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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

 

슬럼투성이 지구

도시의 슬럼화와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

 

 

마이크 데이비스 Mike Davis

1946년 캘리포니아주 쌘 버너디노 출생. 정육노조의 장학금으로 대학에 들어감. 이후 민권운동, 반전운동, 노동운동에 참여. 1980년 New Left Review지의 편집진에 합류. 현재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Prisoners of the American Dream, 창작과비평사 1994)이 국내에 번역됨. 이 글의 원제는 “Planet of Slums: Urban Involution and the Informal Proletariat”이며 New Left Review 26호(2004년 3-4월호)에 실림. miked@uci.edu

ⓒ Mike Davis 2004 / 한국어판 ⓒ (주)창비 2004

 

 

내년 어느날엔가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슬럼 아제군레(Ajegunle)에서 아이 하나가 태어날 것이고, 청년 하나가 인도네시아 자바 서부의 고향마을을 떠나 휘황찬란한 자카르타로 상경할 것이며, 농부 하나가 가난에 몰린 가족을 이끌고 뻬루 리마의 무수한, ‘젊은 마을’(pueblo joven)로 이주할 것이다.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모이면 인류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상에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아지는 것이다. 제3세계 인구조사의 부정확성을 감안하면 이 세기적 전환은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다.

지구의 도시화는 ‘로마클럽’(1968년 서유럽의 정계·재계·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로마에서 결성한 국제적인 미래연구기관―옮긴이)이 멜서스(T. Malthus)식 발상의 악명높은 1972년 보고서 『성장의 한계』(Limits of Growth)에서 처음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1950년 전세계에서 인구가 100만명이 넘는 도시는 86개였다. 지금은 400개이며, 2015년에는 550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는 1950년 이후 전지구적 인구폭발로 늘어난 인구의 약 2/3를 흡수했다. 지금도 도시인구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과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매주 100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현재의 도시인구(32억)는 1960년의 전세계 총인구보다 많다. 한편, 전세계 총 농촌인구는 한때 최대치(32억)에 도달했다가 2020년을 기점으로 줄어들 것이다. 결국 앞으로 세계에서 인구가 늘어날 곳은 도시로 ‘국한’될 것이며, 세계인구는 2050년에 100억이라는 최대치에 도달할 것이 예상된다.1

 

 

1. 도시의 갱년기

메트로폴리스의 영웅, 식민지 개척자, 희생자는 어디에 있는가?

―브레히트 『일기』(1921)

 

이렇게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개발도상국 도시지역에 집중될 것이며, 다음 세대의 개발도상국 도시인구는 두배로 늘어 거의 40억에 육박할 것이다.2 (사실 중국과 인도와 브라질의 도시인구를 합하면, 이미 유럽 및 북아메리카 인구와 맞먹는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인구 800만 이상의 거대도시(megacity), 나아가 주민 2000만―이는 프랑스혁명 당시 전세계 도시인구의 추정치이다―이 넘는 초거대도시(hypercity)가 여기저기 솟아나는 장관이 연출될 것이다.3

1995년에 인구 2000만을 확실히 넘는 도시는 토오꾜오밖에 없었다. 『극동경제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에 따르면, 2025년이 되면 그 정도 규모의 대도시권은 아시아에만―자카르타(2490만명), 방글라데시의 다카(2500만명), 파키스탄의 카라치(2650만명)를 포함해―10개 내지 11개가 생겨날 것이다. 샹하이와 뭄바이(봄베이)도 거론된다. 마오(毛)주의에 입각한 의도적인 도시화 억제정책으로 수십년간 성장이 동결됐던 샹하이는 양쯔강 어귀의 거대한 메트로 지대에 무려 2700만명의 주민이 살게 될 수도 있다. 뭄바이는 인구 3300만명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빈곤집중을 생명체와 자연환경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거대도시가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라면, 인구증가분의 3/4을 수용하게 될 지역은 희미하게 빛나는 2등성의 도시와 중소도시 지역이다. 그런데 유엔 조사관들이 강조한 것처럼, “이런 지역의 주민에게 편의시설이나 공공써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도시계획은 거의 혹은 전혀 세워지지 않고 있다.”4 중국에서 공식 집계된 도시 수는 1978년 이후 193개에서 640개로 급증했다.(1997년 공식집계로는 중국의 43%가 도시지역이다.) 그러나 대형 메트로폴리스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도시인구 분담률은 사실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1979년 시장개혁으로 인해 남아도는 농촌 노동력의 대다수를 흡수한 곳은 오히려 중소도시, 그리고 최근에는 ‘도시화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라고스를 비롯한 몇몇 초대형 도시가 초신성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편(라고스 인구는 1950년 30만에서 오늘날 1000만으로 증가했다), 부르키나파소의 와가두구, 모리타니의 누악쇼트, 카메룬의 두알라,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나리보, 말리의 바마코 등 수십개의 작은 마을과 오아시스가 쌘프란씨스코나 맨체스터보다 더 큰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도 예외는 아니다. 1등성도시들이 오랫동안 성장을 독점해왔지만, 이제는 멕시코의 띠후아나, 브라질의 꾸리띠바, 칠레의 떼무꼬, 브라질의 쌀바도르·벨렘 등 2등급 도시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는 지역은 10만명에서 5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이다.”5

또한 그레고리 굴딘(Gregory Guldin)이 주장한 것처럼,도시화의 개념은 도시―농촌 연속체의 모든 지점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도시화란 도시와 농촌의 구조적 변형을 의미하는 동시에 양자의 상호작용이 증대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굴딘의 중국 남부 연구에 따르면, 시골 자체가 도시화하는 동시에 시골에서 엄청난 규모의 이주민이 발생한다. “시골 마을은 점점 시장과 ‘샹’(鄕, 중국 농촌의 행정단위―옮긴이) 마을을 닮아가고, 지방도시와 중소도시는 점점 대도시를 닮아간다.” 이로 인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양면적 풍경―일부만 도시화된 시골―이 나타난다. 굴딘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양면적 풍경은 “인류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의미심장한 경로 (…)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양자의 혼합된 형태로, 조밀한 상호교류망이 중심의 대도시와 그 주변의 지역을 연결한다.”6인도네시아에서도 자보타벡(Jabotabek, 자카르타 광역수도권)을 중심으로 중국과 유사한 농촌·도시의 혼종화(hybridization)가 많이 진행된 상태다.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토지용도 유형을 ‘데소코타’(desokota)라 부르면서, 데소코타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도시화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도시학자들은 제3세계 도시들이 서로 엮여 특별한 새로운 네트워크, 회랑지대(回廊地帶), 위계구조로 구축되는 과정에 관해 숙고한다. 예컨대, 쥬강(珠江)삼각주(홍콩―꽝져우)와 양쯔강 삼각주(샹하이)는, 뻬이징―톈진 회랑지대로 연결되어 (토오꾜오―오오사까 지역, 라인강 하류 지역, 뉴욕―필라델피아 지역에 비견되는) 도시―공업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로 급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구조물, 가령 “일본·북한에서 자바 서부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도시 회랑지대”의 초기단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샹하이는 토오꾜오·뉴욕·런던과 함께 전지구적 자본과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세계도시’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질서의 댓가는, 규모와 성격이 다른 여러 도시의 도시내 불평등 및 도시간 불평등의 심화일 것이다. 예컨대, 굴딘은 옛날의 도농간(都農間) 소득 및 개발 격차가 이제 그 못지않게 근본적인, 중소도시와 해안의 초대형도시 사이의 격차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중국의 흥미로운 논의를 인용하고 있다.

 

 

2. 디킨즈 시대로 돌아가다

나는 어둠, 불결함, 전염병, 음란함, 비참함,

때이른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무수한 무리를 보았다.

―디킨즈 「12월의 전망」(1850)

 

제3세계 도시화의 동학(動學)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도시화를 되풀이하면서 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는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명은 유럽의 인구 정도를 농촌마을에서 스모그와 마천루의 도시로 옮겨놓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이다. 이로 인해 “수천년간 두드러지게 농촌중심 국가였던 중국이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7 샹하이 ‘세계금융쎈터’의 초대형 유리창은 마오 쩌뚱(毛澤東)은 물론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옮긴이)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도시사회를 곧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도시의 성장에는, 확실한 제조―수출 동력이 있거나 (현재 개발도상국으로 들어오는 총 외국자본의 절반에 이르는) 중국처럼 외국자본의 대거 유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국 이외 지역의 도시화는 산업화와 급격히 분리되고, 심지어 개발 자체와도 분리되었다. 혹자는 이것이 냉혹한 현실―생산증대와 고용증대를 분리하는 씰리콘 자본주의의 본질적 성향―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성장 없는 도시화는 기술진보에 따른 철칙이라기보다 전지구적 정치위기―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 연이어진 1980년대의 IMF 주도 제3세계 경제개편―의 유산이다. 게다가 제3세계 도시화는 실질임금 하락, 물가상승, 도시실업 급증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불황기를 위험천만한 속도(1960년에서 1993년까지 연평균 3.8%)로 달려왔다.

