을 얻고 재우가 노동단체에서 역량을 인정받아가면서 비합법조직 속에서 지도선으로 지위를 높여갔지만 창은은 처음 함께 공장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밑바닥이었다.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그들의 비합법조직이 내부 논쟁에 휩싸였을 때 창은은 재우와 문태의 반대입장에 섰다. 대중주의 노선에 경도된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 재우가 찾아갔을 때 녀석이 한 말은 단 하나였다.

“이게 원칙에 맞는 일이냐. 우리 조직의 규율이 이런 임의적인 접촉을 허용하고 있어?”

계선을 벗어난 조직원간의 접촉은 당연히 금기사항이었다.

“친구로서 온 거야.”

재우가 발끈했을 때도 녀석은 단호했다.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얘기만 해.”

재우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재우와 문태가 지지했던 입장이 조직의 다수가 되었고 자유주의로 비난을 받은 창은은 조직을 떠났다. 갈라서기 전에 이미 누가 더 혁명적인가를 두고 양측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상처를 안겨주었다. 창은의 팔이 철망을 감는 롤러에 말려들어갔던 것도 논쟁으로 밤을 세우던 그 무렵이었다.

“자유주의자도 싸우고 있는 이 정권에다 보상을 신청해? 너나 실컷 하지 임마, 베트남까지 메일은 왜 보내.”

재우는 취한 눈길로 문태를 바라봤다. 문태의 얼굴 위로 명동성당에서 보았던 창은의 얼굴이 겹쳐졌다. 지난해 재우가 서울에서 만난 창은의 직책은 ‘이주노동자의 집’ 소장이었다. 수소문 끝에 안산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녀석은 명동성당으로 농성하러 가고 없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돋우는 명동 거리를 거슬러 도착한 성당 입구, 경사진 진입로에는 허름한 천막 세 개가 찬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두번째 천막을 들췄을 때 녀석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외국인 노동자들과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입을 꽉 다물고 재우를 마주 바라보던 문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메일에서 분명히 썼잖아, 임마. 보상신청은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고 명예회복 신청만 같이 한다고, 개별적으로 하면 번거로우니까 우리 사무실에서 한꺼번에 처리해주겠다고. 그게 뭐가 나빠? 명예회복, 그것도 문제야?”

“어떤 개새끼가 우리의 명예를 심사할 수 있는데? 불명예스러운 건 지난날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야……”

 

재우에게 최악의 한나절이 지나갔다. 지난밤에 마신 술은 뒷머리를 부숴버리고 싶도록 쪼아댔고, 찜통 더위는 숨을 컥컥 막히게 만들었다. 그동안 용케도 견뎌내던 냉방기가 마침내 멈춰섰고, 집안에 있는 선풍기 두 대를 모두 가져다가 틀어댔지만 뿜어져나오는 것은 후끈거리는 바람뿐이었다. 어제 저녁에 해놓았던 직역 원고 덕분에 비몽사몽간에 오전을 견딜 수 있었다. 원고를 희은이 살려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점심시간과 함께 재우는 찬물을 채운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폭음 다음날 그가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수면 상태로 누운 재우에게 레지투이가 수화기를 들고 왔다. 김언니였다.

“재우씨, 나 오늘 일 못하겠어.”

“무슨 일을요?”

“비 오는 게 내 잘못이야? 비 와서 골프 못 치는 걸 나보고 뭐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 내가 비 오라고 했어?”

재우는 비로소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김언니에게 전화했던 일이 떠올랐다. 김언니는 지난해까지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가이드를 하다가 지금은 친구가 하는 기념품 가게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재우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미혼이어서 누구에게나 김언니로 불렸고, 마음 씀씀이가 선하고 서글서글해서 관광가이드 부탁이 들어오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였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가이드들은 눈밖에 날까봐 재우의 손님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김언니 아니면 마땅히 부탁할 곳도 없었다. 이틀치 가이드료 100불은 자신이 지불할 테니 잘 좀 대해주라, 그 친구들이 돈 줘도 절대 받으면 안된다, 한때 가장 친했던 놈이다, 어쩌구 하며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횡설수설했던 기억이 토막으로 떠올랐다.

