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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지구시대의 비교문학과 영어의 지배

 

 

조너선 애럭 Jonathan Arac

컬럼비아대학 영문학·비교문학과 해리먼(Harriman) 교수. 『바운더리 2』(boundary 2) 편집위원. 저서로 『비평적 계보들: 포스트모던 문학연구의 역사적 상황』(Critical Genealogies: Historical Situations for Postmodern Literary Studies, 1987), 『우상과 표적으로서의 허클베리 핀: 우리시대 비평의 기능』(Huckleberry Finn as Idol and Target: The Functions of Criticism in Our Time, 1997)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Anglo-Globalism?”이며 New Left Review 16호(2002년 7-8월호)에 실림. ja2007@columbia.edu
ⓒ Jonathan Arac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 옮긴이의 말

 

이 글은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가 「세계문학에 관한 몇가지 추측」(“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1호, 2000년 1-2월호)에서 제시한 세계문학에 관한 구상을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싸이드(Edward Said)의 비교문학적 작업과 견줌으로써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애럭 자신이 인정하듯 글이 시론의 성격을 띠는가 하면 논지전개가 때로 어수선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으므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모레띠가 이 논문에서 펼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를 간략히 소개하는 한편 이에 대한 애럭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짚어둔다.

모레띠에 따르면, 19세기 괴테와 맑스가 지역적·민족적 문학과 대비되는 세계문학의 이념을 제안한 이래에도 비교문학 연구는 서구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가 관철되는 것으로 보이는 지금, 세계문학은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포괄하는 탈유럽중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수백개의 언어와 문학을 포괄하는 세계문학의 전행성적 체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술할 것인가? 연구대상이 엄청나게 확대됨에 따라 많은 언어를 습득하여 많은 자료를 섭렵하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대상의 규모와 성격에 걸맞은 새로운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이 대목에서 모레띠는 꼼꼼한 읽기(close reading)에 기반한 자료에 대한 직접적 접근에 대비되는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에 기반한 자료에 대한 이차적(second hand), 간접적 접근을 방법론으로 내놓는다. 세계문학 연구에 종사하는 비교문학 연구자의 과업은 직접적인 텍스트 분석이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이 수행한 자료조사의 결과를 재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같은 “멀리서 읽기”는 자료의 방대함에서 비롯되는 단순한 편법이 아니라 “지식의 조건”이다. “멀리서 읽기”는 문학적 장치, 주제, 비유법 등과 같은 텍스트보다 더 작은 단위들 또는 장르, 체계 등과 같은 텍스트보다 더 큰 단위들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대상에 대한 포괄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그같은 과정에서 구체적인 텍스트 자체가 관심의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 지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일 따름이다. 이차자료에 기반한 이러한 종합을 통해 전지구적 수준의 세계문학을 구성하는 것이 비교문학 연구자의 몫이라면 일차자료에 관한 조사와 분석은 지역적·민족적 언어에 능통한 각 지역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리하여 종합작업과 분석작업의 분업이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모레띠의 주장이다.

애럭의 모레띠에 대한 비판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우어바흐나 싸이드가 비교문학적 종합을 시도하면서도 문학텍스트의 구체성에 밀착된 비평적 노력을 중요시했던 데 반해, 모레띠가 세계문학의 보편적 거대도식에 집착하면서 문학텍스트의 구체성을 포기한 것은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순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적·민족적 수준의 분석작업과 세계문학 수준의 종합작업을 분업적 체계 속에서 분리하는 것은 영어의 전지구적·제국주의적 지위를 전제하는 것인 한편, 그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역적·민족적 언어 및 문학의 존립근거를 박탈하는 논리로 작동될 수도 있다. 두번째 문제 또한 모레띠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추상적인 데서 비롯된다.

애럭의 문제제기는 모레띠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최근 고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시의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이론적 작업에서 문학작품의 구체성에 입각한 비평적 관심이 갖는 의의, 전지구화 시대에 민족문학과 민족어가 차지하는 위상, 영어의 정치학 등 중요한 생각거리들을 담고 있다.

