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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만화여, 책의 품이란 참 따뜻하지 않은가

2002년 한국만화

 

 

이명석 李明錫

만화평론가 manamana@korea.com

 

 

비극의 시대가 있었다. 주인공들은 한치의 물러섬 없이 운명과 맞섰고, 머리칼 한올까지 하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 등 한국만화의 80년대는 문자 그대로 ‘완전연소(完全燃燒)’의 시간, 비극의 박물관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만화가들에게는 그때야말로 진정한 황금시대였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만화는 아이들의 품을 벗어났고, 만화가들에게는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가슴을 옥죄는 군부의 검열과 어르신들의 꾸중도 독자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씻어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희극의 시대다. 엽기는 뒤집어지고 개그는 뒤통수를 친다. 매몰찬 패러디가 열혈의 과거를 조롱한다. 발랄한 주인공들이 예정된 승리를 거두고, 삶은 이기는 게 당연한 게임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역시 역설적으로, 그 환희의 웃음 밑에서 한국만화는 깊은 절망을 곱씹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약속된 승리를 위한 달콤함 패배이기를 기원하지만, 만화의 신은 아직 그 최종화의 콘티를 구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2002년 한해 동안 여러 만화가들이 손가락 끝의 굳은살을 잃어버렸고, 잉크를 먹지 못한 펜들은 녹슬어갔다. 수많은 만화잡지가 사라지는 바람에 작품을 그릴 공간 자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후죽순 생겨난 인터넷 만화방의 횡포에 본업을 제쳐놓고 저작권 분쟁을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소년보호법에 반대하며 일어섰던 만화가들은 만화시장의 근본적인 개혁을 외치며 대여점 반대운동에 나섰다. 만화라는 이름을 붙인 축제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그 대부분에서 만화는 애니메이션·게임·캐릭터 ‘산업’을 위한 힘 빠지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만화계는 지금 안팎의 요인들로 인해 과거 어느 때보다 큰 타격을 받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의 만화독자층을 크게 확대시킨 일본만화가 자기 침체에 빠져 더이상 새로운 히트작을 만들어내지 못하자, 안일한 번역 메커니즘에 익숙해 있던 국내 만화잡지계도 그 여파를 톡톡히 체험하게 되었다. IMF 구제금융시기에 대거 생겨난 대여점들은 일견 만화시장의 확대를 가져오는 듯했지만, 결국 만화를 ‘싼값에 빌려보는 소일거리’로 한정짓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의 성장은 주독자층인 청소년들을 빼앗아갔고, 포털싸이트들의 공짜만화방 공격은 만화를 더욱 값싼 미디어로 만들고 말았다. 만화열기가 한창 끓어오르던 90년대 말, 청소년보호법과 「천국의 신화」에 대한 음란성 시비로 인해 창작의 자유를 크게 위협받은 만화가들은 안팎의 파동 속에 심한 멀미를 하고 있는 듯하다. 만화가와 만화출판계의 골이 깊어지고, 별다른 자기혁신을 보이지 못한 만화계는 점차 허탈감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쪽에선 새로운 만화, 새로운 만화가, 새로운 독자들이 생겨나 폭풍우 속에 밝은 빛줄기를 내비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누들누드」의 양영순, 「도날드 닭」의 이우일, 「비빔툰」의 홍승우, 「Snow cat의 혼자 놀기」의 권윤주 등 일본만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깥의 만화들이 점차 중심에 들어오고, 어느새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들로 성장하고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언더그라운드, 혹은 인디만화의 줄기는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매체를 만나 더욱 넓은 작가군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전체적인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고 있다.

그와 더불어 「땡땡의 모험」 「아스테릭스」 「코르토 말테제」 등 유럽만화의 걸작들이 대거 소개되면서, 만화독자의 지평을 전혀 다른 쪽으로 이끌어나가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서점용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몇번씩 되읽으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진지한 만화읽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주독자층도 전통적인 만화문화의 중심인 청소년층을 벗어나 2, 30대의 성인독자들에게 그 손을 내뻗고 있다. 말하자면 전자오락실에서 게임 한판 하듯 만화를 휘리릭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와 뮤지컬을 감상하듯 천천히 곱씹으며 펜 선의 미묘한 율동까지 즐기게 된 것이다. 「꺼벙이」 「요철 발명왕」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고전만화의 복간 붐은 한편으로는 신작만화의 고갈을 메우려는 안쓰러운 시도로도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걸작들을 소장 가능한 책으로 재발간하여 만화사의 빈 곳을 채워나가고, 삼십 이상의 독자들이 만화에 대한 향수 속에 그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시도로서 칭찬의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제 만화가 책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여전한 장애들은 있다. 지금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책소개 쇼(!)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는 출판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 엉뚱하게도 만화에 그 불똥이 튀어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은 “책을 읽어야만 교양인이 된다”는 훌륭한 취지에 따라, 만화를 진지하게 읽거나 자신의 만화독서를 자랑하는 독자들을 여러차례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언론중재위원회에까지 제소된 후 약간의 해명으로 유야무야되긴 했지만, 오늘날 이 사회가 만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TV의 뉴스시간에는 만화의 문화적 가치를 운운하면서, 그보다 훨씬 개방적으로 보이는 쇼 프로그램에서는 만화를 교양의 방해꾼으로 내몰고 있다. 만화는 정말로 책의 적인가?

여러 문학전문 출판사들이 속속 만화를 내놓고 있다. 그들은 이미 70년대 이후 일본 대형출판사들의 성공적인 만화출판의 사례를 보아왔지만, 우리 사회의 완고한 문학중심주의, 활자중심주의 때문에 만화를 술자리의 안주로 삼는 데도 부끄러움을 느껴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문학인들도 사석에서 몇몇 만화의 철학적 테마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심지어 가장 혐오할 만한 개그만화의 도발적 파괴성과 카타르씨스를 옹호하기도 한다. 만화가 비록 문학과 어깨를 겨누지는 못하더라도, 서서히 교양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파편적인 노략질을 겪으며 본연의 만화는 깨닫고 있다. 만화는 책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모니터로 날아간 만화는 이미 전혀 다른 것이다. 책 역시 깨닫고 있을 것이다. 굳이 ‘영상의 시대’라는 허울이 아니라도 만화는 자신이 충분히 껴안을 만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책과 만화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깨닫게 된다. 저 모니터와 스크린에서 혼자 달아나버리는 영상보다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상상하며 책장에서 책장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묘한 사색의 틈을 즐길 수 있는 만화가 훨씬 자신의 정서에 맞는 것임을. 책과 만화가 서서히 만나가는 이 장면이 한국만화에 새로운 승리를 위한 반전의 순간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