“호텔에서 출발할 때부터 분명히 얘기했어. 여기 비라는 게 금방 그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내릴 수도 있다. 가서 비가 그치면 치는 거고 안 그치면 못 치는 거다……”

재우는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봤다.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하는데 못 가서 그래. 나한테 섭섭해서 그러는 걸 거야. 누님이 좀 참아줘.”

“무슨 사람들이 이래? 지금만 그러는 거 아냐. 승합차 타고 오는 동안에도 내가 이것저것 설명하면, 한 아저씨는 어떻게 하는지 알아? 맨 뒷자리 가운데에 다리 길게 꼬고 앉아서 영어로 된 가이드북 들척들척하면서, 그건 여기 그렇게 안 씌어 있는데, 뭘 잘 모르는구만. 응, 그 말은 맞네, 이러는 거야. 그렇게 지들이 잘났어? 잘났으면 사람한테 이렇게 모욕을 줘도 되는 거야?”

대부분의 가이드들이 그렇듯 김언니도 베트남어를 쓰거나 읽진 못했다. 하지만 일상회화는 막힘없이 구사했고, 여행사 가이드 경력만 3년이 넘는 베떼랑이다. 여간해서는 감당을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누님, 김문태 좀 바꿔줘봐요.”

“김문태…… 재우씨 친구라는 그 젊은 사람? 여기 없어.”

“어딨어?”

“그 사람은 골프 못 친다던데, 그래서 구치터널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신까페에 내려주고 왔어.”

재우는 갑자기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구치는 사이공 시내에서 한시간 반 거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해방전선은 그곳을 중심으로 총연장 250km의 땅굴을 파고, 사이공 시내를 드나들며 미국과 싸웠다. 3층으로 거미줄처럼 뚫린 구치의 터널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세계 최강의 미국을 베트남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원 달러’를 외치며 달려드는 관광지의 아이들과 10불의 팁에 손목을 내맡기는 술집 아가씨들을 보고 베트남을 알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구치에 가면, 가서 단돈 1원도 받지 않고 오로지 호미와 망태기만으로 24년에 걸쳐 파놓은 250km의 땅굴을 보면 전혀 다른 베트남이 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된다. 김문태가 거기에 가 있다. 녀석이 골프를 치지 못한다는 것도 뜻밖이었다. 재우의 머릿속을 바람 한줄기가 뚫고 지나갔다. 갑자기 몸마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누님, 그 자식들 불쌍한 놈들이다, 생각하고 오늘 하루 끝까지 책임져줘요. 내가 이번 일 끝내놓고 세게 한턱 낼게. 알았죠?”

“………”

갑자기 활기를 되찾은 재우의 목소리에 김언니는 어리둥절한지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욕실에서 나오는 재우를 보고 희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인간의 얼굴로 돌아왔네.”

“오, 돌아온 우리의 안쩌이눙뚱!”

레지투이는 손가락으로 재우를 가리키며 엉망인 건달이라고 맞장구를 쳤고, 재우는 활짝 웃는 레지투이를 향해 손을 젓고 나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바므이남(35).”

‘바므이남’은 바람둥이를 가리키는 새로운 은어였다.

“컹 바므이남, 안쩌이눙뚱.”

바람둥이가 아니고 엉망인 건달이라고 우기는 레지투이를 보고 재우는 이제서야 그에게 어제의 일을 물어볼 여유가 생겼다.

“영화사에 간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꽝형이 그러대. 나라가 가난하고 영화사가 가난한데, 해야지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요?”

재우가 다시 묻자 레지투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약간 모자라는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나라가 가난하고 영화사가 가난한데 어떻게 해?”

둘은 같이 낄낄거렸다. 희은도 재우가 옮겨준 말을 듣고 뒤따라 깔깔거렸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밤 열두시가 훨씬 넘어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숨이 컥컥 막히는 찜통 속에서 120번 씬까지 무려 21씬을 해치웠다. 내일 하루 동안 남은 23씬을 끝내야 했다. 오늘처럼 하면 못할 것도 없다.

