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창비를 읽고
멀리 이곳 베를린까지 창비를 보내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서는 한글로 된 읽을거리가 귀해서 정말 감사히 받아 열심히 읽었습니다. 모든 기사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특집에 대한 편집자 대담과 개번 머코맥의 「부시의 세계와 코이즈미의 일본」이었습니다.
이번호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소설가인 저로서는 반갑기도 했지만 특별히 그 대상이 창비에서 그간 은연중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던 일정한 속성의 작가 써클에 머물지 않고―그 결과로 나타난 작가 리스트에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있기는 합니다만―적극적으로 확장하고자 한 점이 긍정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일종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집자 대담은 그 배경과 과정이 되는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창비의 보수성이라고 할 만한 성질을 지적한 진정석님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보수는 반드시 개방이나 똘레랑스에 대한 상대개념이 아니라 상업성이나 대중영합성에 대한 반대에 더 가까울 듯합니다. 게다가 ‘뛰어난 군소작가’라는 날렵한 표현은 그럴듯한 아류는 넘치나 완성된 창의성은 드문,아니 사실은 전무에 가까운, 그런 문학의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표현한 말인 듯하여 백번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 문학에서 뚜렷한 가시적 성과가 자리잡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거품의 옷을 남보다 먼저 서둘러 입히는 것보다 기존의 것들의 논리를 더욱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임규찬님의 반론은―모든 존재가 다 똑같은 임무에 매달릴 필요는 없으므로―매우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문학 독자로서 한가지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있다면, 한국문학이 언제까지나 좁은 시야, 자신의 싸이클에서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한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작은 나라고, 문화적으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더구나 언어나 문학의 면에 있어서는 솔직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먼저 폐쇄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과도하게 욕심내면서도 먼저 타인을 알아가는 점에서는 인색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문학’이란―민족문학의 입장이든 소위 신세대문학의 입장이든―지나칠 정도로 오직 ‘한국문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문학의 진보를 위해서 그런 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이곳의 문학잡지가 제임스 조이스나 빠블로 네루다, 카프카, 혹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러시아의 젊은 작가들까지 흔히 특집으로 다루며 그 특집의 내용도 표면적이 아니라 아주 충실하고 흥미로운 것을 볼 때,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유행이나 시류에 편승한 읽기 쉬운 인기작가의 작품만을 번역하고 일방적인 숭배를 바치는 것 말고, 외국어권 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포함한 진지한 관찰은 적어도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하는 하는 작업으로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시야와 언어를 스스로 우물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문학잡지가 작가 지망생들의 등용문만이 아니라 더 넓은 일반 교양층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그런 문학잡지가 한국에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독자로서의 바람입니다.(비극적이게도 한국에서 이미 ‘일반 교양층’은 단어로만 존재할 뿐 전문가와 대중을 뒤로 한 채 사라져버린 종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개번 머코맥의 「부시의 세계와 코이즈미의 일본」은―결국 극동아시아의 문제는 ‘북한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겠으므로 결국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후기 부분에 일본인 인질문제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곳에서 이라크 한국인 피살 사건에 관한 뉴스를 접했을 때 그것을 읽었고, 일본인 인질이 풀려난 후 일본의 여론에 대해서 이곳 훔볼트대학의 일본학 전공자에게서 자세한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인 인질의 피랍과 죽음은 이곳 텔레비전에서는 CNN이나 BBC와는 달리 톱으로 다루지도 않았으며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에 있는 재외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남았으며 사건 자체의 비극성을 넘어서서 ‘김선일씨의 저 자리는 언제라도 (한국인인 이상) 내 것이될 수 있다’라는 식의 우울한 열패감마저 갖는 듯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국적이나 태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런 국제적인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결국은 ‘○○인’으로 되는 문제는 모두에게 영원한 질문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글을 New Left Review에 어떻게 다시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화적 활동을 펼치던 일본인 활동가들이 인질이 되었으며, 정부가 돈을 낸 다음 풀려났고, 덕분에 자국내의 우익여론이 들끓게 되었으며 그런 일련의 결과들이 어느정도는 예상 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 개인으로서 행동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특정상황과 그 주변의 문제를 분석할 때는 좀더 다각적이고 미시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으면 단지 선동적인 몰아가기 식인 미디어 언론의 문장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밖의 4·15총선에 대한 좌담, 논단의 「고구려의 역사와 동북아의 현실」과 「20세기 동아시아의 국학」 등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사실이 정리되어서 개인적으로 유익하고 또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2004년 여름 베를린에서 소설가 배수아
신예시인들의 시를 읽고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관심있게 읽었다. 주제의 구성이나 결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신예시인들의 시 40편을 쥐가 소금을 먹듯이 아껴가며 두번 외웠다(?). 오랜만에 창비에서 시를 이렇게 많이 실은 것이 즐거웠다. 몇년 새에 등단한 시인들의,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재기를 뽐내며 우후죽순처럼 일어서고 있었는데,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조금 씁쓸했다.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시전문지의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연륜이 깊어지면 그네들의 시의 깊이는 웅숭깊어지고 파랗게 물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한다.
