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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중음신의 입을 빌려 쓴 처참한 전쟁의 기록
반레 장편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실천문학사 2002
김태수 金泰洙
시인. sorikkk@hanmail.net
꿈에 그리던 귀국을 두어 달 앞둔 1972년의 어느날, 북베트남의 안케 패스(Ankhe Pass) 작전으로 맹호부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자 미국의 지시에 의한 보복작전인 콘툼-플레이쿠 작전이 백마부대에서 은밀히 진행되었다. 작전준비가 완료된 D-1일, 손톱과 머리칼을 잘라 봉투에 넣어 중대본부에 반납한 어린 군인이던 필자는 사단 노천강당에서 출정신고식을 하면서 고향 가족들의 생각과 힘겹게 살아온 작은 기억 하나까지 영화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왈칵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 졸병이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많은 밤을 지새며 준비했던 그 위험한 도박은 다음날 새벽, 전격 취소되었다.
1964년, 미국은 자신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에 의해 공격받은 ‘통킹만 사건’을 과장 해석하여 비전투지역인 북베트남에 융단폭격을 시작하였다. 1975년까지 계속된 전쟁은 결국 사상자 420여만명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우리나라 또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미명(美名)하에 8년 동안 30여만의 젊은이들을 캄란, 닌호아, 퀴논, 다낭에 백마·맹호·청룡부대의 이름으로 참전시켜 3만여명의 사상자들을 남김으로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그 피의 값이 모국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혹자는 말하지만 목숨을 걸었던 파월병사의 입장에서는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영계(靈界)에서 중음신(中陰身)이 된 ‘응웬꾸앙빈’ 상사의 입을 빌려 시작되는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하재홍 옮김)을 읽으면서 이것이 내가 겪었던 베트남전의 실체였다니, 그 참혹한 쓸쓸함이 감전된 듯 온몸을 휘감아왔다. 이 소설의 작자는 ‘반레’이며 반레의 본명은 ‘레지투이’이다. 1949년생으로 동년배인 레지투이는 해방전사로, 필자는 해방을 방해하는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선에서 맞섰으므로 둘의 운명도 기구할 수밖에. 레지투이는 ‘반레’라는, 해방전쟁에서 죽은 시인 지망생 친구의 이름으로 1976년 등단한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벗들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온밤 내내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벗들을 대신하여”(5면) 베트남전쟁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한다.
북베트남에서 ‘호치민루트’를 따라 남하하여 사이공 부근 전투에 참가한 D301대대원들 중 살아 귀향한 사람은 고향친구이자 또다른 반레인 부분대장 ‘부이쑤안팝’을 비롯한 단 5명뿐이었다. 결국 죽은 자와 산 자의 총칭은 ‘반레-레지투이’일 수밖에 없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중음신 응웬꾸앙빈의 입을 빌려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전쟁의 처참함을 아름다운 생명력이 꿈틀대는, 눈물겨운 한판 굿으로 열어 보인다.
남베트남에서 활약했던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30% 정도 섞인 게릴라 부대였다. 17세의 응웬꾸앙빈이 소속된 부대 또한 해방전선의 원군(援軍)으로 호치민루트로 남하하여 중남부전선의 각 해방전선부대에 분산배치된 후 자동해체된다. D301대대에는 마음씨 좋은 소대장 ‘판웃’ 준위와, 편협 가혹하고 시기심이 가득하나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강한 책임감을 발휘하는 협동농장 빈민 출신 부소대장 ‘부이반꼼’ 상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빈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다. 다시 북베트남으로 가서 병력을 편성, 남하하는 데 앞장서는 호송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때문에 구토를 할 정도로 처참한 ‘땀톤읍(邑)’전투 등을 치른 빈이 새로 배치된 ‘PK-1정찰중대’는 남부전선 북사이공 분구 소속으로 부소대장인 그와 소대장 ‘따꾸앙론’이 짧은 기간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소대장은 인간의 도덕성을 파괴하는 속임수를 싫어했다. 일곱살 연상의 여인 ‘투이’와 동거했으나 그 일로 인하여 27세에 죽게 될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뿌리쳤기 때문인지 정확히 스물일곱살 때, 위독한 아내의 눈을 손으로 감겨주고는 적들과 동반죽음을 택한다. 따꾸앙론의 죽음은 빈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으며 그는 “나의 소대장, 나의 형,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233면)라며 절규한다.