 

아침부터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오후 한시 이십오분, 열두시 삼십분 출발예정이던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 대기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재우는 빗방울에 얼룩진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많은 일을 해봤지만 이번처럼 보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것도 드물었다. 더욱이 창작물을 다루기는 처음이었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 세시가 넘어서 ‘끝’자를 찍는 순간 그는 막연한 보람과 함께 밀려드는 아득한 허탈감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지금 재우의 무릎 위에는 출력한 베트남어 씨나리오 한부와 레지투이가 읽으라고 준 얇은 시집 한권이 있다. 이륙선을 향해 동체가 방향을 바꾸자 사선으로 흩뿌리는 빗방울이 좁은 창문을 희뿌옇게 했다. 흐려진 창문 위로 희은과 레지투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공항 오는 길에 호텔에 들러 희은을 내려주었을 때 녀석은 이런 게 어딨냐며 그의 옆구리를 치다가 끝내 가슴에 풀썩 안겨왔다. 재우는 시집 갈피에서 그녀의 서울 전화번호가 적힌 호텔 명함을 슬그머니 꺼내본다. 꽝아이에 다녀오면 녀석은 이미 서울로 떠난 다음일 것이다.

비행기는 이륙 대기선에서 10분 넘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최사장은 초조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며 흐려진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탑승이 지연될 때부터 재우는 마음속으로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되기를 빌었는지 모른다. 관제탑이 재우의 마음을 읽었을까. 다낭행 소형 쌍발기는 동체를 탑승 지점으로 되돌렸고, 다낭공항에 폭우가 내리고 있어서 착륙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방송이 뒤따랐다.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편은 아침과 점심, 하루에 두 차례뿐이었다. 결항된다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승용차로 가면 내일 오전까지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빗길이라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재우는 공항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언제 결항 여부를 결정하겠다든가, 결항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책을 마련하겠다든가, 하는 안내방송은 늘 그래왔던 대로 없었다. 승객들은 역시 마냥 기다렸고, 항의하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최사장도 체념한 표정이었다. 재우는 레지투이가 준 시집을 펼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시집이라고 한 줄 알았는데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이름이 달랐다. 반레? 들은 적이 있는 시인이다. 시를 잘 모르는 재우였지만 몇편 읽지 않아서 그 시집이 아주 슬픈 정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항을 알리는 방송은 오후 세시가 지나서 나왔다. 재우는 최사장과 함께 그의 사무실로 갔다. 꽝아이의 여러 곳으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약속들을 모두 내일로 미뤘다. 내일 아침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최사장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도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희은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하자 녀석은 비명을 질렀다. 레지투이와 함께 보기로 하고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다시 해방영화사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부재중이었다. 재우는 희은을 만나기로 한 까페의 이름과 장소를 메모로 남기고 택시에 올랐다.

서울에서 온 감독과 함께 노천까페에서 기다리던 희은은 재우가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서 녀석은 감독을 재우에게 소개했다. 감독은 재우보다도 두 살 위였고, 직업이 주는 선입관과 달리 소박하고 겸손했다.

“반레 시인은 따로 오시나보죠?”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며 감독이 재우에게 물었다.

“누구요?”

“반레 시인요.”

“………”

재우는 감독에게 주던 눈길을 거두고 옆에 앉은 희은을 바라봤다.

“레지투이 그 아저씨,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대요. 시 쓸 때 필명이 반레래요.”

재우는 자주 그를 매혹시키던, 레지투이가 만들어낸 마술과 같은 언어들을 떠올렸다.

“모르셨어요?”

“네.”

재우는 말끝을 흐리며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펼쳐봤다.

“감독님 얘기 들으니까 그 아저씨 만만치 않더라. 열일곱살 때부터 전쟁 끝날 때까지 십년 동안이나 게릴라로 총 들고 싸웠대, 글쎄.”

