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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방송도 생물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년의 회고와 전망
정길화 鄭吉和
MBC 시사제작국 부장대우 junglehwa@orgio.net
1999년 9월 12일은 한국방송사에 특별한 날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첫방송된 날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맹아(萌芽)의 날이다. ‘제주 4·3’편으로 첫 발걸음을 뗀 이 프로그램은 혼돈과 왜곡으로 점철되어온 한국현대사에서 강자와 승자에 의하여 은폐되어온 역사적 진실을 정면으로 해부하고자 하였다.
1999년 이후 4년에 걸친 장정을 계속하고 있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도합 58편을 방송하여 미니씨리즈형 다큐멘터리 혹은 게릴라식 프로그램이란 별칭을 얻었고 방송가에서 특별한 장르와 편성으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은 2003년의 방송이 준비되고 있다.
사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처음 방송될 때만 해도 주위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제목이 풍기는 기회주의적인 냄새부터 못마땅한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이른바 권력의 주구로서 편파 불공정 방송으로 혹세무민해왔다는 부인할 수 없는 과거의 전력을 안고 있는 게 이땅의 방송이 아닌가. MBC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처지였다. 옛말에도 있듯 나쁜 기억은 더 오래가는 법이다. 이것은 지난 1988년 이래 방송계 현장에서 꾸준하게 전개된 방송민주화운동이나 방송노조투쟁으로도 쉽사리 치유되지 못한 천형의 상흔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역시 정권교체 후 현재의 권력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또 한건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느냐”에서 시작해 “당신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혹은 “지금 하는 뉴스와 프로그램이나 잘하라”는 힐난은 고스란히 자업자득의 업보였다. 저널리즘은 모름지기 당대의 기록물로서 분명히 그때그때 할말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무슨 후일담 문학도 아니면서 시간이 지나간 뒤 비로소 말하는 것은 직무유기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제작진의 생각은 확고하고 또 순수했다. 그런 말을 들을 것이 두려워 지금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때 말 못한 것은 비겁한 일이지만 지금도 말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1999년 방송분을 보면 ‘제주 4·3’뿐만 아니라 ‘동백림 사건’ ‘진보당 사건’ ‘여순 사건’ ‘인혁당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등 흔히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를 말할 때 맨 먼저 등장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거의 다루어지고 있다. 또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것은 특정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독재정권 시절의 공작정치와 인권유린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당대의 정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제작진의 ‘자기검열’로 그 첫해에는 방송되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당시의 제작진들은 언제 다시 이런 프로그램을 할 기회가 올 것인가 하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 4년여가 넘도록 방송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택에 씨를 제대로 뿌리게 되었다.
1999년에 13편이 방송된 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프로그램 자체의 영향력과 호의적인 여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시 방송법 개정국면에서 공영방송으로서 MBC의 정체성이 도마에 오를 때 이 프로그램은 가히 수문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여론선도그룹과 지식인들의 긍정적인 평가도 한몫을 했다. 당시에 신문들의 반응도 좋았다. 가령 ‘제주 4·3’편이 방송된 이틀 후인 9월 14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4·3을 다뤘던 이전 프로들에 비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측이 군경의 초토화 작전을 사전에 묵인하고 있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 제작진은 또 오라리 방화사건은 우익인 대동청년단에 의한 것임을 관련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 이같은 성과는 관련자료와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제작진이 꼼꼼히 챙긴 덕분이다.”
당시의 언론상황이 지금과 같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 기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4·3 피해자’측의 입장을 부각시켰다며 반대편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제공했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보수신문의 이같은 보도는 이례적이라 할 만했다. 기실 세무조사로 언론계에 ‘전선’이 형성되는 2001년 1월 전까지는 이런 현상이 드물지 않았다.
우리 현실에서 공중파 방송은 부인할 수 없이 시대의 분위기와 흐름을 반영한다. 가령 1990년에 첫방송을 한 「PD수첩」은 기만적인 6·29로 권력 재창출을 이룬 노태우정권 후반기에 각계각층에서 분출하는 민주화의 드센 요구의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1993년의 KBS 「다큐멘터리극장」은 김영삼정권이라는 이른바 문민정부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다큐멘터리 정신으로 치열하게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정권교체라는 시대의 산물로 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특정 정권과의 문제가 아닌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보아야 한다. 지난 4년간 이 프로그램이 걸어온 길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작 제작진을 괴롭혔던 것은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주요한 역사적 증인이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사건수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장보존과 목격자 확보인데 진실을 찾기 위하여 상당부분 탐사기법적 접근에 의존해야 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시간의 경과와 망각,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진행된 권력에 의한 선택적 은폐와 조작이야말로 가장 큰 난관이었다. 증언을 거부하는 왕년의 거물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터뷰를 끝내 거부하던 인사들을 얼마 후 신문의 부음란에서 발견했을 때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증언이 일방적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통산 평균시청률이 7〜8%로 두 자리에도 들어서지 못했으나 지난 4년간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프로그램 매니아도 형성되었고 수차례 상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집요하게 제기된 것도 성과이다. 반민특위의 해체, 연좌제, 인혁당 사건, 북파공작원, 전태일 분신, 도시산업선교회, 녹화사업, 삼청교육대,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 등 역대 정권이 자행한 사건들의 상처는 어둡고 깊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미국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을 시작하게 된 것도 뜻깊게 생각한다. 토오꾜오 전범재판, 노근리 사건, 미국의 세균전 의혹, 에버레디 플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와 핵개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 등 프로그램 전편에 걸쳐 있는 미국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큐멘터리적인 실증적 접근의 결과였다.
새롭게 구성되어 준비중인 2003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한반도의 구조적·역사적 모순과 불안정성에 대한 천착을 도모한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적확한 의제설정에 의한 논증이 전개될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지난 수십년에 걸쳐 진행된 한국사회의 민주화 대장정이 낳은 결실이다. 정치만 생물이 아니라 방송도 생물이다. 거목으로 큰 그늘을 드리울지 기대와 성원 속에 지켜봐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