薛俊圭/한신대 영문과 교수 jksol@hanshin.ac.kr

 

 

하나의 큰 주제에 관한 이 짧은 에쎄이는 진행중인 생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1 논의의 폭을 이 글에서 감당할 만한 정도로 한정하기 위해, 지난 반세기에 걸쳐 세 세대를 대변한 세 명의 서구 비교문학 연구자, 즉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핵심적인 강령적 저작들을 검토하겠다. 시대순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1950년대 초, 1970년대 중반, 2000년 등 대체로 고른 간격을 두고 나온 저작을 골랐다. 이 글의 논의에서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인 반면 이론은 거리를 두고 추상화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많은 부분–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 뽈 드만(Paul de Man),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등의 저작 중 상당부분–이 비평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지구화가 이론을 선호해 비평을 침식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교환과 정보의 전지구적 언어인 영어가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상호 교섭하게 된 수백개의 언어 및 문화 들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2 내가 이 복잡한 현상을 처음으로 기술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이 현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전지구화는 복수화(複數化)한다. 그것은 모든 국지적, 민족적 또는 지역적 문화를 타문화에 개방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複數)의 세계들’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같은 복수의 세계는 단일한 매개체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달러가 전지구적 상업활동의 매개체이듯, 영어 또한 전지구적 문화의 매개체로서 ‘단일한 세계’를 창출한다.

 

내 논제의 예화는 나를 불안하게 만든 어떤 재치있고 도전적인 글에 나온다. 이 글은 영어로 씌어져 영어 학술지에 실린,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딸리아 학자의 것이다. 프랑꼬 모레띠는 「세계문학에 관한 몇가지 추측」에서, 1827년 괴테가 최초로 제안했고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도 거론했던 세계문학(Weltliteratur) 개념을 갱신함으로써 유럽중심적·냉전적 비교문학 연구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3 모레띠는 자본주의와 민족국가의 동시적 발생과 더불어 유럽의 한 핵심부에서 퍼져나간 초문화적 확산력을 지닌 형식으로서 근대소설에 촛점을 맞춘다. 근대소설의 확산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거론한 바,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전지구적 생산성을 지녀온 인쇄술, 자본 및 민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의 한 실례이다.

모레띠는 “현재 우리 주위의 문학이 분명 하나의 행성체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관측에서 출발한다. ‘수백의 언어들과 문학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거역할 수 없이 대면하게 된 시대에, 비교문학 연구자들이 늘 그래왔듯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해결책은 양에서 질로 옮아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주의 틀로써 작업하는 것이다. 한 세기를 거슬러올라가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에게서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으로서의 해석학적·역사적·비교문학적 사회과학 모델을 찾는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의 ‘실제적’ 상호관련이 아니라 (…) 문제들개념적 상호관련이 다양한 학문들의 영역을 규정한다. 새로운 문제가 새로운 방법에 의해 추구되면 ‘새로운 학문’이 출현한다.

 

나중에 가서 쿤(T. Kuhn), 푸꼬(M. Foucault), 알뛰쎄르(L. Althusser)가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버는 여기에서 인식의 방법과 인지적 기법의 우위성, 그리고 원재료의 종속성을 강조한다. 이같은 모델에 따라 모레띠는 세계문학이 대상이나 사물의 명칭이라기보다 문제–즉, 가능성–의 명칭이며, 그것에 관한 학문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더 많은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 결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비평적 방법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모레띠가 (포퍼K. Popper를 좇아)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이론들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도약, 내기, 즉 가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레띠의 가설은 전지구화에 관한 근래의 사유들 대부분에 주된 영감을 제공하고 또 그 선례가 되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세계체제 연구를 토대로 삼는다. 월러스틴에게서 모레띠는 핵심(core)과 주변(periphery)–‘하나이면서 동시에 불평등한 세계체제’–의 개념적 모델과 연구방법도 빌려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에서 따온 인용구들로 구성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하는 월러스틴 저작의 양상에 주목한다. (세계체제론의 기본개념인 ‘core’와 ‘periphery’는 통상 ‘중심’과 ‘주변’ 또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centre’라는 매개항이 제시되므로 core는 ‘핵심’, centre는 ‘중심’으로 옮긴다.–역자)

 

 

이차적 글읽기

 

