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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거대 스포츠 행사가 남기는 것

 

 

정준영­ 丁俊榮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화평론가. 저서로 『만화보기와 만화읽기』 『텔레비전 보기–––시청에서 비평으로』 등이 있음. junchung@dongduk.ac.kr

 

 

행사는 끝났지만……

 

한해 두 번의 거대 스포츠 행사라는 숨가쁘던 일정이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스산한 가을바람과 함께 ‘Be The Reds’ 티셔츠가 거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더니,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으스스한 소식에 밀려 ‘북녀 응원단’의 어여쁜 모습에 대한 기억도 급속히 희미해져가고 있다. 언론보도는 발빠르게 대통령선거 이야기로 달려가며, 술자리의 환담에서도 스포츠를 얘기하는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월드컵을 달구었던 자발성의 향연, 통일에의 기대를 부풀게 하던 북녀 미인의 웃음은 이제 한여름밤의 꿈으로 그냥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앞으로 우리 사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스란히 일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일까?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몇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월드컵 직후 사상 최대수준으로 치솟던 프로축구의 관중수가 불과 두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이런 경험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직후에도 이미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프로축구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월드컵 기간중 거리를 메운 수많은 군중들이 축구를 좋아해서 모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월드컵에 대한 열광이 ‘대〜한민국’에 대한 열광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다소의 한정이 필요하다. 불과 석달 후에 벌어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을 성원하는 열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회장소가 부산이었고, 종목이 많아 집중력이 떨어졌으며, 중반 이후 메달 레이스의 박진감이 감소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과거 타국에서 열렸던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을 지켜보며 가슴 졸이던 느낌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월드컵이 끝난 후 한동안 그 한달의 흥분을 정리해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펼쳐진 바 있다. 당장 월드컵의 경제적 효과를 따져보는 손익계산서가 제출되었고,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얘기하는 논의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보고자 하는 시도까지 엿보였다. 마찬가지로 이번 아시안게임과 관련해서도 남북관계의 변화라든지 통일에 대한 전망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논의에서부터 북한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얘기들이 짧게나마 제출되었다. 하지만 두 대회의 의미를 전유하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선거라는 목전의 대사 때문에 잠시 잊혀지고 있지만 앞으로도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의 경험이 끊임없이 환기되어 새로이 의미규정되는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이다. 그 결과 두 대회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고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스포츠 경기의 승부만큼이나 예측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 스포츠 행사의 효과를 논의하기에 앞서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가 독립변수가 되는 사례는 그다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말이다. 축구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고 권투 때문에 북아일랜드 내전이 잠시 휴전에 들어간 적도 있지만 거대 스포츠 행사의 개최에 따른 직접적 경제효과를 제외한다면 대개의 경우 스포츠는 여타 정치·경제·사회적 변수들의 종속변수이거나 기껏해야 매개변수 정도일 뿐이다. 그나마 그런 경제적 효과조차 단기적인 것에 불과할 뿐 장기적인 지속력을 갖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올림픽과 월드컵 등 거대 스포츠 행사의 효과는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무리한 투자를 감당하지 못해 올림픽 개최 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몬트리올의 사례는 그중 가장 극단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거대한 참여규모 때문에 우리의 눈이 잠시 흐려진다 하더라도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올해 우리나라에서 개최됐던 대회들 역시 독립변수의 역할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일부 분야에서조차 다른 조건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효과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스포츠 행사의 효과가 덧없는 것임은 과거 우리 사회가 치러본 바 있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경험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비록 공동개최이지만 월드컵을 개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양대 스포츠 행사를 모두 개최한 10개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수도가 아닌 도시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두번째 국가가 되었다. 거대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한만큼 앞으로도 이 숫자는 그리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공교롭게도 지난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중국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으며, 1988년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2개를 획득하여 세계 4위의 성적을 거둔 바 있다. 그러나 그때의 호성적이 그대로 우리나라의 번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번영을 구가하던 우리 경제는 올림픽 이후부터 불황에 빠져들어 고난의 90년대를 보내야 했다. 90년대 중반 한때 반짝한 적도 있지만 곧 IMF 환란을 겪으며 30여년의 경제개발 기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올해 열린 두 대회에서의 호성적이 국운상승의 기운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낙관적인 기대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울 올림픽에서의 열광이 지난 15년 동안 어떤 식으로 사그라들었는지를 진지하게 참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포츠의 세계화

