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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규정 李圭正

1937년 일본 쿄오또 출생. 경남 함안에서 성장. 1977년 『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당신 손에 맡긴 영혼』, 장편소설 『먼땅 가까운 하늘』 등이 있음. kj9432@yahoo.co.kr

 

 

 

매헌 오팔삼 약전

 

 

1

 

매헌(梅軒) 오팔삼(吳捌森) 선생이 목욕탕에서 쓰러진 것은 지난 3월 9일 새벽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일본의 전·현직 정치인의 망언소식을 접하면 그만 목뒤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한동안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다. 심하면 손발이 저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증세까지 곁들여졌다. 목욕탕에서 쓰러지기 전날 그는 망언기사를 신문에서 봤다. 일본이 심심하면 하는 소리지만 독도가 일본 영토란 것이었다. 게다가 한일합방은 조선 정치인들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 결과 한국이 발전했으므로 한국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망언도 있었다. 기사를 읽는 순간 뒷골이 당기면서 손발 저리는 증세가 또 나타났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그 증세는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다. 하지만 쉽게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망언 중 가장 자존심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해서 한일합방이 된 것이라니! 천벌을 받을 놈들!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아무리 혼자 달래려고 해도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오후에 여암(餘巖)을 불러 남천동 식당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여암은 대구사범 선배이면서 옥살이를 함께한 동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울적한 심기만 발동하면 그를 만나곤 했다.

“그따위 왜놈들 망언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매헌은 뭘 그리 흥분하는지 원……”

“어허, 여암 선배는 언제부터 달관한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 속은 나보다 더 안 편하면서.”

“그런 말 듣고 속 편한 사람이야 없겠지. 하지만 왜놈들의 그런 시답잖은 소리에 흥분하면 건강만 해치니까 하는 소리지.”

여암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왜놈들이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세계의 운세가 우리한테로 몰리고 있어. 우리 민족에 바야흐로 세계의 길운(吉運)이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지. 영화만 해도 일본은 물론 영화의 본산지인 미국을 앞지르고 있고, 젊은 가수들 노래도 그렇다고 하더만. 소위 한류(韓流)열풍이 온 아시아를 석권하는 것만 봐도 그래. 그리고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이란 정책으로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도 우리의 욱일승천의 운세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 이제 일본의 운세는 한물간 것이니 정신나간 왜놈의 말 신경쓸 것 없어요.”

오팔삼은 말없이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렇게만 된다면야 오죽 좋으랴 생각했다. 그는 요즘 우리의 정쟁(政爭)이 한일합방 무렵의 정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지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둡기 전에 들어오라는 할멈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어두워지면 바깥출입을 삼간다. 낮에는 괜찮다가도 어둠만 깔리면 아랫도리가 휘둘리면서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여느날과 같이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했는데 온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일단 뽑힌 대통령에 대해서는 승복해야 하는데,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늘 헐뜯고 걸핏하면 탄핵 운운하고 있으니 도대체 저것들이 국민을 염두에 두고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웠다.

다음날 새벽, 늘 하던 대로 산책을 했다. 산책이라지만 아침마다 걷기운동을 하는 것이다. 한 삼사십분 동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몸에 땀이 밴다. 그런 다음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면 말할 수 없이 상쾌해진다. 샤워기의 꼭지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팔이 이상했다. 겨우 팔을 들었으나 이번에는 꼭지를 돌릴 수가 없었다. 운동을 나설 때부터 약간의 현기증이 있었고, 가슴에 경미한 통증이 있었다. 그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오래전부터 심장약을 먹고 있었고 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겨우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려는데 그때부터는 손이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왼쪽 가슴이 아주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면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탈의실로 나오려는데 그만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목욕탕에는 오팔삼이 아침마다 보는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그중 한사람이 급히 오팔삼의 집으로 연락하고 구급차를 불렀다. 오팔삼의 부인이 목욕탕으로 달려온 얼마 후에 119 구급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오팔삼은 차에 실렸고, 부인 마리아씨는 사위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오팔삼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반가운 나머지 엎드려 절부터 하려고 하자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면서 매정하게 말했다.

“절은 무슨 절! 니가 여기는 웬일이고? 여기는 안죽 니가 올 데가 아니니 썩 돌아가거라!”

할머니는 깨끗한 모시적삼에 모시치마를 입은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는데 절을 받기는커녕 무서운 얼굴을 하고 얼른 돌아가라는 말만 했다. 참으로 서운했다. 절대로 그럴 할머니가 아니었다. 오팔삼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어머니를 이별하자 할머니는 동냥젖을 얻어먹이기도 하고 암죽을 끓여먹이기도 하며 그를 키웠다. 그렇게 애지중지 어렵게 키운 손자를 보고도 쌀쌀맞게 대하다니! 이번에는 청년 너댓 사람이 안에서 줄레줄레 나와 그를 에워싸더니 한마디씩 했다.

“야, 완산지호(完山志鎬)! 자네 참 오랜만이네그려.”

“완산지호가 아니라 오팔삼이지 오팔삼. 그래, 한밭감옥에서 헤어진 후로 처음이니 이게 얼마 만인가!”

“그래, 자네가 평생을 후진교육에 힘썼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일 다 마치고 여길 왔는가?”

