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문학상
제4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문학상의 제4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의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되었으며, 상금은 1000만원입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1월 27일(수)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신대철(申大澈)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심사위원
본심: 고은 최하림 최원식
예심: 박영근 김기택
2000년 10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 수상자 약력
1945년 충남 홍성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1977)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2000) 등이 있음. 현재 국민대 국문과 교수.
심사 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2년 9월 7일 모임에서 제4회 백석문학상 심사위원으로 고은·최하림·최원식 3인을 위촉하고 예심위원 선정을 지난해처럼 운영위원 중 문단인사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예심위원을 선례에 따라 중견시인 중 심사대상 시집이 없는 인사로 박영근·김기택 2인을 위촉하고, 각자가 6~7권의 후보작을 추천토록 의뢰했다. 양인은 각기 6권과 7권의 시집을 추천했는데 그중 일부가 중복되어 9권의 시집이 1차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본심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중견시인의 시집 4권을 덧붙이기로 하여 다음 13권의 시집을 본심대상으로 정했다.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고진하 『얼음수도원』, 고형렬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김명인 『바다의 아코디언』,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마종기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 박태일 『풀나라』, 박형준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송재학 『기억들』, 신대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채호기 『수련』, 최정례 『붉은 밭』(가나다순).
본심은 10월 4일 창작과비평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13권에 대한 심사위원 각자의 견해를 밝히면서 대상시집은 자연스럽게 4~5권으로 압축되었고, 다시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와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로 범위를 좁혀 오래 토론을 벌였다. 후자의 결곡한 아름다움을 높이 보았으나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가 도달한 경지를 기려 마땅하다는 데 전원이 합의하였다.
심사평
高銀 시인
시집 열셋은 저마다 울긋불긋하다. 시집 하나하나를 한달음에 읽어내는 일은 괴로움 반 즐거움 반이었다. 무순(無順)이었다.
고형렬 『김포 운호가든집에서』는 현실 저쪽에 나가 있는 고적(孤寂)이 그려진다. 생활도 적멸인가.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은 절제의 시범인 듯하다. 한낮의 사상(事象)에 스며든 어둠이 세밀하다. 송재학의 『기억들』은 화자가 임의로 직면하는 풍경들이 묵상에 잠기는 듯하다. 정작 시의 배후는 불길인가. 이면우의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는 산전수전의 정신을 갖추었다. 거짓 없는 일상, 처연하다. 강연호의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는 할말이 많아서인지 말이 푸짐하다. 정작 시인이 그려내는 사물은 입을 다물고 있다.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에는 핏줄 이야기, 피붙이가 사는 곳, 피붙이가 흐르는 곳의 이야기가 있다. 근원의 농경사회는 그러나 떠난 자의 기억이다. 고진하의 『얼음수도원』은 태백산맥 이쪽 저쪽의 심정적 이정표이다. 저녁노을도 공양(供養)이란다. 채호기의 『수련』은 야심이 담긴 주제 설정의 시집이다. 언어가 막 익기 시작하는 과일처럼 탱탱하다. 그래서 모네(C. Monet)가 아니라 각질의 인물이다. 김명인의 『바다의 아코디언』은 충직한 신념을 드러낸다. 먼길 마다하지 않고 황소가 간다. 마종기의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는 생의 실내악이다. 시 속에 동물은 더러 있으나 동물성은 없다. 박태일의 『풀나라』는 절로 고개 끄덕여지고 절로 어깨 들썩여진다. 시가 비승비속의 가무를 일으킨다. 최정례의 『붉은 밭』은 순간 속의 전체를 포착한다. 일즉일체(一卽一切)인가보다. 언어가 강렬하다. 의식과 기교 어느 쪽인가. 신대철의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인간사를 녹여 자연에 보태고 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무아인가. 시집 안의 여러 오지야말로 시인의 오지체험을 승화시키고 있다. 과연 오지의 시인이로고.
결국 신대철의 과작을, 위임받은 세 사람이 다같이 수상작으로 삼았다.
이로써 올해 백석 선생을 기리는 일을 마친다.
崔夏林 시인
예심을 거쳐온 시집들 가운데서 선자의 손에 남은 것은 신대철의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와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였다. 두 시집을 놓고 우리는 장시간 토의에 들어갔다. 신대철은 시집 전편에 흐르는 ‘상처’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호하기는 하되 그것의 깊이를 지니고 있었으며, 박형준은 정감이 서린 말씨를 구사하고 있으되 집중력이 덜 보인다는 점들이 지적되었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선자들은 그 장단점이 한편의 시(나아가 시집) 속에서 서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어떻게 펼쳐나가는지 들여다보아야 된다.
박형준의 이번 시집에서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은 ‘어머니’로 보인다. 뿌리은유라고 해도 된다. 어머니가 등장한 시들은 어머니로부터 시인에 이르는 반세기에 한한 시간을 거느리고 있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전통을 알게 모르게 껴안고 있다. 그래서 시들에는 물기가 있고 설득력이 넘친다. 반면에 어머니는 박형준의 세계를 한정적이게 하고 배타적이게 한다.
신대철의 시는, 뿌리 은유라 할 수 있는 상처가 안개에 싸여 있으므로 비무장지대나 알래스카, 울란바토르, 북극으로 무한변용될 수 있으며 무한확대될 수 있다. 확대와 변용이란 구체화하지 않는 것이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없다’가 된다. 관념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관념은 그의 상처를 극단으로 밀어가 얻은 비극적인 관념이고 극광(極光)과도 같이 눈부신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투명하다 못해 시리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 우리는 // 빛 쏠리는 쪽으로 휘어지며 이 세상 깊이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안개 낀 얼굴은 길거리마다 탈이 되어 걸려 있고 탈 벗은 자들 꿈같이 살아가는 집 안을 지나면 길은 시커멓게 그을리며 탔습니다. 우리는 햇볕 속을 따갑게 지나 정오를 지나 수직으로 올라갑니다.