 

스포츠가 종속변수라고 해서 거대 스포츠 행사가 그 주최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영향의 범위와 크기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거대 스포츠 행사는 단순히 그 규모 때문에라도 주최국에 다소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 당장 거대 스포츠 행사를 치르기 위해 건립되는 경기장들은 경제에 대한 영향은 물론 국민들의 체육활동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월드컵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중집회를 이끌어내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의 강도가 더욱 클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이런 거대 스포츠 행사를 치름으로써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겨났고 생겨날 것인가? 먼저 스포츠 내적인 부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포츠의 세계화 경향이다. 스포츠를 흔히 세계인의 언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스포츠의 세계화라는 말이 다소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대 스포츠의 특성 중 하나는 보편성이고 그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장 여러 종목의 운동경기들을 모두 포괄하는 유개념으로서 ‘스포츠’라는 보통명사 자체가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이다. 단수형을 사용하느냐 복수형을 사용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세계화란 스포츠 성취에 대한 기대수준 또는 평가의 세계화를 의미한다. 권투와 유도 등 일부 투기종목이나 마라톤 등을 제외한 국제경기에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해방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기 전 우리 스포츠의 성취는 주로 아시아권을 기준으로 판단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프로화가 이루어졌고 평가기준의 세계화도 가장 빨리 자리잡혔던 권투조차 1966년 김기수가 첫 세계타이틀을 딴 이래 세계수준의 기준이 일반적으로 적용된 것은 홍수환을 비롯해 세계타이틀 보유자가 이어졌던 1974년 이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금메달이 국민적 염원으로 평가되고 금메달 수상자에게 엄청난 포상금이 지급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평가기준은 아시아권이었고 특히 아시아권의 스포츠 강국인 일본과 새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등장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가던 중국이었다. 이 시기 우리 스포츠의 목표는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에서의 탈아시아를 향해 줄달음치던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올림픽 금메달과 프로권투에서의 연이은 세계제패에 힘입어 기준을 높여가던 우리 스포츠계에 세계수준의 기준이 자리잡을 기반이 마련된 시기는 80년대 초반이었다. 선동열·김재박·한대화 등의 활약으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고, 이제는 전설이 된 박종환 사단의 투혼으로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 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며, 19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로 세계 10위에 오르고부터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성취는 여전히 유보조건이 달려 있었다. 먼저 야구는 세계적으로 별로 보급이 되지 않은 스포츠이다. 게다가 아마추어들만이 참여하는 세계선수권대회는 미국과 일본의 프로선수들이 빠져 있어 진정한 세계 챔피언전으로는 격이 떨어진다. 또 청소년축구대회의 성취는 어릴 때부터 승리에 집착해 기본기도 팽개친 채 이기기 위한 경기에 몰두해온 우리 청소년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4강 진출의 의미가 반감되었다. 당장 성인야구에서 미국과 일본의 프로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되는 우리 야구가 청소년야구에서는 대만과 함께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에 비견되었다. 마지막으로 LA 올림픽은 세계 스포츠계의 강자인 소련과 동구권이 불참한 반쪽 대회로 치러져 우리 대표팀의 업적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 4위를 차지하면서 우리 스포츠의 평가기준은 마침내 아시아권을 완전히 넘어서게 되었다. 아시안게임에서 중국과 마지막까지 종합 순위 1위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12년 만의 통합올림픽으로 치러진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함으로써 우리 스포츠가 세계 수준에 올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세계 7위로 다소 순위가 떨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적어도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가라앉히는 데 기여했다.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에 대한 포상금이 재조정되는 등 금메달에 대한 집착이 다소 완화된 것은 이런 변화된 분위기를 반영한다. 육상과 수영 등 이른바 기초종목에서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양궁과 권투, 유도 등 메달박스가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 스포츠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는 믿음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한 것은 우리 스포츠계에 존재하던 마지막 장벽 중 하나가 깨져나간 것을 의미한다. 월드컵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세계 챔피언전으로서의 월드컵이 지닌 권위와 관계가 있다. FIFA에 가입한 204개의 협회 숫자가 보여주듯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진정으로 세계적인 스포츠이다. 게다가 월드컵은 여러 종목의 세계선수권전 중에서도 가장 전통깊은 대회의 하나이며 출발부터 올림픽과 달리 프로선수의 참가를 허용해 진정한 세계 챔피언을 가린다는 목적을 표방했다. 올림픽에서 세계화를 달성한 우리나라가 그 다음 목표로 월드컵에 촛점을 맞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스포츠계의 열망을 월드컵 첫승이 이어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번 물꼬가 터지자 비교적 순조롭게 획득할 수 있었던 올림픽 금메달과 달리 월드컵 첫승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두번째 본선진출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이후 1998년까지 4번의 월드컵을 거치는 동안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따금씩의 무승부로 1점씩의 승점을 추가하기는 했지만 첫승과 3점의 승점, 16강 진출은 이뤄질 듯하면서도 막판에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처럼 우리 축구를 비켜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축구의 급격한 실력향상,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참패한 것 등은 오히려 국민들의 좌절감을 돋우었다. 박찬호와 박세리 등 여타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축구만 아시아권으로 뒷걸음치는 상황이 빚어졌던 것이다. 가장 광범위한 팬 기반을 지닌 인기 스포츠이고 매년 일본과의 정기전을 이어올 만큼 민족적인 스포츠인 축구에서의 이런 부진은 열망을 더욱 상승시키는 데 기여했다.

