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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문화사회와 탈노동사회
담론과 현실
안정옥 安釘沃
서울대 사회학과 강사. 논문으로 「현대미국에서 시간을 둘러싼 투쟁과 소비적 현대성: 노동, 시간과 일상생활」 등이 있음. oahn@freechal.com
일한다는 것, 정체성과 문화적 코드
어느 방송사에서 이채로운 한 인생을 소개했다. 스콧 버거슨은 대학을 나온 자칭 아나키스트인데 삼십여 나라를 떠돌아다니다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액세서리 행상도 하지만 직업적 정체성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롭게 떠돌며 살고 그 경험을 담은 1인 잡지 『BUG』를 만들기도 한다. 잡동사니 같은 삶이 그의 라이프스타일이고, 그것이 문화건달로 자처하는 그의 유동하는 정체성의 발원지인 듯싶다. 건달이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의 전형이지만 자신은 무언가 쓸모있게 시간을 보낸다고–즉 문화건달이라고–자부하는 것 같다. 그처럼 사는 사람을 한국 사람 가운데서도 찾아보려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디오니소스적 인간형은 눈흘김을 받게 되며, 잘해야 별종으로 분류되는 정도이다.
자유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일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선 경험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럴 때마다 괜히 동네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서울의 동네야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지 벌써 오래여서 이발소 아저씨가 아니면 그다지 남의 눈에 밟힐 일도 없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정장을 하지도 않고 대낮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무언가 기대하는 범위에서는 벗어나 보인다. 정장은 직업인의 제복 아닌가. 실직자가 의관을 잘 갖춰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시간에 직장 없는 사람이 만날 사람도, 그를 만나줄 사람도 별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집에 때이르게 돌아가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오늘날 노동은 이처럼 사회적 리듬, 관계와 정체성을 엮어주고 구성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다. 출퇴근 시간에 무리 속에 묻혀 오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패턴이자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회의 리듬에서 벗어나 생활하며 일하지 않거나 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은 사회적 평판을 얻는다. 여기서 일이란 노동시장에 진입하여 기업이나 공공조직 등 공식조직에서 근무하는 것을 뜻한다. 그 밖의 일–예컨대, 가사노동–은 폄훼되거나 일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일과 일의 장소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문화코드가 있고, 거기에 달라붙는 정체성이 있으며, 그것들은 또 변화한다.
탈산업주의적 가치, 새로운 소통양식과 문화를 중심으로 한 탈물질주의 연구는 한국에서도 다소 등락이 있지만 2, 30대의 젊은 세대일수록 일보다 여가를 선호하는 비중이 높다는 보고가 있다. 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일을 통해 접하는 경험, 일을 통해 만나고 엮이는 사회적 관계, 일이 규정하는 나의 일상리듬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2, 30대의 노동력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주5일 근무제가 널리 시행되면 10년쯤 후의 일과 여가문화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주5일 근무제는 그 자체가 일단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여가에 대한 권리와 관련된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며 사회적 합의를 완전히 보지 못한 채 제도화 단계에 들어선 주5일 근무제는 노동과 일상생활의 사회적·문화적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놓을 것인가? 탈물질주의 가치관이 더 폭넓게 확산되며 노동중심 사회에서 문화중심 사회로 옮겨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탈노동사회로서 문화사회 담론은 탈노동(post-work)을 문화적 대안을 위한 조건으로 부각시키며 이러한 관심을 넓히고 있다.