–「얼음집」 부분
무서운 집중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투명한 아름다움이다. 그 무서운 집중력과 투명한 아름다움이 신대철을 수상자로 밀었다.
이면우의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를 감명깊게 읽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명기해두고 싶다. 시와 삶이 하나가 되는 시를 모처럼 대하는 즐거움이 컸다.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예심을 거쳐 오른 시집들 가운데 나는 신대철의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김명인의 『바다의 아코디언』, 고형렬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그리고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는 피어 있다』에 주목하였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신대철의 두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일종의 변경통신이다. 한반도 안의 미묘한 변경, 비무장지대에서 출발하여 그는 세계의 모든 극지들을 탐사한다. 그러나 이 원심적(遠心的) 탐구는 종내 ‘나’로 구심(求心)한다. 아마도 6·25에서 기원한 듯한 가족적 상처와 앨쓴 화해를 모색하는 시인의 편력이 과연 어디로 귀결할지 자못 궁금하다.
김명인을 정독하면서 김기림(金起林)의 「바다와 나비」가 떠올랐다. ‘정오의 사상’을 호기롭게 내걸고 ‘현대’를 향해 저돌하던 김기림의 모더니즘이 식민지 현실과 부딪치면서 엷은 피로에 싸여 막막히 귀환하는 지점에서 이 시가 솟아났다면, 김명인은 이 시집에서 인간 또는 뭇 중생을 통과하는 ‘시간의 발효’를 집중적으로 사유한다. 그런데 생기보다는 환멸과 비관에 더 기운 것이 안타깝다.
‘이론적 인간’에 대한 극도의 기피 속에서 시의 음악을 통해 실존의 불안을 진지하게 응시해온 고형렬은 참으로 유니크한 시인이다. 그런데 그의 불교적 사유가 출세간으로만 기우는 점이 슬프다.
이번 시집을 통해 박형준은 발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유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응시하는 시편들이 거둔, 사회성과 예술성의 비의도적 균형에 비해 현재를 노래한 시편들은 한 변으로 기울었다.
박형준의 미래에 기대를 두면서 신대철을 금번 수상자로 삼자는 데 나도 기꺼이 동의하였다. 신대철 시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수상 소감
고백
신대철
수상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이땅에서 받기만 하고 침묵밖에 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는다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이지만 지속적으로 시를 쓰면서 우리 현실을 감내해온 시인들께는 계면쩍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계속 침묵만 지킨 것은 아닙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에 실린 시편은 모두 젊은이들과의 작품토론회에서 이미 발표한 것들입니다. 표정이 없는 종이가 아니라 뜨겁게 살아 움직이는 가슴에다 발표한 작품들입니다. 저는 다만 그 울림을 받아 고치고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시들은 제 개인이 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체험을 추체험하면서 시의 총량에 참여했을 뿐입니다.
저는 한때 ‘인간적 진실’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진실 앞에 수식어를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만큼 혼돈에 빠져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서 사선을 넘으며 공작원을 북파시킨 일이 죄의식으로 남아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군복무를 험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단의 씨앗을 키웠다는 자책감에 제대로 시를 매듭지을 수 없었습니다. 첫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는 저를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신적인 균형을 잡기 위하여 씌어진 시집입니다.
제 고통은 그대로 생활에 이어졌습니다. 결혼 후 스무 번이나 집을 옮겼습니다. 가난하기도 했고 어딜 가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한 ‘국제창작계획’에 참여하면서 저는 조금씩 제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모습은 분단된 나라에서 온 시인들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제 고통은 제 개인의 것이 아니고 우리 한민족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새로 살고 싶었습니다. 북극 얼음사막으로, 황막한 고비 모래사막으로, 초원으로 헤맨 것은 삶을 다시 회복해보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북극을 떠도는 동안 만난 북한사람은 제 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포대경(砲臺鏡)에 잡히던 북한사람을 극지에서 마주보고 살아가는 일이 꿈만 같았습니다. 남북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제 시에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 온기는 그가 넘겨준, 그의 체온입니다.
그로부터 받기 시작한 체온에 이웃의 체온을 섞고, 궁핍한 이들의 체온까지 섞어 새로이 원초적인 삶을 꾸려보려고 들어간 곳이 고비 모래사막이었습니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떠도는 인간을 유목민으로 바꾸면서 단순한 생활 속에 거처를 두고 거기 정착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막에 가보니 그곳은 그렇게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사막이 아닙니다. 죽은 땅이지요. 사막은 그냥 사람 사는 곳이에요. 살기 위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뎌보지 않으면 모래구릉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니 절대고독이니 원초적 삶 운운하는 이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들입니다. 삶이란 모래와 풀과 바람에 길들여지며 굴러다니는 거지요. 악취도 향기지요.”
저는 사막에 들어와서 마침내 종교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삶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머리나 신념에 기대지 않고 몸으로 사람과 땅과 하늘과 빛에 가까워지고 몸으로 말을, 사랑을,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여기 이땅으로 제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이 악몽 같은 도정에서 나온 시집입니다. 저에겐 ‘인간적 진실’에서 ‘진실’로 나오는 데 23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북파공작원 문제가 공론화되어 그들에게도 북쪽으로 간 비전향 장기수들처럼 이땅에서 함께 평화통일을 꿈꾸며 살 수 있는 길이 트이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시를 써보라고 독려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