이 ‘뒤틀린’ 도시 붐은 도시의 경기침체라는 부정적 피드백이 시골에서 도시로 향하는 이주의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이주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예측한 기존 경제모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특히 역설적이었다. 코트디부아르, 탄자니아, 가봉 등 경제가 매년 2~5%씩 후퇴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도시는 아직도 연평균 5~8%의 인구증가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비밀의 일부는 바로 IMF였다. IMF가 강요했던 (지금은 WTO가 강요하는) 농업규제 철폐정책과 ‘탈농민화’정책은 도시에서 고용창출이 중단된 후에도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의 슬럼으로 몰려가는 대탈주를 가속화시켰다. 도시의 경제성장이 정체하거나 후퇴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몇몇 학자가 ‘과잉도시화’로 명명한 현상의 극단적인 면모이다.8 이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자유질서는 천년 동안 이어져온 도시화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맑스에서 베버에 이르는 고전적 사회이론에 의하면, 앞으로 생겨날 대도시도 맨체스터, 베를린, 시카고가 거쳐간 산업화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 쌍빠울루, 부산, 그리고 최근 시우다드후아레즈(멕시코), 방갈로르(인도), 꽝져우는 대체로 이러한 고전적 궤적을 밟아왔다. 그러나 남(南, 지구상의 빈국들을 가리킴―옮긴이)의 대다수 도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더블린과 흡사하다. 에밋 라킨(Emmet Larkin)이 강조했듯, 당시의 더블린은 “19세기 서구사회에서 만들어진 모든 슬럼권” 중에서도 독특했는데, “더블린의 슬럼은 산업혁명의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1800년에서 1850년까지 더블린의 골칫거리는 산업화가 아니라 산업기반의 붕괴였다.”9

콩고의 킨샤사, 수단의 카르툼,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방글라데시의 다카, 뻬루의 리마 역시 수입대체산업의 몰락, 공공부문의 위축, 중산층의 지위 하락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성장한 도시이다. 사람들을 시골에서 ‘밀어내는’ 전지구적 동력들―자바와 인도의 기계화, 멕시코와 아이티와 케냐의 식량 수입, 아프리카 전역의 내전과 가뭄, 그리고 전세계적인 기업 합병 및 농업관련 산업의 전반적인 경쟁―에 힘입어, 도시의 ‘끌어당기는’ 힘이 채무와 경기침체로 급격히 약화된 후에도 도시화는 지속되는 것 같다.10 한편, 구조조정, 통화가치 하락, 재정 감축과 함께 진행된 빠른 도시성장은 슬럼의 대량생산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많은 도시세계가 디킨즈 시대로 후퇴하고 있다.

슬럼의 놀라운 확산은 작년 10월 ‘유엔 인간정주위원회’(UN-Habitat)에서 출판한 암울한 기념비적 보고서의 주된 주제이다. 『슬럼의 도전』(The Challenge of the Slums,이하 『슬럼』)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도시빈곤에 대한 최초이자 진정한 전지구적 감사보고서이다. 『슬럼』은 중국과 구 쏘비에트 블록을 처음으로 포함하는 전지구적 가계자료를 확보해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에서 호주 씨드니에 이르는 여러 도시의 사례연구를 빈틈없이 종합하고 있다.(유엔측 저자들은 전지구적 불평등의 심화양상을 연구하기 위해 미시적 표본자료를 처음으로 활용한 세계은행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밀라노비치는 자신의 한 논문에서 “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인구 90% 이상의 소득 내지 복지〔지출 혹은 소비〕의 분배상황에 대한 그런대로 정확한 자료를 확보했다”11고 설명하고 있다.)

『슬럼』은 지적 정직성의 면에서도 돋보인다. 보고서에 참여한 한 연구원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워싱턴 컨쎈써스’(Washington Consensus) 유형(세계은행 IMF 등)은 전지구적 슬럼의 문제를 규정할 때마다 이것이 세계화나 불평등의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공치’(bad governance)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반면, 이 새 보고서는 유엔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지나친 신중함과 자기검열의 벽을 깨고 신자유주의, 특히 IMF의 구조조정프로그램을 정면으로 공격한다.12 “지난 20년 동안 국가와 국제기구의 개입은 주로 도시빈곤과 슬럼을 확산시키고 배제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도시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도시 엘리뜨의 노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슬럼』 6면)

『슬럼』이 초도시화와 비공식 정주(定住)에서 비롯된 대단히 중요한 몇몇 토지용도 문제―스프롤현상(sprawl, 도시의 급격한 발전과 지가地價 상승 등으로 도시 주변이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현상―옮긴이), 환경의 열악화, 도시적 위험요인 등―를 간과하고 있는(이후의 UN-Habitat 보고서를 위해 이런 문제를 남겨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것은 사실이다. 또한 『슬럼』은 노동인력이 시골에서 축출되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시빈곤과 비공식부문 고용의 성별 측면에 관한 광범위한 최근 자료를 활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몇몇 약점에도 불구하고 『슬럼』은 연구결과의 긴급한 의미를 유엔의 제도적 권위를 통해 증폭시킨 중요한 폭로문헌이다.‘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의 보고서가 지구온난화 위험에 대한 전대미문의 과학적 합의를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슬럼』은 도시빈곤의 전지구적 재난에 관해서 권위있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앞으로 나올 세번째 보고서는 지구온난화와 도시빈곤 사이의 불길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지역을 다룰지도 모른다.)13 본고의 목적에 비춰보아도 『슬럼』은 도시화, 비공식부문 경제, 인류 연대, 역사의 동인(historical agency)을 둘러싼 최근의 쟁점을 검토하는 데 탁월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3. 빈곤의 도시화

쓰레기 산은 아주 넓게 퍼지다가 눈에 띄는 구분이나 경계표시도 없이 서서히 뭔가 다른 것으로 변했다. 무엇으로 변한 걸까? 길도 없는 뒤죽박죽 상태의 구조물 더미. 판지상자, 합판, 썩어가는 널빤지, 녹슬고

유리 깨진 차체들이 한데 버려지고, 여기에 주거지가 생겨났다.

―마이클 셀웰 『상황은 악화되고』(1980년)

 

‘슬럼’의 정의가 실려 있는 최초의 문헌은 보(Vaux)가 편찬한 1812년의 『은어 사전』(Vocabulary of the Flash Language)이라고 한다. 여기서 슬럼은 ‘사기’ 혹은 ‘불법적 거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던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슬럼은 빈민층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빈민층이 사는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 후 슬럼은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고, 일반적인 국제적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고전적 슬럼’은 편협하기로 악명높고 이채로울 정도로 지방색이 강한 장소였지만, 개혁가들은 슬럼이 낙후된 주거환경, 인구과밀, 빈곤, 비행이 뒤섞인 장소라는 찰즈 부스(Charles Booth)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했다. 물론 19세기의 자유당원들은 도덕적 측면을 가장 중요시했는데, 슬럼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의 ‘인간쓰레기들’이 부도덕하고 허랑방탕하게 썩어가는 장소라고 여겼다. 『슬럼』의 필자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비난은 버리지만,그밖에 슬럼에 대한 고전적 정의―인구과밀, 열악하거나 비공식적인 주거, 안전한 식수와 위생시설의 부족, 주택보유의 불안정성―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이러한 다면적 정의는 슬럼의 조건을 가늠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이다. 멕시코 도시주민의 19.9%만이 슬럼에 거주한다는, 경험에 반하는 유엔의 조사결과에 많은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 정의를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슬럼』은 2001년의 슬럼 거주자를 최소한 9억2100만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는 청년 엥겔스가 맨체스터의 초라한 거리에 첫발을 들여놓던 당시의 세계인구에 필적한다. 사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디킨즈의 『블릭 하우스』(Bleak House)에 나오는 악명높은 슬럼 ‘톰올얼론’(Tom-All-Alone)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슬럼 거주자는 놀랍게도 저개발국가 도시인구의 78.2%이고, 최소한 전세계 도시인구의 1/3이다. 제3세계 대다수 도시의 연령구조로 추정해보면, 최소한 슬럼인구의 절반은 20세 미만이다.14

세계에서 슬럼 거주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에티오피아(놀랍게도 도시인구의 99.4%), 차드(역시 99.4%), 아프가니스탄(98.5%), 그리고 네팔(92%)이다. 그러나 도시주민의 생활수준이 가장 낮은 곳은 모잠비끄의 마뿌뚜와 콩고의 킨샤사로 추정된다.(어떤 자료에 따르면) 이곳 주민 2/3의 소득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치의 식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도의 델리에서 도시계획 당국은 변두리 재정착 부락―1970년대 중반 도시빈민을 잔인하게 몰아넣은 지역―의 좁은 공터를 이제는 불법 거주자들이 점유하고 있다면서 ‘슬럼 안의 슬럼’에 대한 심한 불만을 표시한다. 이집트 카이로와 캄보디아 프놈펜에선 최근에 도시로 이주한 주민들이 무단으로 혹은 세입자의 자격으로 옥상을 차지하여, 하늘 위에 슬럼도시를 세우는 중이다.