지난 월드컵에서의 예기치 못했던 성과는 열망의 기운을 상당부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도 육상과 수영 등 기초종목에서의 금메달 획득이나 월드컵 우승과 같은 목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이제까지와 같은 무게를 갖고 국민들을 장악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점차 스포츠는 일상화될 것이며 우리는 좀더 여유를 가지고 스포츠를 대하게 될 것이다. 대표선수 중심의 엘리뜨 스포츠가 서서히 약화되고 생활체육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커지리라 예상된다. 실상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이미 그런 발전을 어느정도 확인한 바 있다. 금메달 수상자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금메달 획득 여부를 둘러싸고 마음 졸이는 일도 줄어들었던 것이다. 대신 장애를 뛰어넘은 금메달 획득이랄지 북녀 응원단의 인기 같은 다양한 내용들이 언론보도를 장식했다.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96개의 금메달이 너무 많은 탓만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이제 금메달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진 상황을 반영한다. 지난 월드컵에서 자국의 대표팀 이외에도 잉글랜드나 브라질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일본인들처럼 우리도 점차 스포츠를 즐기는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다.

스포츠가 일상화되면 이제까지 스포츠에 부여되던 다양한 스포츠 외적 의미도 약화될 것이다. 서울 올림픽에서 정점을 이루었듯이 독재체제의 요구와 남북간의 체제대립이라는 요인이 결합되어 80년대까지의 우리 스포츠는 항상 과도한 정치적 부하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은 상당부분 완화되었으나 지난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드러났듯 위에서 강요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는 여전히 강력한 민족주의의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이 커다란 국민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 박찬호·박세리·최경주의 활약에 오늘도 많은 국민들이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 등은 대중매체의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민족주의의 운반물이라는 스포츠의 한 측면을 감안하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극단적 규모로 표출되었던 민족주의는 역으로 스포츠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관행을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서구 선진국의 스포츠 상업주의 사례를 볼 때 이 끈이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겠지만 그 강도는 훨씬 약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스포츠가 일상화되면서 각 사회구성원들이 스포츠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양해질 것이라는 점과 연관이 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는 강력한 하나의 의미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가 발전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단일한 의미가 약해지면서 이제까지 억눌려온, 각자의 현실에 기반한 독자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발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 스포츠는 냉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스포츠가 다양하고 독특한 정체성 획득의 수단이 될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스포츠는 단순한 여가활동으로 축소되어버릴 것이다. 이 속에서 축구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남겠지만 직접 참여와 관람을 포함한 스포츠 활동 자체는 다양화될 것이다. 더불어 스포츠의 계층간·세대간 분화는 더욱 가속화되리라 예상된다.

