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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오기영의 해방 직후 사회비평활동
한기형 韓基亨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사의 시각』 등이 있음. khhan1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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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적·백 두 세계의 냉정전(冷靜戰)은 날을 따라 가열해가고 있다. 이 두 세계는 각기 자기 빛깔과 같은 조선의 완전 일색을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색세계의 부자유를 원치 않고 백색세계의 착취도 원치 않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흰 백합도 청아한 동시에 붉은 장미의 정열적 미소에도 매혹을 아니 느끼지 못한다. 진실된 경제적 민주와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조선이 된다면, 붉은 꽃, 흰 꽃은 제각기의 향기를 발하며 제각기의 형색으로 경염(競艶)할 것 아닌가. 이러한 적·백의 조화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과연 부당한 일인가?
(오기영 「적색과 백색」, 『삼면불』, 성각사 1948, 155면)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 1909~?)은 잊혀진 인물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잊혀진 것이 아니라 기억되지 못한 것이다. 한 인간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은 전적으로 후인들의 기억에 달려 있다. 역사의 구성이 기억하는 사람의 자의적 관심과 주관적 척도에 달려 있으니 결국 후인들의 태도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관건적 문제이다. 기억의 거세를 강요당해온 한국현대사의 구성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오기영이 주로 활동한 해방정국에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문제가 당면한 핵심적 과제였다. 그러나 민족국가 수립이란 동일한 문제의 이해방식은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이념에 긴박되어 있었고, 그 두 이념의 자장을 벗어난 사고는 존립의 기반조차 얻기 어려웠다. 사회주의 혁명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로의 편입이란 두 길이 현실적 선택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미·소 냉전 대립의 저 압도적 압박은 그 두 가지 이외의 길에 대한 대안적 사고를 어렵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유의 단순화를 야기한 강대국의 대립이 사고의 단순화뿐 아니라 제3의 길에 대한 관심 자체의 폐기를 은연중 강요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좌와 우를 아우르고 또 넘어서는 민족 주체의 정치철학은 두 개의 이념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귀속되어 이해되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공상적인 논의로 평가되었다. 역사의 기록자들은 그들을 ‘중간파’로 분류하였고 당대 현실운동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은 이상주의자 그룹으로 규정하였다.1 다수파의 언어가 아닌 소수파의 언어, 역사는 그들의 말에 무관심했고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기영은 해방정국의 짧은 시간 속에서 정치평론집 『민족의 비원』(서울신문사 1947), 『자유조국을 위하여』(醒覺社 1948), 수기집 『사슬이 풀린 뒤』(성각사 1948), 수필집 『삼면불(三面佛)』(성각사 1948) 등의 집필을 통해 좌·우의 상호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민족의 이념으로 그것을 통합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운동의 선두에 있지는 않았지만 지식인의 시대적 소임에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해방되고 50년이 훨씬 지나도록 세인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말이 소수파의 언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생각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믿으려 했던 우리 현대사의 경화된 관념체계가 그러한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거부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의 의도는 그러한 역사적 소수의 언어 속에 살아 있는 시대의 진실을 더듬어보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대세를 거슬러 자신의 믿음을 말했던 인물들의 삶이 기억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다행이겠다.
오기영은 흥미로운 가족사의 배경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1909년 황해도 배천읍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세형(吳世炯)은 읍내에서 규모있는 상점을 경영했는데 3·1운동 당시 배천읍내 만세시위 주모자의 한사람이었다. 이러한 오세형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오기만(吳基萬), 오기영, 오기옥(吳基鈺) 세 아들의 의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형 오기만은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윤철(尹哲)이라는 가명으로 상해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1931년 여름, 국내에 들어와 공산당 재건운동을 포함한 지하활동에 종사했고, 1934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오기만은 감옥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데 수기집 『사슬이 풀린 뒤』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우 오기옥은 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 말기 치안유지법으로 8개월간 복역하다 해방과 함께 출옥,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고 6·25 와중에 경주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뿐만 아니라 오기영의 매제 강기보(康基寶)도 제3차 고려공산당 평안남북도책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2
가족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과는 달리 오기영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안창호·조만식·오동진 등 서북 계열의 기독교 민족운동가 그룹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1929년 수양동우회에 입단하고 1937년에는 동우회 사건에 연루, 검거되기도 했다. 10여년간 재직하던 동아일보에서 퇴사당한 이유도 그 여파의 결과로 추측된다. 사회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를 동시에 포괄했던 가족사와 그 자신의 경험은 해방 이후 오기영의 의식내용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제로 작용한다.3 “가난하고 세력없는 계급의 동지였던 예수의 정신이 가난하고 세력없는 계급을 위해 싸울 때에는 혁명적이지마는 일단 권세있는 착취계급과 타협하고 그 총검의 비호를 입을 때는 예수는 천국에서 내려다보거나 말거나 이들은 완전한 반동세력으로서 발전”(「예수의 조선」, 『민족의 비원』 249면)한다는 오기영의 기독교관 속에는 그러한 이념 형성의 중층성이 반영되어 있다.