“재작년 토오꾜오 영화제에서 그를 처음 만났어요. 거의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의 필름이 돌기 전까지는 초대받은 감독들 중 가장 눈에 띄지 않은 존재였지요. 그렇지만 그의 필름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어요.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흔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가지고 왔는데, 저건 진짜다, 입에서 그 말이 저절로 터져나왔어요. 당신, 전쟁 때 뭐했냐, 대담시간에 물어봤지요. 뭔가 다른 인간이다 싶었는데, 대답이 참 싱거웠어요. 당시 베트남의 청년세대들과 다르지 않게 살았다, 그러고 마는 거예요. 하지만 그날 저녁 그와 함께 온 해방영화사의 프로듀서의 입을 통해서,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았죠.”

감독은 레지투이에 대해 꽤 길게 얘기했다. 레지투이는 북부의 닌빈이 고향이었다. 육지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아름다운 닌빈의 자탄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96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원입대해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살 때였다. 호치민 루트를 타고 오로지 걸어서, 3개월 만에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대원들은 이미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투목적지로 이동해오는 동안에 그의 동료 3분의 2는 전투 한번 해보기 전에 죽었다. 굶어서 죽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미군의 폭격에 맞아 죽고, 부비트랩에 걸려 죽고……

“그래서 호치민 루트 다큐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구나. 충분히 그럴 만도 했네. 그래서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희은이 한마디를 보탰고, 감독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는 죽어간 친구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친해졌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앞에 걸어가던 친구가 지뢰를 밟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지, 함께 싸웠던 그들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가 있겠어, 라고.”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와 함께 입대했던 300명의 부대원들 중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다섯 명뿐이었다. 전쟁이 계속된 10년 동안 그의 동료 295명이 죽었고, 그는 살아남은 다섯 명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왜 감독님은 그 아저씨를 감독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인이라고 불러요?”

재우가 궁금해했던 질문을 희은이 대신 던져주었다.

“그는 시인이기를 원하니까. 그의 다큐멘터리는 일관되게 전쟁의 비극과 상처를 다루고 있어. 소설도 그렇대. 국립 해방영화사의 최고 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정작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이름은 시인이고 또 그렇게 불리길 원해.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여기 기자의 얘기로는, 그의 시는 전쟁이 안겨준 비애로 전쟁을 넘어서려는 정신의 바다를 이룬다고 해. 반레라는 그의 필명에 담긴 사연도 모르겠네?”

레지투이가 전선에서 만난 친구 중에서 시인을 꿈꾸던 이가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시집을 읽고, 시를 썼다. 그러나 그 친구는 수많은 동료들이 그랬듯이 전선에서 열아홉살의 나이로 죽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죽은 그 친구의 이름이 반레였다. 197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레지투이는 전선에서 싸웠고 최후의 사이공 함락작전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그는 군복을 벗었고, 자신의 첫시를 ‘반레’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지금까지 그의 모든 글은 ‘반레’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

그들의 자리는 수습하기 곤란한 깊이로 빠져들어버렸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이 더 계속되지 않은 것은 무겁게 내려앉은 화제를 건져낸 감독의 재치 덕분이었다.

“레지투이 같은 친구를 남기고 죽은 반레라는 사나이도 꽤 괜찮게 살다 간 거 아닌가. 넌 그런 의리있는 친구 있냐?”

입을 삐쭉 내밀며 희은이 감독의 화제를 냉큼 받아냈다.

“난 친구 없어도, 가늘고 길게 살 거예요.”

화제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재우의 가슴에 얹힌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얘기하는 사이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 위의 차양을 두드리고 지나간 빗방울은 미처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로 부드럽게 착지하고 있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씨클로 들이 일제히 길가에 멈춰서는 모습을 재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습경보가 울린 것처럼 순식간에 텅 빈 거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빗방울은 빗줄기로 변하면서 아스팔트를 맹렬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에 부딪혀 탄환처럼 튀어오른 비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무렵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어느새 비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은 빗줄기가 굵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거리를 채웠다. 벗은 상체로 씨클로를 몰고 가던 사내의 어깨에도 비옷이 얹혔고, 아오자이를 입고 하교하던 여고생도 자전거와 함께 비옷에 덮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사람들은 유유히 가던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까페로 들어서는 레지투이도 비옷을 입고 있었다.