이같은 방법에 입각해서 모레띠는 고의적으로 논란을 불러올 법한 의제를 내놓는다. 문학사는 ‘이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적 비교문학 연구는 “직접적인 텍스트 읽기가 전혀 없이 다른 사람들의 연구결과를 짜맞춤”으로써 이루어지는 계획이다. 여기에서 모레띠는 미국 학계를 짐짓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꼼꼼하게 읽기(close reading)의 나라’인 것이다. 미국학자들이 ‘극단적으로 적은 수의 정전(canon)’에 매달리는 데 맞서서, 그는 주어진 연구계획이 포괄하려는 영역이 방대하면 할수록 “텍스트에서 더욱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모레띠의 목표는 ‘꼼꼼하게 읽기’라는 잔존적 방법을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라고 하는 그의 새로운 방법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멀리서 읽기의 장점은 그것이 “텍스트보다 훨씬 작거나 큰 단위, 즉 문학적 장치, 주제, 비유법, 또는 장르나 체계 등에 촛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꼼꼼하게 읽기에서 벗어남으로써 체계상의 쟁점들을 제기하려는 모레띠의 방법론적 포부는 캐나다의 이론가 노스롭 프라이(Northrop Frye)를 상기시킨다.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Anatomy of Criticism)는 신비평의 ‘단일작품 물신화’에 대한 논쟁의 일환으로 망원경의 은유를 동원한 바 있다. 모레띠와 마찬가지로 프라이의 관심사도 거시적 수준과 미시적 수준 모두에서 초텍스트적인(transtextual) 것을 포괄했다. 모레띠가 자신의 의제를 위한 또다른 구상에서 형식이라고 정의했던 것은 프라이가 문학이론의 기초단위로서 원형(archetype)이라고 정의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프라이에게 원형은 “문학적 경험 전반의 한 요소라고 인정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에서 빈번히 되풀이되는” 어떤 것이다.4 모레띠에게 “형식은 문학의 반복 가능한 요소, 즉 많은 경우와 오랜 기간에 걸쳐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되풀이되는 어떤 것이다.”5

꼼꼼하게 읽기를 배제하는 모레띠의 새로운 형식주의는 지금 활동중인 미국의 문학연구자들에게는 루카치(G. Lukács)의 베버적이고 미학주의적인 『소설의 이론』(Theory of the Novel, 1916)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진 사고의 유형을 재활용한다. 루카치는 이 저작에 “위대한 서사문학의 형식에 관한 역사적·철학적 논고”(강조는 필자)라는 부제를 달았으며, 이 책에서 그는 도합 세 장에 걸쳐 『돈끼호테』(Don Quixote),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 『감정교육』(L’Education Sentimentale) 등 여러 언어의 작품들을 비교문학적으로 다루면서도 직접인용은 한 단어도 하지 않는다. 루카치, 베버와 마찬가지로 모레띠는 역사연구자를 자처하는데, 이것이 프라이와 다른 점이다.

역사학자로서 모레띠는 그가 ‘문학적 진화’의 법칙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탐구한다. 모레띠는 그같은 법칙 한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문학적 체제의 주변부에 속하는 문화들, 다시 말해 유럽 안팎 대부분의 문화들에서 근대소설은 자율적 발전이 아니라 서구적–대체로 프랑스적이거나 영국적인–형식의 영향과 지역적 소재들이 타협한 결과로서 발생한다.6

 

모레띠의 정식화에 맞지 않는 이례적인 경우를 하나 지적해두자.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근대를 시대구분하는 방식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영국의 경우 필딩(H. Fielding)은 자신의 『조지프 앤드루즈』(Joseph Andrews, 1742)를 “쎄르반떼스의 방식을 좇아 씌어진, 산문으로 된 희극적 서사시”로 정의했다. 따라서 모레띠의 근대적 핵심 자체는 한때 핵심이었다 나중에 주변이 되어버린 형식을 변용함으로써 발생한 셈이다. 이 이례적인 경우는 모레띠가 월러스틴을 활용하는 방식과 관련된 좀더 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월러스틴의 기획 전반은 역사적 성격을 지니지만 그의 모델에서 핵심과 주변의 관계는 공시적(synchronic)이다.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핵심은 핵심이 될 수 있으며 주어진 싯점에서 그 둘은 한데 어우러져 체제를 규정한다. 그러나 모레띠의 법칙에서는 중심(centre)의 핵심(core)에 대한 관계가 ‘영향’에 의해 작동한다. 즉 중심이 핵심보다 선행한다. 월러스틴에게 공간적인 것이 모레띠에게는 시간적인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서구 비교문학 연구의 전통적인 우선순위 및 발전론의 단계론적 모델에 모레띠가 원했을 법한 정도 이상으로 근접한다.

어쨌든, 자신이 제안한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의존하게 될 2차자료들을 열거하는 과정에서 모레띠는 진실로 전지구적인 비교문학 연구에 대한 탐구심을 어느정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한 성찬을 내놓는다.