오기영은 도산 안창호의 최후를 끝까지 지킨 몇 안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이를 통해 안창호에 대한 오기영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도산의 죽음에 대한 오기영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민족지도자의 최후와 관련된 흔치 않은 기록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이날 낮 조각가 이국전(李國銓)군이 와서 선생의 데드 마스크를 뜨기로 하였다. 경찰의 눈을 피하여 조심조심 석고를 가져다가 이군과 나와 단둘이서 영구실 문을 안으로 잠그고 석고를 개어서 선생의 사면(死面)을 떴다. 석고가 굳어진 뒤에 이것을 떼내는 순간 선생의 감기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평생에 인자하고 다정하시던 그 눈이시다. (「도산선생의 최후」, 『민족의 비원』 80면)
해방 전 오기영은 주로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그가 보여준 다양한 영역에 걸친 사회비판 의식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평양폭동사건 회고」(『동광』 1931년 9월호)는 해방 전 오기영 사회의식 형성의 한 맥락을 보여준다. 1931년 7월 15일 밤, 평양에서는 ‘만보산(萬寶山) 사건’의 보복을 핑계로 평양 거주 중국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자비한 테러가 자행되었다. 결과는 참혹하여 119명의 사망자와 163명의 중상자가 생기고, 289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오기영은 이를 “민족의식의 오용(誤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일제의 조작에 의해 피압박자의 감정이 광기로 표출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억압되어 내열하던 민족에너지를 이민족에 대한 학살로 폭발시킨 이 사건이 결국은 인간성에 대한 부정과 자기모멸감으로 귀결될 것임을 말한다. 이는 이성의 마비상태에서 상식을 넘어선 이념갈등이 결국 민족의 생명력을 소진시킬 것으로 보았던 해방 이후의 판단과 통한다.
해방 후 오기영은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입사, ‘귀속사업체’의 운영 참여를 통한 국부 확충을 도모한 한편, 본격적으로 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평론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사회비평 활동의 핵심은 ‘이성의 회복’을 통한 민족역량 총결집이었다. ‘이성의 회복’이란 제안이 위기의 시대에 대한 구세(救世)의 방략으로는 비현실적으로 비춰지나 그 나름의 근거가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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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친일부역자·친미파의 갈등이 이미 광기의 수준으로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결과는 파국으로 달려갈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현실의 비이성적 상황에 대한 각성의 계기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해결의 단초라고 오기영은 판단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해 정치와 이념의 소승적 다툼을 넘어서야 하는데 이성을 통한 투철한 현실인식의 확보만이 그 유일한 길이라고 본 것이다.
