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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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李盛夫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1962년 『현대문학』,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지리산』 등이 있음.

 

 

부끄럽게

내가 걷는 백두대간 105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늙은 소나무가

뒷짐지고 서서 나를 불러세운다

천만년 참아온 바위의 속내를 읽었는지

나에게 무슨 말 던져 깨우치려는지

그 까닭 잘 듣고 싶어

나도 이녁 그늘에 앉아 땀닦고 귀를 기울인다

꿈적도 않는 바위 숨죽이고 엎드려 있지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가벼운 떨림을 나도 감지한다

늙은 소나무는 불그레한 몸뚱어리 거칠게 용틀임하므로

내가 오줌 마려운 소년처럼 쩔쩔맨다

이 높은 곳에서 더 넉넉하게 자리를 깔아놓은 바위

허리 휘어져 더 굳센 힘을 감추는 소나무

세상만사 다 꿰뚫어보는 눈들 있어

내 잠자코 사는 일도 힘에 부치구나

내가 저지른 허물들 하나씩 들추어내 널어놓고

솔바람 소리 나를 부끄럽게 말려준다

늙은 소나무가 알아들었냐는 듯이

햇살 잘게 썰어 빛나는 이파리로 웃는다

 

 

 

고운 얼굴들 더 많이 살아납니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106

 

 

승리에 굶주린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가쁜 숨 몰아쉬며 해쓱하게 아름다웠습니다

미처 말을 못해도 내 볼 가까이에 닿는

착하고 힘겨운 눈빛들 나는 다 알아차렸습니다

이 골짜기 칠연의총에서부터

동엽령 올라 덕유평전 백암봉 향적봉까지

그리고 도로 이 골짜기 내려갈 때까지

걷다가 달리다가 서서 숨고르다가

그렇게 몇해 전 젊은 그대들과 나도 하나였습니다

단풍 물든 얼굴들 서럽게 창백해져서

내 안타까움도 붉은 울음이었습니다

내 몸 바스러지는 줄도 모르면서

내 얼굴도 함께 백지장 된 것을 모르면서

나도 축지의 하늘 찾아 내빼기만 했습니다

구십사년 전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의병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신명선과

일백오십여 유골들을 수습해 묻었던

산 아래 마을사람들과

또 오십일년 전 송칫골 육개 도당회의

입 굳게 다물고 돌아선 이현상과

그를 따르던 젊은 산사람들 모두

오늘은 같은 얼굴들로 저리 많이 되살아나므로

찬찬히 살피느라

나도 느리게 걸어 산마랑에 이르렀습니다

올라와서 보니 눈 덮인 평야가 달려와

내 키를 자꾸만 낮추게 합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더 높은 꿈이 솟구치지요

이 너른 벌판

철쭉밭이거나 키작은 조릿대밭에서도

승리에 굶주린 저 고운 얼굴들

외침 소리 달음박질 소리 바람 소리

한꺼번에 나를 때립니다

 

✽ 칠연의총: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왕실 근위대 지휘관의 한 사람인 신명선(申明善)과 그를 따르던 150여 의병들이 덕유산 칠연(七淵)계곡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1908년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는데, 1974년 이들을 기리기 위해 칠연의총을 조성하고 정화사업으로 단장되었다. 1995년 나는 이곳에서 젊은 후배들과 산악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 동엽령·덕유평전·백암봉·향적봉: 덕유산 남북 주능선상에 있는 고개·고원·봉우리 이름.

✽ 송칫골 육개 도당회의: 6·25 당시 덕유산 북쪽 송칫골에서 열렸던 노동당 6개 도당위원장 회의.

 

 

 

자유의 길

내가 걷는 백두대간 107

 

 

무엇을 깜박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거나

하는 일들이 가끔 생긴다

예삿일이 아니다라고 그때마다 도리도리를 한다

이렇게 멍청하게 또는 부지불식간에

사는 일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그 길에 들지 않아야 하고

그 길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되돌아나와야 한다

눈 덮여 길이 사라진 덕유삼봉 오르면서

길춘일이 여기 어디쯤 길을 잃어 헤맸다는

언저리를 더듬어간다 나도 조만간

눈구덩이에 박히거나 안개 속에 묻히거나

사람과 짐승 발자국 따라가다

엉뚱한 곳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걸음이 자꾸 휘청거린다

온몸의 털 곧추서서 긴장하는데

내 몸이 문득 나에게 말한다

그래도 나는 새장 속에서 뛰쳐나왔어

이렇게 없는 길 찾아가는 것이 더 좋아!

아무리 버둥거려 벗어나고자 해도

도로 제자리에 오기만 하는 삶은

서울 속에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간다

 

✽ 덕유삼봉: 덕유산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높이 1264m의 봉우리.

✽ 길춘일: 1994년 71일 동안 백두대간을 지원 없이 단독 종주한 산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