 

18세기 말 동유럽에 관한 가스빠레띠(Gasparetti)와 고실로(Goscilo)의 글, 19세기 초 남유럽에 관한 또스치(Toschi)와 마르띠-로뻬스(Marti-López)의 글, 20세기 중엽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프랑꼬(Franco)와 쏘머(Sommer)의 글, 1860년대 유대(Yiddish) 소설에 관한 프리덴(Frieden)의 글, 1870년대 아랍 소설에 관한 무싸(Moosa)의 글, 싸이드(Said)와 알렌(Allen)의 글, 같은 기간의 터키 소설에 관한 에빈(Evin)과 파를라(Parla)의 글, 1887년에 나온 필리핀 소설 『내게 손을 대지 마라』(Noli me tangere)에 관한 앤더슨(Anderson)의 글, 19세기 말 청나라 소설에 관한 쟈오(Zhao)와 왕(Wang)의 글, 1920년대와 1950년대 사이 서아프리카 소설에 관한 오비에치나(Obiechina), 이렐레(Irele), 그리고 퀘이썬(Quayson)의 글[물론 여기에 덧붙여 카라따니(Karatani), 미요시(Miyoshi), 무커지(Mukherjee), 에벤-조아르(Even-Zohar), 그리고 쉬바르쯔(Schwarz)의 글] 등을 검토했다. 네 대륙을 2백년에 걸쳐 다룬, 스무 개가 넘는 독립적인 비평적 연구들인데, 이들 모두가 같은 견해를 보였다.7

 

모레띠에게는 이 학자들이 ‘독립적’이라는 것, 즉 그들이 제한된 자료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논지를 직접 전개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레띠가 구상하는 지적 분업에서 한 언어권의 학자는 그 언어로 된 텍스트만 읽을 뿐 다른 언어권 학자들의 글은 읽지 않는다. 비교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만이 모든 학자들의 글을 읽는다.

이런 진화론적 모델의 함축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모레띠는 세번째 항목을 끌어들이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비교문학적 연구와 민족단위 문학연구 간의 관계를 한층 명백히한다. 근대소설의 진화에 관한 핵심·주변 모델은 “외부에서 들어온 줄거리, 지역적 등장인물, 그리고 가장 불안정한 것으로 지역적 화자의 목소리” 등 상호작용하는 세 구성요소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지역적 화자의 목소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이 필요하다고 모레띠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같은 분석은 꼼꼼한 읽기–내 식으로 표현하면 비평적 읽기–와 관련된 것이므로 비교문학의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민족단위 연구의 특수한 영역, 곧 비평의 공간이 구획된다. 하지만 그 공간에 미래가 있는가?

민족문제에서 비교문학의 학문적 기획의 관점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모레띠의 글이 충격적인 것은 비교문학은 언어적 성격을 버려야 하며 언어문제는 개별 민족문학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교문학 연구자들은 2차대전 이후 1980년대까지 지배적이었던 언어능력의 모델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가 더이상 구조를 지탱하는 네 개의 지주가 아닌 것이다. 1993년 베른하이머(Bernheimer) 보고서 「세기말의 비교문학」(Comparative Literature at the Turn of the Century)에 의해 촉발된 논쟁에서, 새로운 전지구적 언어의 정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가지 상이한 제안들이 나왔다.8 모레띠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한칼에 자르고자 한다.