탈노동사회로서 문화사회 담론의 지형
한국사회에서 소위 정상근무시간인 9시에서 6시 사이에 일하는 사람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다. 거꾸로 오전 9시 이전 또는 오후 6시 이후에 일하는 사람의 비중은 늘고 있다.1 일을 더 일찍 끝내거나 교대근무체계에 따라 더 늦게 시작하는 경우도 있을 터이지만 이들이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추구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동시간과 생활기회가 분절화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에서 일본의 프리터(free arbeiter)나 볼류바이터(voluntary arbeiter), 독일의 시간개척자(time pioneer)처럼 대안적인 노동형태를 추구하며 새로운 생활양식을 가꾸는 집합적 현상이나 범주가 출현하지는 않았다. 비주류 하위문화의 소수자를 가리키는 ‘문화건달’이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쓰임새가 폭넓지는 않다. 그보다는 가전(家電)제품 대신 개전품(個電品)을 사용하는 수십만에 이르는 젊은 남녀로 이루어진 씽글족이나 코쿤(cocoon, 누에고치)족의 라이프스타일이 주목받는데 미혼시절의 과도기적 변화로 끝날지 그 이상 나아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들의 노동과 생활양식에 관한 정확한 실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직 소수지만 독일의 시간개척자는 노동사회의 생활양식과 다른 대안적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2 1980년대 임시직의 다중직업인으로서 노동과 분리된 소득보장운동을 벌인 욥버(Jobber)가 유연화라는 시장기제의 공세 속에 실패하였다면,3 시간개척자는 유연화가 제공하는 신축적 노동과 시간제 노동을 적극 추구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숙련된 노동을 추구하지만 노동에서 자유로운 시간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더 많은 가처분 소득을 위한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돈을 쓰는 여가소비보다는 시간의 경제에서 자유로운 시간 자체가 라이프스타일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된다. 더 많은 ‘가처분 시간’은 더 많은 자기성찰의 시간이고, 이는 다시 생활세계의 사회화 형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일본의 프리터는 1982년 50만명 정도에서 1996년에는 151만명 정도로 늘었다. 프리터의 60%는 여성이고 20대 초반이 중심이나 30대 중반까지 분포한다. 정규고용노동 중심의 생활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개척자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그 구성과 성격은 조금 복잡하다. 가장 많은 유형은 남녀 공히 학교를 떠난 모라토리엄형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입학 전에 비정규노동을 추구하는 기간한정형과 취직 전에 정규고용을 지향하며 파견근무를 하는 유형이 그 다음으로 많다. 여성의 경우는 예능 지향형과 프리랜써 지향형이 그 다음으로 많은 편이다. 가족 병가나 파산 때문에 프리터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능 지향형과 프리랜써 지향형이 시간개척자와 비교적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4
이렇듯 일본의 프리터는 사실 어느 정도가 자율적인지 어느 정도가 타율적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어떤 유형은 은폐된 실업이나 불완전고용일 수 있다. 프리터는 일본기업의 고용 포트폴리오 전략에 맞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기업의 인적자원 관리방식은 고용 포트폴리오 집단을 장기축적능력 활용형, 고도전문능력 활용형과 고용유연형 집단으로 나누어 활용하는 추세이다.5 첫번째 유형은 다수의 관리직이나 기능직을 대상으로 장기고용하는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전문가 집단을 연봉제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것으로 승진보다는 성과에 따른 보상으로 유인한다. 세번째 유형은 단순직과 전문직을 임시직·계약직·시간제 노동자로 단기고용한다. 이 유형은 생활과 안전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 퇴직금과 복리후생을 받을 수 없다. 독일의 시간개척자 역시 생계 자체를 위협하는 불안정한 노동조건에 노출될 수 있다. 신축적 노동형태는 노동자의 전통적 권리에 대한 공세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렇듯 탈노동사회 담론은 20세기 말엽 이후 노동사회가 흔들리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일부 언더그라운드 하위문화 집단을 빼면 노동사회에 대한 저항의 사례를 아직 한국에서 찾기 어렵지만 탈노동사회 담론은 이제 심심치 않게 제기되거나 소개되고 있다.6 하지만 한국에서 탈노동사회로서의 문화사회 구상이 더욱 어려운 이유는 먼저 한국이 중심부 국가의 기준으로 볼 때 아직 노동사회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비정규 불안정노동자가 전체 노동력의 과반수를 넘어섬으로써 이 문턱에 도달할 가능성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조의 차이는 있지만 탈노동사회로서의 문화사회 이론가에 포함시킬 수 있는 유럽의 앙드레 고르(André Gorz),7 울리히 벡(Ulich Beck)이나 탈노동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채택하는 미국의 스탠리 아로노위츠(Stanley Aronowitz)8에게 노동사회란 한국과 같은 장시간 노동체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사회를 노동중독사회(홀거 하이데Holger Heide)라고 표현하는 것은 노동사회의 의미와 말깔(어감)을 오해하게 할 소지도 없지 않다. 노동사회는 무엇보다도 사회보장과 여가 등 (남성)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가 표준화된 노동–나라별로 다르지만 대략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연 40주 노동과 40년의 기대 노동생애–기준으로 보장되고 제도화된 사회를 뜻한다. 표준화된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권리에서 주변화되거나 배제되며 노동자 시민의 생활기회와 생활양식을 보장받지 못한다. 따라서 표준화된 노동을 떠난 대안적인 생활양식은 시간개척자나 일부 프리터처럼 틈새 속에서만 불안정하게 숨쉴 수 있다. 탈노동사회로서의 문화사회론은 이러한 사회형태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다.
