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F.라페 외 『굶주리는 세계』,창비 2003
식량에 대한 잘못된 신화의 해체
김철규 金喆奎
고려대 사회학과 ckkim@korea.ac.kr
근대화의 길을 힘차게 걸어온 한국사회에서 굶주림은 남의 일이 된 듯하다. 춘궁기는 옛이야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기아를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만난다. 영양실조로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고, 배만 볼록 나온 아프리카 어린이의 영상이 굶주림에 대한 경험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 가끔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들에 관한 보도를 통해 ‘그들의’ 굶주림을 ‘구경’하기도 한다. 국제기구에서 찍어 보내준 야윈 북녘 아이들을 보며 ‘남의 일’로서 기아를 만난다.
우리는 남의 굶주림에 대해 좀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기상이변의 불운을 탓하거나 그들의 무책임한 출산에 혀를 찬다. 적은 성금을 보내며 우리 자신의 풍요와 여유로움에서 희미한 우월감을 확인하는지도 모르겠다.
『굶주리는 세계: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WORLD HUNGER: Twelve Myths, 허남혁 옮김)는굶주림을 ‘우리’ 문제로 인식할 것을 요청한다. 불편하겠지만, 세계에서 8억여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매년 1천2백만명이 기아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는 현실을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며, 원정출산까지 마다않는 미국에서조차 3천만명이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한다니 문제는 보통 심각하지 않다.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인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은 기아의 원인을 자연재해나 지나치게 높은 출산력에서 찾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신화’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식량과 관련된 신화들을 추려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현재 세계는 식량부족 상태에 있다. 이는 많은 경우 자연재해 탓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만이 해법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전혀 다른 주장으로 상식을 뒤엎으며 신화를 해체한다. 식량은 충분히 생산되고 있으며, 자연재해 자체보다는 거기에 대응해왔던 지역의 사회–문화 씨스템 해체가 문제이다. 이러한 씨스템 해체의 원인은 서구의 식민지 체제나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다. 인구증가는 빈곤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높은 인구밀도가 아닌 빈곤과 계층 양극화가 굶주림을 초래한다. 그리고 자유시장은 오히려 기아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세계적으로 심각한 기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저자들은 객관적인 자료와 엄밀한 논증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과잉인구에 따른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신화에 대해 살펴보자. 저자들은 악명 높은 아프리카의 기아조차 높은 인구밀도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료에 따르면 2억1300만명이 만성적 영양실조로 시달리는 사하라 이남 국가들도 많은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
문제는 분배와 농업구조의 성격이다.1980년대 중반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심각한 가뭄과 식량부족 속에서도 농민들은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없었다. 면화와 같은 환금작물을 생산, 수출해야 했기 때문이다.제3세계 국가들의 농민들은 비민주적 토지소유구조, 국가부채, 수출 지향적 농업구조 때문에, 굶어 죽어가면서도 외국의 도시 소비자들을 위해 면화와 커피를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식량과 인구 문제를 얘기하면서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식량의 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맬서스의 정책적 메씨지는 식량과 인구의 불균형에 따른 자기조절 과정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즉, 기아, 전염병, 빈곤 등은 인구를 적정선으로 회복시키려는 조절기제이며, 따라서 빈곤법(Poor Law)과 같은 복지정책에 의한 인위적 개입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 굶주린 자는 죽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 그의 메씨지였다.
오늘날 맬서스류의 자유주의 유령이 다시 세계를 뒤덮고 있다. 세계의 강대국들과 이들의 정책을 좌우하는 파워 엘리뜨들은 신자유주의의 깃발을 들고 시장만능주의를 외친다. 자기조절적인 세계시장 기제가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고, 사회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굶주림을 포함한 사회문제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기만적이다. 영국 헤게모니 체제의 경험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장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역사적’ 시장은 권력관계를 내재하고 있으며, 경제적 집중을 통해 거대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왔다.
식량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결국 초국적 농식품 기업들의 식량부문 지배력을 증대시킨다. 나아가 농민들을 식품생산 체제의 하위 노동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특히 농자재, 유전자공학, 종자 등을 초국적기업들이 지배함으로써, 먹을거리 부문 전체가 소수 기업들의 통제 하에 들어갈 위험이 크다. 이는 빈곤계층의 굶주림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굶주림을 남의 얘기로 생각해왔다.OECD 가입과 월드컵 개최 등으로 먹는 문제는 화젯거리도 아닌 것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정말로 굶주림은 남의 얘기일까?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작년에 점심이나 저녁을 지원받은 결식아동수가 20만명에 달했으며, 미취학 결식아동수는 15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끼니를 걱정하는 노숙 가정과 영양실조에 걸린 도시빈곤 가정의 아이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굶주림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굶주림은 식량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굶주림의 문제가 여전히 ‘우리’의 문제이며, 불평등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계층 양극화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데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한국어판을 WTO 협상에 몸으로 반대하며 죽어간 고(故) 이경해 선생에게 바침으로써, 별 생각 없이 밥 잘 먹고 지내온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문제, 즉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를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다”(21면)는 저자의 말을 한국의 독자들은 준엄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