사려깊은 구안자(具眼者)의 냉정한 관찰이면 이땅에서 이성이 몰락된 것을 인식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의 분열을 슬퍼하고 독립의 지연을 한탄하지마는 의외에도 민족의 통일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긴절하게 요구되는 냉철한 이성이 참혹히도 몰락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성의 몰락」, 『민족의 비원』 7면)
그가 해방 직후 사회비판을 전개했을 때 그 근거는 이성에 기반한 상식의 복원이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사회에서 그러한 비판적 행위는 오기영 자신의 고백대로 좌우를 넘어서는 ‘진실한 용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필집 『삼면불』은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당시 사회에 대한 풍자적 보고서이다. 예컨대, 시내를 질주하는 미군 버스와 피곤에 지쳐 이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서울시민 눈초리의 대비(「다욕」), 해방된 조국에 찾아온 수많은 전재동포(戰災同胞)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는 장면들(「전재동포」), 제주도 4·3사건은 ‘배륙(排陸) 기풍’이 강한 섬사람들이 뇌물에 눈이 먼 관리들과 비협력자를 적색분자로 모는 경찰에 맞서 일으킨 저항이라고 보는 관점(「제주도 사태」), 일제시대에 조선독립단을 선비(鮮匪), 항일 반만군(反滿軍)을 만비(滿匪)라 부르고 해방 후 경찰이 사회주의자를 적비(赤匪)라 부르니 우익폭도는 백비(白匪)라 부르자는 시대적 풍자(「경찰과 수사학」), 좌우로 대립된 교사들 때문에 학생도 좌우로 갈려버리는 반교육적 교육계의 모습(「교육난」), 막걸리 한사발과 노동자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정관리들의 비현실적 양조 금지령(「양조 금지」), 백만원·이백만원 벌금을 물어야 할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근로소득세를 못 내 재산차압을 당하는 제도의 불공정성(「벌금」), 경성전기 간부시절에 사장과 사동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좌익 노조원들에게 인민재판을 받은 일이나 좌익으로 몰려 경찰·검찰뿐 아니라 미군에까지 심문을 받으며 ‘민족적으로 비상한 모욕’을 느꼈던 개인적 경험(「忍辱」)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삼면불』의 사회비판은 자연스레 정치문제로 이어진다. 오기영은 단독선거로 구성된 남한정부를 ‘가능지역정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가능지역선거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그 법률과 행정이 북조선에서까지 시행될 가능성이 없으니 별수없이 가능지역정부가 아니냐는 것이 오기영의 논리이다(「가능지역정부」). 남한 단독선거가 분단을 고착화한 것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남북한이 각기 정부를 세우는 것을 두고 “두 애꾸가 서로 애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인데 이것이 남의 연극이라면 웃고 말아서 무방하려니와 우리 자신의 현실이니 웃지 못할 비극인 것이다”(「북조선 정부」)라고 비꼬는 것 또한 앞의 경우와 통하는 발상이다.
한편, 소수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 정치체제의 반민주성에 대한 비판(「多少同樂」), 공산군의 해방지구가 늘어가고 있는 상황을 장개석(蔣介石) 정권의 부패 탓으로 돌리며 ‘생선(권력)을 소금에 절일 것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야유(「소금과 중국혁명」), 팔레스티나의 분할과 한국의 분단을 대비하면서 ‘성지의 유혈에서 우리의 두려운 장래를 예견’하고 ‘UN은 과연 우리의 이러한 참화를 방지할 능력이 있느냐’라는 질문(「성지의 유혈」),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행사되는 대국의 거부권이 진정한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보장하는 대신 ‘전쟁의 신의 삼차대전 설계도’를 보장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는 예견(「거부권」) 등은 오기영이 국제정세와 한국문제를 긴밀하게 연결해 사고했음을 알게 하는 예이다.
이성의 회복을 위한 오기영의 사회비판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독립에 대한 전민족적 각성에 방향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가 “우리가 지금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나 또는 어느 한편에만 치우쳐 신뢰하여서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것은 이미 사십년 전의 전철이 있고 이래 사십년 동안 우리 노예생활의 피묻은 기록이 있습니다”(「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 『민족의 비원』 131면)라며 해방 후 정세가 근대 초기 상황의 재판이 될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아래의 글은 불행한 역사의 재연을 막고자 하는 오기영의 의도가 현실정치가를 향해 표출된 것으로 특히 주목을 끈다.
