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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고향

 

테싸 모리스-스즈끼 Tessa I.J. Morris-Suzuki

현재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아시아태평양학과 일본사 교수. 저서로 Time, Space, Nation(1998) 『邊境から眺める』(2000) 『批判的想像力のために』(2000) 『グロ-バル化時代の日本』(2002) 등이 있음.

ⓒ Tessa I.J. Morris-Suzuki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 토오꾜오대학의 현무암(玄武岩)씨에게 각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안산 방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필자

 

 

 

1. 첫인상에 이곳은 서울 근교 바깥자락에 있는 다른 어느 곳의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다. 솟은 건물들은 새로 지은 것이고 파스텔 색채로 산뜻하게 칠해져 있다. 땅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한 귀퉁이에는 주민들이 채마밭을 만들어 옥수수·토마토·오이 등을 가꾸고 있다. 오늘은 2002년 제헌절이라 아파트 각 동의 정면은 태극기의 물결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 사소한 차이들은 이곳이 다른 아파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칠월 뙤약볕을 피해 천막 아래 그늘 바닥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커다란 체스판을 놓고 체스게임에 몰두해 있고, 엘리베이터에는 ‘некурить’(러시아어로 ‘금연’이라는 뜻)라는 표지가 붙어 있으며, 게시판에는 월드컵 기간 동안 비행기 예약이 어려울 것이라고 여행객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의 때지난 메씨지가 러시아어로 적혀 있다.

그 다음 다른 점은 주민들의 연령층이다. 여름날이면 보도를 따라 뛰어놀거나 반짝이는 새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 대다수는 노인이고 상당수는 팔십대이다. 아이들은 여름 손님으로, 여기서 석달 동안 머물다가 가을이 되면 제비처럼 바다를 건너 날아간다.

젊은이들이 다 가버리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들만 남는 겨울이 되면 이곳의 풍경은 어떨까, 나는 궁금해진다.

이곳이 바로 ‘고향마을’이라는 곳이다. 여기가 사할린 한국인들이 귀향한 곳이다.

 

2. 그것은 매우 긴 여행의 끝과 같다. 하지만 이 원점으로의 귀환은 새로운 형태의 뿌리없음을 일깨운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 여행은 조선인 이민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확장일로에 있던 일본식민지 카라후또(樺太, 사할린 남부)의 정착지로 이주하던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중 소수의 사람들은 잘 풀려서 자녀들을 식민지 수도 토요하라(豊原, 지금의 유즈노-사할린스끄)와 여타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촌마을에서 이 여행을 출발했는데, 이들은 1942년 이래로 카라후또의 공장과 탄광에서 일할 조선인 남자들을 차출한 일제(日帝)에 의해 끌려온 사람들이다. 1936년에서 1945년 초 사이에 카라후또의 조선인 인구는 8천명에서 5만명(카라후또 전체인구의 약 15%)으로 팽창했다가, 전쟁 막바지 몇달 동안 노동자들이 홋까이도오, 큐우슈우 등지의 탄광으로 재배치됨에 따라 다소 줄어들었다.

몇몇은 전시 탄광에서의 생활을 아직 기억한다. 내가 2001년 10월 유즈노-사할린스끄에서 만난 조정구씨는 1945년에 탄광노동자로 사할린에 끌려왔다. 조선을 떠날 때 열여덟이었던 그는 2년 안에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사실은, 그의 나이 육십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는 처음으로 고향마을을 잠깐 동안 방문할 수 있었다.

1940년대 말 일본으로 가는 송환 선박이 출발하던 사할린 남단 도시 꼬르사꼬프에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다. 전후에 사할린 식민지 전역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갈 배를 기다리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국고보조에 의해 사할린 한국인의 송환계획이 시작된 2000년 2월 이래 1천여명의 사람들이 영구거주자로 한국에 돌아왔지만, 이 섬의 조선인 후손 4만명 가운데 대다수는(조정구씨도 그들 중 하나이다) 남아 있다.