주 40시간 노동을 기준노동시간으로 삼는 주5일 근무제는 중심부 국가에서 노동사회의 제도에 속하는 셈이다. 국내의 문화사회와 탈노동사회 담론에서도 주5일 근무제를 탈노동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점은 잘 주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노동시간의 단축에 치중하여 노동시간의 배치라는 측면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5일 근무제는 기준노동시간의 길이와 관련될 뿐 아니라 여가의 배치리듬을 규정한다. 이러한 배치는 하루 기준노동시간 단축보다 노동과 여가의 리듬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5일제의 경우 이틀의 주말 뒤에는 다시 기존의 노동리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하루 노동시간은 평일의 노동리듬과 평일의 생활리듬을 변화시켜 생활양식의 변화 가능성을 높인다. 여기에 미국에서 주5일 근무제(1938)가 대니얼 벨(Daniel Bell)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을 해결하는 제도적인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된 까닭이 있다.
벨은 1920년대의 대중소비혁명이 신교적인 노동규율과 윤리의 쇠퇴를 가져와 미국에 문화적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보았다. 노동의 세계는 합리성·효율성과 생산의 세계이고, 대중소비는 자기규율을 결여한 탐욕과 쾌락주의의 세계이다. 노동의 규율과 소비의 방종 사이의 모순이 바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벨의 우려와 달리 이러한 모순은 크게 완화되었다. 먼저 주5일 근무제는 기업의 시간(평일)과 개인의 시간(주말)의 경계를 제도화했다. 둘째, 근대 남성 생계형 핵가족 형태는 남성을 사회의 주5일 노동자로, 여성을 평일과 주말의 소비(관리)자로 제도화하여 규율과 욕망을 성별분업에 따라 조화시켰다. 셋째, 소비주의는 전통적 가치와 양립하는 핵가족 단위의 가족중심 소비로 제도화되었다. 넷째, 1920년대 소비자 신용(할부판매금융)의 발명과 제도화는 임금 수준을 넘어서는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돈을 갚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고, 가계도 합리적으로 관리하게 만들었다. 소비자 신용은 노동자의 소득이 안정적인 것을 전제로 발달한다. 2차대전 이후 케인즈적 완전고용정책과 단체교섭의 제도화를 통한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타협은 일자리 안정과 고임금을 보장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했다.9
한국에서 주5일 근무제 담론이 확산될 무렵 여가의 대중화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확산시키며 널리 회자된 모 카드회사의 광고카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를 읽는 방식의 하나는 이러한 맥락이다. 신용카드로 여가를 소비한 노동자는 더 열심히 노동에 대해 헌신할 것이다. 그것은 탈노동사회 담론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나 각종 연구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주5일 근무제에 따른 여가의 확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공의 사회적·문화적 하드웨어(시설 또는 하부구조)와 소프트웨어(문화 콘텐츠)는 크게 부족하다. 이러한 현재의 조건에서 문화와 여가생활은 문화의 공공성과 문화적 민주화를 높이는 방향보다는 가족중심의 금전소비형 여가를 축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10 소비와 노동과 여가의 쳇바퀴가 확대재생산되며 순환구조를 그리는 한, 문화적 대안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이 발전하고 자리잡을 가능성은 그만큼 협소해진다.
스태판 린더(Staffan B. Linder)는 1970년에 『유린당한 여가계급』(Harried Leisure Class)이라는 책에서 여가시간이 늘어도 더 바빠질 수 있다고 했다. 소비주의의 열망과 기대가 높아지면서 여가시간마저도 만족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낭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소비의 사회』에서 어린시절과 같은 자유시간의 모델이 영원히 사라졌다며 시간 낭비의 불가능성을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본 것은 이와 상통하는 것이다.11 마침 삐에르 쌍쏘(Pierre Sansot)는 느림이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이라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고 있다(『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소비사회의 유린당한 여가계급은 문화적·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사회적 소통에서 멀리 있다.
