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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무조의 철학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문학과지성사 2002
민형원 閔炯源
덕성여대 철학과 교수 hwmin@duksung.ac.kr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철학자·사회학자이면서도 일급 에쎄이스트이자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나 사회학자로보다 작곡가로 이해받기를 원했다. 그랬기에 1980년대 독일의 헤쎈방송(HR)은, 프랑크푸르트학파 제1세대의 주요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씨리즈에서, 아도르노 편의 제목을 “아도르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으로, 부제를 “나는 일차적으로 작곡가입니다”로 정했다. 아도르노는 자신을 알반 베르크의 제자로서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제2차 빈 악파’의 일원으로 생각하면서 평생 작곡을 철학적 작업과 병행했다. 때문에 피히트(G. Picht)는 아도르노 철학을 쇤베르크의 음악이 ‘무조음악’(atonale Musik)이라고 불리는 것에 비겨, ‘무조(無調)의 철학’(atonale Philosophie)이라고 이름하였다. 때문에 “아도르노 사상의 원천을 사회학에서 거의 무시해왔던 아도르노와 신음악과의 관계”(36면)에서 찾는 것이 목표라는 저자 노명우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저자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과 『신음악의 철학』의 관계에 대해 특별한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사실 이 두 저작은 계몽의 비판과 극복이라는 관심에서 씌어진 일란성 쌍생아이며, 아도르노 자신도 『신음악의 철학』을 『계몽의 변증법』의 ‘보론’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신음악의 철학』은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한 천착을 통해 음악의 영역에서 계몽의 변증법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고 동시에 음악이 어떻게 그것과 단절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언뜻 보면 서로 모순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과제의 내적 연관성에 대해 아도르노는 “음악사와 인간 역사는 수렴하면서 동시에 서로 자율적인 역사”라는 테제를 근거로 삼는다. 이 테제에 의해 『신음악의 철학』은 계몽의 변증법이 음악의 역사에서도 얼마나 철저히 실현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음악사는 하나의 ‘무의식적 역사서술’이며, 일반 역사와 마찬가지로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롯하는 합리화의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도르노는 이에 대해 “음악 전체는 합리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 음악사를 운동하게 하는 핵심개념은 합리성의 개념이며, 합리성은 (…) 지배와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합리성에 의한 지배와 억압의 전개과정으로서의 역사는 음악사에도 동일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도르노가 음악사에서 최초의 ‘좋은 합리성’을 보인 예로서 평가했던 쇤베르크의 12음 기법도 예외가 아니다. 음악적 재료에 대한 가공의 ‘가장 진보된 단계’를 보여주는 12음 기법의 좋은 합리성 역시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301면).
음악의 역사는 의심할 바 없이 지속적으로 수행된 합리화 과정의 결과이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역사에서의 합리화 과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음악사는 사회의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자율적으로 진행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음악사에서의 합리성은 역사의 합리성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고유한 동력에 의해, 역사의 전개과정 가운데서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하는 억압과 지배의 논리로서의 합리성에 대한 항의와 부정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아도르노에게서 음악의 합리성은 계몽의 변증법을 맹목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몽의 변증법과의 단절을 가능케 하는 ‘계몽에 대한 계몽’의 촉구로서 역사에 대한 특정한 부정(bestimmte Negation)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192~93면). 음악의 합리성은 나아가 ‘특정한 부정’을 통해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 아도르노가 돌파(Durchbruch)라고 부른, ‘유토피아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226면). 이로써 음악은 어떤 급진적 사회이론보다 강한 사회비판이 된다.
쇤베르크의 후기 작업은, 이미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에서 단초가 보인 유토피아의 모습을 현실화한다. 쇤베르크는 후기 작품을 통해 자신의 12음 기법도 피할 수 없었던 작품의 완결성·총체성의 이념과 결별하고 동일성에 의해 장악될 수 없는 모순과 균열, 갈등과 빈 공간을 작품 가운데서 그대로 승인하게 되었다(313면). 이때 음악은 더이상 주체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지 않는 비동일성의 온전한 표현이 되며, 바로 이것이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의 피안에서 꿈꾼 유토피아이다(336면). 소극적으로나마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은 음악에서만 가능했다. 그 이유는 우선 아도르노가 계몽의 비판을 위해 논증적 전통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논증적 전통의 외부에 있는 ‘개념 없는 사고’로서의 음악에 의존했기 때문이고(223면), 둘째로는 그가 폭력과는 무관한 다른 세계로의 변혁은 현실의 지배적 실천보다 더 나은 실천의 대리자인 음악 가운데서 모색될 수밖에 없다고(69면) 믿었기 때문이다. 1934년 아도르노는 벤야민에게 말했다. “나는 미적인 것이 기계적인 계급이론보다 훨씬 심도있게 현실에 혁명적으로 개입한다고 믿는다”라고.
저자는 아도르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아도르노의 다종다기한 영역에 걸친 착종되고 난해한 사고를 치밀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다. 크게 남는 아쉬움은, 아도르노의 사고를 이렇게 내재적으로 충실히 재구성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현재의 관점에서 아도르노의 이론이 노정하고 있는 한계도 비판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점이다. 아도르노 음악미학의 기본 테제는 ‘가장 진보적인 음악재료와 가공방식’은 각 시대마다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빈 고전주의에서 쇤베르크에 이르는 음악 발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테제를 정당화했고, 이 논리가 그대로 쇤베르크 음악만을 현단계에서 유일 가능한 진보적 음악으로 평가하는 최종적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나 쇤베르크에 의해 표상되는 음악재료와 가공방식에 대해서만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는 이러한 입장이 여전히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또한 이로부터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바르토크(B. Bartók), 힌데미트(P. Hindemith), 스뜨라빈스끼(I.F. Stravinsky) 등의 음악에 대한 아도르노의 ‘부정적’ 시각과 평가는 정당한 것일까?
음악과 철학, 사회학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는 아도르노의 고유한 사고의 운동궤적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의 철학·사회학뿐 아니라 음악미학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도르노의 이러한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사고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때로는 좁은 분과 학문의 틀 안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과 폐쇄성 때문에, 혹은 연구자들의 제한된 역량 때문에 이제까지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근자에 아도르노 연구에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던 ‘아도르노와 음악’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에서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저작은 이러한 시대적 관심을 반영하면서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선구적 작업으로서, 아도르노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