오늘의 유고는 어찌하여 철막 속에서 외톨이의 고아로 고민하고 있는가. 여기 공산주의의 국제주의로서의 성격을 다시금 비판하며 공산주의자의 민족주의적 양심의 고민을 볼 수 있다. 일당의 지도자로서는 그 당의 이해를 위하여 싸울 것이나 일 민족의 지도자가 될 때에는 그 민족의 이해를 더 중시하는 것이 지도자로서는 더 양심적 지도자인 것이다. (…) 사회주의의 건설은 반드시 그 민족의 이해를 슬라브 민족의 이해와 같이하여야만–때로는 그 민족의 이해를 슬라브 민족의 이해 앞에 희생하여야만 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의 국제단결은 불가능한 것인가? 내정간섭에 반대한 유고의 티토가 비로소 이 숙제를 세계적 주시 속에 공개하고 민족의 양심에 고민하는 중이다. 조선민족 중에서는 이러한 고민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 것인가. (「유고의 고민」, 『삼면불』 160〜61면)
이 글은 1948년 7월 12일에 씌어졌다. 이때는 1948년 5월 31일 남한 단독 제헌국회 개원, 7월 헌법공포,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이에 맞서 북한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남북한이 제도적 분단을 위한 체제정비를 추진하는 과정에 씌어진 이 글은 한반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의식하고 있다. 한국의 티토가 될 것을 암시하는 가운데 오기영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민족적 대의에 복무하고 민족의 이성에 충실하기를 촉구했다. 끝내 그의 바람은 관철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기영의 평론활동이 섬세한 정세파악과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남북 분단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오기영은 민족 내부의 전쟁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반도가 미·소의 극단적 대립에 휘말려 있고 국내 각 정파들이 강대국의 세계분할 구도에 편승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내전의 발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남북의 분단은 항구화할 것이요, 그리하여 반신(半身)은 소측에서, 반신은 미측에서 가열한 냉정전쟁(冷靜戰爭)의 도구가 될 것이며 만약 이 사태가 발전하는 날, 극동의 화약고는 마침내 폭발할 우려조차 기우(杞憂)라 단정할 용기도 없는 것이다. (「민족위기의 배경」, 『자유조국을 위하여』 40면)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제정 러시아 때부터 가지고 있는 슬라브 민족 생존권의 신장’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것은 ‘정체(政體)가 변혁한 후에도 변혁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오기영은 보았다. 미국 또한 생산력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군수재벌의 ‘무기 소비처’를 구하기 위해서는 적을 발견하고 그 적에 대한 ‘세계의 적개심’을 환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미국이 발견한 적이 공산주의라고 그는 진단했다.
여기에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일본의 재무장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그는 거론한다. 미국이 일본을 원조하여 부흥시키는 것은 대소전선(對蘇戰線)을 염두에 둔 것이며 이 때문에 일본의 “군사적 잠재력은 군벌의 건재와 함께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일본의 재무장」, 『자유조국을 위하여』 194면)고 그는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사실이 되어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이루었으며, 동아시아 사회에서 변형된 형태의 제국주의적 경제지배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기영은 바로 이 점에 유의했다. 그는 일본의 재무장을 단순히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이란 관점에서만 파악하지 않았다.4 그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 속에서 새로운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주목한 것이다. 오기영은 우가끼 카즈시게(宇垣一成)가5 “우리는 피로써 (미국에) 배상할 것이다”(「일본의 재무장」, 『자유조국을 위하여』 202면)라고 한 말에 전율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피로써 미국에 보상하면 그 출혈의 댓가는 ‘물을 것 없이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의 피를 마시는 것’에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기영은 이러한 분석 속에서 소련 견제를 위해 독일의 군비확충을 용인한 결과 자신이 먼저 희생된 영국의 전철을 밟지 말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또한 그는 영국의 그릇된 정책이 얼마나 많은 생명의 살육과 문화 파괴의 계기가 되었던지를 미국에 묻고 있다. 그의 예견은 말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전후 지원이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발본적 자기비판의 기회를 박탈했고 동양 맹주로의 복귀를 끊임없이 꿈꾸게 하는 빌미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오기영의 정세분석은 민족 내부의 갈등, 미·소 양국의 대립,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이란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속에는 한반도 문제를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국제적인 공통 관심사로 확산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다. 