각종 통계는 슬럼인구를 고의적으로 줄일 때가 많고, 엄청나게 줄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후반 태국의 방콕은 ‘공식적으로’ 빈곤율 5%에 불과했지만,조사결과 인구의 거의 1/4(116만명)이 슬럼과 무단점유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유엔은 최근 아프리카 도시빈민에 대한 유엔 통계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축소되어 있음을 발견했는데, 예컨대 앙골라의 슬럼 거주자는 유엔 원래 통계의 두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유엔은 라이베리아의 도시빈민도 실제보다 적게 계산했다.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시골주민들이 끔찍한 내전을 피해 부랴부랴 고향을 떠나면서 수도 몬로비아 인구는 불과 1년(1989~1990년) 사이에 세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25만개가 넘는 슬럼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시아의 5대 메트로폴리스(카라치·뭄바이·델리·꼴까다·다카)에만도 약 1만5000개 슬럼지역에 총 2000만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보다 더 많은 슬럼인구가 도시화되고 있는 서아프리카 해안지역으로 밀려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빈민도시는 아나톨리아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로 확산되고, 안데스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의 자락을 휘감고, 멕시코와 요하네스버그와 마닐라와 쌍빠울루 빌딩숲에서 터져나오고, 아마존강·니제르강·콩고강·나일강·티그리스강·갠지스강·이라와디강·메콩강 기슭을 따라 늘어서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슬럼투성이 지구의 슬럼들은 서로서로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 고유의 특징을 갖고 있다.(꼴까따의 부스티bustee, 뭄바이의 촐chawl과 조파드파티zopadpatti, 카라치의 카치아바디katchi abadi, 자카르타의 캄풍kampung, 마닐라의 이스크워터iskwater, 카르툼의 샴마사shammasa, 더반의 움존돌로umjondolo, 라바트의 인트라무리오intra―murio, 아비장의 비동빌bidonville, 카이로의 발라디baladi, 앙카라의 게세콘두gecekondu, 끼또의 꼰벤띠요conventillo, 브라질의 파벨라favela,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야미쎄리아villa miseria, 멕시코씨티의 꼴로니아뽀뿔라르colonia popular 등.) 이런 거친 슬럼의 대척점에 특유의 환상적 풍경과 주거형 테마파크―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작품에 나오는 부르주아 ‘별천지’―가 위치한다. 이런 곳에 틀어박혀 사는 것이 전지구적 중산층의 꿈이 되고 있다.

고전적 슬럼이 도심의 퇴락지구였다면, 새로운 슬럼은 주로 급속도로 팽창하는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다. 멕시코씨티·라고스·자카르타 같은 도시의 수평적 성장은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개발도상국의 ‘슬럼 스프롤현상’은 부자 나라의 교외 스프롤현상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다. 예컨대 라고스의 개발지역은 1985년에서 1994년까지 불과 10년 만에 두배로 늘어났다. 라고스 주지사가 지난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라고스 주의 총 토지면적 3577km2의 약 2/3가 판자촌 내지 슬럼으로 분류될 수 있다.”15 실제로 한 유엔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라고스 여기저기가 미스터리다.(…) 가로등 없는 고속도로는 숨막히는 쓰레기 골짜기 사이를 달리다가 200개의 슬럼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흙길로 들어선다. 슬럼의 하수도로 오물이 그대로 흘러간다.(…) 정확한 인구는 아무도 모르며―공식 집계된 숫자는 600만명이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1000만명으로 추정한다―해마다 몇명이나 살해당하고, 몇명이나 에이즈에 걸리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Amy Otchet, “Lagos: the survival of the determined,” UNESCO Courier, 1999. 6)

 

라고스는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에서 나이지리아의 이바단까지 이어지는 주민 7000만의 판자촌 연쇄고리 중 가장 큰 고리에 해당된다. 이 연쇄고리는 지구상에 찍힌 도시빈곤의 발자취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물론 슬럼의 생태는 주거공간의 공급상황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인다. 『하버드 법률 리뷰』(Harvard Law Review)에 실린 최근 연구에서 윈터 킹(Winter King)은 개발도상국 도시주민의 85%가 “자산을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6토지소유의 권리가 불확실하고 국유지 관리가 느슨하다는 점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쏟아져들어오는 틈새가 되었다. 슬럼의 거주형태는, 멕시코씨티와 리마처럼 고도로 조직적인 무단 토지점유에서부터 뻬이징·카라치·나이로비의 외곽지역처럼 치밀하게 조직화된 (그러나 종종 불법적인) 임대시장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카라치처럼 도시 변두리가 공식적으로 정부 소유인 곳에서도 “토지투기로 발생하는 엄청난 이윤은 (…) 저소득 가계의 희생 속에서 사적 부문으로 계속 흘러들어가고 있다.”17 슬럼의 정치성향을 통제할 수 있고 정기적으로 뇌물과 집세를 수금할 수 있는 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비공식 거주를 (그리고 불법적인 개인 투기를) 대개 눈감아준다. 공식적인 토지소유권이나 주택소유권이 없는 상황에서 슬럼 거주자들은 지방 공무원이나 정당의 거물과 반(半)봉건적 의존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 마을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기반시설의 공급은 도시화 속도에 아주 미치지 못한다. 도시 외곽의 슬럼지역에는 공식적인 기초설비나 위생시설 등이 전혀 없는 곳도 많다.18 라틴아메리카 도시지역의 빈민가는 공공설비에서 남아시아보다는 대체로 나은 편이고, 남아시아 도시지역이 최소한의 기초써비스(수도와 전기 등)를 갖추고 있는 데 비해 아프리카의 슬럼지역은 그런 써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데가 많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 그랬듯,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에 의한 수질오염은 해마다 200만명 이상의 도시지역 영·유아의 생명을 앗아가는 만성적인 설사병의 원인으로 온존해 있다. 아프리카 도시주민의 57%가 기본적인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나이로비 같은 도시의 빈민층은 ‘날아다니는 화장실’(배설용 비닐봉지)에 의존해야만 한다. 한편, 뭄바이에서는 변기 한대에 빈민가 주민 500명이 매달려 있다는 통계에서 단적으로 위생문제가 드러난다. 마닐라 빈민가의 11%, 다카 빈민가의 18%만이 공식적인 하수처리시설을 이용한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HIV·AIDS 발생률과 상관없이 아프리카 슬럼 거주자 다섯명 중 두명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위협받는’ 빈곤 속에 살고 있다.

한편, 도시빈민은 위험하고 주거에 부적당한 지대―가파른 언덕, 강가, 침수가능 지역 등―에 정착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도시빈민은 정유공장·화학공장·유해폐기물처리장 등 생명을 위협하는 시설물 주변이나 철도변·고속도로변에 판자촌을 형성한다. 이렇듯, 도시재해가 전대미문의 빈도와 규모로 발생하는 작금의 상황을 ‘조성’하는 것은 바로 빈곤이다. 마닐라와 다카와 리우의 고질적인 홍수피해, 멕시코씨티와 꾸바따웅(브라질)의 파이프라인 대형화재, 보팔(인도) 참사, 라고스의 군수공장 폭발사고, 라틴아메리카의 까라까스(베네수엘라)와 라빠스(볼리비아)와 떼구시갈빠(온두라스)의 끔찍한 산사태 등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도시빈민은 불법 거주집단이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국가의 폭력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 1990년에 라고스의 마로코 바닷가 슬럼을 밀어버린 악명높은 사건이 있었고(“부자들의 요새인, 이웃한 빅토리아 섬에 사는 주민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에서”), 1995년엔 져쟝춘(浙江村)이라는 뻬이징 변두리의 거대한 불법 판자촌을 혹한의 추위 속에서 폐허로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슬럼은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할 것이다. 당분간은 시골이 세계빈민의 과반수를 수용할 것으로 보이지만, 2035년에 이르면 도시의 슬럼이 그 부담을 떠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급증하는 제3세계 도시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공식 거주지에 맡겨질 것이다. 2030년 또는 2040년까지 슬럼 거주자가 20억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지만, 도시빈곤은 슬럼과 겹치면서 슬럼 문제 이상이다. 실제로 『슬럼』은 도시에 따라서는 빈민의 대다수가 사실상 엄밀한 의미에서의 슬럼보다는 그 바깥에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게다가 유엔 ‘도시감시단’ 연구자들이 경고한 것처럼, “2020년에 이르면 전세계 도시빈민은 총 도시인구의 45%에서 50%에 이를 수도 있다.”19

 

 

4. 도시빈곤의 ‘빅뱅’

그들은 알쏭달쏭한 웃음을 터뜨린 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구조조정프로그램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

―피델리스 발로군 『조정당한 인생들』(1995)

 

새로운 도시빈곤의 진화는 비선형적인 역사과정이다. 도시 외곽을 중심으로 판자촌이 서서히 늘어나는 과정에는 빈곤이 급증하고 슬럼이 폭증하는 시기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작가 피델리스 발로군(Fidelis Balogun)은 소설집 『조정당한 인생들』(Adjusted Lives)에서 1980년대 중반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SAP, Structural AdjustmentProgramme)을, 라고스의 옛 정신을 완전히 파괴하고 나이지리아 도시주민을 ‘재(再)노예화’한 거대한 자연재해로 묘사한다.