“야터! 안 반레(시인 반레 아저씨!).”

희은이 손을 번쩍 치켜들며 재우에게 금방 배운 베트남어로 외치듯이 레지투이를 불렀다. 레지투이는 두 손으로 양쪽 팔꿈치를 감아쥐고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재우와 감독이 일어서서 마주 고개를 숙이는 동안 희은은 레지투이의 인사법을 흉내내며 말로 보충을 했다.

“겸손! 겸손!”

“가짜 겸손!”

레지투이는 익살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며 희은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감독과 레지투이의 대화를 통역하는 중간중간 재우는 레지투이가 만들었던 문장들을 떠올렸고, 그러다가 둘의 얘기를 놓치기도 했다. 레지투이가 친구에 대해 재우에게 물었을 때도 그는 얘기를 놓쳤다.

“누구 친구요?”

“서울에서 온 자네 친구 말이야.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면서? 잘 해주게.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말없이 웃고 있는 재우에게 레지투이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해보게.”

“………”

“전쟁중에 우린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도 영원히. 처음 만난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드냐 하면 말야, 내가 저 사람을 앞으로 두 번은 더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세 번? 그 안에 우린 대부분 죽기 마련이니까. 살아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재우가 문태에게 전화를 한 것은 술잔이 몇 순배 더 돈 다음이었다. 술잔은 돌고 돌았고, 비는 내리고 또 내렸다. 모두가 마음이 젖었고 레지투이의 목소리도 젖었다. 그들은 꽤 취해 있었고, 레지투이는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오래도록 내다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날은 너무 슬퍼…… 난 저 비를 보면 호치민 루트에서 죽은 동지들이 생각나. 죽은 채로 정글 가운데서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던 동지들이 생각나…… 그들을 묻으며 함께 울었던 동지들도…… 그들도 다 죽었지…… 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재우는 레지투이가 폭우를 뚫고 그의 집으로 왔던 아침을 떠올렸다. 적멸감이 감돌던 그 눈빛이 밤을 꼬박 세운 다음의 것이었다는 것을 재우는 오늘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이면 전쟁터에서 죽어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온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레지투이는 눈앞의 거리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내다봤다.

 

문태의 희망과 달리 인천행 KE682는 0시 10분, 정시에 이륙했다.

문태가 탄 비행기의 이륙을 확인하고 공항청사를 빠져나온 재우는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점보기 한대가 어둠을 가르고, 불빛을 깜박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화를 한 지 한시간이 지나서 도착한 문태에게 가장 말을 많이 시킨 사람은 레지투이였다. 재우는 꼼짝없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얘기를 옮겨야 했고, 문태가 오기 전에 하던 얘기들까지 중간중간 다시 들려주어야 했다. 문태가 레지투이에게 아직도 공산주의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했다. 문태의 물음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목숨을 걸고 만들려고 했던 것을 당신은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300명의 당신 부대원들 중에서 295명이 목숨을 버려가며 이루려고 했던 나라가 지금의 바로 이 베트남인가요?”

“우리가 원했던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어요. 굶주리지 않고, 외국의 군대가 베트남의 사람과 대지를 유린하지 않는 세상을 바랐을 뿐이에요……”

레지투이는 말을 멈추고 문태의 눈길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권을 팔러 온 소녀와 한치, 뻥튀기를 팔러 온 아주머니, 코코넛을 팔러 온 사내가 자기들의 일을 잊어버린 채 통역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대화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서 있었다. 레지투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맨발의 소녀는 문태에게 복권을 사라고 권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싸운 건 아니잖아요?”

