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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류우뀨우에서 오끼나와로

토미야마 이찌로오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정근식 鄭根埴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56jks@hanmail.net

 

 

오끼나와(沖繩)의 카데나(嘉手納) 기지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뜨고 내리는 미군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 묘하게도 한국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동아시아의 지역적 경계가 뚜렷하게 떠오르고, 그것이 단지 주관적으로 설정된 지역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실체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어떻게 이 땅에 미군들이 들어오게 되었을까, 이들의 작전권은 어디까지일까 등등의 소박한 질문들의 끝에는 바로 그 동아시아의 중심에 분단 한국이 가로놓여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이던 1945년 봄,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선택한 전장이 오끼나와였고, 바로 그 다음은 제주도였다. 지금도 제주도 서남해안에는 ‘의연하게’ 남아 그때를 증거하고 있는 일본군 어뢰정 대피호와 비행기 격납고 들이 있는데, 이것의 역사적 선행지점에 바로 오끼나와의 평화공원이 들어서 있는 죽음의 절벽이 있다. 이곳은 동아시아 현대사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착종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여기에는 결사항전을 명령하고 자결한 오끼나와 방면군 사령관 우시지마(牛島)와 함께 본토 결전을 온몸으로 막아야 했던 현지 오끼나와 주민들, 멀리 한반도에서 끌려온 조선인들까지 평화라는 이름으로 한데 섞여 누워 있다. 15만명의 희생자 중 약 10%를 조선인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단지 수백명의 이름만이 공원의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안타까운데, 더욱더 우리를 착잡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조선인으로서가 아니라 분단 한반도,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서로 다른 국적으로 누워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분단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끼나와에도 있고, 현실의 세계뿐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조차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평화기념관의 전시개악뿐 아니라 평화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명단도 기억투쟁의 산물이다.

전장의기억필자가 2001년 오끼나와를 세번째로 방문했을 때, 노마 필드(Norma Field)나 토미야마 이찌로오(富山一郞)가 자신들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찌바나 쇼오이찌(知花昌一)가 직접 찌비찌리 동굴 앞에서 1945년 봄의 오끼나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요미딴(讀谷)촌 사람들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마을 주변에 있는 동굴들에 몸을 숨겼다. 물론 이들은 미군에 항복하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므로 절대 항복해서는 안된다는 황국신민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주민들의 운명을 가른 두 개의 동굴 이야기였다. 중국전선에 참가했던 간호원이 있던 이 동굴과 하와이의 노동자로 다녀온 사람이 숨어 있던 다른 동굴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달랐다. 난징(南京)학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은 적국의 병사나 주민들을 무참하게 강간, 약탈하고 살해했다. 전쟁은 언제나 그런 것이며 자신들도 똑같이 당할 것이라는 공포, 이것은 찌비찌리 동굴에 숨어 있는 종군간호원의 전쟁기억이었고, 주민들을 결사항전의 길로, 그래서 결국 죽음의 길로 인도했다. 동굴 속에서 주민들은 스스로를 감시했다. 미군이 마을을 수색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면 주민 전체가 발각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마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어린이들을 살해하였다. 반면, 하와이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 동굴에서는 아무런 피해 없이 주민들이 마을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하와이에서 거주했던 두 명의 주민들은 ‘귀축미영’과는 다른 미국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미군점령 후 주민들로 하여금 순순히 동굴에서 나오도록 고무하였다.

오끼나와는 지정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를 인식하는 일종의 관제고지(管制高地)이다. 근대일본은 류우뀨우(琉球) 처분을 시작으로 대만총독부를 거쳐 남양청(南洋廳) 설치의 길을 따라 ‘남방’을 침략해 들어갔고, 다른 한편으로 한일합방을 시작으로 ‘북선개척’, 만주국 설치의 길을 따라 대륙을 침략하였다. 식민정책자들은 ‘제국의 식민지’들을 그저 나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민족들의 위계서열을 부여하면서 분리 통치하고, 또 동질적인 황국신민을 창출하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근대 오끼나와는 식민지 조선을 또다른 시각에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의 촛점은 내국화된 식민지와 반환되거나 독립한 식민지 간의 차이이리라.

한국에서 오끼나와에 대한 관심은 ‘남도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의 서남부 도서나 제주도가 오끼나와와 유사하다거나 홍길동의 최후 선택지가 오끼나와 어디의 섬이었다는 고전문학적 상상력에 의존하여 시작되었지만, 최근에는 무게중심이 류우뀨우의 오끼나와화라는 ‘제국’사 속에 내재하는 모순, 그리고 미군기지 문제와 관련된 평화운동, 주민운동이 가진 동아시아적 의의 등을 밝히는 데로 이동하고 있다. 토미야마 이찌로오의 『전장의 기억』(임성모 옮김)은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관심과 함께 근대 오끼나와의 역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반영한다. 이 책은 원래 1995년에 출간된 『전장의 기억』과 2002년에 출간된 『폭력의 예감』의 일부를 번역한 것으로 전자는 1부의 4개 장을 구성하며, 후자는 2부의 3개 장을 구성하고 있다. 토미야마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전장동원이라는 개념하에 군율이 주민 전체로 확장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전쟁기억이라는 개념하에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한 청산 없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국민 전체를 전쟁의 희생자로 만들어가는 전후의 과정을 잘 포착하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폭력론과 함께 근대 오끼나와학을 개척한 이하 후유우(伊波普猷)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오끼나와 근대사를 식민지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유력한 방법을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식민지 문제나 전후 분단체제의 문제를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사고하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삶의 본질을 기저에서 구성하고 있는 전쟁 체험과 기억을 사회과학적 연구대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전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전쟁기억에 관한 이론적 성찰에 주력하고 있지만, 논의의 집중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데,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오끼나와전 자체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나 오끼나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집단들의 맥락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양군도라도 불렸던 태평양의 여러 섬들의 상황에 대한 더욱 정확한 역사적 기술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문제들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는 흐름에 내포된 일반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