머릿속에서 쌀을 빻는 듯한 폭발음이 뇌까지 쑤셔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거나, 뜨거운 기운이 회오리바람처럼 동굴 속으로 층층이 몰려들어온다고 표현한 B-52기의 폭탄 투하는 거대한 나라 미국의 잔인성을 대변할 만큼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1972년 ‘236기지’의 백마사단 작전 때 사령부는 ‘베트콩’의 저항이 완강한 지역에 융단폭격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 부대원들을 후방으로 물린 다음날 아침 작전지역은 굉음과 함께 뭉글뭉글 연기가 솟더니 이내 고공비행한 B-52 편대가 나타났고, 마을은 “샅샅이 파헤쳐진 땅과 잘게 부서진 바위들”로 “지구 혼돈의 시절”을 연상시키는, “풀벌레조차 모두 숨을 멎은 죽음의 세계 (…) 완전히 영혼을 잃어버린 폐허의 세계”(192~93면)가 되어 베트콩의 시체 한구 찾을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을 필자는 직접 목격했다.
“들판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262면) 불태우기 위하여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가장 비열한 악행인 ‘오렌지작전’은 먼저 고엽제를 뿌리고 낙엽진 수풀에 벙커C유(油)를 들이부은 후, T-28폭격기나 헬기로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정글 속의 적들을 불태워 죽이는 잔인한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고엽제의 살포는 소설가 이대환(李大煥)이 ‘느린 총알’(slow bullet)이라고 표현했듯 오랜 시간 후 폐질, 불치병 등 심각한 후유증으로 나타나 베트남에서만 200만명 이상의 인명과 많은 참전 한국군인들을 죽거나 고통으로 신음하게 했다. 더욱 놀랄 만한 사실은 미군이 근래 우리나라 DMZ에다 6만 갤런의 에이전트오렌지(고엽제)를 뿌렸다는 사실이다.
전장에서 빈을 만났던 여인네들은 모두가 눈물겹게 생을 마감한다. 입대 전, 고향친구이면서 빈의 아기를 낳아주겠다던 ‘낌’은 전선에서 다리 하나로만 돌아와 가난한 생을 산다. 고향방문 후 귀대길에 만난 케자오18부대의 여전사 ‘응웬티마이’는 적의 폭격으로 “가슴을 서너 차례 압박한 후”에 “온 힘을 다해 공기를 불어넣고 아주 세게 빨”자 “약간 짜고 비릿한 덩어리가 그의 입으로 넘어와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피! 핏덩이가 그녀의 기관지를 꽉 막고 있”(136면)었다는 말에서처럼 손 한번 쓸 새도 없이 안타까운 최후를 맞는다. 베트콩 의무중대의 간호원 ‘낌칸’과는 따꾸앙론 소대장의 주검을 묻고 오는 가장 쓸쓸한 싯점에 재회하여 며칠이나마 지극히 짧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죽기 직전까지 빈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 듯 입술이 반쯤 열려진 낌칸, 미치광이처럼 미군들에게 총을 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음신이 된 빈은 “날마다 황천에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277면) 소망한다. 견습군의관인 ‘바오’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임신까지 하게 되지만 의사로서의 출세길이 막힐까봐 두려워한 바오에게 독살되어 무색·무취·무감각의 영계에 오게 된 ‘꾸에지’와의 관계 설정도 이 소설이 주는 특별한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전쟁투성이인 현실세계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는 반레-레지투이적(的)인 깊은 사유로, 서술이 불가능한 황천(黃泉)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전쟁 속에서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순결한 청년이 목숨을 걸고 감당하던 전쟁현실의 참혹함과, 미국이 자국(自國)의 이익을 위해 세계의 헌병인 양 오만에 찬 모습을 보이다 결국은 국제사회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쫓겨난 과정을 통해 반전(反戰) 메씨지를 전달한다. 또한 종전 후 베트남 인민들의 각박한 삶들이 점차 자본주의화되는 과정에서 사회기반이 부정적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는 조국의 현상에 대한 뼈저린 반성적 회의도 포함한다.
또한 이 소설은 해방 직후부터 미국에 대한 맹목적 짝사랑에 빠져 있는 한국 엘리뜨층의 자성이 ‘미선·효순양 사건’과, 요상한 핑계에 의하여 결국 이라크가 침공당해야 하는 이 싯점에서 너무나 절실하다는 분명한 증언이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도 반레-레지투이는 “가족과 고향, 절친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고, 그가 “살아온 날들”과 인간의 삶에서 받았던 “그 아름다운 정감들을 모두 잊”(295면)으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은 없다면서 오늘도 잔잔한 눈길로 인간세상의 쓸쓸한 풍경을 안타까이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온몸을 다해 증오하던 더러운 전쟁의 화염이 또다른 곳에서 치솟는 모습까지도.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디에 도달하더라도 도달한다.”(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