근대 노동체제, 생활양식, 주5일 근무제와 사회적 소통
물론 바쁘게 산다고 소통이 적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맞벌이 부부가 오히려 홑벌이 부부보다 대화가 많다는 조사가 얼마 전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맞벌이인 경우 두 사람이 좀더 독립적인 인격으로 만나 대화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주5일제가 실시되면 가족과 함께 보내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면 가족간의 소통이 더 많아질 것이라 기대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화사회라 하면 그것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적인 소통의 활성화를 포함한다. 그것은 근대 노동체제와 생활양식에 의하여 규정된 사회적 경계와 분절을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월드컵 거리축제는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며 한데 어우러지는 기쁨의 소통공간을 창출하였다. 특정한 이벤트를 계기로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신부족주의(마페졸리M. Maffesoli)의 특징이 없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소통의 벽을 허물어 새로운 사회적 소통양식을 창출하기까지 엄청난 문화적 반성과 역량 증대를 요구하지만, 그러한 기쁨이 각자의 닫힌 공간‘들’에서 벗어날 때 가능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부는 집에서, 직장인은 회사에서, 청소년은 교실에서, 대학생은 학내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기쁨의 기회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의 원천은 게임의 승리만이 아니었고 기쁨의 종류도 서로 달랐을 터이다. 서로 어우러지며 차이를 줄이고 동시에 다양한 색깔을 긍정하며 그 차이의 맛깔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상적인 상호소통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근대 노동체제의 생활양식은 이러한 소통의 기쁨과 문화적 형식을 누리기 힘들게 한다. 근대 노동체제는 노동의 영역과 사회생활의 다른 영역의 분리 속에 뿌리내렸다. 한국에서도 노동의 영역과 가족의 영역은 분리되었고 그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중간의 점이지대–알음알음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적 삶의 장소와 가락–는 사라져갔다. 직장까지 가는 길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으로 변한 지 오래다. 지하철을 타면 출발지와 도착지만 있다. 그 사이를 익명의 공간이 지배하고 거기에서는 무신경이 미덕이요 에티켓이다. 출퇴근 시간이면 차에서 쏟아져나오는 인파도 사회의 노동리듬에 따라 근대에 생긴 군중현상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워(rush hour)의 인파는 축제의 군중과 달리 제 갈길을 서두르며 흩어지는 개체화된 군중이다. 이러한 속에서는 다양한 사회성의 소통과 그 문화적 형식이 꽃을 피우기 어렵다.
물론 이웃 없는–특히 남성의 경우–세상에 일은 단지 돈벌이 수단만이 아니라 동료와 친구를 엮어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정리해고나 노동의 유연화나 성과급식 연봉제는 그것마저 유동적·경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퇴근 후가 직장 바깥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꽉 짜인 스케줄에 여럿이면,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에서 일은 으뜸이다. 집에서 나간 뒤의 시간과 직장에서 나온 뒤의 시간은 일을 위한 것(출근과 학원수강)이거나 일의 연장 및 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경우(직장 회식과 접대)이다. 게다가 한국은 여전히 하루 실노동시간이 길고, 사회의 추세에 따라 야간근무도 늘고 있다. 사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어렵사리 이벤트라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을 떠난 사회적 소통은 좁은 틈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하루 실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일 바깥에서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갈 수 있는 사회성이나 사회적 유대관계의 틈을 일상 속에서 넓힐 수 있다.12
주5일 근무제 논의에서 하루 실노동시간을 규제하는 초과근무 및 할증률에 대한 규정과 논란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주당 12시간까지 초과근무를 허용할 전망인데 주5일로 펼치면 하루 2.4시간이다. 이래서는 생산직 노동자의 현행 하루 실노동시간을 줄이기는 힘들다.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는 더욱 그러한데 기업계는 노동비용을 이유로 들며 초과근무 사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할증률을 현행 50%에서 25%로 낮추자고 주장해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변형탄력근무시간제의 도입은 경기수요에 따라 하루 노동시간을 들쭉날쭉하게 만들어 생활리듬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사무직의 경우 시간급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실노동시간 단축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일상‘생활’ 가운데 활(活)은 이틀의 주말에만 기대하는 형국이 될지 모른다. 주5일제는 90년대 말 이후 토요일과 일요일 노동시간이 늘고 있는 (전문)사무직 노동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공장설비의 지속적 가동을 위하여 교대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주말노동에서 자유롭지 않고 주 닷새라는 것에만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임금이 낮지 않더라도 고도 소비사회의 힘은 초과근무에 대한 의존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자녀의 사교육비는 물론이고 가족여가에 대한 높아진 기대와 여가비용의 조달을 위하여 역설적이게도 초과근무의 선택이 불가피하다. 초과근무나 가족중심의 주말 여가문화가 발달할수록 노동자 사이의 회합, 소통과 연대의 기회는 줄어들 것이다. 노동조합의 조직률 하락을 우려하는 소리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판매써비스직의 경우 소비재 구입과 여가소비가 집중되는 주말이 늘면 이들의 주말노동도 늘 것이라 전망할 수 있다. 비정규 판매써비스직 노동자(의 일부)는 회사 안의 사회적 분절과 함께 생활기회의 사회적 분절 증가를 경험하게 될 상황에 처해 있다.13