“허 참, 완산지혼지 오팔삼인지 자네는 할 일이 더 있을 텐데 벌써 여길 왔어?”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면서 오팔삼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영화에서 희미한 윤곽이 차츰 또렷해질 때처럼 하나하나 얼굴이 되살아났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대전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옥사한 동지인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박제민, 서진구가 아닌가. 그는 반가운 나머지 그들을 얼싸안고 소리쳤다.

“어, 동지들……”

그는 하도 반가워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완산지호’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일본인 검도선생이 지어준 이지호의 창씨개명이었다. 전주 이씨라고 해서 그 관향과 관계있는 완산을 일본식 성으로 썼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들은 이 넉자의 일본식 이름을 한번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 않았다. 오팔삼도 친구들의 창씨개명을 일본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일본 지명이나 인명을 일본식 발음으로는 절대 부르지 않는다.

오팔삼(吳捌森), 이 이름은 이지호가 스스로 붙인 자신의 별명이었다. 대전감옥에서의 죄수번호가 583이어서 성은 오(吳)로 하고, 온 나라의 숲〔森〕이 모두 깨지는〔捌〕 판이라는 심정에서 생각한 별명이었다. 숲이란 젊은 혈기와 정의감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생명력 넘치던 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별명에 숨겨진 뜻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출옥하고 나서도 이 이름을 계속 썼다. 어쩐지 본명보다 더 정다웠다. 동지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그래. 자네는 조모님 말씀을 듣게. 아직 여기에 와서는 안될 몸이야. 우리 대신 해야 할 일이 좀 많은가. 온 국민이 정신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소식 우리도 다 아네. 도대체 나라에 제 노릇을 하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거든. 허 참,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모진 고문과 감옥살이 끝에 옥사했던가! 그러니 자네라도 남아서 생각 짧은 인간들을 꾸짖고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해. 진정한 어른노릇을 하라는 말이네.”

그러자 또 누가 거들었다.

“옳은 말이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바로 차리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 국민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진정으로 잘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어. 잘 먹고 즐기면 잘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어. 민족의 줏대나 정체성을 잃어버렸단 말이네. 온 국민이 우리말과 글자를 중시하고 있는가?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자도 있다더군. 이런 얼빠진 민족이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우리 다섯 사람말고도, 우리 글과 말을 지키려다 순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선열의 정신을 잊어버린 놈들이 3·1절과 광복절 기념행사는 왜 해? 앞뒤가 안 맞는 노릇이지!”

“맞는 소리네. 요새 일부 젊은층은 아예 민족이란 개념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니, 이런 낭패가 있는가? 국민에게 민족의 자존심이란 게 온통 사라지니 너도나도 이민을 가는 거고, 애 밴 계집들은 다투어 미국에 가서 해산을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니 자네라도 남아서 우리가 못하는 따끔한 말을 해야 하네!”

평소에 아무리 말해봐도 듣는 사람이 없었는데, 자신의 동조자를 여기서 만나다니! 오팔삼은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맺혔다.

“동지들 말씀이 일일이 언즉시야(言則是也)요마는 동지들 만난 김에 여기서 조금만 더 놀다가 돌아갈라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못돼. 그러니 지금 바로 돌아가게!”

선배인 박찬웅이 명령조로 말한 뒤 심상찮은 눈짓을 하자 동지들이 득달같이 오팔삼의 몸을 번쩍 들어 문밖으로 던져버렸다.

“할매애!”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란 말 대신 ‘할매’만 불렀다. 그때 누가 오팔삼의 몸을 흔들면서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인자 정신이 좀 드능교?”

오팔삼은 긴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생명의 3월, 눈부신 햇살을 가린 병실의 연녹색 커튼이었다. 어리둥절해 눈을 돌리자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할멈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어, 여기가 어디요?”

말을 하는데 어쩐지 소리가 신통치 않았다. 코끝에 산소호흡기 호스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박서방 병원 아잉교.”

“가만있자, 내가 여기는 어찌 왔을꼬?”

“그만 되기 만번 다행이요. 아침에 목욕탕에서……”

아침에 목욕탕에서? 그랬구나! 어제 왜놈의 망언에 기분이 상했던 것, 여암 선배를 만나 맥주를 마신 것이 떠올랐다. 오팔삼은 너무도 선명한 꿈을 떠올리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

 

1941년 11월 하순, 대구사범 5학년 때의 초겨울 어느날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먹구름까지 짙게 끼어 더욱 음산했다. 당시 이지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도심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누구에게 휘쫓겨 달리기 시작하는데, 금세 산길로 접어든다. 옳지, 나는 고향에서 보통학교 다닐 때 매일 재를 넘었으니 이런 산길에서는 네놈들을 따돌릴 자신이 있다! 하면서 달리다보면 갑자기 앞이 콱 막히면서 높은 절벽 밑에 와 있다. 절벽은 바위로 되어 있어 잡을 것도 디딜 데도 없는데, 그런 절벽을 타고 오르다 미끄러져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면서 잠이 깬다. 어떤 날은 황톳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물살에 휩쓸리는 바람에 물에 빠지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잠에서 깨면 고향에서 사귀던 최미홍의 얼굴이 떠오른다. 최미홍은 이지호가 진작부터 은밀히 연정을 품고 있던 이웃마을 규수였다. 처음에는 지호의 일방적인 구애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구애가 보통 총각들의 짓궂은 장난이나 일시적 충동이 아님을 알고 최미홍은 수긍도 부정도 않는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지호는 그런 연인을 속으로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묻는다. 미홍씨, 내가 왜 이러지요? 도대체 악몽을 왜 이리 자주 꾸는 거요? 그러나 가슴만 심하게 뛸 뿐이었다.