이런 속에서 스포츠를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은 경제논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스포츠의 상업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현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 외적 논리의 개입에 의해 그 발전이 제약돼왔다. 당장 모든 프로팀들이 많은 적자에도 불구하고 모회사의 기업 이미지를 위해 존속하고 있으며, 외국 프로팀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인 특별석의 도입도 평등주의 논리 때문에 미뤄지고 있다. 프로야구의 선수협의회 구성과 같은 단순한 사안조차 구단의 권위주의적 태도 때문에 해결점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가 일상화되면 이런 경제 외적 영향은 상당부분 줄어들 것이다. 주5일 근무의 일반화와 여가의 증대가 그런 발전을 촉진시킬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중매체의 영향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상업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과정에서 대중매체는 그 첨병으로 지금까지에 비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대중매체에 의해 민족주의란 틀 속에서 가공된 스포츠 스타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현상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월드컵 기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 스포츠와 에로티씨즘이 결부되는 양상도 점차 일반화될 전망이다. 정교해진 카메라 기술은 공보다는 남자선수의 머리 모양이나 여자선수의 몸매를 좇는데 더 자주 활용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헉슬리(A.L. Huxley)가 예견했던, 즐거움의 과잉이 사회성원들의 불만을 모두 해소시키는 사회로 점차 움직여갈 것이다.

결국 스포츠의 평가기준은 세계화되지만 그에 부여되는 의미는 점차 약화되리라는 것이다. 대신 스포츠의 의미는 점차 세분화·다양화되고 그 과정에서 계층간·세대간 차이가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민족주의와 결합한 상업주의가 스포츠 열기를 진작시키고자 애를 쓰겠지만 짐작컨대 하나의 스포츠 행사가 지난 월드컵에서처럼 강력한 국민통합의 계기가 되는 사례를 앞으로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스포츠 행사와 문화변화

 

촛점을 스포츠 바깥으로 돌려보면 어떤 점들을 꼽아볼 수 있을까? 거대 스포츠 행사의 영향이 가장 크게 드러날 부문으로는 문화부문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내용들이 이미 문화부문과 상당부분 중복되는데, 스포츠는 여타의 문화적 부문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역이다. 실상 현대 스포츠의 성립 초기부터 스포츠는 개인의 성격이나 집단의 가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체육정신’(athleticism)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이런 가정은 그 자체가 일정한 이데올로기성을 지니지만, 이데올로기가 지닌 실제적 효과를 감안할 때 그냥 허구로만 넘겨버리기도 어렵다.

스포츠 행사가 촉진시키는 문화변화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변화를 가능케 한 사회적 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 중 하나로 여가의 확대와 여가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80년대 초까지의 경제개발 시기 동안 우리 사회의 경제적 환경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특징지어졌고, 생존을 위한 활동에 쫓기는 가운데 여가활동은 사치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올림픽 직전의 3저 호황에 힘입어 경제가 활성화되고 70년대 이래의 노동운동이 서서히 결실을 맺으면서 우리 사회에도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몇가지 수치를 인용해보자. 우선 1988년과 1990년 사이에 월평균 근로시간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시간당 임금이 평균 21.4% 급증하였다. 또 1989년에는 국민소득 5210달러를 달성하였다. 소득이 늘어나면서 내구소비재의 수요가 증가하여 자유시간을 늘렸다. 특히 이 시기에 빠른 속도로 진행된 자가용의 보급이 여행문화를 활성화해 행락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한국의 자동차 내수시장은 1985년까지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올림픽을 전후해 급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에 자동차 보유량은 연평균 23〜30% 증가하였으며 특히 승용차의 내수는 1986년 15만 6천대에서 1987년 24만 9천대로 폭증하였고 이것이 1989년에는 다시 51만 4천대로 늘어났다. 나아가 1988년부터는 해외여행자 수도 급격한 증가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1985년 88만 6천명에 불과하던 출국자수가 1990년에는 233만 3천명에 이르러 5년 사이에 거의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여가의 확대가 올림픽 개최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고 일본도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 직후부터 대중 여가시대에 돌입했다는 점에서 올림픽과 여가의 확대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를 상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가활동은 물적 토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여가의 확대가 올림픽의 직접 효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올림픽의 효과는 이런 여건의 변화와 맞물려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여건의 변화와 올림픽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번째 변화는 전반적으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는 점이다. 여가를 향유할 물적 토대가 마련되고 올림픽을 계기로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문화에 관심을 쏟을 분위기가 성숙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문화의 위상이 상승한 데는 올림픽 이후 국가위상이 올라가고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사회적 이슈가 상당부분 줄어든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일을 한다는 신세대들이 출현하여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특히 80년대 말 이후 힘든 일을 기피하고 휴일 작업을 기피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써비스 업종의 이상 비대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문화부문에서 청소년 세대가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시기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들은 정체성의 추구과정에서 기성세대에 비해 문화에 대한 욕구가 높은 편인데,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대중문화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90년대 초반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변화는 우리 사회의 세계화이다. 세계화가 단지 스포츠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거대 스포츠 행사는 개최국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전파한다. 이는 이들 행사가 전세계적 미디어 이벤트로 가공되기 때문이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때 텔레비전 중계가 도입되었으며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에서는 최초로 위성중계 씨스템이 도입되어 각국의 선수들이 각축을 벌이는 장면은 물론 개최지의 풍물을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송출해주었다. 다른 한편 거대 스포츠 행사는 세계인의 문화를 개최국에 들여오기도 한다. 스포츠 행사를 국가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주최국은 자국의 이미지가 세계인에게 어떤 식으로 비칠 것인가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보신탕 업소의 정비가 있었다면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는 화장실의 대대적인 개선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ESPN의 한 축구 논평가는 수원 월드컵 구장의 화장실을 가장 깨끗한 화장실로 꼽기도 했다. 변화의 영향이 단순히 외적 환경에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스마일 운동 등의 캠페인 과정에서 우리는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외국의 문화에 몸을 담그게 된다. 그 결과가 거리응원 후 쓰레기를 치운 ‘붉은악마’의 행동처럼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부문의 변화도 분명 적지 않다.

