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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R. 카버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문학동네 2004
왜 레이먼드 카버인가
김선형 金宣亨
국민대 강사 sunhyung-kim@hanmail.net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초기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1976, 손성경 옮김)가 출간되었다. 출판사에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카버의 전작을 번역해 ‘레이먼드 카버 소설전집’으로 묶어 연내로 모두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현대 미국 단편작가에 대한, 영미문학계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예우’는 반가운 만큼이나 낯설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레이먼드 카버인가?
레이먼드 카버는 존 치버(John Cheever)와 함께 미국 단편소설의 중흥을 일군 주역이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는, 동시대의 작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판타지나 SF, 난해한 언어적 실험, 패러디에 몰입한 데 반해, 무미건조하리만큼 관조적인 태도로 간단없는 ‘일상’을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골몰했다. 카버의 작품들에는 판타지도 없고, 언어유희도 없다. 오로지 황량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겨진, 초라한 일상의 편린들뿐이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만 봐도 등장인물들은 아내에게 배신당하고(「제발 조용히 좀 해요」), 마약에 취해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며(「알래스카에 뭐가 있지?」), 삶에 불만족하고 이룰 수 없는 갈망에 괴로워하며(「이웃 사람들」), 생선이 반토막 나듯 가족의 연대는 무참하게 해체된다(「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기자본주의의 잿빛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이라면, 카버의 인물들이 느끼는 절망과 환멸에 공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가히 촌철살인이라 할 카버의 효율적 문체로 그려지는 상황들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맞닥뜨려보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소한 삶들이 참담하게 붕괴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치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우리네 초라한 자아의 추락을 수수방관하며 바라보듯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가 그려내는 이 생생한 초상들, 즉 절망적인 빈부격차,자본주의가 조장하는 헛된 욕망과 더 헛된 위안들, 가족의 급속한 해체, 무산자들의 소외의식, 언어와 소통의 실패는 분명 마리화나가 중산층의 일상까지 침투했던 70년대 미국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지역적인 현실이다. 또 우리의 이 강렬한 공감은, 카버 문학세계의 보편성을 입증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자본주의가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미국의 7,80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터이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절망이 모두 얼마나 미국의 7,80년대가 맞닥뜨렸던 그것들과 닮아 있는가를.
그런데 카버의 소설을 읽는 것은 기묘하게 낭패스럽다.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성격이나 역사적 배경이 없는 ‘만인’들이며 막연한 ‘깨달음’이나 ‘계시’ 혹은 ‘변화’를 기다리지만 결국은 ‘허무’만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121면)는다. 역사적·사회적 부조리는 보편적·절대적 인간조건으로 위장된다. 이런 세계관은 리얼리즘 작가들보다는 카프카나 베께뜨에 훨씬 가깝지만, 훨씬 더 구체적으로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카버의 경우는 패배주의의 오명을 벗기 힘들다. 카버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미국 문학계에서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냉소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거니와, 형이상학적 인식이 부재한 표피적 현실묘사를 ‘더러운 리얼리즘’ 소위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평자들도 있으니까. 실제로 카버 문학세계의 장점과 단점은 미니멀리즘이라는 형식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엄청난 가독성을 자랑하며 쉽게 공감대를 형성해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낳는 대신, 현실에 대한 심도깊은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문제 말이다. 미니멀리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헤밍웨이의 “사유하기보다는 느끼도록 하라”는 명제는 카버의 작품에서 장단점 모두가 충실히 계승되어 활짝 만개한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데 지금 카버 전집이 출간되는 건, 영미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다못해 카버의 스승이자 미니멀리즘의 원조인 헤밍웨이 단편선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현실이니까. 