흉몽이 밤마다 지호를 괴롭히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둘째 수업시간이 반쯤 지났을 무렵 교무과 사람이 급우들 몇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들 지호와는 둘도 없이 친한 비밀결사 동지들이었다. 불려나온 사람은 5명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마지막으로 완산지호도 불렸다.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그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때 교실 밖에서 몸집이 크고 험상궂게 생긴 사복의 장정 7,8명이 잽싸게 나타나 불려나온 학생들을 둘러쌌다. 그중에 마치 유니폼 입은 럭비선수처럼 어깨가 벌어진 한 사내가 일본어로 을러메었다.

“허튼수작일랑 말고 좀 따라가자!”

그들은 수갑만 안 찼다뿐 완전히 죄인의 몰골로 끌려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남대구경찰서였다. 남대구서 뒤 동북쪽으로 대구형무소가 있었다. 형무소의 붉은 벽돌담 앞 남쪽에 대구사범의 농업실습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실습중이던 후배들이 끌려가는 이지호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대구서의 어느 방에 갇힌 그들은 한사람씩 불려나가 왜경에게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조사받았다. 그리고 오후 네시 조금 넘어 다시 밖으로 끌려갔다. 지호가 자주 찾던 헌책방 골목, 영화관인 만경관이 있는 낯익은 중앙통 거리와 약전골목을 지나 닿은 곳은 대구경찰서였다. 점심을 굶었건만 시장한 줄도 몰랐다. 경찰서에 닿자마자 일행은 각각 유치장 독방에 갇혔다. 경찰이 지호의 등을 무작스럽게 밀어넣는 바람에 유치장 구석에까지 가서 쓰러졌다. 아, 이게 마지막인가보다고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칠순에 가까운 할머니 생각이 난 때문이었다. 지호는 집안의 무녀독자 장손으로 태어나 할머니한테서 온갖 정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렇게 키워준 할머니를 다시는 못 뵐 것 같았다.

대구서에서 고향에 있는 연일보통학교 두해 후배인 순사를 만났다. 그는 유치장 간수로 있었다. 이지호를 알아보고 저녁때 관식 대신 중국음식을 시켜 넣어주고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사회음식을 못 드실 테니 이거라도 드십시오.”

점심을 거른 참이라 중국음식을 아주 잘 먹었다. 밤이 되니 몹시 추웠다. 맨마룻바닥에 담요 한장으로 누웠으나 아무리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생각이 다 났다. 무사히 졸업하고 최미홍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건데 다혁당(茶革黨)은 괜히 만들어가지고. 아니다, 정신 바로 박힌 이 시대의 남아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독립운동이 아닌가. 그래도 내 한몸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래도! 나는 결코 어리석은 짓을 한 게 아니야. 아암, 어리석은 짓이 아니고말고! 이러면서 혼자 몸을 뒤척였다. 잠 못 드는 고통을 난생처음 당했다. 새벽 네시쯤 된 시각에 유치장 저쪽 복도 끝에서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났다. 구둣발 소리가 다가와 멎더니 지호가 갇혀 있는 유치장 문을 열었다. 구둣발은 아무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지호를 구두 끝으로 흔들어 일으켜앉혔다. 그러고는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그때까지 말 한마디 없었다. 무언이 주는 공포! 숨이 멎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공포에 떨면서 캄캄한 밤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대구역이었다. 지호와 함께 학교에서 붙잡혀온 친구들이 잇따라 도착했다. 왜경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관 한사람이 학생 한사람을 수갑까지 채워서 데리고 왔다.

이지호 일행은 학생복 차림으로 대전행 새벽열차를 탔다. 이 일이 발각되어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곳이 충청도였으니 대전으로 송치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반승객들이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더러는 혀를 끌끌 차며 노골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되지 못한 놈들! 학생이 공부나 착실히 할 일이지, 무슨 죄를 지어 저리 잡혀가노?