 

이 경제프로그램의 괴상한 논리대로라면, 죽어가는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우선 힘없는 대다수 시민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쥐어짜야 한다는 식이다.(‘sap’는구조조정프로그램의약자이지만, 영어로 ‘수액을짜내다’라는뜻도있다.–옮긴이) 중산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점점 부자가 되어가는 극소수 사람들이 내버린 쓰레기 더미는 점점 늘어나는 극빈층의 식탁이 되었다. 아랍의 석유 부국과 서구사회로의 고급인력 유출이 홍수를 이루었다.(Fidelis Odun Balogun, Adjusted Lives: stories of structural adjustment, Trenton, NJ 1995, 80면)

 

이 책에서 발로군은 “민영화는 전속력으로 진행되는데 배고픔은 날로 더해간다”고 한탄하며 SAP의 부정적인 결과를 열거하는데, 이는 나이지리아 국민은 물론이고 SAP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 30개국의 생존자들, 나아가 수억명에 이르는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에게도 금방 마음에 와닿는 얘기일 것이다. IMF와 세계은행이 채무를 빌미로 제3세계 대부분의 경제를 구조조정하던 1980년대는 슬럼이 집 없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미래이던 때인데, 가난한 농촌 이주자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아오던 수백만의 사람들도 ‘조정’의 폭력으로 집을 잃고 살 길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슬럼』에서 강조하듯, SAP는 “원래 반(反)도시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슬럼』 30면), 기존의 복지정책·재정구조·정부투자에 존재하는 일체의 ‘도시적 편향’을 역전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20 IMF―대형은행의 앞잡이로 행동하고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의 비호를 받는―는 모든 가난한 나라에 언제나 똑같이 독이 든 잔을 건넸는데, 통화가치절하, 민영화, 수입관세 및 식량보조금 철폐, 강제적인 의료비·교육비 삭감, 가혹한 공공부문 축소 등이 그것이다.(1985년에 재무장관 죠지 슐츠는 해외에 파견된 미국 국제개발처USAID 관리에게 “웬만하면 모든 공기업을 민영화하라”21고 명령하는 악명높은 전보를 보냈다.) 한편, SAP는 소규모 자작농에 대한 보조금을 제거하여 이들로 하여금 ‘죽든 살든’제1세계 농업관련산업이 지배하는 전지구적 상품시장에 뛰어들게 만들었는데, 이는 제3세계 자작농이 철저하게 파괴되도록 만들었다.

장하준(張夏準)이 지적한 것처럼, SAP는 위선적이게도 “사다리(즉 보호관세와 보조금)를 차버렸”는데, OECD 국가들은 농업에서 도시의 고부가상품 및 써비스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이 사다리를 이용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22 『슬럼』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안 빈곤과 불평등이 증가한 주요원인을 하나만 들라면 그것은 국가의 퇴각이다.” 유엔 소속 저자들은, SAP가 강제한 공공부문 지출·소유의 축소라는 직접적인 것과 함께, ‘교부금 지출’(지방자치와 특히 NGO―주요 국제구호기관에 직접 연계된―로의 권한이양)에 기인한 더 미묘한 국가권한 축소를 지적한다.

 

명백히 분권화된 오늘날의 전체 구조는, 지금까지 선진국이 활용해온 대의정부 개념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전지구적 헤게모니의 작동에는 아주 편리한 구조이다. 국제사회의 지배적 구도〔즉 워싱턴의 구도〕는 사실상 개발을 위한 패러다임이 되며, 따라서 세계 전체는 돈 있는 세력이나 국제조직이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빠르게 통합된다.(『슬럼』 48면)

 

IMF와 백악관이 조장하는 인위적 경기침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도시지역이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계속된 가뭄, 유가 상승, 치솟는 이자율, 상품가격 하락 등과 맞물린 1980년대 SAP의 경제적 충격은 1930년대의 대공황보다 더 심각했고 더 오래갔다.

캐롤 라코디(Carole Rakodi)의 조사에 따르면, 아프리카 구조조정의 대차대조표에는 자본 도피, 제조업 붕괴, 수출소득의 정체 내지 감소, 도시 공공써비스의 과도한 축소, 물가상승, 실질임금 급락 등이 포함된다. 콩고의 킨샤사에서는 (“예외적 현상인지 다가올 사건의 신호탄인지”)‘정화운동’(assainissement)으로 공무원 중산층이 사라지고 “실질임금의 터무니없는 감소”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범죄와 폭력조직이 악몽처럼 증가했다.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는 1980년대에 일인당 공공써비스 지출이 해마다 10%씩 감소하여 지방정부가 사실상 붕괴돼버렸다. 수단의 카르툼에서는, 이 지역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으로 인해 110만명의 ‘신흥빈민’이 양산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쌜러리맨이거나 공공부문 종사자 출신이다.”23 제조업에서 강세를 보이고 현대적인 도시써비스를 자랑하는 몇 안되는 아프리카 열대도시 중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에서는 SAP 체제를 따르면서 어김없이 산업조직의 붕괴, 건설업의 몰락, 공공 교통 및 공중위생의 급격한 악화가 초래되었다. 발로군의 나라인 나이지리아에서는 (라고스와 이바단 등 몇몇 도시에 점점 집중되는) 극빈층이 1980년 28%에서 1996년 66%로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세계은행의 보고에 따르면 “1인당 GNP는 지금 약 260달러로서 40년 전 독립 당시보다도 적고, 1985년의 370달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24

라틴아메리카에서 군사독재에 의해 종종 실시된 SAP는 농촌경제를 뒤흔든 한편, 도시의 고용 및 주거상황을 짓밟았다. 1970년만 해도, 농촌봉기를 내세운 체 게바라(Che Guevara)의 ‘거점’(foco) 이론은 시골빈민(7500만명)이 도시빈민(4400만명)보다 훨씬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농장이나 시골마을에 사는 빈민(1990년 8000만명)보다 도시의 ‘꼴로니아뽀뿔라르’나 ‘비야미쎄리아’에 사는 빈민(1990년 1억1500만명)이 더 많아졌다.

이와 함께 도시 불평등 문제가 폭발했다. 산띠아고에서는 삐노체뜨 독재정권이 판자촌을 밀어내며 예전의 급진적인 주민들을 쫓아냈는데, 이로 인해 빈곤가정이 친척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두세 배로 늘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상위 10%의 소득이 1984년 하위 10%의 10배에서 1989년 23배로 증가했다. IMF 경기침체로 실질적인 최저임금이 83% 하락한 리마에서는 빈곤선 이하에서 생계를 꾸리는 가정이 1985년 17%에서 1990년 44%로 증가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불평등 정도를 측정하는 고전적 지니계수(빈부격차와 계층간 소득분포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소득이 어느 정도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주로 이용한다. 지니계수는 0과 1 사이의 값을 가지는데, 0에 가까울수록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낮으며 0.4가 넘으면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심한 것으로 본다.―옮긴이)가 1981년 0.58에서 1989년 0.67로 상승했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전지역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졌다.(세계은행의 2003년 보고서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지니계수는 아시아보다 10포인트 높고, OECD 국가보다 17.5포인트 높으며, 동유럽보다는 20.4포인트 높다.)

제3세계 전지역에서 1980년대 경제쇼크는 가계 단위의 재편을 가져왔는데, 혼자서는 생존이 어려워지자 여러 가정이 모여 의식주를 해결했고, 여성의 생존기술과 생존의지에 특히 의존했다. 중국과 산업화가 진행중인 동남아시아 도시지역에서는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연한노역 계약을 맺고 조립라인과 열악한 공장환경에 몸을 맡겼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 북부 국경도시를 예외로 하면 이런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다. 산업조직이 붕괴하고 남성들의 공식부문 일자리가 무더기로 사라지자, 여성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삯일꾼·술장사·노점상·청소부·파출부·넝마주이·유모·창녀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옛날부터 도시여성의 노동 참여비율이 다른 대륙보다 항상 더 낮았기 때문에, 1980년대에 여성이 3차산업 비공식부문 경제활동으로 몰려든 것은 그만큼 극적인 사건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비공식부문의 상징은 선술집을 운영하는 여성이나 행상을 다니는 여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크리스천 로저슨(Christian Rogerson)이 지적한 것처럼, 비공식부문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한) 자영업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대리인이다.25(빈민층이 극빈층을 착취하는 고약한 미시착취의 네트워크가 널리 퍼져 있지만, 비공식부문을 다루면서 이 점은 대개 슬쩍 넘어간다.)