이런 비가시적 부문의 변화 중 하나는 물질적 여유, 문화의 비중 증대와 관련하여 이른바 매니아 문화가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매니아란 취미분야에 대한 지식을 고도로 축적하여 일종의 비공인 전문가가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매니아는 일부 상류층이나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 분야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나 물질적 여유와 함께 90년대 이후 그 구성원과 분야가 크게 확대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매니아의 확산에는 문화의 비중이 증대하고 즐김의 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졌다는 점, 인터넷의 발전으로 이들이 집합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쉽게 마련되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지난 월드컵에서 거리응원을 주도하여 월드컵 분위기를 확산시킨 붉은악마도 따지고 보면 이런 변화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붉은악마의 출현이 즐김의 풍조, 매니아 문화의 확산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60년대 중반 이후 서구사회에서 발전한 써포터즈 문화와 비교하면 붉은악마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국 프로축구의 써포터즈들이 노동계급 출신의 하층 저학력 청소년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팀에 대한 주인의식과 승리를 강조하는 노동계급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면, 붉은악마의 주축은 중산층 출신의 고학력 집단으로서 연령도 10대보다는 2, 30대가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붉은악마는 외적인 응원의 형태에서 90분간 쉼없이 서서 응원전을 벌이는 유럽 써포터즈의 형식을 동일하게 차용하고 있으나, 그 지향에서는 축구 자체를 즐기고 그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오히려 상층 아마추어의 태도와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매니아적 태도는 붉은악마가 90년대 문화변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비가시적인 부문의 또다른 변화는 90년대 이후 우리 문화가 급속하게 미국화되었다는 점이다. 올림픽 이전 우리 문화는 왜곡된 전통문화와 일본문화, 일본을 경유한 미국문화가 혼합된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올림픽 이후 직수입된 미국문화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구권의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지배질서가 자리잡힌 것과 맞물려 문화의 세계화가 오히려 압도적인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종속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세계 공용어로서 영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급격하게 늘어난 미국유학생, 어학연수생은 우리 문화의 미국화를 촉진시켰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가 더이상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지 않게 되었으며 랩음악을 비롯한 흑인들의 거리문화가 곧바로 우리의 거리문화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 문화의 유행 역시 미국과 동시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서울 올림픽 이후 진행된 이런 변화의 흐름에 올해 개최된 스포츠 행사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한편으로 월드컵은 즐김의 문화가 더욱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거리응원은 이 즐김의 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성원들의 수용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자기표출의 경험을 일단 한번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도 유사한 기회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번과 같은 커다란 이벤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사한 규모의 축제가 반복되기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오히려 더 밀도있는 소규모 축제는 점차 활성화될 것이다.