그러나 아침 일찍 도착한 곳은 대전이 아닌 강경이었다. 그들은 다시 강경경찰서로 갔다. 그곳 유치장에서 지호는 6,7명의 잡범과 함께 두 주일이나 지냈다. 함께 잡힌 동지들은 각각 딴방으로 갔다. 잡범들은 나고 들면서 자주 바뀌었지만 곧 친숙해져 온갖 이야기를 했다. 절도 요령, 소매치기 기술, 금지물품 암거래 비결, 심지어 부녀자를 겁탈하고도 뒤탈 없게 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호만은 참깨 들깨 노는 데 아주까리 끼인 격으로 외톨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추운 겨울인데도 담요가 부족해 밤이면 담요 쟁탈전이 벌어지고, 곁에 가기도 싫은 혐오스런 인간들과 몸을 밀착해 자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 자는 지호에게 접근해 추잡한 짓거리를 하려고 도 했다. 하지만 예사 수감자와는 달라 보이는 눈빛과 접근해오는 자에 대한 완강한 몸짓에 아쉽다는 듯 씩씩거리며 지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강경경찰서에서 딱 한번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함께 붙잡힌 동지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눈짓만으로 만족해야지, 그 어떤 말이나 손짓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이미 ‘대구사범 학생일당의 범행’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지호와 그 선후배 동지들이 ‘다혁당’이란 비밀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해 「반딧불」 「학생」 등의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마 먼저 검거된 동지들이 고문에 못 이겨 불어버린 듯했다. 이런 판국에 쓸데없이 스스로 행한 바를 부인하는 것은 고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란 판단이 섰다. 지호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신문에 응하면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경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지호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거기에는 대구사범 선후배들이 줄잡아 30명도 더 되어 보였다. 아, 너도 알고 보니 동지였구나 하며 가슴이 뛰기도 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점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서로 몰랐던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왜경은 이 사건의 확대를 우려해 철저한 보도관제로 비밀에 부쳤고, 검거된 연루자를 전국 각 경찰서에 분산 수용했다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선전포고일인 1941년 12월 7일, 주동자 35명을 대전형무소로 옮겨 수감했다. 나머지는 일단 석방했는데, 당시 다혁당사건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당사자(주모자)는 물론이고, 대구사범 은사요 정신적 기둥이던 김영기 선생을 비롯, 같은 방을 쓰던 하숙생, 그 하숙집 주인, 학부모 등 300명이나 되었다는 것을 훨씬 뒤에 알게 되었다.

미결수 감방은 구치소 1사에 있었는데, 사상범을 비롯해 미결수와 장기수 들이 1사의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지호가 수감된 방은 1사 1호실이었다. 1평 남짓한 마룻바닥에 변기통과 물통이 하나씩 있었고 벽에는 세면대가 붙어 있었다. 낮에 책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방안은 어두웠는데, 뒷면 벽 높은 곳에 서너 뼘 정도의 작은 창이 하나 있어 한줄기 빛이 겨우 들어오고 있었다. 감방 문에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틈이 있었는데, 간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방안을 감시했다.

이런 방에서 지호는 푸른 수의에 죄수번호 583을 달고 언제나 꼿꼿이 앉아 있어야 했다. 발이 저리다고, 허리가 아프다고 서거나 누우면 강한 체벌을 받았다. 하루종일 벌을 서는 듯한 감방생활이었다. 그래서 죄수번호 583을, 정신 바로 박힌 젊은 청년들 다 깨지는 판국을 살아가는 불행한 사내 오팔삼(吳捌森)으로 생각했다. 감방 출입문 밑에 뚫린 손바닥 크기의 구멍으로 하루 세끼의 밥이 들어왔다. 틀에 찍혀 4각 6면체로 나오는 밥에는 보리쌀에 콩이 섞여 있었다. 오팔삼은 콩밥을 물이 되도록 씹어서 삼켰다. 영양분의 허실을 막기 위해서였다. 반찬이라고는 소금에 절인 시래기 한 잎이 전부였고, 뜨물보다 더 투명한 된장국은 된장맛은 찾아볼 수 없는, 소금을 친 것이었다. 이런 국물이라도 더 먹기 위해서는 잡역을 맡은 죄수에게 잘 보여야 했다. 잡역수는 대개 나이가 든 장기수들이었다. 하루종일 기다려지는 게 세끼 밥이었다. 나중에는 콩이 몇개인지 세면서 밥을 먹기도 했는데, 콩은 언제나 5,60개씩 들어 있었다.

이런 콩밥도 1943년으로 접어들자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밥으로 바뀌었다. 전쟁이 가열되고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일제는 사료용 콩깻묵을 죄수들에게 먹였다. 이것으로 연명하다보니 죄수들은 모두 손발이 퉁퉁 붓고 얼굴이 누렇게 뜨는 부황증에 걸렸다. 이 무렵 오팔삼이 꿈에서 본 다섯 명의 동지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박제민, 서진구 등이 옥사를 했다.

감방 점검, 소지품 검사는 왜 그리 잦던지. 기상과 취침점호 받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고, 며칠에 한번씩 머리에 용수를 쓰고 나가 운동하는 시간은 십분도 되지 않았다. 운동시간에 말은 못 나누었지만 그래도 동지들의 모습을 먼데서나마 볼 수 있었다. 나날이 초췌해지는 동지들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저런 중환자 모습일 거라고 오팔삼은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간수의 눈을 피해 감방 안에서 부지런히 운동을 했다. 앉아서 주먹을 쥐고 팔을 앞으로 옆으로 폈다 굽혔다 하는 것, 목을 360도 회전시키면서 눈을 깜박이는 것, 꼿꼿이 앉은 자세로 상체를 되도록 크게 움직이는 허리운동을 했다. 교화과에서 한달에 한번 넣어주는 『황도(皇道)』 『신도(神道)』 같은 쓸모없는 책도 시신경을 연마하기 위해 시선을 활자에 두고 읽기도 했다. 그럴 때는 되도록 책 내용과 분리해 글자만 읽었다.