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 예전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옮긴이) 국가들에서도 1989년의 자본주의적 ‘시장개방’ 이후 도시빈곤은 대거 여성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들 옛 ‘이행기 국가’(유엔이 붙인 명칭)의 극빈인구는 1990년대 초에 1400만에서 1억6800만으로 급증했으니,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량 빈곤화였다. 전지구적 대차대조표 상으로 보면, 이러한 경제참사는 중국 해안도시들의 소득증가에 쏟아진 찬사로 일부 상쇄되었지만, 중국의 시장 ‘기적’에는 “1988년에서 1999년까지 도시노동자 임금격차의 엄청난 증가”라는 댓가가 있었다. 여성과 소수민족은 특히 불리했다.26

물론 이론적으로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마땅한 시기였다. 제3세계 도시들이 다시 한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SAP로 야기된 불평등의 간극을 메웠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구조조정의 고통을 세계화라는 진통제로 달래줬어야 했다. 『슬럼』이 비꼬듯 지적한 것처럼, 1990년대는 신고전주의적 시장자유화라는 거의 유토피아적인 조건 속에서 전지구적 도시개발이 이루어진 역사상 최초의 10년이었다.

 

1990년대에 무역량은 전례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제한구역은 개방되었으며, 군사비 지출은 줄어들었다.(…) 이윤율이 급속히 하락하고 기초상품 가격이 떨어지면서, 기본 생산단가는 모두 낮아졌다. 자본의 흐름은 점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거의 완벽한 경제적 조건하에서 1990년대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과 사회정의가 이루어진 시대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슬럼』 34면)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도시빈곤은 인정사정없이 계속 늘어났고, “빈국과 부국의 격차는 20년 동안 그랬듯이 커졌으며, 대다수 국가에서 소득격차는 증가했거나 기껏해야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세계은행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20세기 말의 전지구적 불평등은 지니계수 0.67라는 가공할 수치를 기록했다. 이 상황은 전세계 하층 2/3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층 1/3이 모든 것을 차지함을 뜻한다.27

 

 

5. 잉여 인류?

우리는 ‘도시’의 접경까지 밀고 나가, 도시의

수천가지 생존의 틈새를 붙잡는다……

―파트릭 샤무아조 『텍사코』(1997)

 

1978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야기된 야만적인 지각변동은,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빅토리아 시대 후기(1870~1900) 동안에 ‘제3세계’가 처음 형성되던, 파국적 과정에 비견될 수 있다. 제국주의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생계형 농업이 대규모로 세계시장에 강제 편입되었고, 이로 인해 수백만명이 굶어죽고 수천만명이 고향을 떠났다. 그 최종적인 결과, 농촌이 ‘반(半)프롤레타리아화’―생존 자체를 보장받지 못하는 가난한 반(半)농민과 농업노동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 거대 계급의 발생―된 것은 라틴아메리카도 마찬가지였다.(결과적으로 20세기는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생각했던 도시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민족해방을 외치는 획기적인 농촌봉기와 농민전쟁의 시대가 되었다.) 최근의 구조조정은 제국주의 시대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슬럼』의 결론에 따르면,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무방비·저임금의 비공식부문 써비스산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인구의 처리장이 되었다.”(40면) 이어서 『슬럼』은 무뚝뚝하게 단언한다. “〔이〕 비공식부문의 발생은 (…) 시장개방의 직접적 결과이다.”(46면)

전세계 비공식부문 노동계급―슬럼 주민과 겹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은 거의 10억에 이르니,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전대미문의 계급이라 하겠다. 가나의 아크라에 체류하던 인류학자 키스 하트(Keith Hart)가 1973년에 ‘비공식부문’이라는 개념을 처음 거론한 이후, 도시빈민의 생존전략 연구와 관련된 만만찮은 이론적·경험적 문제들과 씨름한 방대한 문헌이 쏟아져나왔지만, 그 대다수가 미시축적(micro―accumulation)과 생계 이하(sub―subsistence)의 경제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경제위기로 인해 제3세계 도시에서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의 위치가 뒤바뀌고, 일차적인 가계운영 방식으로서 비공식부문에 의존하는 생존주의(survivalism)가 증가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기본적인 합의가 있다.

최근 알레한드로 뽀르떼스(Alejandro Portes)와 켈리 호프만(Kelly Hoffman)은 SAP와 시장개방이 197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도시의 계층구조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를 검토한 바 있다. 유엔 보고서의 결론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197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전지역에서 공무원과 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반면, 빈부격차는 심화되었고 비공식부문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뽀르떼스와 호프만은 비공식부문 쁘띠부르주아(“노동자 5인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 소유주와 자영 전문직 및 기술직을 합한 인구”)와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전문직과 기술직을 뺀 자영 노동자,가사 노동자, 소규모 작업장에서 임금을 받거나 받지 않는 노동자”)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뽀르떼스와 호프만은 비공식부문 쁘띠부르주아 계층―북아메리카 경영학과에서 그토록 선호하는 ‘소기업인’(microentrepreneur)―이 많은 경우 공공부문에서 퇴출당한 전문직이거나 해고당한 숙련노동자임을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이 계층이 도시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에서 10%로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는 “공식부문의 취업률이 낮아지면서 쌜러리맨 출신들이 사업가 정신을 강요당하는 상황”28을 반영한 것이다.

『슬럼』에 따르면 총괄적으로 개발도상국의 비공식부문 노동자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약 2/5에 이른다(60면).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의 조사에 따르면, 비공식부문 경제는 라틴아메리카 노동인력의 57%를 고용하고, 새 ‘일자리’ 다섯 중 넷을 공급하고 있다. 또다른 자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도시주민의 절반 이상,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다카 주민 65%이상이 비공식부문에서 생계를 유지한다. 또한 『슬럼』이 인용하고 있는 연구에 따르면, 비공식부문 경제활동이 도시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시아가 33~40%, 중앙아메리카가 60~75%, 아프리카가 60%에 이른다. 실제로 사하라 이남 지역의 도시에서 새로 생기는 ‘공식적 일자리’란 거의 없다. ILO가 199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을 수반하는’ 구조조정기의 짐바브웨의 도시노동시장 연구에서 밝혔듯, 공식부문이 창출하는 일자리는 일년에 1만개에 불과한 반면, 도시노동인력은 연평균 30만명 이상씩 증가한다. 『슬럼』 역시 10년간 아프리카 도시지역의 새 일자리는 90% 이상이 비공식부문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에르난도 데 쏘또(Hernando de Soto)를 비롯한 못 말리는 자력(bootstrap) 자본주의론자들이라면, 주변화된 노동자, 해고된 공무원, 농촌 유민으로 이루어진 이 엄청난 집단을 보며 공식 재산권과 규제 없는 경쟁공간을 열망하는 야심찬 사업가가 넘쳐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비공식부문 노동자는 어떻게든 연명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적극적’ 실업자로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29 전세계에 1억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거리의 아이들은―데 쏘또(de Soto) 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주식회사를 창업할 것 같지도, 껌팔이를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도시 외곽에서 은밀하게 살아가는 중국의 7000만 ‘유랑 노동자’가 나중에 하도급업자로 성공하거나 공식부문의 도시노동계급으로 편입될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미시적·거시적 착취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비공식부문 노동계급은 거의 노동법이나 노동기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알렝 뒤브레쏭(Alain Dubresson)이 아비장 연구에서 주장한 것처럼 “숙련노동 및 소규모 거래의 활력은 주로 임금부문에서 나오는 수요에 의존한다.” 뒤브레쏭은 ILO와 세계은행이 “비공식부문이 공식부문을 효과적으로 대체해 인구 250만 이상의 도시를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자본축적을 꾀할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0 뒤브레쏭의 경고를 되풀이하는 크리스천 로저슨은 (뽀르떼스와 호프만의 주장을 받아들여)‘생계형’ 소기업과 ‘성장형’ 소기업을 구분하고, 전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들 사업체는 주로 여성이 운영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수익은 대개 최소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투자나 기술숙련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고, 단지 유지가 가능한 사업체로 확장하는 것도 벅찬 일이다.”아프리카의 도시지역 임금은 공식부문도 아주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마저 노동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죽지 않고 사는지를 이해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며(이른바 ‘임금의 수수께끼’), 이와 함께 비공식 3차산업 부문은 빈민층끼리 격돌하는 극단적인 생존경쟁의 각축장이 되었다. 로저슨이 인용하는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의 사례에도 나오듯, 선술집이나 구멍가게(spaza) 등 여성이 운영하는 비공식 틈새사업은 경쟁자가 아주 많아져 수익성의 급격한 하락으로 허덕이고 있다.31

비공식부문 노동이라는 현실의 거시경제적 추세는, 다른 말로 하면, 절대빈곤의 재생산이다. 그러나 비공식 프롤레타리아는 최하층 쁘띠부르주아도 아니지만, 19세기에 사용되던 낡은 의미의 ‘산업예비군’ 혹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물론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의 일부는 공식부문 경제의 노동인력으로 은밀하게 차출되며, 실제로 많은 연구를 보면, 월마트(WalMart)를 비롯한 거대기업의 하청 네트워크가 ‘꼴로니아’와 ‘촐’의 빈곤 속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루 일이 끝났을 때 도시의 슬럼 거주자 대다수는 당대의 세계경제 속에서 진실로 거처가 없는 존재이다.