그보다는 오히려 요즘 ‘한창 뜨는’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이라든가, 그들의 육성으로 비준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번역문학계의 스타 무라까미 하루끼가 레이먼드 카버를 ‘오리지널’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든가, 김영하와 같은 작가들이 ‘허망하고 고통스럽지만 신비한 독서경험’을 체험하게 해준 ‘고수’를 인정한다고 언급한다든가. 그뿐인가. 한창 뜨는 영화감독 박찬욱은 폴 오스터와 레이먼드 카버의 팬이라 공공연히 자처하고 있다. 소위 ‘쿨’(cool)한 사람들이 모조리 약속이라도 한 듯 카버에 경배를 바쳤으니 궁금증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출판사의 이번 ‘예우’가 거장에 대한 마땅한 대접이라기보다는 역시 이런 유명세를 타고 멋지게 ‘흥행’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좀 위험한 일반론이기는 하나, 소수 문학전공자들을 제외한, 평균적인 외국문학 소비자들의 취향을 뭉뚱그려보면 대체로 소설을 통해 깊은 사유를 하는 수고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지적 허영심을 버리고 싶어하지도 않는 경향을 보여왔다. 실제로도 이러한 범주에 무난히 들어맞는 작가들이 우리 번역문학계의 스타 플레이어로 등극해왔다. 무라까미 하루끼, 무라까미 류, 밀란 쿤데라, 베르나르 베르베르, 폴 오스터 등이 모두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소위 ‘스타 플레이어’들이다. 탁월한 문학성을 확실히 검증받은 것은 아니나 대중작가로 치부하기도 힘들고, 그러면서도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가들이다. 이들은 두드러진 공통적 특질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일상적 디테일에 대한 집착, 대중문화적 감수성과 소비습관―구체적인 브랜드 이름의 거명 등―에 대한 관심, 뿌리가 모호하고 막연한 권태, 강렬한 절망적 정서, 비주얼리스트적인 묘사,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한 무관심 혹은 의도적 회피 등이다. 이들의 작품세계에서는, 역사와 사회의 ‘징후’로서 어떤 막연한 정서는 팽배하지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의식―혹은 자의식―과 치열한 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쉽고 간결한 일상어를 사용하며 위트와 기발한 말장난은 넘치되 복잡한 문학적 비유나 플롯은 사양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적당한 문학적 명성과 ‘쿨’한 트렌디함, 소화하기 쉬운 미니멀리스트적 문체는 그 공식에 딱 들어맞는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의 번역은 우직하며 성실하다. 심각한 오역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간간이 너무 우직해서 영어 문법구조가 투명하게 보이긴 하지만, 번역자가 카버의 무미건조한 문체를 옮기는 데 소임을 충분히 다했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쉽고 간단한 말일수록 자연스러운 번역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동병상련의 처지로 어찌 모르랴. 다만 오역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의아한 번역문의 뉘앙스 문제를 하나 지적한다면 “제발 조용히 좀 해요”(415면)다. 부정을 저지른 아내의 고백을 들은 뒤 괴로움에 문을 닫고 들어간 남편이, 계속 귀찮게 말을 시키는 아내에게 애원조로 던지는 한마디인데, “Would”를 쓴 것도 아니고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는 절박하고 짜증 섞인, 소통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일갈이다. 이런 어감을 고려하면 이전 번역본의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가 훨씬 더 적절한 번역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소한 트집거리 몇가지를 제외한다면, 확 끌리게 매력적인 문체는 아니더라도 성실한 역자의 수고가 드러난 결과물이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문체를 고려해 소설가인 정영문과 김연수의 손을 거쳐 출간된다고 한다.
하지만 번역은 물론이고 외국문학의 수입과 유통에 있어서, 우직하고 성실함은 커다란 미덕이다. 지난하고 치열한 독서의 보람을 아는 독자들은 결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외국문학 편식의 부작용은 벌써 창작 일선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루끼, 쿤데라, 오스터, 카버는 현재 활동하는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에게 일종의 ‘글쓰기 모델’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니, 이들의 작품세계가 노정하는 한계가 곧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한계로 고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이미 기우가 아니다. 외국문학 수입은 비단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는 문제다. 레이먼드 카버의 전집 출간이 일회용 상업적 기획으로 끝나지 않고, 현대 영미문학계에서 활동하는 다양하고 훌륭한 작가들을 성실하고 우직하게 소개하는 노력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