오팔삼은 이런 1호 독방에서 2년 가까이 갇혀 지냈다. 이러다가 말까지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어 입속말로 말 연습을 하곤 했다. 자문자답의 혼잣말이었는데, 지난날 중요한 일의 날짜 같은 것도 기억해두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 이지호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나? 1921년 음력 2월 14일 경북 영일군 연일면 배골 61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아버님의 함자는 관(冠)자 수(秀)자이신데, 이 어른의 외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지. 예닐곱살 때 아버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아홉살 때 연일보통학교에 입학해 십리 길, 그것도 고갯길을 넘어 등교하면서 해마다 개근을 했어. 우리집 살림을 일으키신 일자무식의 할아버지께서 내가 열일곱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그러자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지만 그해  1937년 4월 7일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했지. 지금 생각해도 장한 일이었어.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나는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할머니와 아버님께 작은 위안을 드렸어.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혀 거의 죽어가고 있으니…… 아니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내가 눈물을 흘리다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최미홍씨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돼. 나는 반드시 우리 조선의 독립을 보고, 독립된 조국에서 교육자로 봉사할 것이다. 이미 지난 1937년 4월에 윤독회를 만들었고, 방학이면 고향에서 야학을 열어 민중을 계몽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동지 이동우의 주선으로 1940년 11월 23일 대구 봉산동 127-28번지에서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문예부에 가입했지. 그 뒤 1941년 2월 15일 대구 봉산동 242번지의 하숙방에서 문예부 회원이 주동이 되어 다혁당을 조직했고…… 그러다 1941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수업중 왜경에 검거되어 강경경찰서를 거쳐 지금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거야.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가슴의 피는 아직 식지 않았어. 이 젊음을 반드시 독립된 조국을 위해 바쳐야 해. 정신이 곧 생명이야. 정신력으로 어찌하든지 살아서 이 감옥을 나갈 거야. 천지신명이시여, 저를 지켜주소서. 그리고 제가 한시도 잊지 않는 최미홍씨에게도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주소서.”

일제가 ‘예심제’를 만들어 미결수를 장기간 독방에 가두어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옥사자가 연거푸 생기는데도 재판을 미루기만 하던 일제의 속셈은 어찌하든지 조선의 젊은 인재들을 괴롭혀 혼을 빼려는 것이었다. 이런 고문 아닌 고문은 수감자에게 정신착란을 일으키게도 했다. 한 방 건너 3호실에 수감된 이동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는 독방에서 종일 뭔가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거나 밤에 자지 않고 발악을 하곤 했다. 그는 결국 수갑을 차고 지내게 되었는데, 밥도 수갑을 찬 채 입으로 먹었다. 소위 ‘개밥’으로, 까딱하면 누구든지 하루 이틀씩은 개 신세가 되곤 했다.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모진 추위와 더위였다. 대전 중촌정 1번지 언덕 위에 있는 감옥은 겨울에 견디기 힘든 찬바람이 몰아쳤고, 너무 작아서 목까지 올리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상체가 드러나는 얇은 이불 한장으로 맨마룻바닥에서 자기란 고문 그 자체였다. 기름기가 다 빠져 피골이 상접한 오팔삼은 혹한을 견디느라 어금니를 얼마나 악물고 지냈는지 성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장시간 비볐는데도 결국 손발에 심한 동상이 걸렸다. 감방 안에 둔 물이 꽁꽁 얼어 세수를 못한 날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여름철에는 바람 한점 들어올 데가 없어 오후만 되면 가만히 있어도 한증탕에 앉은 것처럼 등이며 가슴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밤이 깊어지면 더위는 좀 덜해지지만 모기의 극성에 시달려야 했다. 낮에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새까맣게 붙어 있던 이 모기란 놈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옥살이하던 1941년 12월 31일 대구사범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지만 오팔삼은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 1943년 2월 8일 예심이 종결되고, 9개월여 후에 구형공판이 열렸다. 구속된 지 2년5개월 만이었다. 수감된 동지들은 하나같이 죽음 직전의 상태였다. 혼자 힘으론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1943년 11월 23일 오전 9시, 대전지방법원 2호 법정에서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 담당인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의 근등춘의(近藤春義)라는 젊은 일본인 검사의 논고가 있었다. 피고석을 응시하면서 검사는 위엄어린 표정과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사건은 20세 전후의 젊은 학생들이 일으킨 큰 사건으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동아 건설을 지상목표로, 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 뜻을 모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고 있는 이때에, 피고인들은 대담하게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갖가지 항일운동을 자행하였다는 것은 진실로 가증스럽고 끔찍한 사건이다.”

검사는 이 대목에서 너무 격앙해 목이 말랐던지 컵의 물을 반쯤 마신 후에 논고를 계속했다.

“이 사건은 1930년대에 일본 토찌기현에서 일어난 ‘좌익학생 프락치사건’과 같은 맥락의 불온한 사건으로서, 조기에 발견했기 망정이지 이를 늦게까지 두었더라면 일본제국의 정책 수행이나 진로 등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이들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음이 명백하여 치안유지법 제1조에 저촉되고, 불온한 출판물을 간행한 것은 출판법에 위반되며, 일기장 등에 불온한 언동으로 황실을 비난한 것과 신문 등에 게재된 천황 폐하의 사진을 훼손한 것은 황실불경죄에 해당되므로 종합형법을 적용하여 엄벌에 처함이 옳을 것으로 사료되는바, 주모자에게는 징역 10년, 동조자에게는 각각 징역 5년을 구형한다.”