창비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정성을 듬뿍 들인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엿보인다. 영업도 잘해야겠지만 좋은 책을 제일 많이 만든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행동거지가 필요할 것 같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상삼리 부영아파트 901동 1104호 이상인 lisiin@hanmail.net
이땅 아내들의 무언의 시위―신경숙의 소설을 읽고
소설 「그가 지금 풀숲에서」를 읽으면서, 계속 내 아내를 떠올렸다. 무심하기로 말하면 나도 이 작품의 주인공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20년을 부부로 함께 살아오면서도 무엇 하나 잘해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외계인손 증후군’, 참으로 희한한 병도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노는 한쪽 손이 어느 때부터인지 남편의 뺨을 내리치고 목을 조르기까지 하는 바람에, “팔을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메모 한장 남기고는 친정에 가버린 아내, 아내를 만나러 가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풀숲에 내던져져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지나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그’, 그는 어쩌면 일에 빠져, 바쁘게 돌아가는 삶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어린 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삶이 드리우는 빛과 그늘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식구의 아픔도 결코 편하게 읽혀지지는 않지만, 초겨울, 단추 하나가 덜렁거리는 홑겹의 바바리를 입고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왠지 추워 보이는 남자를 불쑥 사랑해버린 ‘그’의 아내. 그녀가 결혼생활에서 보여주는 삶의 방식, 직장일에 바쁜 남편의 무심함을 혼자서 감내하며 외로움에 지치도록까지 자신을 내버려두는, 너무도 순종적이며 희생적인 태도가 안쓰러움을 넘어 답답함으로까지 느껴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내 아내의 첫사랑이 누군였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담배는 피워본 적이 있는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맹렬히 궁금해’지고 있으니, 나도 그간 어지간히도 무심한 사람 아니었겠는가. 아내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전훈
김윤영의 문화평에 대한 반론
지난호에 게재된 김윤영 작가의 문화평 「소통불능을 다룬 두 영화」를 읽으면서 몇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김기덕의 「사마리아」에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 다른 생각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그는 「사마리아」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두 편의 영화를 크게 ‘소통불능’에 관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는데, 사실 각각의 작품들을 꼼꼼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선뜻 여기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김윤영은 「사마리아」의 경우 딸과 아버지 간의 ‘극단적인 소통불능’이 거의 불편함을 안겨줄 정도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쏘나타’)가 지닌 함의를 완전히 배제했을 경우에나 가능한 진술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아내의 묘지에 들른 후 다시 차를 몰고 산에서 내려오다 차바퀴가 돌더미에 걸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때 가만히 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딸은 차에서 내려 말없이 돌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한다. 다시 차를 몰고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인근의 개천가로 간다. 거기서 행복한 모습으로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몰래 개천가를 빠져나와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사라진다. 딸은 서툰 운전솜씨로 차를 몰아 아버지를 따라가지만 따라잡을 가망은 없어 보인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 에피소드 직전까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함과 도식성으로 보는 이의 흥미를 반감시켰던 「사마리아」는 ‘쏘나타’에피소드에 와서야 다소간 중심을 잡는다. 그리고 여기엔 김기덕 특유의 주제, 즉 소통에 이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침묵 내지 묵언 속에서 행해지는 작은 몸짓들이라고 하는 주제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소통불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극단적 침묵을 통한 소통에의 열망’이라고 바꿔 불러야 할 것인데, 이러한 주제는 데뷔작 「악어」에서부터 「섬」 「수취인 불명」 그리고 더욱 최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 김기덕의 모든 영화에서 일관되게 감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김윤영의 글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등장인물간의 문제를 영화작가와 관객 내지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마리아」가 ‘소통불능’을 다룬 영화임을 전제한 뒤 갑자기 김기덕(의 영화들)과 관객들 간의 소통의 어려움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근심하는 것으로 비약하는데, 사실상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김윤영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흡사 김기덕의 ‘고립’은 그의 영화가 ‘소통불능’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김기덕의 문제는 김윤영의 주장처럼 그가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복되는 영화작업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주제에 걸맞은 스타일을 찾지 못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유운성 eye3132@hotmail.com