물론 슬럼이 시작된 곳은, 데보라 브라이써슨(Deborah Bryceson)이 지적한 것처럼, 초대형 농기업과 불공평한 경쟁관계에 빠지면서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그야말로 ‘파탄나고’ 있는 전세계 농촌이다. 농촌이 ‘수용능력’을 상실하면서 슬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도시가 잉여노동의 하수구로 전락하면서 도시의 ‘퇴화’(involution)는 농촌의 퇴화를 대체하는 형국이다. 도시로 흘러든 잉여인구는 남들처럼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더 대담하게 자기착취 기제에 몸을 내맡기고, 이미 과포화상태인 틈새시장을 더욱 세분화하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32 ‘근대화’ ‘개발’ 그리고 이제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시장’이 각각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10억의 노동인력이 세계체제에서 퇴출당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원조하에서 퇴출당한 10억명을 생산성있는 노동자나 소비대중으로 편입할 그럴듯한 씨나리오를 누가 과연 고안해낼 수 있을까?

 

 

6. 맑스와 성령

〔주께서 이르시되〕 가난한 이가 먹을 것이 없고 일자리가 없다고 말할 때가 오리라.(…)가난한 이는 곳간을 부수고 먹을 것을 구하리라.

그러면 부자는 총을 메고 노동하는 이와 전쟁할 것이요.

(…)피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거리에 가득하리라.

―1906년 ‘어주써 스트리트 부흥회’에서의 예언

 

그렇다면 후기자본주의는 이미 인간 선별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의 전지구적 성장은 고전적 맑스주의도 근대화론자들도 예측 못한 완전히 새로운 구조적 발전이다. 실제로 『슬럼』은 사회이론이 진정한 전지구적 하층민―사회화된 노동의 전략적인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요새처럼 고립된 도시부유층 거주지역을 에워싸는 판자촌 세계에 대규모로 집중되어 있는―의 새로운 특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퇴화경향은 물론 19세기부터 존재했다. 유럽의 산업혁명은 농촌에서 이주해온 노동력 전체를 흡수할 수가 없었다. 특히, 1870년대에 유럽의 농업이 북아메리카의 대초원(prairie)과 파괴적인 경쟁관계에 들어서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이 시베리아뿐만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 대거 이주한 것은, 남유럽 극빈지역에 뿌리내린 하위계급 무정부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더블린 같은 거대도시의 발생을 막아주는 역동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잉여노동은 부자 나라로의 이주를 봉쇄하는 전대미문의 장벽―첨단기술로 국경수비를 강화하는 문자 그대로의 ‘만리장성’―에 직면하고 있다. 아마조니아, 티베트, 칼리만탄, 이리안자야 등 ‘국경’지역에서 실시되는 말썽 많은 주민재배치 프로그램은 브라질·중국·인도네시아의 도시빈곤을 별로 줄이지도 못하면서 환경파괴와 인종분쟁만 야기한다.

이렇듯 21세기 잉여 인류를 말썽 없이 쓸어담을 수 있는 곳은 슬럼밖에 없다. 그런데 거대한 슬럼이, 빅토리아 시대에 겁에 질린 부르주아가 한때 상상한 것처럼, 폭발 직전의 화산은 아닐까? 혹은 점점 많은 빈민들이 비공식부문의 빵조각 하나를 놓고 싸우는 것을 볼 때, 무자비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공동체 내의 자기소모적 폭력이 도시 퇴화의 최고형태로 자리잡는 것은 아닌가?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는 맑스주의 최강의 마법, 즉 ‘역사의 동인’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까? 공식부문 경제에서 잘려나간 노동들이 전지구적 해방 프로젝트에서 하나로 재통합될 수 있을까? 혹은 가난한 거대도시에서의 저항의 사회학이 산업사회 이전의 도시군중―소비위기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폭발적이지만, 수혜자주의, 대중주의적 스펙터클, 인종통일 호소 등에는 쉽사리 무너지는―으로 퇴행하는 것일까? 혹은 예상치 못한 어떤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하트(Hardt)와 네그리(Negri)의 말대로, 초거대도시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걸까?(하트와 네그리의 공저 Empire의 주된 논지를 가리킴―옮긴이)

사실 이렇게 거창한 문제가 나오면, 빈곤문제와 도시에서의 저항을 다루는 최근 문헌은 거의 아무 답도 주지 못한다. 예들 들어 다양한 종족의 슬럼 빈민이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비공식부문 노동자가, 정치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대자적 계급’은 고사하고, 의미있는 ‘즉자적 계급’이라도 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물론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는 기존 생산양식의 유지에서 얻는 이익이 거의 혹은 전혀 없기에 맑스주의적 의미의 ‘급진적 고리’(radical chain)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온 농촌 이주민과 비공식부문 노동자는 대부분 교환가능한 노동력을 박탈당하거나 부유층의 하인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집단노동이나 대규모 계급투쟁의 문화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활동무대는 공장이나 국제적 조립라인이 아니라 슬럼의 거리나 시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존 월튼(John Walton)이 빈민도시에서의 사회운동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강조한 것처럼, 비공식부문 노동자의 투쟁은 무엇보다 일시적이고 비연속적인 경향이 있다. 또한 그들의 투쟁은 직접적인 소비문제―집을 얻기 위한 무단 토지점유, 식비 상승이나 제반 공공요금 인상에 맞서는 폭동 등―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적어도 옛날에는 “개발도상국의 도시문제가 대중적 행동주의(activism)보다는 후원자―수혜자 관계에 의해 중재되는 경우가 많았다.”33

1980년대 채무위기 이후부터 라틴아메리카 신대중주의 지도자들은 좀더 안정적인 일상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도시빈민의 절박한 욕구를 교묘하게 이용해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월튼이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비공식부문은 자신의 대중주의적 영웅을 선택하는 데서 이념적 원칙이 없었는데, 가령 뻬루에서는 후지모리였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차베스였다. 다른 한편으로,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서 도시지역의 수혜자주의는 인종적·종교적 강성파의 지배, 인종청소라는 강성파의 끔찍한 야심과 너무나 자주 동일시된다. 라고스의‘오오두아 인민의회’(Oodua People’s Congress)의 반(反)무슬림 의용군이나 뭄바이의 준(準)파시즘적 시브세나(Shiv Sena, 힌두교 근본주의를 따르는 정당―옮긴이) 운동은 그 악명높은 사례들이다.