하지만 모레띠의 글은 언어를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다룬다. 영어가 모든 대륙들을 긴 시기에 걸쳐 조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적인 매개체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전지구화에서 영어가 실제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무시한다. 모레띠가 드는 스무 명의 비평가들 가운데 한명은 스페인어, 또 한명은 이딸리아어, 그리고 나머지 열여덟은 영어로 인용된다. 스물에 이르는 민족문학들을 조망하는 일은 인상적인 다양성을 띠지만, 그 문학들을 알리는 수단은 하나의 언어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에서 영어는, 경제학에서 달러가 그러하듯, 지식이 지역적인 것에서 전지구적인 것으로 번역되게 하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전지구화 과정의 언어문제에 관해 순전히 추상적 관심을 보이는, 구체적으로 말해 영어의 역할을 부각하거나 문제삼지 않는 사람은 모레띠말고 또 있다. 전지구화에 대한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야심만만한 정치적 탐구인 『제국』(Empire)에는, 내 주의력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영어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발본적·심층적 공통성” “통신과 (…) 공통된 언어들로 이루어진” “생산력이 높은 세계” 등을 규정하는 대목에서조차도 영어가 언급되지 않는다. 하트와 네그리가 윤곽 짓는 세계에서는 “통신이 점점 더 생산의 기초가 되었고” 따라서 “언어적 감각과 의미에 대한 통제가 (…) 점점 더 정치적 투쟁의 중심적 쟁점이 된다.” “인간 공동체”가 “무한한 권능을 지닌 여러 빛깔의 오르페우스”로 성립되는, 블레이크(W. Blake)나 셸리(P. B. Shelley)에게서 발견될 법한 묵시론적 희망의 순간에, 절정은 “세속적 오순절”(五旬節: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날–역자)의 모습으로 도래하며, “몸들이 섞이고 유목민들이 공통의 언어를 말하게 된다.”9 하지만 이 축복에 찬 희망에 대한–프라이 식으로 표현하자면–악마적 희화화로서라도 전지구적 영어를 거론할 법하건만, 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이론은 그런 것이다!

 

 

인식 가능한 것의 확장

 

나는 지금까지 모레띠의 기획을 프라이의 경우와 비교했지만, 널리 인식되지 않고 있는 또다른 20세기 중반의 비근한 사례는 프라이 경우보다 모레띠의 기획에 더 가깝다. 모레띠의 글은 아우어바흐의 1952년도 글 「문헌학과 세계문학」(Philology and Weltliteratur)의 문제틀을 갱신한 것이다. [아우어바흐는 『후기 라틴 고전시기 및 중세의 문학언어와 그 대중』(Literary Language and its Public in Late Latin Antiquity and In the Middle Ages)의 서론에서 동일한 관심사를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10 이 글에서 아우어바흐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영감을 얻은 지암바띠스따 비꼬(Giambattista Vico)의 『새로운 학문』(Scienza Nuova, 1725)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초 독일 로만스어 문헌학자들 중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 특히 레오 슈피쩌(Leo Spitzer),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Ernst Robert Curtius), 카를 포쓸러(Karl Vossler) 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규정한다. 그는 비꼬의 문헌학에 관한 정의로부터 문헌학이 독일문화 내에서 ‘인류’를 관심사로 다루는 정신사(Geistesgeschichte)로 자리잡게 되는 단초를 추적해낸다. 아우어바흐는 자신의 작업이 역사상의 특정한 시기–그가 ‘우리 시대’라고 부르는 2차대전 이후의 시기–에 진행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 시기는 수세기 동안 종전의 학문과 사색의 지평이 되었던 유럽문화의 쇠퇴에 의해 규정된다. “유럽문명은 그 존재의 종말에 다다르고 있으며, 독자적 존재로서의 그 역사도 끝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미 유럽문명은 또하나의 좀더 포괄적인 통일체 속에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세계문명”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어서, 발본적으로 혁신적인 새 흐름은 “다른 혹성에서나 와야 할 법”하다고 생각되었다.11

지식획득의 이같은 새로운 기회와 연관된 “엄청난 양의 자료”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어진 주제에 관한 사용가능한 모든 지식을 한번의 생애 동안 축적하고 종합하려는 뜻을 품을 수 없다.” 이같은 정식화의 수준에서 보면 아우어바흐는 모레띠가 해석한 월러스틴보다 덜 낙관적인 것 같다. 아우어바흐는 당대적 지식을 산출하는 기초로서 체계보다는 “비체계적이고 마음을 여는 노력” 정도를 제안할 따름이다. 아우어바흐가 보기에 이러한 노력은 무엇보다 그의 방법–모레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포부를 품은–이 적용되도록 해줄, 그가 ‘출발점’(Ansatzpunkt)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결정을 요구한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의 텍스트를 고립된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나는 그 텍스트에 질문을 던지며, 그 텍스트가 아니라 내 질문이 나의 일차적 출발점이다.”12 이는 실질적으로 모레띠가 해석한 베버와 가까워 보이지만 종합화에 대한 포부의 수준은 더 낮게 잡혀 있다. 과학도 법칙도 없는 것이다.