이런 예상이 가능한 것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다. 그중 한가지는 우리 사회가 다시 소득 1만달러 시대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원래 1만달러 시대로의 진입은 IMF 환란 직전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으나 환란과정에서 원화 가치가 추락하며 본격적인 진입이 미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예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성원들의 의식이나 생활습관에서는 이미 1만달러 시대의 행동양식이 자리잡혀 있다. 앞에서 붉은악마의 매니아적 성향을 지적한 바 있지만 문화취향이 다양화하고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급속히 확산된 것이 그것의 한 징표이다. 이는 계층의 고착화와 맞물려 과거에 볼 수 있었던 단일한 유행의 지배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또하나는 부족하나마 지방자치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서울 중심성 때문에 이제까지 지방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자리잡히고 지역에 대한 소속감이 발전하면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지자체 주도로 개최되고 있는 다양한 지역 문화행사들이 그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소규모 축제에 대한 요구가 이들 문화행사와 결합될 때 이제까지의 하향식 문화행사가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행사로 변화될 것이다.

다른 한편 문화의 미국화는 일정한 제동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80년대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 때문에 서울 올림픽에서 이미 미국을 선호하지 않는 태도가 표출된 적이 있고 지난 몇년간 영화와 대중음악 등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직접적 영향이 크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월드컵은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덧붙일 것으로 기대된다. 하나는 월드컵을 통해 우리 사회가 획득한 자신감이다. 과거 일본이나 미국 문화의 수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데에는 그들 나라에 대한 열등의식이 항상 기저에 깔려 있었다. 지난 월드컵에서 일본에 비해 월등한 성적을 거두면서 세계적 수준을 달성한 것은 이런 열등의식의 완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물론 미국 대중문화의 압도적인 힘을 완전히 극복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의식의 면에서 그에 대한 경외심은 상당부분 약해질 것이다. 다른 한편 소득 1만달러 시대의 재진입이나 IT산업의 발전 등은 아직 부족하나마 우리 사회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일정한 동시대성에 도달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문화의 흐름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전파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동시대성의 달성은 일방적인 전파가 더이상 당연시되지 않는 수평성의 획득 같은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다양화와 연결되어 문화의 전면적인 미국화가 더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이 될지를 쉽게 예상해보기는 어렵지만 우리 문화의 독자성이 조금씩 발전되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문화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문화의 개방성이 증진되면 우리 문화는 그만큼 다양하고 수용성이 높은 문화가 될 수 있다. 월드컵에서 경험했던 ‘히딩크 효과’가 그런 발전을 앞당길 촉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안게임에서 많은 외국팀이 우리 코치들을 적극 채용한 것도 참조가 될 것이다. 우리 내부의 순수주의·배타주의가 약화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자리잡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맺음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에 대한 전망은 항상 조심스러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나는 앞으로 문화의 다양화와 탈미국화가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을 해보았다. 나의 기대를 혼합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글은 거대 스포츠 행사의 의미를 전유하려는 싸움에 나 나름대로 끼여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전망하는 발전방향이 곧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문화의 다양화란 문화의 풍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계층이나 세대에 따른 문화향유의 분리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분리가 각 사회구성원들의 자족감을 높여주고 현실만족도를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특징지은 활력은 감퇴되고 현상은 점차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지향점이 각 개인의 행복을 진흥시키는 것이라면 현상의 고착을 동반하더라도 개인의 자족감이 증진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의 자족감이 허위적일 것이라는 데 있다. 헉슬리적 만족의 세계, 또는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매트릭스의 세계가 모든 개인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겉으로 즐겁다고 이를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월드컵 기간중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는 자녀에게 ‘역사적 현장’을 경험시켜주고자 100만원이 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자녀와 함께 직접 경기장을 찾은 부모의 얘기가 나온 바 있다. 소득수준이 향상되어 그 정도의 입장료가 누구에게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치열한 경쟁 속에서 표를 얻은 그들에게 축하를 해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이 거대한 동질성 속에서도 이미 이질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월드컵 기간중 축구를 중심으로 모두 하나가 되었던 그들이 앞으로 서로 다른 종목에 대한 취향을 점차 발전시켜가게 될 때 나는 과연 그것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