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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이 있음. ksw2100@hitel.net
능소화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凌霄야 凌霄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이야 아니되어도 凌霄야 凌霄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째 툭, 툭, 떨어져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나생이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 꽃피어 쇠어지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그 짜릿한 뇨기를
맑은 울음주머니를 가진 밤
집앞 밭들 사이에 조그만 논이 있었다는 걸
개구리 울음소리 들려와 비로소 눈치챈다
어느 외로운 식물이 터뜨린
비린 씨앗 같던 올챙이들 어느새 자라
밤에게 둥근 울음주머니를 달아준다
떨어져 구르는 제 몸 어딘가에
울음주머니 하나씩 매달고
더러워진 봄꽃들이 맑은 하늘로 올라간다
부풀어오른 둥근 울음주머니 저편으로
새로 생긴 잔별들이 보리잎처럼
까끌까끌 내 손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지나온 길들로부터
도대체 나는 어떤 피를 수혈받은 걸까
열망이 사라지고
다만 이 괴이한 평화로움
모든 오늘이
울음주머니 속에 숨고 싶다고 내게 말한다
더러워진 꽃들이 모두 승천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세상은 더러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