내가 아우어바흐를 끌어들인 목적은 우선 그와 모레띠가 생각하는 문제들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진실로 전세계에 걸친 문학이 출현함으로써 인식가능한 것이 확장되었다는 사실,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충분히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지식탐구의 새로운 절차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따라서 역사적 탐구가 가능하도록 상상력을 동원해 고안된 자료접근지점을 그같은 지식탐구의 절차가 정의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두 사람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의 종식은 어떤 사람들에게 전지구적 통찰의 순간을 허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한편 압도적이기도 했던 그 통찰은 이분법적 냉전구도 속에 차단되었지만, 1990년대에 와서 전지구적인 것은 좀더 분명하게 재출현했다. 아우어바흐는 전지구성을 정의했다는 점에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박식함이 그가 태어난 독일에서 겪은 유대인으로서의 주변적 지위, 뒤이은 터키 망명 및 미국 이민 등과 결합함으로써 예사롭지 않은 직관력을 제공한 것 같다. 그의 성찰은 단호하면서도 과거에 대한 동경에 차 있다. 그에 비하면 모레띠가 윤곽짓는 문제는 지금에 와서는 낯익다. 새로운 것은 그의 해결책과 거기에 담긴 지나친 행복감이다.

아우어바흐는, 우리가 보았듯, 자신의 스승 비꼬를 독일의 정신사 전통에 연결지음으로써, 모레띠의 베버 지지에 의해 규정된 바로 그 지적 공간에 우리가 비꼬를 위치시킬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비꼬는 문헌학자였고 베버는 실증주의자였다. 문헌학과 실증주의 사이의 긴장(비꼬와 베버, 아우어바흐와 모레띠 사이의 긴장)은 이같은 표면적 동일화가 암시하는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 비평과 이론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 지점인 언어의 수준에서 분명 그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우어바흐가 보기에 텍스트에 던지는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들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우어바흐가 비평을 하는 반면 모레띠는 이론을 한다. 19세기에 문헌학과 실증주의 사이의 긴장이 니체에게서 명백히 드러났다. 우리 시대에 이같은 긴장이 발견되는 한 지점은 한때 모레띠의 동료였고 아우어바흐의 추종자이기도 한 싸이드의 작업이다. 싸이드는 「문헌학과 세계문학」을 공동으로 번역했고, 『시작』(Beginnings: Intention and Method)에서는 아우어바흐와 비꼬를 활용해 독자적이고 영향력있으며 여전히 도전적인 방식을 개진했는데, 그의 방식은 모레띠와는 방향이 매우 다르다. 모레띠가 아우어바흐에 내재하는 긴장을 추상적 형식주의 편에서 해소한 반면, 싸이드는 비꼬에게서 “인간의 용도에 따라 쓰이는 까닭에 물리적 실재로부터 발산하게 마련인 말을 어수선한 물리적 실재 쪽으로 억지로라도 되돌려보내려는 문헌학자의 완고한 버릇”13을 높이 평가한다.

『시작』에 제시된 강조점 셋은 내가 규명해온 문제틀에 논쟁적 원근법을 제공한다. 첫째, 지식과 번역 사이의 곤란한 관계의 성격에 대해 싸이드가 20여년 전에 설명해놓은 것을 보자.

 

우리는 문학 수련을 받은 학생이 ‘고전문학’에 관해 어설픈 지식을–번역을 통해–갖고 있을 따름이라 해도, 문학과 자연스럽게 인접하며 어떤 방식으로 문학과 관련이 있다고 그가 전제하는 다른 지식, 또는 준지식(準知識 paraknowledge)에 대해서는 긴하게 의식하고 있을 것을 기대한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오늘날 연구자로서 우리의 운명은 우리 학생들과 정확히 같다. 우리 가운데 고전 문헌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고작 독해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그리스어나 독일어를 배웠을 뿐이고, 대다수가 프랑스어 또는 이딸리아어를 급히 읽어나가는 강의를 듣는 동안 로만스어 문헌학에 관해 약간 읽었을 따름이다. 번역된 저술들(프로이트, 니체, 프루스뜨, 헤쎄, 보들레르)이 책장마다 잔뜩 꽂혀 있는 서점은 쉽게 활용가능한 다른 어떤 수단보다 우리를 지식의 세계에 더 가깝고 더 신속히 데려다준다.14

 

영어라고 여기에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싸이드의 책이 미국 학계의 독자층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모든 자료가 어떤 언어로 번역되는지는 분명하다.

두번째 강조점은 싸이드의 비꼬 해석에서 나오는데, 이 해석은 아우어바흐가 해석한 비꼬보다 덜 이론가적이고 더 발본적으로 비평가적인 인물을 제시한다. 싸이드는 “비꼬의 세부사항들에 대한 집착”과 “텍스트에서 건져올린 듯한 도식적 방법을 회피하는” 경향을 강조한다.