주5일 근무제는 인터넷의 각종 소규모 레저 및 스포츠 동아리의 오프라인 모임을 더 확장할 기회가 되겠지만 소득 계층에 따라 차별적 양상을 보이기가 십상이다. 이틀의 주말을 얻게 된–그렇지만 주말에 사교육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는–청소년과 대학생은 물론이고 젊은 생산직과 특히 젊은 사무직 남녀 노동자를 중심으로 그러한 움직임이 퍼져나가겠지만 이러한 모임을 위한 공공지원과 사회적 인프라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인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소득에 따른 계층적 차이가 여가활동에도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데, 소득이 낮은 경우는 지금도 주말 여가시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대중매체 등의 가정오락(텔레비전, 비디오 시청)이나 인터넷 게임처럼 오프라인 모임에 비해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오락문화의 비중이 클 것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하는 인터넷 게임도 속도에 민감한 경향을 보이지만 이른바 극한 스포츠를 즐기는 층이 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행글라이딩이나 패러글라이딩은 오래된 것이고, 번지점프도 낯익은 경험이 되었다. 서울에서 2002년 10월까지 100만대 가량이나 팔렸다는 인라인스케이트도 극한 스포츠에 포함되기도 하며, 급류를 타는 래프팅, 밧줄을 타고 경사가 가파른 곳을 뛰어내리는 마초 러닝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극한 스포츠는 때로는 생명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을 무릅쓰고 스릴을 즐김으로써 빠른 시간 안에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자오락이 바쁜 현대인이 틈새 시간을 이용하여 즐길 수 있는 오락의 한 형태이듯이, 극한 스포츠도 주중이나 대개는 주말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 안에 짜릿함과 쾌감을 맛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오락으로서 맞춤의 것이다.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고용불안 문제가 부상하면서 노동강도의 문제는 단체교섭 의제에서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어느 직종이든 이틀의 주말은 기준노동시간 단축을 보상하려는 노동강도의 강화와 교환될 전망이다. 그러면 극한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는 더 늘 것이다. 극한 스포츠는 상대적으로 젊은 전문직이나 사무직을 중심으로 더 확산될 듯싶다. 비용문제도 있거니와 육체노동자는 피곤해진 몸을 휴일에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현대의 정신노동자는 좌식 생활에 약해진 몸과 업무상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몸을 움직여 달래고 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도태의 위험감수를 부추기는 성과주의 경영관리체제가 고도화되면 ‘써바이벌 게임’처럼 짜릿한 스릴과 육체적·정신적 쾌감을 맛보려는 경향이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당분간은 가족단위 레저활동이나 가족외식 같은, 사회적 소통의 활성화와 다소 거리가 있는, 가족중심의 금전소비형 여가문화가 주말살이의 주요한 특징이 될 것이다.14 가족여행과 가족외식의 증가는 가족유대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휴일 준비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특히 맞벌이 부부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1999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경우 남편의 직종을 막론하고 가사노동을 포함한 아내의 총노동시간이 남편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15 늘어난 주말에 가족유대를 위하여 (특히 맞벌이) 여성이 떠맡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게다가 맞벌이 여성은 밀린 가사를 주말에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여건의 미비로 자기계발형 여가가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여성에게 그러한 기회는 더 제한되어 있다. 가족중심형 여가는 두 성 사이의 관계가 변화하지 않으면 가족 안에서 두 성 사이의 소통에 긴장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여성을 사회적 소통의 회로에서 거리를 두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회성의 새로운 문화적 형식에 대한 추구
한국에서 산업화와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노동-가족 관계는 제대로 안정된 적이 없다. 노동의 세계는 언제나 가족의 세계를 침범하고 좌지우지했다. 주5일 근무제는 그 자체로는 그러한 노동-가족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제도적 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60여년 전에 이 제도를 도입한 미국사회와 현재 한국사회의 역사적 시간차는 적지 않다.