한반도의 운명이 곧 세계 인민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발상 속에 들어 있는 세계사적인 안목도 소중하지만, 강대국들로 하여금 정책을 전환하도록 요구한 그 지성의 자세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항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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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영은 평론활동의 와중에서 자기 가족의 식민지 체험을 『신천지』(1946년 3월호~6월호)에 4회에 걸쳐 “사슬이 풀린 뒤”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이 수기는 1948년 상당한 개작을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속에는 사회주의 운동가의 식민지 시대 활동상이 들어 있어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한국의 식민지 체험은 ‘문학적 기록’의 풍요로운 창고인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 그 시대에 대한 ‘체험’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한 이념 대립과 경직된 정치환경 때문이다. 검열에 저촉되는 내용들은 일괄 폐기되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재구성하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사슬이 풀린 뒤』는 분단상황이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기 이전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식민지 상황에 대한 어떤 원형적 기억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오기영은 이 책의 서장인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우리 당대뿐이 아니라 길이 자손에게까지 이 피묻은 기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침략하였던 야만에 대하여 두고두고 적개심을 가져야 하며 그 적개심을 자손에게까지 상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15면)고 말했다. 기억의 상실과 폐기야말로 역사에 대한 가장 심각한 훼손이라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이 책은 오기영의 유년시절과 3·1운동, 혁명가 오기만의 활동과 죽음 등을 중심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천진한 시선으로 그려낸 3·1운동의 모습은 우리가 3·1운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비장 혹은 숭고에 가까운 고정관념과는 상당히 벗어나 있다. 3·1운동을 지방생활사의 관점에서 그려낸 탓에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대담론적 분위기보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소요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따뜻한 감동의 시선에 싸여 독자에게 전달된다. 예를 들어 “‘글쎄, 얘야 안에 있어! 꿰져 죽으려고 그래?’ 등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걱정에 ‘죽어두 좋아요’ 하는 대답을 문간에 남겨놓고 나는 다시 행길가로 뛰어나갔다”(28면)라거나 아이들끼리 조직한 만세시위로 인해 헌병대로 잡혀갈 때 동네사람들이 먹을 것을 마련해주며 전송하는 장면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대목들은 3·1운동을 한 인물의 성장기에 경험한 가장 빛나는 시간으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저자의 형인 오기만의 활동과 비극적 죽음을 다루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무거워진다. 배재고보 출신으로 20년대 후반 상해로 망명, 상해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오기만은 1931년 6월 초순경 김단야(金丹冶)의 지시를 받고 국내에 잠입, 김형선(金炯善), 한국형(韓國亨), 심인택(沈仁澤) 등과 지하조직활동에 종사하게 된다.7 국내 활동중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오기만은 상해로 탈출했으나 1934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오기만을 실은 배가 인천항에 들어오고 형을 마중하기 위해 항구로 나간 동생의 시선에 잡힌 혁명가의 모습, 형제간의 이 비극적 해후는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부조된다.
앞장선 한사람과 뒤에 선 한사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복경관이었다. 그 중간에 서서 하이칼라 맨머리 바람에 검정 중국옷을 입은 형님의 두 손을 채운 쇠수갑은 아침 햇발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갑판에 나선 채 잠깐 멈칫하는 듯하였던 그 눈은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는 듯하였다. 나는 그가 나를 찾는 것인 줄을 얼른 알 수 있었다. 가슴속으로 한줄기 무거운 것이 흘러내림을 깨달았다. 내가 그 눈에 발견되려는 노력은 필요치 않았다. 형님은 곧장 나를 발견한 것이다. 두눈을 한번 크게 뜨면서 반가움이 잠깐 나타나다가 이내 무심한 얼굴로 부두를 내려섰다. (130~31면)
1936년 6월 11일, 오기만은 폐결핵의 악화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가족들의 헌신적 간호에도 불구하고 오기만은 1937년 8월 23일 끝내 숨졌다. 오기만은 죽기 전 유언처럼 일본의 패망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일본은 제 무덤을 파는 짓이야. 만주를 유지하려니까 북중(北中)에 쳐들어가는 것이나 만주침략 이후 중국민족이 얼마나 깼다는 것을 모르는 놈들이다. 물론 세계가 이번까지 그냥 내버려둘 리도 없구. 그래서 내 생각엔 이것이 세계전쟁의 시초라고 보여져. 꼭 세계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러면 뻔하지 그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틀렸다. (181면)
『사슬이 풀린 뒤』는 치밀한 구성이나 극적인 박진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구성적 긴밀함을 얻지 못한 것은 작자의 창작의도가 작품적 완결보다는 자신과 가족이 겪은 참혹한 기억을 풀어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말한 대로 야만의 시대에 대한 후인의 기억상실에 날카로운 반성의 계기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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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균형 속에서 민족자주에 의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염원했던 오기영은 끝내 절망한다. 그는 “조선의 정치가는 너무 절대(絶對)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치는 절대로 ‘절대’가 아니다”(「이성의 몰락」, 『민족의 비원』 10면)라고 절규했지만 자기고민의 현실적 방향성을 얻지는 못했다.