 

대신에 그는 넓은 시야, 광범한 비교, 큰 보편적 원칙들과 연결된 세부사항에 대한 애정 등을 지지했는데, 이 모두에는 도식에 하중을 걸어 쓸모없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비꼬의 수사가 지닌 힘은 늘 우리를 합리주의적으로 고려된 방법론에서 벗어나게 하여 정서로서의 지식, 기발한 착상, 상상력 등으로 이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지닌 한계가 호도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같은 경로는 비꼬와 마찬가지로 독자도 언어로 되돌아가게 한다. 언어는 비꼬가 거기에서 항상 시작하라고 가르치는 지점이다.15

 

비꼬의 이같은 모습은 싸이드가 흠모하는 스승 블랙머(R.P. Blackmur)의 언동을 상기시킨다. 지금은 고전이 된 블랙머의 모더니즘 연구는, 특히 예이츠(W.B. Yeats)와 조이스(J. Joyce)의 경우, 그들 작품의 방법론적 도식들을 드러내 보인 다음, 언어의 수준에서 그 도식들이 와해되면서 예기치 못한 훌륭한 표현 및 통찰로 이어짐을 입증했다. 싸이드에게 블랙머는 “비평이 촉구하고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배워서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의 형태로 모사되거나 재생산되거나 재활용되어서는 안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역설”16의 중심적인 실례가 된다. 싸이드의 생각에 이것은, 연구자는 모레띠의 월러스틴 해석을 뒷받침하는 각주들을 파도타듯 스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싸이드가 보기에 텍스트에서 실제적인 것은 기정사실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암묵적 제국주의?

 

싸이드가 1975년에 제시했으며, 결코 온전히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첫 저서인 콘래드(J. Conrad)론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한 의제 하나를 다루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그 의제는 영문학연구의 모습을 바꿀 뿐만 아니라 전지구화의 상태에 놓인 세계문학의 현 상황을 대면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비교문학 연구과제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제1언어이고 다른 작가들에게는 제2언어인) 영어가 (…) 어떻게 하나의 민족어이면서 동시에 세계어가 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데 있어 문학적 접근과 사회학적 접근의 상호의존이라는 형식적·심리학적 문제.17

 

나는 전지구성이 세계문학 연구에 제기하는 도전에 대한 모레띠의 접근방식에서 발견되는 여러가지 특성들, 즉 공언되지 않고 있는 영어 제국주의, 단일언어적 전체기획이 우선시되는 까닭에 언어에 기초한 비평이 약화되는 현상 등이 당혹스럽다. 이에 반해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싸이드의 관심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또한 그가 내세우는 비평적 기예(virtuosity)의 모델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이 있다. 배울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비평적 수행능력은 신비평적 모델이 텍스트를 돌이킬 수 없이 고립시켰듯 비평가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공적 지식인으로서 싸이드가 행한 엄청나게 용기있고 영향력있는 작업은 이같은 고립의 위험에 맞서는 것이다. 싸이드 자신이 이 위험을 되풀이해서 경고한 것은 고립의 깊은 유혹 때문일는지도 모른다.18

모레띠는 유쾌할 정도로 멋들어지고 재치있는 산문을 개발했지만, 그의 지적 포부는 그의 미문가적(belletrist) 포부와 달리 전문가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연구팀을 이끄는 지난 시기 독일 대학교수들의 경우와 같아 보인다. 문학적 인문학에 대한 이 포부가 귀하고 훌륭한 점은 그것이 협동적 사업을 육성, 촉진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어떤 한 연구자의 작업이 비교문학 연구자가 제시한 가설과 종합의 타당성을 확증하거나 또는 거기에 도전함으로써 다른 동료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도록 하는 진정한 공유의 과정이다. 이것이 모레띠가 스탠퍼드대학에 최근 설립한 ‘소설연구소’의 유토피아적 차원이다.19 문헌검토자들은 세계의 모든 다양한 언어들로 된 자료를 꼼꼼히 읽고 그 결과를 전지구적 규모의 종합을 맡은 사람에게 제출한다. 종합을 맡은 사람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단떼(Dante)의 찬사를 끌어와 좀 비틀어 말한다면,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고 묻게 된다.