일사천리로 논고를 마친 검사는 재판장과 피고인석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스스로 만족한 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쩌면 이런 논고로 조선에서 본토로 영전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팔삼은 검사의 논리전개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토찌기현의 좌익학생운동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일종의 변혁운동이지만, 대구사범 학생항일운동은 신성한 독립운동이다. 네놈들의 불법적인 압제에 신음하다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선 우리에게 생존이 달려 있고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신성한 독립운동인데, 이를 왜놈 조무래기들의 좌익운동과 혼동, 동일시하는 네놈은 똑똑한 체해도 실은 바보 같은 놈이다! 오팔삼은 눈을 흘기며 검사를 마음껏 비웃었다.

구형 1주일 후인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 2호법정에서 선고공판이 열렸다. 일제는 사건의 내용이 드러나 민심의 동요와 학생들의 집단적 항거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공개리에 재판을 열었다. 선고공판에서는 검사의 논고와는 대조적인 변론도 있었다. 그러나 변론이 선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는 피고인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관선 일본인 변호사는 대전지방법원장을 지낸 북촌(北村)이란 사람이었다. 연로한 그는 연륜에 걸맞게 변론도 그럴듯했다.

“이 사건은 크고 조직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젊은 학생들의 정의로움과 용기는 가상히 여길 만하다. 피고들은 조선의 인재들로서 조선의 독립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일본인이 생각하면 반역자이지만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로서, 뜻있는 조선인이라면 이런 일을 권장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 조선인은 이 학생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이때에 이 학생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 형을 대폭 감하여 집행을 유예하고 사상교육을 철저히 해 전향을 기도하는 것이 좋으리라 사료되므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바이다.”

일본인 변호사는 이렇게 변론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결코 흥분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듯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조선인 변호사는 둘이었는데, 먼저 이인(李仁) 변호사가 일어났다. 이변호사는 피고인 몇이 합동으로 위촉한 변호사였다. 그는 사건의 성질상 개개인에 대한 변론은 하지 않고, 한일합방 후 조선민족의 저항과 독립운동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변론을 했다. 물론 독립운동의 당위성이나 필요성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도 그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 학생운동을 특별히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자라나는 청년의 기질을 이해하고 학생들이 일으킬 수 있는 스트라이크 정도로 보아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것이며,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무죄선고가 곤란하면 집행을 유예하여 사상전향을 시도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안다.”

세번째 변론인 임창수 변호사의 변론도 이인의 변론과 거의 같았다. 특이한 점은 스스로 일제의 정책에 동조한다는 투의 변론이었다.

“젊은 청년들에게 중벌을 가한다면 그 배후에 있는 부모 형제 친척들이 모두 일본인 되기를 반대할 것이니, 이 학생들을 석방해 사상의 전향을 꾀하는 것이 백번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인은 어차피 일본과 동조동근의 후예로 하루빨리 일본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팔삼은 이런 변론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망국민의 비애에 사로잡혔다. 임변호사가 그럴싸하게 소위 ‘일조동조동근론(日朝同祖同根論)’을 말했으나 본심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저 경술국치 무렵의 개같은 종락(種落) 몇몇을 제외하면 그래도 마음속에는 민족의식이 살아 있으리라 믿고 있는 오팔삼이었다. 변호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자신들을 살려내려 한 것이 고맙기보다는 오히려 가련했다.

변호사의 변론이 있은 후 잠시 휴정했다가 재판장 적사우보(赤司友輔)의 판결이 있었다. 재판장의 판결문은 이러했다.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행동을 수행한 점은 치안유지법 제1조, 문서 출판을 위반한 점은 출판법 제11조 제1항 제3호, 조선형사령 제42조에 각각 해당하고, 전시(前示) 목적으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선동한 점은 동법 제5조에, 군사(軍事)에 관하여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행한 점은 육해군형법 제100조에 각각 해당하는바……”

이렇게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육해군형법, 일반형법 등을 적용하여 대구사범 학생 전원에게 2년 6월에서 7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오팔삼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2년 6월의 언도를 받고, 선고 전후 총 5년 동안의 옥살이를 했다.

처음 구속될 땐 죽음을 각오했다. 징역을 다 살고 옥문을 나설 때도 이제 살았구나 하는 감회보다는 우리나라가 언제 광복을 맞이하느냐에 관심이 더 컸다. 출옥하던 날, 꿈에도 그리던 연인 최미홍은 마중 나오지 않았다. 물론 한순간 서운하기는 했지만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처녀총각이 만나는 것 자체가 당시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추문이 되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일이 오팔삼과 동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거, 모두가 ‘요시찰인명부’에 올라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다시 하게 된 일이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 중의 불령선인이었다.

 

 

3

 

오팔삼은 1945년 3월 6일, 형기만료로 출옥했으나 그날부터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해 포항의 나무젓가락 공장에 수용되어야 했다. 꿈에도 그리던 최미홍은 만나보지도 못했다. 오팔삼은 그 공장에서 거의 날마다 포항경찰서 고등계 일본인 형사주임의 문안 아닌 문안을 받아야 했다. 그는 언제나 말을 타고 찾아와 오팔삼이 공장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감시했다. 한번은 형사주임이 오팔삼에게 말했다.