이런 ‘18세기’식 저항의 사회학이 21세기 중반까지 계속될 것인가? 과거가 미래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역사는 균일하지 않다. 새로운 도시세계는 경이로운 속도로, 때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사방에서 계속되는 빈곤의 축적은 존재의 안전을 위협하고, 심지어 빈민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점점 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부과한다. 아마도 도시의 일상을 구성하는 공해·인구과밀·탐욕·폭력이 한계점에 이르면 결국엔 슬럼 특유의 예의와 생존 네트워크는 무너질 것이다. 확실히 옛날 농촌사회에는, 종종 기근으로 측정되고 사회적 폭발이 지나가는 문턱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빈곤도시가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게 되는 사회적 온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맑스는 역사의 무대를 모하메드와 성령에게 내주었다. 신(神)은 산업혁명의 도시에서 죽었다가 개발도상국의 탈산업화 도시에서 부활한 것이다. 산업혁명기와 탈산업화기의 도시빈민 문화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인다. 휴 맥러드(Hugh McLeod)가 빅토리아 시대 노동계급의 종교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에서 말했듯, 도시화가 노동계급을 세속화시켰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대체로 정확했다. 글래스고우와 뉴욕이 부분적으로 예외이긴 하지만 “노동계급의 교회에서의 이탈을 계급의식의 성장과 연결시키는 설명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슬럼에서는 작은 교회나 국교에 반대하는 교파가 성행했지만, 대세는 적극적 불신 아니면 소극적 불신이었다. 이미 1880년대에 이르러 베를린은 ‘세계에서 가장 불경스러운 도시’로 외국인들에게 기분 나쁜 충격을 주었고, 런던에서 성인의 평균 교회출석률은 1902년에 이르러 프롤레타리아 거주지역인 이스트엔드와 도크랜드즈에서 간신히 12%―그것도 대부분 가톨릭교회였다―를 기록했다.34 물론, 바르셀로나에서는 ‘비극의 주간’(Semana Trágica)에 무정부주의적 노동계급이 교회를 약탈했고, 뻬쩨르부르끄·부에노스아이레스·토오꾜오의 슬럼에서는 전투적 노동자들이 다윈·끄로뽀뜨낀·맑스가 설파한 새로운 신앙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초에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공간을 지금은 대중주의적 이슬람교와 오순절파(Pentecostal) 기독교가 (그리고 뭄바이의 시바지Shivaji 숭배가)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해마다 50만명의 농촌유민이 과밀도시로 흡수되고, 인구의 절반이 25세 미만인) 모로코에서는 셰이크 압데쌀람 야씬(Sheik Abdessalam Yassin)이 창시한 ‘정의와 복지’와 같은 이슬람운동이 슬럼의 실질적인 정부가 되었다. 이슬람운동은 야학을 조직하고, 권력 남용의 희생자들에게 사법적 도움을 주고, 환자에게 약을 사주고, 순례비용을 지원하고, 장례비용을 지불한다. 압데라흐만 유쑤피(Abderrahman Youssoufi) 모로코 총리―한때 군주에게 추방당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회당 지도자―는 최근 이냐씨오 라모네(Ignacio Ramonet,『르몽드 디플로마띠끄』의 주간―옮긴이)에게 이렇게 시인했다. “우리〔좌파〕는 부르주아화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단절했습니다. 우리는 대중진영을 다시 획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우리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을 꾀어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대중에게 지상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 이슬람 지도자는 라모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 버림받고 잔인한 일상에 직면한 대중은 우리들 덕분에 연대와 상부상조와 우애를 발견합니다. 대중은 이슬람이 인도주의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35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슬럼에서는 오순절파가 대중주의적 이슬람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기독교는 다수결에서는 물론 비서구 종교인데(기독교도의 2/3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 오순절파는 도시 빈민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인다. 사실 오순절파의 역사적 특성은 세계적인 종교로는 처음으로 현대의 도시 슬럼에서 태어나서 자란 종교라는 점이다. 감리교 초기의 열정과 미국 흑인의 영성을 자신의 뿌리로 하고 있는 오순절파는,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난한 마을(어주써 스트리트)에서 여러 인종이 한데 모여 마라톤 기도회를 열었을 때 ‘각성’하였으니, 성령이 강림하여 참가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내린 것이다. 미국의 초기 오순절파는 성령 세례, 기적에 의한 치유, 각종 은사, 천년왕국이 오기 전에 자본과 노동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믿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고,(종교 역사가들이 계속 지적한 것처럼) 최초의 형태는 ‘예언적 민주주의’로 시작되었으니 농촌 신자는 대중주의와 겹치고, 도시 신자는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와 겹쳤다.36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파견된 초기의 오순절파 선교사들은 IWW 조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돈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고, 그날 밤 어디서 자게 될지, 다음 끼니를 어떻게 때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37오순절파 선교사들은 산업자본주의가 자행하는 불의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산업자본주의의 필연적 파멸을 준엄하게 경고한 면에서 IWW에 뒤지지 않았다.

징후적으로, 쌍빠울루의 무정부주의적 노동계급 주거지역에서 브라질의 첫 오순절파 교회를 세운 사람은, 시카고에서 에리꼬 말라떼스따(Errico Malatesta, 1853~1933, 이딸리아의 유명한 무정부주의자―옮긴이)를 버리고 성령을 영접했다는 이딸리아의 장인(匠人) 이민자였다. 남아프리카와 로데지아(지금의 짐바브웨―옮긴이)에서 오순절파 교회가 처음 뿌리내린 곳은 광산지역과 판자촌이었다. 진 코마로프(Jean Comaroff)에 따르면, “오순절파는 영혼의 힘을 실제로 믿는 토착민의 믿음에 들어맞을 뿐 아니라, 도시노동자의 비인간화와 무력감을 치유해주는 것 같았다.”38 오순절파 교회는 다른 기독교 교파에 비해 여성의 역할을 중시하고, 금주와 절약을 대대적으로 지원함으로써―R. 앤드루 체스넛(R.Andrew Chesnut)이 브라질 벨렘의 ‘거리’(baixada)에서 알아낸 것처럼―특히 ‘빈곤계급의 최하층(버림받은 아내, 과부와 편모)을 끌어들였다.39 1970년부터 오순절파는 슬럼 여성에 대한 호소력, 신앙과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다는 평판에 힘입어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클 자생적 도시빈민운동으로 성장했다.40