첫째, 현재의 주5일 근무제는 사회적으로 노동력의 과반수 이상이면서도 주변적인 집단인 불안정 비정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와 생계·생활권)를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극심한 노동시장 분절로 기준노동시간의 단축이 주변화된 노동자를 정규직 일자리로 흡수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보다는 여가에 대한 권리를 우선하는 것이다. 여가에 대한 권리의 확장은 현재 노동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권리의 악화와 맞물릴 수 있다. 오히려 주5일 근무제에 따른 노동비용 증가를 이유삼아 정규직 고용보다는 비정규직 고용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미국의 주5일 근무제는 2차대전 이후 완전고용정책과 맞물려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둘째, 소비·노동·여가의 순환구조가 노동과 일상생활을 촘촘히 짜고 엮기 때문에 ‘자유시간’을 늘린다고 ‘문화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이다. 어느 때보다 노동과 여가의 질·리듬이 다양화·분절화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되는 조건에서 사적 소비에 의존한 욕망과 취향은 다양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 소통 없는 라이프스타일의 분화를 통하여 사회적 벽–라이프스타일 비지(飛地)–을 더 높일 수 있다. 게다가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 ‘자유시간’을 다채롭게 잘 쓰는 문화적 역량과 경험을 위한 공공의 사회적·문화적 ‘하드웨어’와 ‘쏘프트웨어’는 부실하기 그지없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이미 고도화된 소비·문화·여가산업은 주어진 시간에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향, 즉 여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며 여가시간을 노동시간의 모델과 동형의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여가계급’의 자유시간은 문화민주주의와 자율성을 싹틔우기도 전에 꺾일 수 있다.
셋째, 가족형태의 변화는 젠더 관계의 변화와 공보육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주5일 근무제가 1970년대까지 수십년간 안정되었던 배경에는 홑벌이 남성 생계형 가족의 사회적·제도적 확산과 집에서 이를 뒷받침한 주부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질병’–사회적 고립–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성노동자가 가족임금을 버는 경우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가족모형은 늘어나는 가족생계비, 주거·주택비용, 자녀교육(특히 사교육비)과 소비수준의 고도화를 감당하기에는 점점 더 현실에 맞지 않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주5일 근무제는 늘고 있는 맞벌이 공동생계형 가족에 지금보다는 어느정도 안정된 생활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과 여가의 관계는 여전히 남성 노동자, 여성 전업주부의 젠더 관계의 관행, 규범과 제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생산영역(유급노동)과 재생산영역(가사노동)에서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어떻게 제도화되고 해결되느냐에 따라 사회성의 문화적 형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주5일 근무제의 제도화가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소통과 문화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심화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탈노동사회로서의 문화사회 담론은 소비·노동·여가 순환구조의 고도화 속에서는 사회성의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짜기가 어렵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데 일조했다. 한국사회는 한편으로 노동으로부터의 배제(대량실업)나 육체노동의 사회적 주변화 경향에서 비켜나 있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와중에서 일상생활의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형식과 짜임새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결국 중심부 국가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회는 노동사회의 문턱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사회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시간개척자나 일본의 프리터가 추구하는 새로운 노동형태와 자율적인 생활양식이 결코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없고, 더군다나 한국사회에서 위험과 불안정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유형을 선택하기는 어렵다. 탈노동사회 담론은 구체적인 분석과 결합하여 미래를 그리고 거기에 현실을 다가서게 하는 방식을 마련하는 데 취약한 편이다. 이런 점에서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따라 현실을 변화시키며 거기에서 미래를 발견하는 인식의 지도와 실행의 경로는 탈노동사회 담론과 생산적인 긴장을 형성할 수 있다. 두 접근방식 사이의 긴장은 생산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후자의 실천적 원칙이 지켜질 때 이 긴장은 공동체의 새로운 문화적·사회적 조직양식에 대한 기대를 현실화하는 힘이 될 수 있다. 21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장기적 전망 속에서 노동과 일상생활을 짜고 엮는 시간의 결을 사회성의 소통과 그 문화적 형식을 가꾸는 방향으로 바꾸는 노력은 아직 밟지 않은 더 좋은 길을 찾아내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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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진 「직업별 노동시간의 변화: 생활시간 조사 결과(1985〜1999) 자료를 이용하여」, 『사회연구』 제14집(경남대학교 사회학과 2001).↩