창비의 방향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의 장마철, 그 첫자락인 6월 19일부터 20일,1박 2일간 창비가 주최한 제5회 ‘작가와 함께 떠나는 문화기행’에 참가했다. 비록 짧은 기행이었지만 알찬 일정과 창비측의 세심한 배려로 인해 근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출발한 문화기행은 영월 책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선돌, 정선의 정암사,만항재를 들렀고 운치있는 여량의 옥산장을 숙소로 짐을 풀었다. 옥산장 전옥매 여사의 구성진 정선 아라리와 함께 돌기 시작한 동동주는 새벽 늦도록 이어져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어우러지는 자리를 연출했다. 다음날 찾은 월정사와 상원사는 책에서만 봤던 곳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기행의 백미로 여기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명소들을 방문했던 행복한 일정만큼 인상 깊었던 것은 첫날의 토론시간이었다. 창비반·소설반·시반으로 나뉘어 각자 관심이 있는 반으로 모이는 시간이었다. 소설가와 시인이 각각 참여한, 토론의 주제가 짐작되는 소설반·시반보다는 왠지 포괄적인 주제로 토론할 듯한 창비반에 참여하였다. 창비반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모였음에도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열띤 토론이 가능했다. 또한 창비 문화기행 자체가 다양한 성격의 구독자들이 참가한 행사였기에 다양한 관점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런 다양한 의견들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계간 『창작과비평』에 대한 애정이었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0년까지 정기구독을 하는 독자들의 의견은 따끔한 비판보다는 애정어린 조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는 적잖이 계간지의 나아갈 방향 제시와 새로운 요구들이 있었다.
토론에 나왔던 가장 많은 논의는 『창작과비평』이 분명 우리 사회 어느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해내고 있다는 ‘역할론’이었고, 이에 따른 상찬 혹은 불만에 관한 것들이었다. 모두 다 공감이 가는 의견이었다. 문학잡지로서는 최고로 많은 출판 부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서라도 ‘창비’가 차지하는 제 몫의 크기는 모두가 긍정하는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창비가 수행한 역할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 싯점에서 진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계간지라는 형태가 전무하던 시기에 최초로 출판되었다는 역사적인 의의 안에서 창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창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는 그보다 더욱 여러 관점에서 이뤄졌다. 계간지를 외면하는 젊은 독자층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더욱 대중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여 시선을 끄는 잡지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사회의 정치한 문제들에 더욱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은 문학일까 문학 외적인 것일까 등 토론자리에서 나온 갖가지 의견들은 창비가 앞으로 꾸준히 자문하며 나아가야 할 난제였고 독자와 직접 소통하는 가운데 새로운 길을 탐색하려는 편집위원과 편집자의 메모하는 모습에선 비장감마저 들었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창비가 자신의 뿌리를 인지해서 문학 계간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되 거대담론이 뒤로 밀려난 싯점에서 문학이 제기할 수 있는 여러 논점들, 그러면서도 상업적인 논리에서 (몇몇의 특화된 잡지를 제외하고) 다루길 꺼려하는 담론들을 앞장서 이끄는 기폭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또한 지금의 대학생이나 일반인이 그전보다 계간지를 적게 읽고 있음에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의 독자들에게마저 외면받아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으로, “횡적인 독자들의 확대보다는 종적인 독자의 지속성”문제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었다. 이는 결국 처음의 ‘역할론’의 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시원스런 결론을 이끌어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성실한 토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각자의 분분한 의견들에서 공통되는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두 시간 가량 이어진 창비반의 토론은 독자들이 얼마나 창비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자리에 모인 사람들끼리 느껴지는 왠지 모를 친근함은 토론시간 내내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후에 연장된 술자리와 기행일정은 더욱 말할 것도 없으리라.
짧았던만큼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기행, 우연히 참가하게 되었지만 소중한 경험과 인연들을 얻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바람을 덧붙여 적는다. 창비가 ‘문학성’이라는 논쟁적인 잣대를 가지고 한국문학의 장에서 비평정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동국대 국문과 김제곤 eternalj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