안산의 아파트에 900여명과 인천의 양로원에 100여명의 귀환자들이 머물 주거지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안산의 아파트는 안락하며, 사할린에 있는 전형적인 쏘비에뜨 시대의 허물어져가는 아파트 단지에 비하면 훨씬 낫다. 두 개의 분리된 침실이 커다란 거실로 통해 있고, 거실에는 한국식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사할린 생활의 추억거리–방문 온 친지들이 가져온 러시아산 차와 잼, 그리고 2개 국어로 간행되는 신문 『새고려』–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러나 재정착 계획을 구상한 사람들이 관료적인 사고방식으로 각 아파트에 단 한쌍의 부부가 거주할 수 있도록 설계를 했고, 안산으로 돌아오려고 신청하는 사람들은 부부 자격이어야 가능하도록 법규를 정해놓았다. 전쟁 전이나 전쟁 중 (자발적으로나 강제로) 이주하였거나 식민지 카라후또에서 태어난 1세대 구성원들에게만 한국에 재정착이 허용된다. 그들의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은 일년에 최장 삼개월간 방문객 자격으로 올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귀향의 꿈은 가족과 벗들과의 또 한번의 이별을 치르고서야 이루어질 수 있다. 전후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런 이별의 예감은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이다. 조정구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국경이 철의 장막과 같은 나라들에서 평생을 살아왔소. 오늘날 국경은 열릴 수 있지만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철의 장막이 내일 다시 내려와 우리를 우리 자녀와 영원히 끊어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안산의 사할린 한국인들은 냉전시절 그들이 소망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윤택한 생활로 귀향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나이 들고 건강이 쇠하고 배우자와 이웃들이 사망함에 따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귀향의 기쁨은 반감되고 있다. 한국에 생존해 있는 친척들은 자주 만나기에는 너무 멀리 살고 너무 바쁜 경우가 많다. 그러는 동안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은 사할린에 남아 있거나, (어떤 경우에는) 교육과 직장을 따라 하바로프스끄, 이르꾸쯔끄, 모스끄바 등지로 더 멀리 이주한다.

 

3. 내가 사할린 한국인들과 만나게 된 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기나긴 개인적 여정의 종말이기도 하다. 70년대에 나는 영국의 학생으로서 러시아사를 전공했고,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되고 직장을 구하면서 근대 일본사회의 복잡함과 역설에 이끌려 평생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식민주의자이자 피식민주의자이기도 한 영국과 아일랜드계 조상의 후예로서 나는 식민주의가 남긴 해결되지 않은 유산들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거의 10년 전에, 나는 러시아·일본 국경지역의 식민지화에 관해 연구하면서 이러한 실타래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사할린의 한국인 사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그들의 역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을 때도 두려움에 가까운 느낌 때문에 감히 그것을 연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당한 일들이 너무나도 엄청나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말은 전혀 못하고 러시아말도 서툰 처지여서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일을 시도하기에는 소양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두번째로 사할린을 방문하였을 때 역사기록물들을 읽던 도서관에서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나는 조정구씨와 한인회의 다른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분들에게 말을 하고 러시아말과 아직도 유창한 일본말이 섞여 쏟아져나오는 그들의 말에 귀기울일 때,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간절히 들려주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일본(그리고 다른 곳)의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주의의 이런 잔존하는 유산을 망각하게 해온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꿰뚫으려고 얼마나 깊이 갈구하는지를 깨달았다.

이 공동체의 지속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할 가장 큰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다. 일본정부는 식민지 백성들을 데려다가 카라후또에서 부려먹고는 독립 이후에 그들을 방기한 것이다. 일본이 비록 뒤늦게나마 본국송환계획을 보조하는 ‘위로금’을 제공하였지만, 일본은 아직 생존해 있는 전시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빚지고 있는 임금을 지불할 책임조차 지고 있지 않다. 이 노동자들의 임금은 강제저축계획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 복잡한 역사의 유산에 대한 책임이 일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후 점령기간 동안 사할린 조선인들의 송환을 요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행하지 않았던 미국과 여타 연합국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사할린 조선인들의 곤경에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해왔고, 지금도 2, 3세대에게 영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게도 책임이 있다.

제헌절을 맞아 ‘고향마을’에는 태극기가 근사하게 펄럭이지만, 주민들의 대화에는 러시아말이 군데군데 섞여 있고 그들의 음식은 러시아의 향료로 맛을 낸다. 늙어가는 거주민들을 국경 너머 멀리 있는 가족과 벗들과 이어주는 것은 가슴속의 기억과 속삭임이다. 이 정도라도 귀향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여정은 계속되고 평화를 찾아나서는 길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姜美淑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