- Karl H. Hörning (et. al.), Time Pioneers: Flexible Working Time and New Lifestyles (Cambridge, UK: Polity Press 1995). 시간개척자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 최우성 「역자 해제」, 『문화과학』 2001년 여름호 129면.↩
- 日本勞/硏究機構硏究所 엮음 『フリ-タ-の意識と實態: 97人へのヒアリンブ結果より』(日本勞/硏究機構 2000). 일본 프리터 조사자료를 알려준 김순영님께 감사드린다.↩
- 「새로운 고용관리: 고용 포트폴리오 전략」, http://www.webfriend.pe.kr(비영리 인사·경영 정보광장).↩
- 『문화과학』은 1999년 봄호(17호)와 겨울호(20호)에 여러 학자와 연구자의 참여로 “문화사회로의 전환”과 “노동과 노동거부”를 주제로 하는 두 차례 특집을 기획했다. 2001년 여름호(26호)에서도 관련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90년대 후반 이후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배경으로 여러 학문적·실천적 관심을 담은 연구서와 글이 나왔다.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경호 옮김, 민음사 1996), 뽈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조형준 옮김, 새물결 1997)나 버트런드 러쎌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1997), 울리히 벡의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홍윤기 옮김, 생각의 나무 1999) 같은 책이 소개되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중심사회를 넘어서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 André Gorz, Reclaiming Work: Beyond the Wage-Based Society (Cambridge, UK: Polity Press 1999)가 그의 최근 연구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 Stanley Aronowitz and Jonathan Cutler (ed.), Post-Work: The Wages of Cybernation (New York: Routledge 1998), Stanley Aronowitz and William DiFazio, The Jobless Future: Sci-Tech and The Dogma of Work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를 볼 수 있다.↩
- Lendol Caldor, Financing the American Dream: A Cultural History of Consumer Credit (Princeton and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9) 301면과 안정옥 「현대미국에서 시간을 둘러싼 투쟁과 소비적 현대성: 노동, 시간과 일상생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논문(2002) 참조.↩
- 민승규 「‘주5일 근무’ 실시의 전제조건」(삼성경제연구소 2001) 19면 참조(www.seri.org).↩
- 김문겸 「자본주의와 여가」, 『사회연구』 제4호(사회연구사 2002) 36〜38면을 읽으며 린더와 보드리야르의 핵심주장을 다시 상기하며 간추릴 수 있었다.↩
- 문제가 저녁과 밤시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밥 전쟁』(현대정공 노동조합 1998)이라는 영상자료의 제목은 직장인과 가족의 아침살이를 통해서 엮이는 사회구조와 가족생활의 씨줄과 날줄의 짜임새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바쁜 아침살이에서는 줄다리기와 협상(가사분담)으로 평화를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서구 노동계급에게 온가족이 아침식사를 같이할 수 있게 된 시기는 20세기 초엽 하루 8시간노동운동이 성공하며 출근을 늦게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 비정규직에 여성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남편과 상이한 노동시간 리듬을 형성하는 비율이 증가하여 남편이 주5일 근무를 하더라도 가족시간의 이용가능성이 줄어드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월요일에 쉬는 대형유통업체 직원이 주말 사교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은 오래된 것이다.↩
- 중상류층의 경우에 모스끄바 근교의 주말농장 다차(dacha)같이 대도시 근교 주말 가족별장(또는 교외주택) 보유를 늘리고 있고 또 그럴 것이다. 주말살이의 가족중심성에도 불구하고 기대해봄직한 것은 일본의 경우 주5일 근무제와 함께 시민운동이 다시 활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주5일 근무제를 배경으로 주말에 사회참여나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비중이 많지는 않지만 조금 늘어난 편인데 시민운동이나 자원봉사의 경우 약간의 증가도 의미있는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송호근 외 「주5일 근무제의 사회경제적 영향에 관한 연구: 시민생활의 변화와 정책대안」,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2001.↩
- 문숙재 「가사노동 가치평가를 위한 소프트 프로그램 개발의 기초분석: 국민계정체계 및 법체계적용을 중심으로」, 통계청: 1999 생활시간조사 종합분석사업 결과(2001), 50면 표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