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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인석의 처변삼사와 의병정신
이구영 편역주 『의병운동사적』, 현대실학사 2002
이영호 李榮昊
인하대 사학과 교수. yholee@inha.ac.kr
‘처변삼사(處變三事)’라는 말이 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하여 시해당하고, 개화파 갑오정권이 변복령과 단발령을 내리는 사건이 터지자, 1895년 충청도 제천의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은 제자들과 인근의 유생들을 모아놓고 만고에 없는 변란에 대처할 세 가지 행동방향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처변삼사이다(14, 274면).
첫째,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하는 것–거의(擧義)
둘째, 고국을 버리고 멀리 떠나 의리를 지키는 것–거수(去守)
셋째, 의리를 간직한 채 자결하는 것–자정(自靖)
유인석은 이 세 가지 방향이 모두 의리에 합당한 것으로서 자기 뜻대로 택해도 무방하지만, ‘자정’은 도를 위하여 순절하는 것으로서 깨끗해 보이지만 모두 자결하면 도의 맥이 끊기고, ‘거의’는 국가의 원수를 갚고 백성을 보전하며 또 도를 받드는 것도 되므로 마음에 상쾌하지만 큰 역량이 없으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고, ‘거수’를 계획한다. 요·순의 땅인 중국으로 들어가 복색과 상투를 보존하고 예의를 지켜 중화의 맥을 이어가면서 변란이 잠자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중에 있던 유인석은 ‘거의’를 피하고 ‘거수’를 위하여 떠나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이미 의병을 일으켜 그를 의병대장에 추대하게 되자, 국가적 위기의 극복 없이는 의리를 지키기 어렵다고 보고 ‘거수’에 앞서 ‘거의’에 동참하기로 결정한다.
유인석은 1860년대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화서학파의 정통학맥을 이은 인물로서, 1895년 이래 의병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내게 된다. 1895〜96년의 의병은 이천·춘천·제천·홍주·안동·나주 등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유인석의 제천의병이 가장 강력했다.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결국 관군에 패하게 된다. 유인석은 나라와 도가 망하고 많은 동지들이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순절하고자 하지만, 동지들이 설득하여 죽는 것을 단념하고 관서지방으로 피했다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의병을 재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애초에 생각했던 ‘거수’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하다. 유인석은 이후 귀국했다가 1907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간다. 그는 당초 ‘거수’를 꾀했지만 ‘거의’에 실패한 후 ‘자정’을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는 ‘거의’를 목표로 하면서 ‘거수’를 행하였다. 현실을 회피하면서 의리만을 고고하게 지키려는 ‘거수’의 의미가, ‘거의’를 준비하기 위한 ‘거수’의 의미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의병운동사적』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제천의병의 활동과 그의 ‘거수’과정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정리하여 한문 원문을 현대어로 번역·편집한 것이다. 1994년 제천의병 100주년을 기념하여 증보 출판한, 방대한 『호서의병사적』을 더 쉽게 고치고 귀감이 될 만한 것을 추려서 대중적으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편찬한 것이다. 제1부 ‘의병전쟁 종군기’는 의를 좇아 의병을 일으키고 중국과 러시아로 옮겨 ‘거의’를 위한 준비를 꾀한 전모를 기록한, 유인석 의병의 행적에 대한 가장 유력한 사료이다. 제2부 ‘서행일기’는 유인석이 망명한 서간도 지방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가는, 의를 좇는 과정을 기록한 그의 제자 이조승(李肇承)의 일기이다. 제3부는 의병의 고시문과 순국한 의병을 애도하는 제문으로 구성되고, 제4부는 유인석의 처변삼사와 그에 입각한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담은 ‘동문사우에게 드린다’를 비롯한 많은 편지들을 모은 것이고, 제5부는 기타 관련사료이다. 무엇보다도 의병의 기록 대부분이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이 해독하기 매우 어려운데, 이를 현대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의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고 계층이나 성, 문화와 삶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하려는 포스트모던적 경향이 유행을 타고 있는 이 싯점에서 웬 의병인가? 평자는 그 의의를 편역자인 이구영(李九榮)의 개인사와 관련지어 보고 싶다.
본서에 수록된 소중한 자료들은 대부분 편역자 이구영의 가문에서, 험난한 일제시대를 넘어 전승되어온 것이다.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연안 이씨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인 이 집안은 유력한 양반가문으로서 한말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제2부 서행일기를 남긴 편역자의 중부(仲父) 이조승이 유인석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고, 부친 이주승(李胄承)은 고향을 지키면서 이강년(李康䄵) 의병장의 문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편역자는 의병의 후손으로서 그 핏줄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항일운동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항일운동과정에서 자연히 사회주의도 접하게 되고, 해방 후의 조직활동은 그를 한국전쟁 이후 월북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1958년 다시 남하한 뒤 체포되어 1980년 가석방될 때까지 22년간 수형생활을 한다.
출소 뒤에는 한문강의를 하는 한편, 1975년 감옥에서부터 시작한 의병에 관한 사적의 번역·정리를 계속한다. 그가 과제로 생각한 것은 바로 가문에서 전승되어온 의병운동의 과정을 드러내어 “외세의 간섭과 침략을 반대한 민족 자주정신과 애국애족에 기초한 불굴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는”(366면) 일이었다. 그는 “이 나라만큼이나 격동의 삶을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지켜 자신의 뜻을 관철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는 과정이”(4면) 곧 자신의 삶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남과 북에 모두 가족을 가지고 있고, 항일운동 때 자신을 체포한 친일계 형사가 남으로 내려온 자신을 다시 체포하게 된 개인사의 비극은 통일을 통해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의병운동사적』을 번역·출간한 것은 그가 한학의 대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좌표를 민족문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끈 그 뿌리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애를 통하여 볼 때 그의 민족문제에의 동참은 의병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리라.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한반도에 존재하는 민족과 국가가 핵전쟁의 위기상황하에 놓여 있는 작금의 현실은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거대담론을 아직 폐기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님을 보여준다. 100여년 전 의병의 봉기는 당시에 제기된 대내외의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는 한 방법이었다. 100년 후 그러한 위기가 한반도에서 근본적으로 해소되고 있지 못한 점에서 의병의 역사, 그리고 ‘의병정신’으로 격동의 삶을 살았던 편역자의 삶(심지연 『산정에 배를 매고』, 개마서원 1998)을 함께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