문태의 시선은 복권을 내민 소녀의 새까만 손등에 머무르고 있었다. 재우가 통역을 하지 않았지만 레지투이는 문태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을 끝냈을 뿐이지요. 다음 세대에게는 또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지요. 우리가 다 해버리면 다음 세대는 뭘 하고 살겠어요? 어떤 세대도 다음 세대가 할 일을 미리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희은이 박수를 치며 ‘맞아’를 연발했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입에 붙은 어조로 레지투이를 불렀다.

“야터 안 반레!”

그 다음의 물음은 물론 재우가 옮겨주어야 했다.

“근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식당이고 술집이고, 잡상인들이 이렇게 드나들게 내버려두죠? 여기도 그래. 복권까지는 괜찮다 쳐. 뻥튀기까지도 넘어가. 근데 술집에 들어와서 한치 안주 사라고 그러는데도 왜 주인이 가만히 내버려두죠? 설마 이런 술집까지 국영인 건 아니겠죠?”

“외국인들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지만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요.”

희은은 감동한 표정이었지만 문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렇게 들으니까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갈까요. 제가 보기에는 참 위태로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바친 희생은 너무 큰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후회가 없단 말이에요?”

불안한 마음으로 문태의 말을 옮겼는데 레지투이는 의외로 담담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를 살았어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남쪽에서 우리는 십년을 싸웠지만, 최소한 그 십년 동안 나와 내 친구들은 공산주의의 삶을 살았어요. 자기가 살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겠어요? 나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기르면서 가르쳐준 사소한 것들이었어요. 내가 군대에 지원해서 전쟁터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말했어요. ‘아들아,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어머니의 그 말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요.”

택시에 오르기 전에 다시 돌아본 밤하늘, 비행기는 불빛을 반짝이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재우는 택시의 문짝을 잡으려던 손을 들어올려 펼쳐보았다. 손바닥 안에서 아직 문태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빈손을 가만히 감아쥐어보았다.

“마음가짐을 베트남 말로 뭐라고 하냐?”

문태는 작별의 악수를 하다 말고 재우에게 그렇게 불쑥 물었다.

“떰 로옴.”

“떰 로오옴?”

문태는 재우의 손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의 말을 따라했다. 떰 롬, 재우는 비로소 그 말을 한 주인이 레지투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노천까페에서 문태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 대해서 묻자 레지투이의 소년과 같은 눈동자는 더욱 천진하게 빛을 냈다.

“어머니…… 큰 배움이 없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늘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어떤 마음가짐요?”

냉큼 물은 것은 희은이었다.

“뭐 별것 아냐.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어떻게 하면 이 친구와 즐겁게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 함께 지낼 때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헤어질 때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뭐 그런 마음가짐……”

짝짝, 희은이 손뼉을 쳤다.

“역시, 여자가 훌륭해. 그런 어머니가 계시니까 시인이 나오는 거예요. 야터 안 반레! 어머니가 이거예요. 오늘의 결론은 여자가 이거다, 이거예요.”

희은이 엄지를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노천까페에서 나와 문태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떤선~ 공항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반대방향의 창밖을 내다보던 고개를 돌리다가 서로 눈길이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둘 다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그건 뭐라고 그래?”

일행의 마지막 차례로 출국 심사장으로 들어가던 문태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가면서 베트남 말 한마디는 알고 가야지.”

“바이 꼬 떰 롬.”

“알았다 임마, 바이 꼬오 떰 로오옴.”

돌아서는 문태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 같았다. 녀석을 처음 만났던 20년 전, 그때의 맑았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문태의 웃음을 바라보는 재우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웃음이 번져났다.

택시가 경적을 울렸지만 재우는 문태가 떠나간 하늘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멀어져가던 비행기의 불빛이 마침내 완전히 어둠속으로 사라진 다음 재우의 눈앞에는 문태와 창은의 얼굴이 함께 어른거렸다. 기름때 낀 창은의 손을 생각하며 재우는 감아쥐고 있던 손을 펼쳐 다시 한번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무언가를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지난 겨울, 바람 부는 명동성당에서 창은은 재우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택시에 오른 재우에게 운전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재우는 무심코 이렇게 대답했다.

“명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