오기영은 1949년 초 월북한다. 이때 정지용과 동행했다는 설이 있으나8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기영은 왜 월북을 선택했는가. 일단 사회주의로의 사상적 선회는 아닌 듯하다.9 오기영은 월북 몇개월 전인 1948년 10월 9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3차 흥사단 국내대회에 참석, 「동포에게 호소함」이란 제하의 동의안을 제출한다(『흥사단오십년사』, 대성문화사 1964, 164면). 이 시기까지는 도산사상 지지자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기영이 월북한 이유는 남한에서의 좌우합작 활동이 더이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을 근거지로 해서라도 통일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평론가라는 객관적 위치의 유지가 더이상 불가능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가 월북 후 통일전선 단체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남조선 언론협회 대표자격으로 활동한 것도(坪江汕二 『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 東京: 巖南堂書店 1959, 518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된 근거이다.
그러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민족통합의 길보다 북한의 정치적 지향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의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은 남북한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마지막 문건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1949. 6. 25~28, 평양 모란봉극장)의 보고문 내용은 투식화된 공문서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참고로 보고문의 일부를 제시한다.
리승만 등 매국도당은 우리 국토의 절반을 미국 제국주의 군사기지로 내어주려고 ‘한미군사협정’까지를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 괴뢰들은 우리 민족을 미국 전쟁방화자들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멸망의 구렁에 처넣으려고 망국 멸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리승만 도당의 소위 ‘국방군’을 지적하여 인민을 살육하는 흉기를 가진 살인단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토의 분열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조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국통일의 조건이 되는 미국의 철퇴를 겁내고 있습니다. (…) 리승만 정권도 그것이 아무리 하잘것없는 괴뢰정권이요, 한줌도 못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를 토대로 삼았다 할지라도 그네들은 자기네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항거하며 반동을 계속하리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문헌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회 서기국 1949, 98~100면)
북한행을 결심한 순간 오기영이 지녔던 신념의 성취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목표는 좌우를 넘어선 민족 주체의 자주적 통일국가였지만 냉혹한 현실논리 속에 그의 고뇌는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기영은 그가 선택한 민족적 대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끝내 자기 신념의 현실적 기반을 만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에 대해 당대의 사회적 평가는 매우 편협했다. 다음의 글에는 당시의 세평에 대해 오기영이 품었던 비장한 자기다짐의 일단이 잘 드러나 있다.
너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니요, 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고 혹은 중간파라, 심하게는 기회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자유주의자로 자처해본다. 모두가 제 편이 아니면, 자기 주장의 공명자(共鳴者)가 아니면 적으로 몰아치는 이 혼돈 속에서 이러한 비판은 자신을 항상 좌우로부터 공격받는 위치에 두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편당적인 공격과 비난을 쌍방으로부터 받되 견딜 만한 용기가 없이는, 진실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投筆의 실패」, 『민족의 비원』 5면)
필자는 오기영이 말한 ‘이성의 회복’이란 명제 속에 일정한 역사철학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인식 속에는 주체적 근대화를 추구한 애국계몽기의 노력이 좌절된 후 37년간 야만의 시대를 겪은 한 지식인의 경험적 예지가 배어 있다. 즉 이성의 회복이란 화두는 애국계몽기 이후 새롭게 찾아온 근대국가의 주체적 건설에 대한 지식인적 고뇌의 산물인 것이다. 이성의 기반 없이는 참다운 근대의 성립은 불가능한 것이고 야만의 얼굴을 내장한 근대적 메커니즘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이성의 합리성과 냉철한 현실분석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역사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이 오기영이 행한 해방 직후 집필활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의 운명은 주어진 삶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태도’ 속에 표현된다. 후천적으로 획득된 지식이 선천적인 운명 속에 개입하는 시간적 도착과 역전이야말로 지식인이 스스로 선택한 하나의 숙명인 것이다. 지적 쎈서의 예민한 작동 속에서 지식인은 자기감각의 ‘배타적 타당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지식인이 갖는 고유한 삶의 방식이니 오기영이 걸었던 길은 그러한 운명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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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파라는 단어는 해방정국의 정치이념을 구분하기 위한 개념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주에 포함된 인물들이 기회주의자, 혹은 애매한 인식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따라서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잘못된 선입관을 주입할 가능성이 있다.↩