“이 사람, 내가 좋은 데 중매설 테니 결혼하고 좀 편하게 살아보게. 자네, 인물도 준수하고 성격 또한 침착, 온순해서 하는 소리야. 자네는 자네 머릿속에 박힌 저질 조센징 근성만 제거하면 아주 훌륭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어. 아니, 자네의 근성은 단순한 반도인의 근성을 넘어 위험하고 무서운 독성이야. 내가 소개하는 일본인 처녀와 결혼만 하면 자네는 편안히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하도 보기 딱해서 하는 소리야. 자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오팔삼은 그가 여느 고등계 형사 같은 악질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우리 민족 전체를 저질 조센징으로 매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나 표정을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지 아니한가.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허, 규수가 워낙 참하고 자네와 어울릴 것 같아 하는 소리야. 결혼준비고 뭐고 걱정 안해도 되니까 나중에라도 조용히 생각해보게.”

그러나 조용히 생각할 일은 따로 있었다. 최미홍을 어떻게 만날까 하는 문제였다. 우선 자신이 출옥한 사실이라도 알려야 안심을 할 게 아닌가. 나오자마자 큰마음 먹고 편지를 보냈건만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연락조차 없었다. 그런 편지가 호랑이 같은 부친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집에서 쫓겨날 터였다. 편지를 괜히 보냈다는 후회도 들었다.

오팔삼이 워낙 입을 닫고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인지 형사주임은 더이상 중매를 서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오팔삼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나무젓가락 공장에 다닌 다섯달 동안 사회음식을 계속 먹으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불어났다. 그사이에 최미홍의 답장을 받고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최미홍은 그동안 결혼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크게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미홍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버릴까 싶다가도 고개를 흔들곤 했다. 할머니는 이미 별세했지만 아들만 보고 살아온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즈음 부친은 오팔삼에게 결혼하라고 무섭게 채근했다. 오팔삼은 정을 주고 있는 처녀가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근동(近洞)에 있는 고모님께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고 고모부님이 아버지와 그 처녀 집의 중간에서 중매를 서게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고모님은 대뜸 그 처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숨길 필요가 없어 오팔삼은 바로 고모님 동네의 최초시 손녀라고 밝혔다. 고모님이 놀라면서 물었다.

“그 최초시의 손녀딸, 미홍이 처녀가 니캉 그런 사이란 말이가?”

“예.”

“야아야, 그라몬 진작 말할 일이지. 집안도 집안이지만 그 처녀만한 사람을 또 오데서 구하겠노? 너그 고모부가 중간에 설 것도 없다. 내가 당장 아부지한테 가서 말씀을 디리꺼마.”

1945년 5월 어느 화창한 날, 옥색 모시옷 차림에 양산을 받쳐든 고운 모습의 지성미 넘치는 중년여인이 공장으로 찾아왔다. 고모님이 부친의 마음을 움직였고, 최미홍의 어머니에게 사위 될 사람을 한번 보라고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 부인은, 살이 올라 준수한 모습을 되찾은 오팔삼 아닌 이지호를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한편 오팔삼의 아버지도 그 처녀를 먼발치에서 한번 보는 것으로 선보기를 대신했다. 과년(過年)한 게 마음에 좀 걸린다고 했지만 최미홍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 오팔삼은 ‘그 과년의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었습니다’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해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오팔삼은 고향 면민의 추대에 따라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본격적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할 때인데 고향의 건국준비위원회 일로 밤낮 바쁘게 지냈다. 1945년 음력 10월 13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밤, 오팔삼은 아내에게 말했다.

“저를 무작정 기다려주시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떨리는 소리로 미홍이 답했다.

“어언지예, 지가 기약도 없는 분을 무작정 기다린 것도 고생이었지만 지는 지호씨가 무사히 돌아오신 기 더 고맙습니더.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신 기라예.”

오팔삼은 가슴이 팔딱팔딱 뛰고 있는 가냘픈 몸매의 아내를 안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고? 나는 천지신명께 기도했는데.

그는 1946년 1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에 복교하여 2월에는 입학 9년 만에 졸업을 했다. 감옥살이를 한 보람은 있어, 졸업장은 조선인 교장 명의의 우리글로 된 것이었다.

그는 그해 4월 포항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그는 언제나 짚신에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학생들 앞에 섰다. 그는 그런 복장과 신발로 민족의 혼, 민족의 얼을 학생들 머리에 불어넣으려고 했다.

해방 직후의 혼란은 학교에서부터 일기 시작해 사회로 번져갔다. 학생들의 이런저런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오팔삼은 그때마다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학생들의 시위현장에 달려갔다. 교실에서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하면서 자주 눈물을 글썽거렸다. 외세에 짓밟혔던 민족사가 너무 억울하고 슬펐는데 정세는 다시 외세에 시달릴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할 때 학생들은 하나같이 그의 입을 응시하곤 했다. 그런 오팔삼이었으므로 아무리 격한 시위중이더라도 학생들은 그의 말에는 순종했다.

그는 1977년에 애국지사로 건국포장을,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73년 11월 3일에는 모교 대구사범 뒤뜰에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비를 세울 때 비문을 쓰기도 했다.

 

 

4

 

오팔삼은 응급실에서 사흘 만인 3월 11일 일반병실 독실로 옮겼다. 원장인 사위는 절대 안정할 것을 당부하며 문병객도 사절하고,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오팔삼은 퇴원해도 될 것처럼 느꼈다. 현기증도 가슴 통증도 없었고, 정신도 말짱하고 밥맛도 괜찮지 않은가. 아무리 사위의 병원이라지만 병실에 더 있어야 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내일쯤은 퇴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인 12일 오전에 할멈이 나가는 성당에서 신도 몇사람이 문병을 왔다. 그런데 문병객 중 한 중년부인이 오팔삼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어마! 이지호 선생님 아니세요?”