미국 학계에서 여전히 낯익은, 언어에 기초한 비평은 깊은 역사를 통해 출현했지만 그 존재가 실제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문학비평이고 따라서 두 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은 문학의 근대적 의미와 존재를 같이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론이라고 인식하는 작업을 수행했지만, 그것은 언어에 기초한 작가나 작품 분석은 아니었다. 장차 그와 같은 문학비평이 될 것의 숙련된 기법은 수사적 분석과 종교적 성서해석에서 처음 등장해 오랜 기간을 거쳐 가다듬어졌다. 이 둘이 18세기 말 독일 고전 문헌학에서 결합했을 때는 민족주의가 폭발적으로 출현하던 시기였다. 언어에 기초한 근대 문학비평은 근대 민족국가와 더불어 발생하고 번성했다. 모레띠의 글은 이같은 역사를 무언중에 인정하지만, 우리 시대에 문학이 전지구적 성격을 띠고 민족국가의 위치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제기하는 또다른 문제를 파고들지는 않는다. 자기 모국의 근거지를 상실해가고 있는 비평적 수행능력의 한 양식 앞에 어떤 미래가 예비되어 있는가? 이산(diaspora)의 기술을 배워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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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w Left Review와 필자는 이 에쎄이 게재를 허용해준 Diaspora지의 동학적 배려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 에쎄이는 장차 나올 Roland Greene이 편집한 전지구화에 관한 Diaspora 특별호에도 실릴 예정이다.
  2. 이 쟁점에 관한 나의 생각은 boundary 2의 동료들로부터 값진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Ronald Judy, “On the Politics of Global Language, or Unfungible Local Value,” boundary 2, vol. 24, no. 2(1997) 특히 101〜104면; “Reasoning and the Logic of Things Global”이라는 제하에 boundary 2, vol. 26, no. 2(1999) 3〜72면에 묶인 Ronald Judy, Wlad Godzich, Joseph Buttigieg, Terry Cochran의 글을 참조하라.
  3. Franco Moretti, “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1호(2000년 1-2월호).
  4. Northrop Frye, Anatomy of Criticism (Princeton 1957) 365면.
  5. Franco Moretti, “The Slaughterhouse of Literature,” Modern Language Quarterly, vol. 61, no. 1(2000) 225면.
  6. Franco Moretti, “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앞의 책 58면.
  7. 같은 글 59〜60면. 대괄호 속 필자들에 관해서는 이미 논의되었다.
  8. Charles Bernheimer (ed.), Comparative Literature in the Age of Multiculturalism (Baltimore 1995) 55, 62, 66, 113, 130, 135, 145, 160, 178, 196면에 나오는 논평도 볼 것.
  9. A. Negri and M. Hardt, Empire (Cambridge, MA 2000) 302, 404, 362면.
  10. Erich Auerbach, “Philology and Weltliteratur”(1952), trans. Edward and Maire Said, Centennial Review 13(1969) 1〜17면; Literary Language and its Public in Late Latin Antiquity and In the Middle Ages, trans. Ralph Manheim (Princeton 1965).
  11. Auerbach, Liteary Language and its Public in Late Latin Antiquity and In the Middle Ages, 6, 16, 20, 21면.
  12. 같은 책 17, 18, 20면.
  13. Edward Said, Introduction to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Cambridge, MA 2001) xxi면.
  14. Edward Said, Beginnings: Intention and Method (New York 1975) 7〜8면.
  15. 같은 책 368면.
  16. 블랙머의 조이스 관련 논의는 Language as Gesture (New York 1952), 예이츠 관련 논의는 Eleven Essays in the European Novel (New York 1964) 참조. 싸이드의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246〜67면도 볼 것.
  17. Edward Said, Beginnings, 380면. 그의 Joseph Conrad and the Fiction of Autobiography (Cambridge, MA 1966)도 볼 것.
  18. 예컨대 “Reflections on American ‘Left’ Criticism,” boundary 2 (1978) 및 Introduction to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xvii~xx면을 볼 것. 여기에서 싸이드는 문화를 다룬 20세기의 숱한 서구 저자들이 역사의 경험에 반해서 방대한 이론적·형식적 성채를 구축해왔음을 개탄하고 있다.
  19. 연구성과의 공유에 대한 나 자신의 희망은 George Levine and E. Ann Kaplan (eds.), The Politics of Research (New Brunswick 1997)에 실린 “Shop Window or Laboratory: Collection and Collaboration in the Humanities”에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