“2002년 전세계 오순절파·은사파 신도는 5억3300만명 이상”이라는 최근의 주장은 과장이겠지만, 그 절반은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10%(약 4000만명)가 오순절파이고, 오순절파 운동이 급격하고 외상적인 도시화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대응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수긍할 수 있다.41 물론 오순절파 교회는 전세계에 퍼지면서 여러 분파와 이념으로 갈라졌다. 라이베리아·모잠비끄·과떼말라에서 미국이 후원하는 교회들은 독재와 억압의 거점역할을 해왔고, 몇몇 미국의 오순절파 신도는 귀족화되면서 교외 고급주택가의 근본주의 주류에 합류하기도 했다. 반면, 선교 중심의 제3세계의 오순절파 교회는 어주써 스트리트 원래의 천년왕국 정신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체스넛이 브라질에서 알아낸 것처럼, “오순절파는 (…) 비공식부문의 주변부 종교로 여전히 남아 있고” 특히 벨렘에서는 “빈민 중의 빈민의 종교”이다. 제프리 가마라(Jefrey Gamarra)는, 페루―리마의 거대한 ‘변두리’(barriada)에서는 오순절파가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에서 교파의 성장과 비공식부문 경제의 성장이 “서로서로의 결과이자 서로서로에 대한 응답”이라고 주장한다.42 폴 프레스턴(Paul Freston)은 오순절파가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자율적인 대중종교이다.(…)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대중과 같은 사회계급 출신이다”43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대중주의적 이슬람교가 문명의 연속성, 계급을 초월하는 신앙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오순절파는 미국 흑인의 전통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실향민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슬럼지역에서의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오순절파가 비공식 노동계급의 생존적 요구―빈곤층 여성들의 상부상조 네트워크, 신앙요법, 알코올중독자와 약물중독자의 재활치료, 아동에 대한 거리의 유혹 차단 등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시세계가 부패한 곳, 부정한 곳, 구제불능인 곳임을 전제한다. 아프리카 시온주의 교회(그중에는 현재 오순절파가 많다)에 관한 저서에서 진 코마로프가 주장한 것처럼 “이 신식민주의적 근대의 판자촌에 살고 있는 주변인”의 종교가 “공식 정치나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것”보다 과연 “급진적인” 저항인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다.44 그러나 좌파가 슬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슬럼』에서 경고하는 제3세계 도시의 비인간적 운명을 오순절파 교회의 말세론이 훌륭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오순절파는 구조적·실존적 의미에서 진정으로 유랑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金廷娥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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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인구는 세배, 인도의 인구는 두배로 늘어날 것이 예상된다.
  2. Global Urban Observatory, Slums of the World: The face of urban poverty in the new millennium?, New York 2003, 10면.
  3. 지구의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정 도시는 크기에서의 한계와 과밀화 현상에 직면해 성장률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양극화 역전’의 유명한 사례로 멕시코씨티를 들 수 있다. 1990년대에 멕시코씨티 인구는 2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 인구는 약 1800만명에서 1900만명 정도이다.
  4. UN-Habitat, The Challenge of the Slums: Global Report on Human Settlements 2003, London 2003, 3면.
  5. Miguel Villa and Jorge Rodriguez, “Demographic trends in Latin America’s metropolises, 1950~1990,” in Alan Gilbert(ed.), The Mega-City in Latin America, Tokyo 1996, 33~34면.
  6. Gregory Guldin, What’s a Peasant to Do? Village Becoming Town in Southern China, Boulder, co 2001, 14면, 17면. 또한 Jing Neng Li, “Structural and Spatial Economic changes and their Effects on Recent Urbanization in China,” in Gavin Jones and Pravin Visaria,(eds), Urbanization in Large Developing Countries, Oxford 1997, 44면 참조.
  7. Wang Mengkui, advisor to the State Council, Financial Times 2003년 11월 26일자에서 인용. 1970년대 후반의 시장개혁 이후 거의 3억명의 중국인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된다. 앞으로 몇십년 안에 2억5000만명에서 3억명이 추가로 이동할 것이 예상된다.
  8. 반면에 소련과 마오 시대 중국의 계획경제 시절에는 도시 전입에 제한이 있었고, 따라서 ‘도시화 억제’ 경향이 있었다.
  9. Foreword to Jacinta Prunty, Dublin Slums 1800~1925: A Study in Urban Geography, Dublin 1998, ix면.
  10. 따라서 저소득 국가에서는 도시 소득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농촌―도시 간 이주민이 감소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같다.
  11. Branko Milanovic, True world income distribution 1988 and 1993, World Bank, New York 1999. 밀라노비치와 그의 동료 쉴로모 이츠하키(Schlomo Yitzhaki)는 개별 국가의 가족조사자료에 기초한 세계 소득분배를 최초로 계산하였다.
  12. 공정하게 말하자면, 유엔아동기금(UNICEF)은 수년간 IMF를 비판하면서 “수십만명의 개발도상국 아동들이 자기 나라의 빚을 갚느라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UNICEF, The State of the World’s Children, Oxford 1989, 30면)
  13. 그러한 연구는 한편으로는 도시적 위험요인과 기반시설 붕괴를 조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변화가 농업 및 이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14. 1980년에 OECD 대도시의 0~19세 인구는 전체 인구의 19~28%, 제3세계 거대도시(megacity)에선 40~53%였다.
  15. Daily Times of Nigeria 2003년 10월 20일자. 라고스는 다카를 제외하면 제3세계 대도시 중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1950년에 라고스 주민은 30만명에 불과했지만, 1980년까지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성장세를 보이다가 구조조정기로 접어들면서 약 6%―이 수치도 여전히 높은 성장률이다―로 감소했다.
  16. Winter King, “Illegal Settlements and the Impact of Titling Programmes,” Harvard Law Review, vol. 44, no. 2(2003. 9), 471면.
  17. United Nations, Karachi, Population Growth and Policies in Megacities series, New York 1988, 19면.
  18. 그렇지만 기반시설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수한 비공식부문 노동자를 위한 자리―물장사, 분뇨 운반, 쓰레기 재활용, 프로판가스 배달 등—가 생겨난다.
  19. Global Urban Observatory, 앞의 책 12면.
  20. ‘도시편향’ 이론가들―1977년에 이 용어를 만들어낸 마이클 립턴(Michael Lipton)도 포함된다―은 개발도상국의 경우에 농업은 충분한 자본을 공급받지 못하는 반면에, 도시는 상대적으로 ‘과잉도시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재정 및 금융 정책이 도시 엘리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며 투자흐름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도시는 농촌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다.
  21. Tony Killick, “Twenty―five Years in Development: the Rise and Impending Decline of Market Solutions,” Development Policy Review, vol. 4(1986), 101면.
  22. Ha-Joon Chang, “Kicking Away the Ladder: Infant Industry Promo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 Oxford Development Studies, vol. 31, no. 1(2003), 21면. “개발도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에서 1980년까지 연평균 3% 증가했지만,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는 연평균 약 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한가지 역설에 직면했다. 개발도상국은 ‘좋은’(최소한 ‘비교적 좋은’) 정책을 실시했던 1980~2000년보다 ‘나쁜’ 정책을 실시했던 1960~1980년에 훨씬 빠른 성장세를 나타냈다.”(같은 책 28면)
  23. Adil Ahmad and Ata El-Batthani, “Poverty in Khartoum,” Environment and Urbanization, vol. 7, no. 2(1995. 10), 205면.
  24. World Bank, Nigeria: Country Brief, 2003. 9.
  25. Christian Rogerson, “Globalization or informalization? African urban economies in the 1990s,” in Rakodi, Urban Challenge, 348면.
  26. Albert Park et al., “The Growth of Wage Inequality in Urban China, 1988 to 1999,” World Bank working paper(2003, 2), 27면(인용);John Knight and Linda Song, “Increasing urban wage inequality in China,” Economics of Transition, vol. 11, no. 4(2003), 616면(참조).
  27. Shaohua Chen and Martin Ravallion, How Did the World’s Poorest Fare in the 1990s?, World Bank paper, 2000.
  28. Alejandro Portes and Kelly Hoffman, “Latin American Class Structures: Their Composition and Change during the Neoliberal Era,” Latin American Research Review, vol. 38, no. 1(2003), 55면.
  29. 오를란디나 데 올리베이라(Orlandina de Oliveira)와 브라이언 로버츠(Bryan Roberts)는 도시노동인력 중 무엇이 밑바닥 노동인가를 판가름하는 요인은 “단순히 직업의 명칭이 무엇인가, 혹은 공식부문 직업인가 비공식부문 직업인가가 아니라, 가계가 어떤 전략을 사용하여 소득을 얻는가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빈민 대다수는 친척이나 동향인과 “주택, 음식, 그밖의 자원을 나누면서 소득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Urban Development and Social Inequality in Latin America,” in Gugler, Cities in the Developing World, 290면)
  30. Alain Dubresson, “Abidjan,” in Rakodi, Urban Challenge, 263면.
  31. Christian Rogerson, 앞의 글 347~51면.
  32.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정의에 따르면, ‘퇴화’란 “기존 형태의 지나친 혹사로 인해 디테일이 지나치게 복잡해짐으로써 기존 형태가 경화되는 과정”을 말한다.(Clifford Geertz, Agricultural involution: Social development and economic change in two Indonesian towns, Chicago 1673, 82면) 좀더 쉽게 말해서, 농촌의 퇴화나 도시의 퇴화에서 ‘퇴화’란 (소득이 아무리 적어도 일을 하려 하기 때문에) 소득의 급락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노동착취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3. John Walton, “Urban Conflict and Social Movements in Poor Countries: Theory and Evidence of Collective Action,” paper to “Cities in Transition Conference,” Humboldt University, Berlin, July 1987.
  34. Hugh McLeod, Piety and Poverty: Working-Class Religion in Berlin, London and New York, 1870~1914, New York 1996, xxv면, 6면, 32면.
  35. Ignacio Ramonet, “Le Maroc indécis,” Le Monde diplomatique, 2000년 7월, 12~13면. 또다른 전(前) 좌익인사는 라모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약 65%가 빈곤선 밑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비동빌’(bidonville) 주민은 엘리뜨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들이 엘리뜨를 대하는 태도는 과거에 프랑스인을 대하던 태도와 같습니다.”
  36. 오순절파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해석한 논쟁적인 저서에서 로버트 메이프스 앤더슨(Robert Mapes Anderson)은 “오순절파의 무의식적 의도”는 다른 천년왕국운동처럼 실제로 ‘혁명적’이라고 주장했다.(Robert Mapes Anderson, Vision of the Disinherited: The Making of American Pentecostalism, Oxford 1979, 222면)
  37. Robert Mapes Anderson, 앞의 책 77면.
  38. David Maxwell, “Historicizing Christian Independency: The Southern Africa Pentecostal Movement, c.1908~60,” Journal of African History40호(1990), 249면;Jean Comaroff,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 Chicago 1985, 186면.
  39. R. Andrew Chesnut, Born Again in Brazil: The Pentecostal Boom and the Pathogens of Poverty, New Brunswick 1997, 61면. 체스넛은 성령이 사람의 혀를 움직이는 것은 물론, 가족생활도 나아지게 한다는 믿음을 발견했다. “남성의 특권 콤플렉스와 연결된 지출을 없애자, 아쎔벨리노 가족은 중하층 빈민층으로부터 상층 빈민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콴드랑굴라르 가족은 빈민층에서 (…) 하층 중산층으로 옮겨갔다.”(같은 책 18면).
  40. “비정치적이고 비군사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집단활동 중에서 역사를 통틀어 지난 20년간 진행된 오순절파·은사파 운동만큼 빠르게 성장한 운동은 없었다.”(Peter Wagner, foreward to Vinson Synan, The Holiness-Pentecostal Tradition, Grand Rapids 1997, xi면)
  41. The high estimate is from David Barret and Todd Johnson, “Annual Statistical Table on Global Mission: 2001,”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 25, no. 1(2001.1), 25면. 빈슨 싸이난(Vinson Synan)에 따르면, 1997년 현재 오순절파 교단에 등록된 신도는 2억1700만명이다.(Vinson Synan, The Holiness-Pentecostal Tradition, Grand Rapids 1997, ix면)
  42. Jefrey Gamarra, “Conflict, Post-Conflict and Religion: Andean Responses to New Religious Movements,” Journal of Southern African Studies, vol. 26, no. 2(2000. 6), 272면. 안드레스 타피아(Andres Tapia)는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마오주의 혁명론을 추종하는 뻬루의 무장단체―옮긴이)과 오순절파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쌔뮤얼 에스코바(Samuel Escobar)를 인용한다. “둘 다 불의를 완전히 청산하려 했다.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빛나는 길’의 몰락으로 인해 오순절파 교회는 가난한 뻬루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In the Ashes of the Shining Path,” Pacific News Service, 1996. 2. 14)
  43. Paul Freston, “Pentecostalism in Latin America: Characteristics and Controversies,” Social Compass, vol. 45, no. 3(1998), 352면.
  44. Jean Comaroff, 앞의 책 259~63면.