중년부인은 오팔삼에게 다가와서는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우리 마리아 어머니의 바깥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다기에 왔는데, 선생님이시군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선생님?”

그런데 오팔삼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오팔삼은 몸을 반쯤 일으킨 자세로 어눌하게 물었다.

“누구시더라?”

“선생님, 저 ○○여상 졸업생 허영화 아닙니까?”

“○○여상 졸업생 허영화라고?”

“네. 선생님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오팔삼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그 다음다음날, 학교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혀 지프차로 부산육군형무소에 끌려갔다. 오팔삼의 뒤를 이어 교원노조를 함께한 많은 동료들이 붙잡혀왔다. 교원노조가 군인들에게는 공산주의단체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던 오팔삼은 육군형무소에서 한달 이상 지낸 뒤 다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여름을 넘기고 11월 첫추위가 몰려올 때까지 영어(囹圄)생활을 했다. 그러다 육군특별검찰부에 의해 재판 없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미 직장을 잃은 뒤여서 앞이 막막했다. 대구사범 시절 대전형무소에서 감옥살이할 때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 직후가 더 막막했다.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실직자가 된 오팔삼은 며칠 동안 아내와 의논한 끝에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모두 아버지가 계신 고향마을로 보내고, 자신은 중고교에 다니는 아들 둘과 빈집을 지켰다. 자신마저 시골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아들 둘의 학업은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다 못해 서적외판원으로 나섰다. 여러가지 서적 카탈로그와 중고교 참고서를 보따리에 싸서 학교를 찾아다녔다. 어떤 학교에는 교문에 ‘잡상인 출입금지–––특히 서적 외판원’이란 글이 붙여져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어렵게 수위실을 통과, 교무실로 들어가 책을 팔곤 했다. 그런 생활이 어느정도 몸에 익어가던 1962년 3월 어느날이었다. 어떤 사립여상에 갔더니 교감이 바로 대구사범 동기생이었다. 그가 오팔삼을 자기 책상 앞으로 부르더니 귀에 대고 말했다.

“이지호, 자네 우리 학교에 있어볼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정말인가?”

“마침 국어선생 자리가 하나 비었거든. 당분간은 자네가 교원노조 출신이란 걸 숨기고 말이네.”

이렇게 해서 오팔삼은 그 여상에서 4년 반을 있었고, 그사이에 중단한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리고 그는 부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 9월이었다.

오팔삼은 이런 과거를 얼른 떠올렸다. 1960년대 초중반, 40여년 저쪽의 일, 눈이 초롱초롱한 여학생들의 얼굴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맞다! 이 부인은 오팔삼이 그 여상에서 가르친 제자였고 급장이었다.

“자네, 삼학년 일반 급장이었지? 이제 기억이 나네.”

“아이구 선생님, 부끄럽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십니까?”

그러고 보니 허영화는 학생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살이 붙은 지금도 약간 곱슬곱슬한 머리칼하며, 깨끗한 이마, 하얀 얼굴에 비해서 유난히 큰 두눈, 다소 날카로운 듯한 코, 하관은 조금 빨아서 그때 그 인상이었다. 학기 중간에 대학교로 자리를 옮길 때, 모든 학생들이 교문까지 따라나와 울어대며 법석이었다. 그런데 허영화는 굳게 잠긴 교문 밖으로 언제 나왔는지 택시 타는 곳까지 오팔삼을 전송해주었다.

“그래, 자네는 지금 무엇을 하는고?”

“한때 은행원이었지만 오래전에 그만두고, 지금 전업주부 노릇만 하고 있어요.”

오팔삼은 더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닫았다.

“선생님, 정말 이렇게 뵈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자네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허영화는 같은 성당의 교우인 할멈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문병객 일행이 오팔삼을 둘러싸 기도하고 성가 부르는 동안 그는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돌아갈 때 허영화가 말했다.

“선생님, 몸조리 잘하십시오. 그리고 얼른 퇴원하시기를 저희들 모두 기도하겠습니다. 퇴원하시면 댁으로 한번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5

 

3월 12일 오후, 문병객이 돌아가자 그는 퇴원하겠다고 말했으나 사위가 어림없는 소리라면서 말렸다. 그는 퇴원 대신 응급실에서는 못 보던 텔레비전을 켜면서 할멈에게 부탁했다.

“당신 나가서 신문 좀 구해오소.”

할멈이 나간 뒤 그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보냈다. 귀가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주먹을 휘두르고 멱살을 잡아끌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낯익은 정치인이 보였다. 국회의장이었다. 국회의장 앞으로 신발이 날아가고, 누가 던진 서류뭉치도 흩어지며 휘날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의장 주변의 낯선 사람들이 연방 손을 뻗어 의장을 보호했다. 오팔삼은 한참 만에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이 통과된 걸 깨달았다.

오팔삼은 온몸이 떨리는 분노를 느끼며 화면을 주시했다. 이때 여당 국회의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바닥에 꿇어앉아 절을 했다. 순간 오팔삼의 눈이 뜨거워짐과 동시에 가슴에 격심한 통증이 일었다. 숨을 쉴 수도,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할멈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팔삼은 병상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텔레비전만 난장판인 국회 모습을 비추며 왕왕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