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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제금동대향로의 문화적 배경을 찾아서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

 

 

최병헌 崔柄憲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shilrim9@snu.ac.kr

 

 

지난 1993년 10월 충남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의 절터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금동향로 하나가 발굴되어 국내외의 전문가들로부터 수많은 찬사와 감탄을 받았다.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 이래 백제 고고학의 커다란 성과이며, 사비시대(538〜660) 절정기의 백제미술과 문화의 수준·성격을 밝혀줄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었다. 이 향로는 유물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무늬장식과 제작기법이 매우 탁월하여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으며, 동아시아 향로의 역사에서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가장 우수한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데 이의가 없었다. 발굴 직후부터 이 향로 제작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일어났으나, 사비시대 당시 백제의 귀족사회를 풍미하던 불교와 신선사상을 정신적 바탕으로 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필자도 이 백제의 금동향로에서 표현하고자 한 주제가 불교의 연화장세계와 도교의 신선세계일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이 향로는 실로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도교라고 하는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한 장엄한 두 개의 수레바퀴가 하나의 독특한 교향곡으로 조화되어 이루어진 백제 공예미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최근 백제향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러한 기존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에서 그 배경을 찾으려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소개하려는 서정록(徐廷綠)씨의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책이 바로 그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연구서이다. 이 책은 그 시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 백제금동향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로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백제금동향로는 발굴되자마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단편적인 연구논문은 없지 않았으나, 종합적인 이해는 추구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선 이 향로가 발굴된 유적의 조사가 아직까지 완료되지 못했으며, 또한 향로 부조상의 내용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그 해독이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다는 문제도 겹쳐 연구자들의 접근을 망설이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저자는 먼저 향로의 부조상 가운데 5명의 악사와 기러기, 연꽃과 용, 그리고 삼산형(三山形) 산악도와 수렵도 등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넘나들며 그 기원과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그 가운데도 특히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비교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하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그 결론으로써 이러한 부조상들의 상징체계는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우주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느 것이나 백제인들 스스로 고대 동이문화의 계승자라는 명확한 자기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조형들이라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저자 자신은 “이 책이 백제대향로에 대한 문화사적 탐구이면서 동시에 한국 고대문화사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10면)며, 그리고 “우리 역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품어왔던 의문들에 대한 자신의 탐구서이기도 하다”(같은 곳)고 술회하고, 나아가 “백제대향로와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통해서 우리 역사와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 혼란을 말끔히 씻어버렸다”(11면)고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우리는 저자의 이 확신에 가까운 말을 통하여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한 사람의 소박한 아마추어 역사학자를 만나게 된다는 씁쓸한 생각을 갖게 된다.

114-473이 책은 저자의 관점이나 결론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우선 자료의 해석과 논리적 이해의 추구 면에서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의 논지전개에 필요할 경우에는 종횡으로 한국의 고대사 자료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고문헌 자료를 활용하고, 동서양 학자들의 연구성과도 대단히 폭넓게 섭렵하는 정력을 과시하면서도, 반대로 자신의 논지전개에 배치된다고 생각되는 자료는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또한 자료로 이용하는 경우에도 무단히 의미를 바꾸어버리거나 확대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책의 학술적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는 그러한 예를 일일이 들 겨를이 없기 때문에 단 하나의 예만을 지적하겠다. 저자는 결론 부분(354면)에서 향로는 성왕 때 사비 천도를 준비하면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며, 그 제작 연대는 520년대 후반에서 530년대 전반기 사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 향로의 제작 목적은 천도와 함께 사비에 세워진 신궁(神宮)에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유적지는 본래 사비의 신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부여박물관에 의한 지금까지의 유적지 발굴 결과, 금당지·목탑지·중문지·회랑지 등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으며, 그 가람배치는 남북 일직선상의 단탑일금당식(單塔一金堂式)으로 백제 가람의 일반 형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이 유적지는 능산리 고분군과 관련된 백제왕실의 원찰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들 건물터에서는 금동향로와 함께 불상의 금동광배편을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목탑지의 심초석에서는 567년에 조성된 창왕명(昌王銘)의 화강암으로 된 사리감(舍利龕)이 출토되어 이 건물터의 성격과 연대를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한가지 예만을 들더라도 이 책의 저자가 얼마나 잘못된 자료해석을 하고 있으며, 사실과 연대 추정을 그릇되게 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백제의 금동향로에 대한 연구서로서보다는 저자 나름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탐구서이며, 저자가 상상하는 한국고대의 문화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 그것을 계승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 결과의 소산물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