- 오기영의 가족관계와 이력에 대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가 재간행한 『사슬이 풀린 뒤』(2002)의 ‘동전 오기영 연보’를 참조할 것. 참고로 성균관대 출판부는 최근 『사슬이 풀린 뒤』 외에 『진짜 무궁화』(『삼면불』의 개제)와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등 오기영의 저서 네 권을 다시 발간하였다.↩
- 오기영은 민족주의자 부친과 사회주의자 형제들 사이에서 겪은 정신적 갈등을 “내 아버지는 우익에 속한 인물이요, 내 아우는 좌익에 속해 있다. (…) 그러나 비통한 심정이거니와 나는 아버지의 가는 길, 아우의 가는 길이 모두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유일무이한 똑바른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하물며 이 두 가지 길은 모두 조국독립에 통해 있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에 통해 있음을 간취할 때에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상의 조화에서만 독립과 번영의 가능을 믿는 한 이들의 가는 길은 더욱더 독립과는 거리가 멀어가고 있음을 슬퍼하는 바이다”(『민족의 비원』 4면)라고 술회한 바 있다.↩
- 미국이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새로운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오기영은 ① 러일전쟁 승리자로서의 긍지 ② 국민에 대한 철저한 반공교육 ③ 패전의 원인을 소련의 무신(無信)으로 생각하는 것 ④ 반소적(反蘇的)인 일본이 미국 단독 점령하에 있는 것 ⑤ 대소전(對蘇戰)의 동맹군이 필요한 상황 ⑥ 육해군에 걸쳐서 강력히 훈련된 인적자원의 존재 ⑦ 실전경험과 그 용맹성 ⑧ 군수공업의 수준이 높아 보급전선의 단축에 유효한 것 등을 들고 있다(「일본의 재무장」).↩
- 6대 조선총독이었던 우가끼 카즈시게에 대해서는 미야다 세쯔꼬(宮田節子) 「일본인의 조선관, 전전(戰前)과 전후(前後)」,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이형랑 옮김, 일조각 1997) 참조.↩
- 오기영의 국가론과 경제이념 등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장규식의 「해방정국기 중간파 지식인 오기영의 현실인식과 국가건설론」, 『한국 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논총 3, 지식산업사 1997)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 미·소 협조와 좌우 합작으로 통일민족국가 건설 ㉡ 독재, 착취, 외국의 간섭 없는 자유국가 건설 ㉢ 민주적 노동정책을 통한 경제적 민주화와 생산력 증진의 동시 추구 등으로 오기영의 입장을 분석했다. 장규식은 이러한 오기영의 논리가 영국 자유당 계열의 신자유주의론과 도산 안창호의 인격혁명론에 근거한 대공주의(大公主義)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장규식은 오기영의 그러한 논리가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다분히 도덕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한계에 머물렀으며 중간파의 사상적 계보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했던 배성룡의 좌파적 입장과 구별되는 우파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므로 기존 연구자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 오기만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엮음 『사상휘보(思想彙報)』(제2호), 1935,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건’(박경식 엮음 『조선문제자료집 제8권-1930년대 민족운동』, 삼일서방 1983, 19〜20면); 『동아일보』 1934년 5월 8일자 기사 「상해한청위원장 오기만 작일압래(昨日押來)」;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청계연구소 1986) 97〜101면; 박태균 『조봉암 연구』(창작과비평사 1995) 74〜78면 참조.↩
- 당시 소문에 대한 딸 오경애의 증언과 시인 김영랑의 「문학이 부업이라던 박용철(朴龍喆)형」(『민성』 5권 10호, 1949. 10. 1)에 “그대 생각 불현듯 치밀어와 다시 젊어지는 듯싶고나 지용(芝溶)마저 민족의 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는 둥 수선한 세상 어찌 혼자 남은 듯도 싶어서”와 같은 기록에 근거함.↩
- 월북 1년 전에 씌어진 글에서 오기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과연 쏘비에트 사회에서 근로계급은 아무 불만이 없이 행복스러운가. 무엇보다도 첫째로 쏘비에트 사회에는 자유가 있는가. 쏘비에트의 지배자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이 나라 근로계급의 자유를 자랑할지라도 세계는 그것을 믿지 아니한다. 이 사회에도 자유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이 사회에도 자유는 없는 것이다. 자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냉혹한 독재가 있는 것이다.”(「새 자유주의의 이념」, 『자유조국을 위하여』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